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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981 - チャプター 990

1610 チャプター

제981화

하영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말투도 한층 날카로워졌다.“하은 씨, 이건 저희 체면을 안 봐주겠다는 건가요? 아니면 저희 회사 자금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시는 건가요?”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최수빈이 재빨리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에도 미소를 띤 채였다.“하 대표님, 하은 씨는 지금 몸이 좀 안 좋으셔서요. 이 술은 제가 대신 마시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저희 해온시 항공우주 연구원은 이번 협력이 정말 간절하거든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고개를 젖혀 잔에 든 양주를 단숨에 비웠다. 독한 술이 목을 태우듯 내려가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그 모습을 본 하영훈은 다시 웃음을 띠었다.“역시 수빈 씨는 시원시원하시네요. 좋아요, 이 잔은 제가 같이하죠.”그 역시 술잔을 비우더니 곧바로 최수빈의 잔을 다시 가득 채웠다.“자, 한 잔 더! 이 잔까지 마시면 오늘 바로 의향서에 사인합시다.”최수빈은 이것이 노골적인 압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잔을 받아 들었다.양주가 한 잔, 두 잔 계속해서 몸속으로 들어갔다.볼은 점점 붉어졌고 머리는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그녀의 손에서는 펜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기 속에서도 다시 정리된 협력 조항을 하나하나 꼼꼼히 대조하고 있는 것이었다.옆자리에 앉아 있던 임하은은 술을 대신 마셔줄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끔씩 최수빈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주기는 했다.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행동, 아주 단정하고 품위 있는 태도였다.식사 자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최수빈은 거의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 있었다.속은 왈칵 뒤집힐 듯 울렁거렸다.그런데도 하영훈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최수빈을 부축하려 했다.“수빈 씨,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제가 모셔다드리죠. 가는 길에 협력 세부 내용도 조금 더 이야기하고요.”그의 손이 최수빈의 팔에 닿는 순간, 최수빈은 반사적으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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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2화

주민혁은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최수빈의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초점 잃은 눈빛에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이를 본 그가 서둘러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괜찮아? 어디가 불편한 거야?”최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다.“괜찮아요... 그냥 좀 더워서....”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술을 잘 못 마신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취할 줄이야, 열까지 나는 상태라니...’그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어떻게든 빨리 집에 데려다주는 게 먼저였다.차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와 건물 앞에 멈췄다.주민혁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최수빈을 부축해 내렸다.최수빈은 그의 품에 거의 자신의 몸을 맡기다시피 했다. 힘이 빠져 스스로 걷기가 어려웠기에 주민혁은 그녀를 부축한 채 그대로 현관 쪽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최수빈의 체온은 점점 더 올라갔다.무의식중에 주민혁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자 코끝이 그의 셔츠에 스쳤다. 곧 익숙한 시더우드 향이 퍼졌다.그 냄새에 최수빈의 머릿속에는 지난날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고 가슴 한편이 묘하게 저려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민혁은 그녀를 부축해 집 앞까지 데려갔다.최수빈은 더듬거리며 열쇠를 꺼냈지만 아무리 해도 열쇠 구멍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주민혁이 열쇠를 받아 문을 열었다.거실로 들어와 그녀를 소파에 앉힌 뒤, 그는 부엌으로 가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왔다.다시 돌아왔을 때, 최수빈은 소파에 기대앉아 주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눈빛은 흐릿했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호흡은 눈에 띄게 가빠져 있었다.“물 좀 마셔.”주민혁이 컵을 내밀자 최수빈은 그 컵을 받아 들었다.그러나 입을 대지는 않고 대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술에 뭔가가 들어 있었다는 걸 최수빈은 이미 느끼고 있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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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3화

최수빈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채 침대 시트를 움켜쥔 손에 점점 힘을 주고 있었다.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는 주민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문득 낮게 웃음을 흘렸다.그 웃음에는 조롱과 자기연민이 뒤섞여 있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 내가 불쌍해 보여서, 동정이라도 베풀고 싶은 거예요?”술기운에 젖은 목소리였지만 전하는 말뜻은 분명했다.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워 공기를 가르며 꽂히는 느낌이었다.“민혁 씨, 나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당장 가요. 여기서 더는 눈에 거슬리게 하지 말고.”주민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소나무처럼 곧은 자세, 표정은 담담했지만 떠날 기미도 없었다.그는 그저 최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 모습이 최수빈은 오히려 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라 뭐라도 더 쏘아붙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휘청거렸다. 술기운이 다시 한번 거세게 밀려온 것이다.몸이 흔들리더니 시야가 흐려졌고 의식은 파도에 잠기듯 천천히 가라앉았다.마지막으로 본 것은 주민혁이 급히 다가오며 손을 뻗는 모습이었다.그다음 순간, 그녀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밝아 있었다.최수빈은 몸을 조금 움직여 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온몸이 쑤셨고 특히 머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욱신거렸다.어젯밤의 기억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레스토랑에서 하영훈이 집요하게 들이대던 모습, 연달아 비워낸 양주잔들, 갑자기 나타난 주민혁, 차 안에서 이유 없이 치솟던 열기, 그에게 던졌던 가시 돋친 말들, 그리고 어젯밤에 일어난 일까지도.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누군가에게 꽉 움켜쥐어진 것처럼 답답했다.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방은 말끔히 정리돼 있었고 침대 옆 탁자 위에는 이미 식어버린 물 한 컵이 놓여 있었다.그 옆에는 메모 한 장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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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4화

주민혁은 주예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낮췄다.“응, 아빠가 약속했잖아. 약속은 지켜야지.”최수빈은 딸을 돌아보았다. 작은 얼굴 가득 번진 기대 어린 미소를 보자 거절의 말들이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잠시 침묵하다가 그녀는 주예린에게 말했다.“오늘은 도우미 아줌마랑 같이 학교 가면 안 될까? 아빠는 할 일이 좀 있어서.”“그렇지만 아빠가 나랑 가주기로 했단 말이에요.”주예린은 입을 삐죽 내밀며 주민혁의 손을 꼭 잡았다.“아빠, 어디 가야 해요?”주민혁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눈빛은 단호했다.“아니야. 오늘 일부러 휴가 냈어. 예린이 학교 데려다주려고.”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보았다.“어젯밤에 예린이랑 약속한 거야. 어길 수 없어.”주예린의 간절한 눈빛, 그리고 주민혁을 번갈아 보며 최수빈의 마음속 방어선이 무너졌다.알고 있었다, 이건 거절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자기감정 때문에 아이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고 주민혁을 아이 앞에서 약속을 어기는 아버지로 만들 수도 없었다.“알겠어요.”최수빈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바람에 실릴 만큼 가벼웠다.“그럼 학교까지 데려다줘요. 조심히 가고요.”고개를 끄덕이는 주민혁의 얼굴에 아주 미세하게나마 안도하는 기색이 스쳤다.이윽고 그가 부엌으로 가더니 죽을 들었다.“죽 좀 먹고 있어. 나는 예린이 씻기러 갈게.”주민혁이 주예린을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는 뒷모습,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부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수빈은 소파에 앉아 눈앞의 죽을 바라봤다.머릿속은 텅 빈 것처럼 혼란스러웠다.주민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이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아파트 단지 입구.주민혁은 주예린의 손을 잡은 채 최수빈이 도우미의 차량 문을 여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예린이 학교 데려다준 다음에 너도 연구원까지 데려다줄게. 가는 길이 같잖아.”최수빈은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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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5화

항공우주 연구원에 도착했을 때, 건물 앞에는 이미 여러 대의 차량이 주차돼 있었다.최수빈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입구 근처에 서 있던 임하은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최수빈을 보자 임하은은 곧장 다가왔다.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수빈 씨, 어젯밤 괜찮으셨어요?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혹시 밤중에 불편하실까 봐, 제가 민혁 씨한테 남아서 챙겨 달라고 부탁했어요.”일부러 주민혁을 남게 했다는 말에 최수빈의 마음이 순간 불편해졌다.임하은의 말투에는 미묘하게 강조하는 기색이 실려 있었다. 마치 주민혁이 그녀를 돌본 일이 자신의 허락 아래 이뤄진 배려인 것처럼 들렸다. 그 관심은 진심이라기보다 시혜에 가까웠다.“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저 괜찮아요.”불필요한 감정 없이 최수빈은 담담하게 말했다.“어젯밤에는 주 대표님께 신세를 졌죠. 직접 감사 인사드릴 겁니다.”거리를 두려는 최수빈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한 듯, 임하은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저한테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다 같은 직장 동료잖아요. 서로 돕는 게 당연하죠. 게다가 어제는 저 대신 술을 받아주신 거잖아요. 그 생각하면 저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그때, 건물 안에서 육강민이 걸어 나오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정말로 마음이 불편했다면 어제 직접 남아서 수빈 씨를 돌봤어야죠. 다른 사람에게 맡길 일이 아니라.”말투에는 노골적인 비판이 섞여 있었다.“임신 중이라 불편하다는 건 핑계가 안 됩니다. 진짜 걱정됐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요.”임하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반박당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다물고 말했다.“저도 남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임신 중이라 몸이 따라주질 않아서요. 괜히 잘못 돌봤다가 오히려 폐를 끼칠 수도 있고요. 민혁 씨는 남자니까, 그런 면에서는 더 수월하잖아요.”“수월하다고요?”육강민이 피식 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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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6화

“앞으로는 기억해. 먼저 연락하지도 말고, 따로 찾아가지도 마. 그쪽에서 다가와도 못 본 척해. 임하은이랑 애정 과시를 하든 말든, 뭘 하며 설치든 그건 그 사람들 문제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송미연의 말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약 같았다. 흐릿하던 최수빈의 마음이 서서히 정리됐다.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 고마워, 미연아.”전화를 끊고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막 탕비실을 나서자 동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저기 봐, 주 대표님 오셨어. 하은 씨랑 점심 먹으려고 일부러 온 거래!”“와, 진짜 부럽다. 저렇게 바쁜데도 직접 와서 같이 먹어주고.”“약혼한 사이라잖아. 곧 약혼식도 올린다던데 당연히 달달하지.”최수빈은 동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주민혁이 정갈한 도시락통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와 곧장 임하은의 자리로 향하고 있었다.임하은은 그를 보자마자 부드럽게 웃으며 일어나 도시락을 받았고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주변 사람들이 괜히 부러워할 만큼 다정한 장면이었다.최수빈은 시선을 거두고 자리로 돌아가려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수빈 씨.”뒤돌아보니 심종연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시간 괜찮으시면 점심 같이 하시죠. 프로젝트 투자 관련해서도 조금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요.”최수빈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심종연은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투자자라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심 대표님. 어디로 갈까요?”“아래에 조용한 한식당이 하나 있어요. 이야기 나누기 좋습니다.”심종연이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두 사람은 식당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메뉴를 받은 뒤 심종연이 먼저 고르라 했지만 최수빈은 입맛이 없어 간단히 두 가지만 주문했다.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이, 심종연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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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7화

최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종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시선은 굳게 다문 최수빈의 옆얼굴에 머물렀고 말투는 담담했다.“수빈 씨, 주 대표님 같은 남자 때문에 그렇게 마음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젓가락을 쥔 최수빈의 손이 잠시 멈췄다. 고개는 들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심 대표님, 투자 세부 이야기로 돌아가죠. 오후에 연구원에 보고서도 제출해야 해서요.”그녀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개인적인 감정에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특히 처음 온천 리조트에서 만났을 때부터 노골적으로 호감을 드러내 온 심종연 앞에서는 더더욱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하지만 심종연은 그녀의 말에 맞춰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프로젝트는 제 팀이 이미 항공우주 연구원과 거의 마무리 단계까지 맞춰 놨습니다. 수빈 씨만 고개 끄덕이면 자금은 다음 주에 바로 집행될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일만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닙니다.”잠시 말을 멈춘 뒤, 그는 목소리를 한층 낮춰 말을 이어갔다.“수빈 씨, 지금 수빈 씨 마음에 걱정이 많다는 것도 알고 과거의 감정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주 대표님은 수빈 씨에게 안정도 존중도 심지어 온전한 한 사람의 마음도 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건 제가 줄 수 있어요. 우리는 프로젝트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심종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묵직했다.“수빈 씨는 연구원에서 기술 개발을 하고 저는 더 넓은 무대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최첨단 장비와 최고의 팀을 들여와 연구 성과가 더 빠르게 현실이 되도록 하죠. 일상 면에서도, 수빈 씨와 예린이에게 든든한 집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다시는 상처받을 일 없게요.”그제야 최수빈은 고개를 들었다.마주한 심종연의 깊은 눈동자에는 농담이라곤 전혀 없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최수빈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켰다. 손끝이 서늘해졌다. 그의 제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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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8화

최수빈은 조용히 반박했다.“저는 감정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시작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지금 제 삶은 충분히 안정돼 있어요. 예린이도 있고 좋아하는 일도 있고...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아침에 송미연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먼저 다가가지 말 것, 연락하지 말 것, 못 본 척할 것.그 생각이 스치자 마음이 한결 또렷해졌다.어쩌면 그녀는 과거에 붙잡혀 있는 게 아니라 아직 마음을 움직일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심종연은 분명 그 사람이 아니었다.심종연은 그녀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보고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수빈 씨의 선택을 존중하죠. 그래도 한 가지만은 말해두고 싶네요.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혹시 생각이 바뀌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세요.”최수빈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룸 안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식기가 맞닿는 작은 소리만 남은 채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심종연이 먼저 항공우주 연구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고 최수빈은 거절하지 않았다.중요한 협력 관계인 만큼, 지나치게 거리를 두는 건 오히려 프로젝트에 방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차가 항공우주 연구원 앞에 멈추자 최수빈은 안전벨트를 풀며 짧게 말했다.“감사합니다.”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심종연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수빈 씨, 어떤 경우라도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협력할 수 있길 바랍니다.”최수빈은 돌아서서 가볍게 웃었다.“물론이죠, 심 대표님. 협력 잘 부탁드립니다.”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차 문을 닫은 뒤, 빠른 걸음으로 항공우주 연구원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로 돌아오니 임하은이 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최수빈을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수빈 씨, 다녀오셨어요? 아까 민혁 씨가 와서 점심 드시러 나간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심 대표님이랑 업무 얘기하러 나갔다고 전해줬어요.”최수빈은 고개만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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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9화

그는 대략 쉰 살쯤으로 보였다. 불룩 나온 배가 셔츠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고 얼굴에는 느끼한 미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최수빈이 들어서자 그는 그녀를 훑어 보고 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수빈 씨, 오래 기다리셨죠. 오는 길이 좀 막혀서요.”최수빈은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준비해 온 협력 제안서를 건넸다.“이 대표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희가 수정한 구매안입니다. 기존보다 단가는 5% 낮췄고 납기일도 45일로 단축했습니다. 프로젝트 일정에는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하지만 이 사장은 제안서를 받지 않았다. 찻잔을 든 채 느긋하게 한 모금 마시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수빈 씨, 제가 일부러 체면 안 세워 주려는 건 아닌데... 이 협력은 아무래도 성사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최수빈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손끝이 서늘해졌다.“혹시 저희 방안이 기대에 못 미쳤나요? 가격이나 서비스 조건은 얼마든지 다시 조율할 수 있습니다.”불과 지난주만 해도 그는 제안서를 칭찬했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이렇게 태도가 바뀌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그것 때문은 아니에요.”이 사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얼버무리듯 말했다.“회사 쪽에 새로운 계획이 생겨서요. 당분간은 이런 부품이 필요 없게 됐습니다. 오늘 식사는 제가 살 테니 그냥 인연 맺었다고 생각하시죠. 협력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말을 하며 슬쩍 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이 노골적이었다. 제안서는 끝내 한 장도 넘기지 않았다.최수빈은 의문이 가득했지만 더 붙잡아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에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채 제안서를 챙겼다.“그렇다면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그렇게 말하고 룸을 나섰지만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프로젝트 일정은 코앞인데 대체 공급처를 찾지 못하면 결과는 뻔했다.복도는 조용했고 끝자락에 있는 화장실 안내등만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일단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 다음 대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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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0화

모든 게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피해도 결국은 마주치게 되는 것 같았다.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켜 마음속에서 요동치던 감정을 눌러 담았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거의 냉담하게 들릴 정도였다.“실적이 누구에게 돌아가든 상관없어요.”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임하은을 한 번 훑어보고, 다시 주민혁에게 시선을 두었다.“어차피 이 협력은 항공우주 연구원을 위한 거고 무인기 프로젝트를 정상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겁니다. 저는 연구에만 집중하면 돼요. 항공우주 연구원에 도움이 된다면 누가 이 협력을 맡든 다를 게 없어요.”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더 이상 그들의 표정을 보지 않고 돌아섰다.복도의 조명이 최수빈의 위로 떨어지며 길게 늘어진 고독한 그림자를 만들었다.임하은은 단호하게 돌아서는 최수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 했지만, 주민혁이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고개를 젓더니 복잡한 눈빛으로 최수빈이 사라진 방향을 오래 바라봤다.건물을 빠져나오자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그제야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감정과 일, 그 모든 것이 얽힌 이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따지기도, 주민혁의 선택 때문에 마음 아파하기도 싫었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육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민성 선배, 이 대표님하고 임하은 씨 협력 건은 더 이상 확인 안 해도 돼요. 다른 공급업체부터 집중적으로 접촉해 줘요. 기술 사양이 잘 맞는 곳을 우선으로 골라서 내일 출근 전까지 리스트 보내주고요.”전화를 끊은 뒤, 최수빈은 택시 한 대를 잡았다.차가 움직이자 창밖의 가로등이 빠르게 뒤로 흘러갔고 그녀는 좌석에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지나간 감정이든 지금의 이 복잡한 상황이든 잠시 내려놓을 때였다.주민혁과 임하은은 그들 나름의 삶이 있고 그녀에게는 그녀가 지켜야 할 선택이 있었다.최수빈의 모습이 계단 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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