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941 - Chapter 950

1610 Chapters

제941화

검은 세단이 회장의 주차장을 막 빠져나왔다.주민혁은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는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조수석의 최수빈은 어깨에 걸쳐 둔 재킷을 정리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길가의 비 가림막 아래에서 한 사람이 급히 뛰어나와 손을 흔들며 차를 세웠다.주민혁이 브레이크를 밟고 보니 려운이었다. 그는 티가 나지 않게 미간을 살짝 좁혔다.려운은 검은 우산을 쓴 채 다급한 얼굴로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타더니 가지런히 접힌 서류 한 장을 앞 좌석으로 내밀었다.“대표님,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아버님 쪽에서 몇몇 원로 주주들과 접촉했다네요. 오늘 밤 저택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가문의 명성이 실추된 걸 명분 삼아 그룹 경영권을 다시 논의하려는 것 같습니다.”주민혁은 서류를 받아 들고 빽빽한 글자를 훑어 내려갔다. 읽을수록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주기훈은 원래 남 아래에 머무는 성격이 아니었다. 주선웅이 구속되고 주씨 가문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지금,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바라봤다.입술이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최수빈이 재킷 자락을 꽉 움켜쥔 채 먼저 입을 열었다.“먼저 가서 일 처리해요. 조심하고.”주민혁이 다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려운이 눈치 있게 차 문을 열었다.“대표님, 제가 수빈 씨 모셔다드릴게요. 걱정 마시고 일부터 보세요. 무슨 상황 생기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주민혁은 마지막으로 최수빈을 바라봤다. 눈빛에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결국 그는 아무 말 없이 빗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검은 실루엣은 주차장 모퉁이 너머로 금세 사라졌다.려운은 다시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며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차 안에는 몇 분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끝내 최수빈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빗소리에 묻힐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려 비서님... 요즘 민혁 씨 어때요?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나요?”그러자 핸들 위에 있던 려운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백미러로 그녀를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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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2화

최수빈은 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을 몇 번이고 문지르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마음속으로 계속 정리하고 있었다.그렇게 그녀가 망설이는 기색을 알아챈 듯, 려운이 먼저 말을 꺼냈다.“수빈 씨, 이번에 은산시에 얼마나 머무를 예정이세요? 항공우주 연구원 프로젝트도 많이 바쁘시지 않습니까?”최수빈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포럼 끝나고 기술 협력 건 때문에 며칠 더 있을 것 같아요. 연구원 프로젝트는 팀이 진행 중이라 당장은 급하지 않아요.”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묻고 말았다.“민혁 씨는... 원래부터 저랬나요? 무슨 일이든 혼자 짊어지고, 누구한테도 말 안 하려 하고?”그녀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예전에는 그저 남성 특유의 무뚝뚝함이라 여겼을 뿐, 다른 문제일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었다.오랜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주민혁은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 속마음을 온전히 보여준 적이 없었다.려운이 한숨을 내쉬었다.“몇 년 전에 주상 그룹을 맡으신 뒤로 계속 그러셨습니다. 그때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주선웅 씨랑 아버님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죠. 회사 안에서도 원로 주주들 반발이 심했고요. 매일같이 문제를 처리하면서 외부에서의 경쟁까지 견디다 보니 스스로를 점점 더 몰아붙이게 됐습니다. 그러다 우울증 진단까지 받고 나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더더욱 혼자 견디려 하셨죠. 자기가 무너지면 주씨 가문 전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하셨던 겁니다.”말을 하다 려운의 손이 무의식중에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하지만 전 대표님이 그 정도 일들로 무너질 분은 아니라고 봅니다.”이 정도의 일들은 남자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것들이었다. 힘들긴 해도 견딜 수는 있었기에 그를 완전히 무너뜨린 건 이런 문제들이 아닐 터였다.“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저한테도 말씀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최수빈은 입술을 깨물었다.“그 사람은 저한테 이런 얘기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어요.”“주 대표님이 원래 그렇습니다. 전부 마음속에만 묻어두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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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3화

최수빈은 잠시 멍해졌다.‘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거지?’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가 도어뷰로 들여다보니, 항공우주 연구원의 젊은 엔지니어 임우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품에는 노트북을 안고 있었고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이 가득했다.문을 열자 임우영이 바로 노트북을 내밀었다.“수빈 씨,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비행 제어 시스템 알고리즘을 몇 번이나 조정했는데 계속 오차가 나요. 내일 초안 제출인데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돼서요...”최수빈은 그의 노트북을 보다가 벽시계를 힐끗 확인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밤중에 남녀가 호텔 방에 단둘이 있는 건 아무래도 조심스러웠으니 말이다.그녀는 몸을 옆으로 비켜 문가에 선 채 말했다.“알고리즘 문제는 낮에 회의에서 핵심 포인트 몇 가지 짚어줬잖아요. 그 방향으로 다시 한번 시도해 봐요.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일단 돌아가서 쉬고 내일 회장에 있는 임시 사무실로 찾아와요. 그때 같이 보죠.”임우영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입장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찾아뵐게요.”노트북을 안고 돌아서는 그의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점점 멀어졌다.최수빈은 문을 닫고 문짝에 기대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책상으로 향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송미연’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전화를 받자 밝은 기운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수빈아, 내가 뭐 하나 얘기해줄까?”최수빈은 소파에 앉아 의자에 걸려 있던 재킷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무슨 일인데?”“박하린 사건 말이야, 거의 유죄 확정이래.”송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안도한 듯 말했다.“동료한테 들었는데 증거가 다 모였대. 이제 재판만 남았어.”순간 최수빈의 손이 멈칫했다.그 일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고 대회에서 표절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던 것이다.“자업자득이지.”송미연의 목소리가 다소 차가웠다.“그런 짓을 했으면 이런 날이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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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4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줄 게 있어.”송미연의 목소리가 한층 진지해졌다.“박하린 사건이 곧 재판에 들어가. 너는 핵심 증인이라 법정에 나가서 증언해야 할 거야. 아마 빠르면 이틀 안에 통지서가 갈걸?”최수빈의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언젠가는 법정에 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조용히 말했다.“알겠어. 날짜 나오면 맞춰서 갈게.”“그리고... 박하린네 엄마가 요즘 너한테 연락한 적 없어? 합의서 써 달라거나 그런 거 말이야. 용서해 준다는 서류 있으면 형량이 좀 줄어들 수도 있거든.”최수빈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항공우주 연구원 앞에서 조윤미가 울면서 용서를 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날 이후로 그녀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포기한 줄 알았는데 송미연이 이 얘기를 꺼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아니, 그때 한 번 본 뒤로는 연락 없었어.”조용히 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의문이 피어올랐다.“그런데 왜 갑자기 그걸 물어?”“그냥 좀 이상해서.”송미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렇게 박하린을 감싸던 사람이잖아. 쉽게 포기할 성격은 아니지. 물증이 다 나와서 더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을 수도 있겠지만...”최수빈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조윤미는 원래 고집이 센 사람이었고 박하린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그런데 갑자기 아무 연락도 하지 않으니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통화를 마치고 소파에 기대자 머릿속이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박하린의 사건, 심종연이 주시후를 데려간 일, 그리고 곧 다가올 재판까지, 하나하나가 모두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최수빈은 휴대폰을 들어 주민혁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심종연이 주시후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지만, 화면 위에 멈춘 손가락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지금의 주민혁은 분명 주상 그룹 문제로 정신없이 바쁠 터였다. 그래서 괜히 또 걱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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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5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민혁 씨가 갑자기 자리를 뜬 게 정말 주주 회의 때문이기만 했을까?’포럼에서 집요하게 밀어붙이던 심종연의 태도, 거기에 주시후를 데려간 이해할 수 없는 행동까지 떠올리자 최수빈은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 같았다.‘혹시... 민혁 씨한테 갑자기 일이 생긴 것도 심 대표님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한 번 고개를 든 의심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왔다.‘심 대표님은 대체 뭘 하려는 거지?’최수빈은 송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미연아, 심 대표님 관련 자료 좀 찾아줄 수 있어? 가능한 한 자세하게. 특히 최근 동선이랑 주씨 가문이랑 어떤 관계가 있는지.”“갑자기 심 대표님은 왜?”송미연이 물었다.“시후 때문이야?”“그것만은 아니야.”최수빈이 입을 열었다.“시후를 데려간 것도 너무 이상하고 어제 민혁 씨가 갑자기 떠난 것도... 혹시 그 사람이랑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뭔가 숨겨진 목적이 있는지 좀 알아 봐줘.”“알겠어. 바로 사람 시켜서 알아볼게.”송미연은 흔쾌히 대답했다.“그런데 너도 조심해. 심 대표님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전화를 끊은 최수빈은 책상 앞으로 가 노트북을 켰지만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녀는 심종연과 엮였던 순간들을 반복해서 떠올렸다.포럼에서의 협업 제안, 따로 식사하자는 제안, 그리고 주민혁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묘하게 의미심장하던 말투 등등 사소한 부분까지도 어딘가 찜찜했다.‘그런데 심 대표님은 원래 주씨 가문과 접점이 거의 없지 않았나?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주씨 가문 일에 끼어든 거지?’오후가 되어서야 송미연에게 메시지가 왔다. 암호화된 파일 하나가 함께 첨부돼 있었다.급히 파일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심종연의 배경, 사업 구도, 최근 행보까지 자세히 정리돼 있었다.그렇게 최수빈이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데 점점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자료에 따르면 심종연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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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6화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주 선생님이나 주선웅 씨랑 따로 접촉한 적은 없어?”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저었다.“선웅 씨랑은 협력 관계였어.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깊게 엮여 있을 수도 있지.”두 사람은 식사를 하며 한참을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뚜렷한 실마리가 나오지 않았다.그렇게 송미연이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막 룸 문 앞으로 갔을 때였다.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멈췄다.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송미연은 급히 최수빈의 팔을 잡아당겼다.“밖에 봐. 저 사람... 심 대표님 아니야?”최수빈도 그녀가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복도 끝에서, 짙은 회색 정장 차림의 심종연이 누군가와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는 듯했다.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은 주기훈이었다.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최수빈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 룸 문 뒤로 숨어들었다.심종연이 주기훈과 연이 닿아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저 둘이 왜 같이 있는 거야?”송미연도 목소리를 낮추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주 선생님은 지금 사방에서 압박을 받고 있을 텐데... 심 대표님은 왜 굳이 주 선생님이랑 엮이려는 거지?”최수빈은 대답하지 않은 채, 복도에 있는 두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심종연이 주기훈의 어깨를 툭 치며 안심시키듯 한마디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곧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 끝에 있는 한 룸으로 들어갔고 뒤따르던 직원이 문을 닫으며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가려졌다.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송미연과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들은 상대도 똑같은 충격을 받은 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그동안 심종연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했던 이유는, 애초에 그의 표적이 주민혁이 아니라 주기훈과의 협력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우리가 처음부터 잘못 짚었나 봐.”최수빈의 목소리가 무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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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7화

답장을 보내고 나서 최수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심종연과 주기훈의 협력이 어느 정도까지 깊이 얽혀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들이 앞으로 주민혁에게 어떤 수를 쓰려는지도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송미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의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무 불안해하지 마. 민혁 씨,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은 아니잖아.”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젓가락을 들어도 입맛이 전혀 없었다.식사를 마친 뒤, 최수빈과 송미연은 나란히 인도를 걸어가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넌 먼저 호텔로 돌아가. 무슨 소식 생기면 바로 알려줄게.”교차로 앞에서 송미연이 걸음을 멈췄다.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의 차가 밤거리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봤다.그러고 나서야 몸을 돌려 호텔 쪽으로 향했다.호텔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주민혁이었다.최수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 전화를 받았다. 이내 휴대폰 너머로 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야식이라도 같이 먹을까?”“안 바빠요. 방금 미연이랑 밥 먹고 나왔고요.”최수빈이 물었다.“그쪽 일은 다 정리됐어요?”“응, 방금 끝났어.”그는 잠시 멈칫하고 나서 다시 덧붙였다.“지금 네 호텔 아래야. 내려와.”전화를 끊으며 최수빈은 야식 먹자는 건 핑계일 뿐, 아마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거라는 걸 직감했다.그녀는 로비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에 올라가 잠깐 정리한 뒤, 서둘러 다시 내려왔다....호텔 앞, 검은 세단이 가로등 아래 조용히 서 있었고,주민혁은 차 옆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어둠 속에서 그의 손끝에 있는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최수빈이 나오자 그는 담배를 끄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타. 데려갈 데가 있어.”차는 호텔을 벗어나 강변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 차 안은 고요했고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최수빈은 운전에 집중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잠시 망설인 끝에 낮에 있었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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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8화

최수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던 관계들도... 지금 와서 보니 다 거짓이었어요.”주민혁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히고 있는 한 죽집 앞에 멈춰 섰다.“여기 해물죽 괜찮아. 네 입맛에 맞을 거야.”그가 먼저 차에서 내리자 최수빈도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안에는 손님상이 몇 테이블밖에 없어 꽤 조용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앉았고 주문하자마자 음식이 금세 나왔다.최수빈은 숟가락으로 죽을 천천히 저으면서도 마음속이 여전히 어수선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주민혁이 그녀를 바라보며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심 대표님이랑 아버지 문제는 내가 처리할게. 넌 재판 준비에만 신경 써.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최수빈은 주민혁을 올려다봤다.그가 일부러 화제를 돌려 걱정을 덜어주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도 심종연과 주기훈의 협력이 주민혁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두 사람은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죽을 먹었다.그러다 최수빈의 시선이 맞은편 주민혁의 손목에 머물렀다. 희미하게 남은 상처 자국들이 보였다.그래서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은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 약은 제때 먹고 있어요? 좀 나아진 것 같아요?”주민혁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둡던 눈빛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았다.“응, 지안이가 계속 챙겨줘.”그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걱정 마.”수면의 질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감정 기복이 얼마나 잦은지는 굳이 말하지 않고 그저 최수빈이 안심할 수 있는 말만 골라 건넨 것이었다.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살짝 문질렀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결심한 듯 말했다.“사흘 뒤에 해온시로 돌아가요. 항공우주 연구원 쪽 프로젝트도 다시 이어가야 하거든요.”이 말에 잠시 몸이 굳더니, 주민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몇 초 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목소리는 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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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9화

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주민혁을 바라봤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조금 전 죽집에서 겨우 따뜻해진 분위기는 더 이상 자신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그의 한마디에 단숨에 식어버렸다.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이혼한 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생각할수록 마음에는 두꺼운 얼음벽이 낀 것처럼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느낌만 들었다.그들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마음을 터놓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함께 살던 시절, 최수빈은 주민혁의 침묵을 성숙해서라고 여겼고 그의 보호를 사랑이라 믿었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들은 모두 그가 자신을 감싸기 위해 두른 단단한 갑옷 같은 것이었다.이는 최수빈 역시 다르지 않았다.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평온을 유지하면서 주민혁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건드릴까 봐 늘 조심하고 또 조심했을 뿐이었다.이렇게 솔직해지지도 못하는 두 사람이 어떻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최수빈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다.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가슴 속 쓰라림을 눌러 삼킨 뒤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알겠어요. 민혁 씨가 원하는 대로 할게요.”이 한마디만 남긴 채, 그녀는 주민혁을 다시 보지 않고 호텔 쪽으로 돌아섰다.돌아보는 순간, 방금 내린 결심이 무너져 다시 이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주민혁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단호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언가에 가슴이 거칠게 움켜쥐어진 듯한 통증을 느꼈다.무심코 손을 뻗어 최수빈을 부르려 했지만 정작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이 그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됐는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러나 주민혁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심종연과 주기훈의 싸움에 그녀가 휘말리게 할 수 없었고 자신 때문에 또다시 다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주민혁은 낮게 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린 채 돌아섰다.검은 세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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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0화

“원장님, 다른 분으로 바꾸면 안 될까요?”최수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저도 지금 처리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고, 또...”하지만 원장은 곧바로 말을 끊었다.“수빈 씨, 이건 위에서 내려온 결정이야. 연구원에서도 신중하게 검토한 결과고.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 담당이 수빈 씨잖아. 수빈 씨가 직접 나서야 일정이 흔들리지 않아. 심 대표님 쪽에서도 수빈 씨를 지명했으니까 조금만 더 수고해 줘.”최수빈은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프로젝트 자료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원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거절해 봐야 소용없었다. 상부의 지시라면 그녀가 거스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알겠습니다.”그녀가 낮게 답했다.“최대한 빨리 심 대표님과 협의해서 프로젝트 진행에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나서 최수빈은 의자에 등을 기댄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주민혁과 미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벅찬데 이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심종연과 함께 일까지 해야 한다니, 상황이 점점 더 꼬여 가는 기분이었다....다음 날 아침, 최수빈은 심종연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플라잉 테크 회의실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자료를 챙긴 그녀는 약속 시간에 맞춰 회사로 향했다.회의실에는 이미 심종연이 와 있었고 그는 최수빈을 보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수빈 씨, 오랜만이네요. 지난번에 식사하자고 했을 땐 바쁘다더니, 역시 일로 불러야 만나 주는군요.”최수빈은 그의 농담을 흘려듣고 테이블 위에 자료를 올려놓았다.“대표님, 바로 프로젝트 얘기부터 하죠. 무인기 기술 실증 적용 관련해서 몇 가지 방안을 정리해 왔습니다.”심종연도 장난기 섞인 표정을 거두고 자료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한 장 한 장 넘기며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원시림 테스트 데이터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전면 성공이더군요. 기대치보다 성과도 훨씬 좋았고.”그의 말투에 감탄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위에서도 이 프로젝트를 굉장히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번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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