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은 애초에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제대로 꾸려 갈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친밀한 관계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와 인정, 함께 버텨 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제헌은 그런 자질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다.“형, 설령 내가 아니었어도 다른 누군가는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실망하고 놀랄 필요는 없어요.”“형이 정말 이람 씨를 좋아했다면, 결국은 이람 씨가 행복한 걸 보고 싶었겠죠. 지금 이람 씨는 저랑 함께 있고, 나는 이람 씨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요.”지후의 논리는 기가 막힐 정도로 아전인수격이었다.“제가 형 여자를 뺏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형을 도와드리는 거죠. 그러니까 형은 우리 축하해 줘야 맞는 거예요.”예전에 연훈은 지후가 사람 마음을 건드리는 데 유난히 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하준도 제3자의 입장이라면, 방금 자기 말이 얼마나 지독한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헌이 저 말을 듣고 얼마나 견디기 힘들어할지, 하준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하지만 하준은 정작 완전한 제3자가 아니었다.‘이람이가 정말 고지후를 좋아하게 된 걸까?’‘이제 이람이는 지후처럼 따뜻하고, 유쾌하고, 재치 있는 남자에게 마음이 가는 걸까?’하준의 눈앞이 잠시 검게 물드는 듯했다.하준은 다쳤다. 피도 꽤 많이 흘렸다. 몸 전체가 점점 식어 가는 감각이 들었다.그럼에도 하준은 차라리 상처가 있는 게 낫다고 느꼈다. 다리의 통증이, 가슴을 찢는 고통을 잠깐이나마 눌러 주고 있었으니까.지후는 제헌이 완전히 미련을 끊고 더는 이람을 붙잡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한마디를 더 얹었다.“제헌 형,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내가 이람 씨 잘 챙길게요.”제헌의 얼굴에서는 이제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이람의 선택, 지후의 배신, 그리고 아직도 하준 손에 있는 아이들.아마 오늘은 제헌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처참한 날일 것이다.제헌은 자기 인생에 이런 모욕적인 시간이 닥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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