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자, 비로소 내가 사랑을 알았다》全部章節:第 111 章 - 第 120 章

289 章節

제111화

이담은 머뭇거렸다.어차피 조만간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으니까.은호도 이담의 난처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이담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다만 제가 이곳에 머물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요. 짧은 기간이라면 도와드릴 수 있겠지만, 길어지면...”“괜찮습니다. 짧은 기간이라도 충분합니다.”이담은 은호와 연락처를 교환했다.“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권은호입니다.”이담은 흠칫 놀랐다.‘설마 내가 아는 그 권씨 집안 사람은 아니겠지?’“그쪽은요?”“심이담입니다.”연락처를 저장한 후, 이담은 은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은호는 이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이담이 그린힐로 돌아와 막 주차를 마쳤을 때였다.우연히 백미러를 통해 진혁의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운전기사가 뒤로 돌아가 문을 열어주자, 초연이 준희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그 뒤를 이어 진혁도 내렸다.초연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혁이 손을 뻗어 준희를 받아 안았다.진혁의 목을 끌어안은 준희의 작은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이담은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꽉 쥐었다.이런 장면을 아무리 여러 번 보고 마음의 준비를 했어도, 막상 눈앞에서 다시 마주치면 여전히 속이 뒤틀렸다.원래는 저 사람들이 올라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릴 생각이었지만, 문득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숨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이담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차 문을 닫는 순간, 실수로 손이 미끄러지면서 힘 조절을 하지 못해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진혁이 고개를 돌려 이담을 바라보았다.그는 아주 잠깐 멈칫했을 뿐,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초연은 마치 진혁과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일부러 진혁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심 선생님, 여기서 다 보네요? 진혁 씨가 저랑 준희 다리 CT 찍는 거 보러 같이 병원에 가줬거든요. 막 돌아왔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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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이담의 이런 반응에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진 진혁이 그녀를 홱 끌어당겼다.“지금 무슨 뜻이야?”이담은 진혁의 손아귀에서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입술은 창백했다.“몸이 안 좋아.”진혁은 이담을 꿰뚫어 볼 듯이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하기 싫은 거야?”언제부터인가 이담은 진혁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처음엔 그저 화가 나서 떼를 쓰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이담은 텅 빈 목각인형 같은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나도 사람이야. 피가 흐르고 살이 있고 감정도 있다고. 난 네 도구가 아니야!”“넌 날 사랑하지 않잖아. 이제 문초연도 돌아왔으니 더 이상 억지로 나를 안을 필요 없잖아, 안 그래?”진혁은 이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질문을 회피했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쥐면서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하기 싫다 이거지?”이담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렸다.“응, 싫어.”“결국엔 원하게 될 텐데.”진혁은 침대 끝에 놓인 겉옷을 집어 들고 문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순간, 방 안에는 죽은 듯한 적막과 이담의 침묵만이 남았다....다음 날 아침 일찍, 이담은 요란한 전화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전화를 받자마자 핸드폰 너머로 심민철의 불같이 화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왜 하 서방이 우리가 하빈이를 못 만나게 하는 거야!]이담은 번쩍 정신이 들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하빈이 보러 병원에 갔더니, 경호원들이 하 서방의 지시라면서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잖아!]심민철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하 서방이 하빈이를 자기네 병원에서 치료받게 해 줬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면회를 막다니. 네가 대체 무슨 짓을 해서 심기를 건드린 거야?][너도 하빈이 지금 상태를 뻔히 알잖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하빈이를 생각해서 네가 좀 참으면 안 되겠니?][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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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돈 많은 남자 꼬시러 왔다고 한 건데, 뭐가 문제예요? 초연 씨 말이 맞네. 꼭 당신 같은 여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달라붙는다니까요...”지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담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때렸다. 아주 깔끔하고 단호한 손찌검이었다.그 요란한 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자, 지영은 분통을 터뜨리며 맞받아치려고 했다.하지만 이담은 지영의 손을 낚아채고, 곧바로 반대쪽 뺨을 한 대 더 후려쳤다.지영의 몸이 옆으로 휘청거릴 만큼 강한 힘이었다.“감히 날 쳐?”눈에 벌겋게 핏발이 선 지영이 뺨을 부여잡고 소리쳤다.“경호원! 빨리 경호원 불러요!”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경호원들이 황급히 달려왔다.지영이 이담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이 여자가 회사에서 행패를 부리고 절 때렸어요! 다들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가요!”“다들 보고 있는 자리에서 먼저 아무 이유 없이 절 모욕한 건 그쪽입니다. 그래서 저도 손찌검한 겁니다.”이담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전 대표님께 볼일이 있어서 온 것뿐인데, 제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악의적인 성희롱 발언을 했잖아요.” “같은 여자로서 같은 여자를 그렇게 모욕하고도 부끄럽지도 않나요?”“아니면 이게 하성그룹의 수준인가요? 여자가 들어오면 모욕부터 하는 게 이 회사 규칙이라도 되나요?”그 말을 듣자, 주변에 있던 여직원들이 지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뭐야, 자기도 여자면서.”“성희롱이라니, 진짜 최악이다.”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지영은 말을 더듬었다.“무, 무슨 헛소리예요! 누가 예약도 없이 오라고 했나요!”“예약을 했든 안 했든, 그쪽이 절 성희롱해도 된다는 이유는 안 되죠.”이담은 여유롭게 핸드폰을 꺼냈다.“원래는 직접 전화를 안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제가 직접 대표님께 연락하는 수밖에 없겠네요.”안내 데스크 직원들은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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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인형처럼 멍한 표정으로 진혁의 무릎 위에 올라앉은 이담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옷을 벗겨 냈다.마지막 단추를 풀고 나자, 이담의 손이 벨트 위에서 멈췄다.실내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았는지, 찬 기운이 옷을 뚫고 모공까지 스며드는 것 같아 몸이 덜덜 떨렸다.진혁은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미동도 없이 물었다.“왜 더 안 해?”이담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에라, 모르겠다. 그냥 한 번 독하게 마음먹자.’이담이 벨트의 금속 버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벨트를 채 풀기도 전에 진혁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이담이 속수무책으로 앞으로 무너지며 입을 열려는 순간, 진혁이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며 입을 맞췄다.“우웁...”깊어지는 입맞춤 속에서 이담은 결국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를 밀쳐내기 시작했다.진혁은 이담의 두 손을 잡은 채 그녀를 아래에 깔고 더욱 거칠게 입맞춤을 했다.다급해진 이담은 그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안에 피 맛이 번질 때쯤에야 진혁이 그녀를 놓아주었다.진혁의 안색은 극도로 가라앉았고, 모든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이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망했다.’“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진혁이 이담의 턱을 거칠게 쥐고 강제로 얼굴을 마주 보게 했다.“예전처럼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어렵냐고? 어떻게 안 어려울 수가 있겠어?’그때의 자신은 순진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바보 같을 만큼 어리석었을 뿐이었다.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현실도 모른 채 혼자만 희망을 품었다. 진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다.결국 자신만 우스운 꼴이 되었을 뿐이다.‘정작 억울하고 서러워야 할 사람은 난데.’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진혁의 손에 붙잡힌 이담의 화사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이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로 연달아 흘러내렸다.진혁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손가락 끝이 화끈거렸다.이담은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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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다음 날 아침, 이담이 거실로 나서자 심계화가 식탁 위에 남아 있던 음식들을 치우고 있었다.심계화는 음식을 버리며 혼잣말을 했다.“잘 차려진 저녁을 왜 아무도 안 먹었대? 날도 더운데, 결국 다 버리게 됐네!”이담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그건 어제 이담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진혁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진혁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 일에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사모님, 일어나셨어요?”심계화가 식탁을 치우다가 고개를 들었다.“이 저녁은...”“대표님이 돌아오실 줄 알고 준비한 거예요.”이담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대표님이 너무 바쁘셨나 봐요.”심계화가 그렇게 말하고는 뭔가 떠올랐는지 웃으며 덧붙였다.“그럼 사모님이 대표님께 도시락을 가져다 드리면 어때요? 예전엔 늘 사모님이 직접 식사 챙겨 드리셨잖아요!”이담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이담은 간단히 아침을 만들어 포장한 뒤 하성그룹으로 향했다.어제 일이 있고 난 뒤라 프런트 직원들은 이담을 알아봤다. 막지도 않았고, 태도도 꽤 친절했다.“대표님 찾으시는 건가요?”이담은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이 도시락을 안 비서께 전달해 주시겠어요?”프런트 직원은 잠시 멈칫했지만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이담이 떠난 뒤, 프런트 직원은 도시락을 안나에게 건네며 심이담이 보낸 거라고 했다.안나는 좀 의아했다.‘이담 씨가 나한테 도시락을 보내다니?’하지만 이내 누구를 위한 도시락인지 짐작했다.다만 갑자기 도시락까지 보낸 이유가 뭘까 싶었다.안나는 도시락을 진혁의 사무실로 가져갔다.진혁은 통유리창을 등진 채 통화 중이었다. 잠시 후 통화가 끝나자 안나가 문을 두드렸다.“대표님.”진혁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심이담 씨가 도시락을 보내오셨습니다.”진혁의 시선이 안나의 손에 들린 도시락에 멈췄다.진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어젯밤에는 저녁을 만들더니, 오늘은 아침까지 만들다니.예전처럼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 분명한데, 예전과는 어딘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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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문 과장님 아이, 하 대표님 아이예요?][세상에! 문 과장님과 하 대표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니!]이 파격적인 소식에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모두가 업무 중에도 이 아이 이야기를 떠들어댔다.이담은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문초연이 나 보라고 일부러 사진을 단톡방에 올린 거겠지.’사진을 저장한 뒤 퇴장하려던 이담은 초연이 사진을 지운 걸 보았다.[죄송합니다, 여러분. 잘못 올렸어요.][문 과장님, 왜 지워요? 다들 이미 봤는데요!]동료들이 장난스럽게 떠들어댔다.[아이고, 진짜 실수로 보낸 거라니까요. 비밀로 해 주세요.]이담은 그 메시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차라리 도와주자.’이담은 곧바로 사진을 이만옥에게 보냈다.[어머니, 손주 보셨어요.]이만옥은 미용실에서 친구들과 피부 관리를 받고 있었다.이담이 보낸 메시지를 보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사진을 클릭하는 순간,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옆에 있던 친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만옥아, 왜 그래? 설마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운 거야?”“그럴 리가!”화를 내며 버럭 소리친 이만옥은 몸에 걸친 담요를 벗어 던지며 일어나서 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두 번 울리자 진혁이 받았다.[어머니, 무슨 일이세요?]이만옥이 냉정하게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밖이요.]“누구랑?”진혁은 회전목마 쪽을 한 번 바라보고 벤치에서 일어나 담배를 꺼냈다.[친구랑 볼일 보고 있어요.]“볼일? 아이 문제 상의하는 거니?”진혁은 담배를 빼내려던 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무슨 말씀이세요?]이만옥은 아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진혁아, 너 지금 문초연이랑 애까지 데리고 놀이공원에 있잖아? 네 입으로 그 애 네 아이 아니라고 했잖아!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진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누가 말한 거예요?]자신이 초연 모자와 함께 있는 건 철저히 비밀이었다.안나도 이 자리에 있지만, 그녀가 이런 얘기를 입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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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저희가 꽤나 인연인 것 같아서요.”은호의 시선이 김미영에게로 향했다.“게다가 어머니도 이담 씨를 잘 따르시는데, 이 정도 보수는 당연히 받으셔야죠.”이담이 커피를 들어 올렸다.“은호 씨, 실례지만 여쭤볼 게 있어요. 어머님께서 어떤 일을 겪으셨길래 저렇게 되신 건가요?”신분이나 배경이 있는 집안에서 정신 질환이 있는 아내를 맞이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니 김미영의 상태가 선천적인 건 아니라고 이담은 짐작했다.분명 어떤 충격을 받은 탓일 것이다.은호의 손끝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때 사고만 없었더라면, 저한테 여동생이 하나 있었을 거예요.”“여동생이요?”이담이 멈칫했다.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께서 여동생을 낳으셨는데, 의사가 사산이라고 했어요. 자기 눈앞에서 아이가 죽는 걸 목격하고 나서부터 정신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셨어요.”“좋을 땐 멀쩡하시다가도, 안 좋을 땐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곤 하세요. 어머니는 아직도 여동생이 살아 있다고, 죽지 않았다고 믿고 계세요.”“그렇군요.”이담은 곁에서 인형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는 김미영을 바라보았다.“아이를 잃는다는 건, 감당하기 힘든 일이겠죠.”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이들이 솔직히 부러웠다.자신과는 달랐다.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려졌고, 어린 시절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누군가의 사랑을 필사적으로 갈구했던 것 같았다.그래도 다행이었다.이제는 아무 미련도 없으니까....오후에 비가 내렸다.은호의 기사가 이담을 그린힐까지 데려다 주었다.이담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서자마자 담배 냄새가 풍겼다.진혁이 엘리베이터 옆 쓰레기통 곁에 서서 담뱃재를 모래판에 털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진, 네가 어머니한테 보낸 거지?”역시 물어볼 줄 알았다.이담은 부인하지 않았다.“맞아.”진혁이 눈을 가늘게 뜨자 위험한 기색이 감돌았다.“어떻게 알았어?”이담은 미리 준비해 둔 단톡방 대화 기록을 꺼내 진혁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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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한경미는 이 매장의 단골이자 VIP였다. 점원들 역시 그녀 덕에 실적을 꽤 올린 터라,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차를 따르고 자리를 내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심 선생님, 한 달에 얼마나 벌길래 명품 매장에 올 생각을 했대?”한경미가 손에 든 LV 핸드백을 어루만지며 눈에 경멸을 가득 담았다.“젊은 사람이 허영심이 너무 과하면 못써. 분수에 안 맞는 짓은 하지도 말고.”이담도 웃었다.“그럼 한 여사님은 남편이 뇌물 받은 돈을 여기서 펑펑 쓰는 건 허영심이 아닌가 봐요? 콩밥 먹고 계실 박 과장님이 이 광경을 보시면 무슨 생각이 드실까요?”“이 못된 년이, 감히 그 일을 입에 올려!”그 말에 한경미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김미영은 한경미를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늙은 것이, 우리 아가한테 함부로 하면 벌받을 거야.”“이 늙은 미친년이, 누구한테 늙은 것이라고 그래!”김미영은 다시 이담 뒤로 숨어 반쯤 얼굴만 내밀고 히히 웃었다.“늙은 미친년? 늙은 미친년이 누군데?”“너...”옆에 있던 점원이 슬쩍 말린 덕이었을까, 한경미는 겨우 화를 삼켰다. 정신나간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참내, 비슷한 인간끼리 어울리는 법이지. 유유상종이라니까!”이담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맞아요, 유유상종이죠. 아니면 한 여사님이 문초연 하나 때문에 그런 더러운 일까지 하셨겠어요?”한경미의 몸이 흠칫하더니 무의식적으로 이담의 시선을 피했다.“무슨 개소리야?”“개소린지 아닌지, 본인이 제일 잘 아실 텐데요. 특히 황연준이라는 사람, 꽤 친분이 있으시죠?”이담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몰아붙이자, 한경미의 얼굴에 스치는 변화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읽혔다.바로 그 변화야말로, 이 일에 그녀가 연관돼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손에 든 핸드백을 움켜쥔 한경미가 턱을 치켜들며 끝까지 잡아뗐다.“그게 누군데? 난 모르는 사람이야. 여기서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얼른 꺼져.”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점원에게 명령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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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권 선생님?” 한경미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당신이 용주시 권씨 가문 사람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용주시 권씨 가문?이담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그저 흔한 권씨인 줄 알았는데, 용주시 최고 부자의 아들이었다.그 권씨 가문이라면, 진혁의 큰아버지가 추진하던 혼담 상대가 아니던가?점원이 조심스럽게 귀띔했다. “한 여사님, 이 블랙카드는 진짜입니다.”한경미는 몸이 휘청했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았다. 남부를 쥐락펴락하는 권씨 가문의 안주인이, 저런 모자란 여자라니 믿기지 않았다.“매장을 비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은호가 점원을 바라봤다. 눈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점원이 한경미 곁으로 다가갔다. “먼저 나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한경미는 이를 악물고 이담을 노려본 뒤, 막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잠깐.”이담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한경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년이, 설마 추궁이라도 하려는 건가?’이담이 몸을 돌려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방금 김 여사님께 욕하셨죠. 사과하셔야죠.”은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시선이 이담에게 가만히 머물렀다.용주시에서는 여자들이 어머니에게 아부하는 것도, 전부 은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하나같이 명예와 이익을 좇는 행동이었다.하지만 이담의 행동은 뜻밖이었다.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구한 것도 우연히 마주쳐 손을 내민 것뿐이었다.그런데 낯가림이 심한 김미영이 이담에게 마음을 연 건, 용주시에서도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지금 어머니가 이담에게 이토록 다가가는 것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권씨 가문 사람이 곁에 있으니 한경미는 감히 토를 달지도 못한 채, 억지로 김미영에게 사과했다.점원 역시 이담이 또 지적하기 전에 얌전히 나서서 사과했다.이담이 김미영 앞으로 다가가 아이 달래듯 말했다. “아주머니, 보셨죠? 다들 사과했어요. 기분 좋으시죠?”김미영은 품에 안은 인형을 쓰다듬으며 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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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저녁 무렵, 은호가 직접 이담을 그린힐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담이 차에서 내리기 전,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오늘 밤 8시 이후에 혹시 시간 있어요?”이담이 멈춰 서며 물었다.“왜요?”“저녁에 연회가 하나 있는데, 경성시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혼자 가기가 좀 그런데, 혹시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은호가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한마디 덧붙였다.“돈은 더 드릴 게요.”이담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은호가 말없이 미소를 짓자, 이담이 문득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돈은 안 주셔도 돼요. 아주머니를 생각해서 그냥 같이 가드릴게요.”은호는 하루에 2,000만 원이나 주고 있었다. 그걸로도 이미 충분했기에 욕심을 낼 생각은 없었다.은호의 눈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이내 눈웃음을 지었다.“그럼 이따가 데리러 올게요.”은호가 떠난 뒤, 이담은 집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서랍을 열자 가득한 화장품들이 눈에 들어왔다.이담은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잊고 있었다. 한때는 자신도 예쁜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였다는 걸. 마지막으로 제대로 꾸민 게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6년간 비굴하게 사랑을 구걸하며 오직 진혁에게 잘 보이려 애쓰던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그 순간 이담은 과거와 화해하고, 또 자신과도 화해하기로 결심했다....밤이 깊어가면서 거리는 불빛으로 환했다.은호가 차 앞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을 때, 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샤넬 U넥 실크 레트로 레드드레스에 스트랩 힐을 신고, 긴 머리는 풍성한 웨이브를 그리며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이담은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진한 화장이 오히려 독이 되는 얼굴이었다. 단아한 메이크업에 빨간 립스틱만 발랐을 뿐인데, 오히려 대범하고 화사한 인상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은호가 감탄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정말 잘 어울려요.”“고마워요.” 이담도 웃으며 대답했다.이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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