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전지훈은 한참 말을 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고아린의 태도였다.언제나처럼 툭툭 받아치던 그녀가 오늘은 너무 조용했다.그는 불평을 멈추고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테이블 너머에 서 있는 고아린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전혀 관심도 없는 듯, 묵묵히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 일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담담하고 평온했다.아까 전지훈이 했던 말들을 그녀는 과연 듣고는 있었던 걸까?평소 같았으면 그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걸 알자마자 당장 다친 데는 없는지, 밤새 잠은 잤는지, 밥은 제대로 먹었는지부터 걱정했을 사람이었다.심지어는 그가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죽이라도 끓여주겠다며 나섰을 게 뻔한데 그런 그녀가 오늘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갑작스럽게 밀려왔고 전지훈은 무의식적으로 욱신대는 위장을 문질렀다.어젯밤 경찰서에서 밤새도록 시달린 데다 지금껏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거기에 고아린의 낯선 태도가 겹치니 가슴께가 답답하게 조여왔다.어쩐지 오늘의 고아린은 어딘가 달라 보였고 익숙했던 모습이 사라져 낯설음만 가득했다.예전과는 전혀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그녀가 입고 있는 산뜻한 파란색 옷은 오히려 손에 닿지 않는 안개처럼 멀게 느껴졌고 그의 가슴 위를 무겁게 맴돌았다.전지훈은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고 그저 눈앞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아린아...”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고아린에게 다가갔다.손을 내밀어 고아린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피했다.알 수 없는 집요함이 일었는지 전지훈은 고아린의 손을 억지로 붙잡았다.마치 이 손을 붙잡는 것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듯이 말이다.“어젯밤은 내가 좀 심했어. 오늘 저녁 같이 밥 먹을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그 에른국 레스토랑 어때?”하지만 고아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돌려 손을 뺐다.비싸기만 하고 양도 적고 먹고 나면 배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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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고아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인사팀으로 내려가더니 망설임 없이 곽은우의 사무실 문 앞에 멈춰 섰다.“곽 팀장님.”문을 두드린 그녀는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서류를 정리하던 곽은우는 그녀를 보는 순간 숨을 들이켰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 ‘탁’ 하고 책상 위에 떨어졌다.“고... 고 비서님?”‘정말 그 고아린이야?! 늘 검정, 흰색, 회색 계열의 딱딱한 정장만 입지 않았었나?’곽은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위아래로 살피며 안경을 고쳐 썼다.“이게 무슨... 일이시죠...?”고아린은 말없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곽 팀장님, 이거 최대한 빨리 처리해주세요.”“고 비서님, 이렇게 직접 찾아오시다니요. 전화 한 통 주시면 저희가 위로 올라갔을 텐데...”그는 이렇게 말하며 서류철을 열었다.그러나 맨 위에 적힌 굵직한 세 글자, 사직서를 보는 순간, 손이 파르르 떨렸다.“사... 사직이요...?!”곽은우의 목소리가 갑자기 몇 옥타브나 올라갔고 그 소리에 놀란 직원들이 사무실 밖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당황한 곽은우는 급히 걸어 나가 블라인드를 내리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고 비서님, 지금 이거 농담이시죠? 이건 제가 결재할 수 있는 건이 아닙니다.”인사팀은 회사의 모든 입, 퇴사 절차를 담당하지만 사실 고아린이 입사할 때는 곽은우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그녀의 입사는 철저히 전지훈이 직접 챙긴 일이었다.그는 아직도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5년 전, 어울리지도 않는 싼 티 나는 정장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묶은 채 갓 졸업한 신입이 대표의 직속 비서로 갑작스럽게 ‘낙하산’으로 꽂힌 날...모두가 수군거렸고 눈에 보이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저런 애가 뭘 얼마나 하냐며, 그냥 끼워 넣기 아니냐는 비웃음 속에서 고아린은 딱 1년 만에 완벽한 업무 처리 능력으로 모든 편견을 깨부쉈다.그 후 5년, 곽은우는 그녀가 어떻게 대표 옆 이인자가 되었는지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봐왔다.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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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최근까지도 회사 안팎에서는 고아린의 약혼자가 배 나온 아저씨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곽은우는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5년 전 회사를 막 창립했을 무렵, 전지훈과 함께 참석한 어느 회식 자리에서 둘 다 술에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가 된 날이 있었다.그런데도 만취한 전지훈은 고아린의 손을 꼭 붙잡고 중얼거렸다.“아린아... 집에 가자... 집에...”그때는 단순히 술에 취한 헛소리라 여겼다.회사 내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한 상하 관계였고 그 이상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그날 밤의 장면이 너무나 또렷하게 떠올랐다.‘그때 그 말이 정말 헛소리였을까?’“...안 되겠어.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지. 나중에 뒤집어쓰면 억울하잖아.”곽은우는 주저 없이 전지훈의 번호를 눌렀다.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나서야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전 대표님, 저...”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끊었다.전화를 받은 사람은 전지훈이 아니라 고아린과 같은 직책의 최측근이자 전지훈의 전속 비서, 안태경이었다.안태경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인가요?”곽은우는 이건 대표 본인과 직접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안 비서님, 전 대표님께 확인 드릴 게 있어서요.”“대표님 지금 휴식 중이십니다.”목소리는 얼음처럼 냉랭했다.“용건 말씀하시죠.”곽은우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시간을 흘끗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고 비서님이... 사직...”그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기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무슨 움직임이 있었던 듯 잠시 뒤 다시 들려온 안태경의 목소리는 감정이라곤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전 대표님 말씀입니다. 모든 건 회사 규정대로 처리하라시네요.”그러고는 어딘가 짜증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전 대표님의 자필 사인이 기준입니다.”“하지만...”뚝.전화는 거칠게 끊겼다.한편, 대표이사실 안.전지훈은 답답한 듯 셔츠의 윗단추를 풀어 젖히고 소파에 반쯤 기대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공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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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고아린은 배달 포장 봉지를 들고 옆 주방으로 들어갔다.무표정한 얼굴로 죽을 작은 냄비에 쏟아붓고 불을 켠 뒤 대충 몇 번 휘젓자 세라믹 숟가락이 냄비 벽면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고아린은 시계를 한번 흘끗 보았다.‘이제 슬슬 회의 다 끝났겠네.’그녀는 조용히 냄비를 들어 대표이사실로 향했다.문이 열리자, 막 들어서던 전지훈은 허리를 숙이고 죽을 덜고 있는 고아린의 뒷모습을 보게 됐다.허리를 살짝 잡아주는 원피스가 그녀의 매끈한 라인을 드러냈고 그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그 위를 오갔다.그런데 시선을 따라다닐수록 전지훈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불현듯 회의실 복도에서 들려온 직원들의 수군거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고 비서님 몸매가 그렇게 좋은 줄 몰랐네...”“그러니까 말이야, 그동안 옷으로 가려놓은 게 아깝다니까...”“...”그 노골적인 감탄들이 마치 바늘처럼 그의 관자놀이를 찔렀다.마음속 깊은 곳까지 날카롭게 파고들며 대학 시절 고아린을 탐하던 남자들의 눈빛을 떠올리게 했다.그녀는 자신의 손안에 고이 간직해온 보물 같은 존재였다.그런데 그 고아린을 이제 다른 사람들이 놀랍다며 나눠보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전지훈은 고아린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죽을 들고 돌아서는 순간, 고아린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그러나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회의 끝났어? 빨리 죽 먹어.”전지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는 이런 옷 입지 마.”고아린은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비틀었다.차가운 웃음이 번졌지만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는 이미 의아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왜?”전지훈은 순간 눈빛을 피하더니 어두운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그냥... 너한테는 안 어울려.”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안으려 했다. 말투에는 역겨울 정도로 짙은 소유욕이 묻어 있었다.“예전처럼 정장을 입는 게 낫겠어.”그러자 고아린은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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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고아린은 눈을 내리깔고 비웃음을 감췄다.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야말로 그 사람의 진짜 속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하여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척하며 전지훈이 내민 손을 슬쩍 피했다.속으로는 냉소를 흘리면서도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을 걸쳤다.“공 비서님이랑 임 비서님, 둘 다 능력 괜찮잖아. 게다가 안 비서님도 옆에서 보고 계시니까 내가 없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을 거야.”‘공 비서’라는 말이 나오자 전지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고아린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이마를 살짝 짚으며 일부러 힘겨운 목소리로 덧붙였다.“아무래도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봐. 일에 집중이 잘 안 돼...”전지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요 며칠 이상했던 이유가 그거였나?’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요즘 좀 피곤했을 거야. 그래, 잠깐 쉬는 것도 좋겠다. 그동안 결혼 준비도 하고.”“그럼 오후에 인수인계 끝내고 바로 나갈게.”고아린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오후?”전지훈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야?”거절하려던 말이 입까지 올라왔지만 순간, 아까 들었던 직원들의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그러자 전지훈의 속에서는 이유 모를 분노가 일었고 결국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렇게 해.”고아린은 사무실을 나와 필요한 업무 인수인계를 마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버튼을 누르고 층수가 점점 낮아지는 걸 바라보며 그녀는 작게 웃었다.이번에는 누군가에 의해 밀려 내려온 게 아니었다.이번만큼은 그녀 스스로 누른 ‘내려가기’ 버튼이었고 본인이 먼저 이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자 선택한 것이었다....회사에서 나와 곧장 고아린이 향한 곳은 달빛 공방이었는데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그녀가 후배 손가희와 함께 연 도자기 공방이었다.졸업하자마자 전지훈의 비서로 들어가고 바쁜 업무와 그의 강한 반대 탓에 도자기를 만지던 감각도 그 모든 열정도 희미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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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달빛 공방이 막 문을 열었을 무렵, 고아린은 틈틈이 쉬는 시간에 들러 일을 도왔었다.하지만 그 당시 회사 설립 1년도 채 안 된 전지훈은 조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추진하다 협상들을 줄줄이 망치고 말았다.그때 고아린은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전지훈은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며 말을 잘랐다.가장 심했던 날, 그는 대놓고 고아린에게 화를 냈고 칼날 같은 눈빛이 그녀의 바짓단을 스쳐 갔다.그러다 그녀의 신발 위에 묻은 진흙을 보았을 때는 노골적인 혐오감까지 드러났다.“지금 네 꼴 좀 봐. 오늘 얼마나 중요한 협의가 있었는지 몰라? 고아린, 네가 나 도와줄 수 없는 건 알겠는데 제발 방해는 하지 마. 이 지저분한 것들 당장 치우고 앞으로는 도자기 같은 거 하지 마. 그냥 조용히 내 옆에서 회사 일만 같이 해줘.”신발 위의 진흙을 내려다보며 고아린도 전지훈에게 따져 묻고 싶었으나 끝내 그 말은 꺼내지 못했다.그가 낮은 목소리로 사과하며 ‘아린아, 난 너밖에 없어’라고 말했을 때, 고아린은 또 마음을 접고 말았다.그 말 한마디에 고아린은 자신의 취미도, 습관도, 모든 것을 포기했다.그런데 결국 그녀가 얻은 건 뭐였을까?“선배...”손가희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톡 건드렸다.그러자 고아린은 현실로 돌아오며 밝게 웃어 보였다.“그 사람이 좋아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그러고는 선반 위에서 앞치마를 꺼내 걸치며 말했다.“이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가 제일 중요해.”이에 손가희는 입을 ‘O’자 모양으로 벌렸다.고아린은 그녀에게 짧게 설명했다.설명할수록 손가희의 미간은 점점 더 찌푸려졌고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럴 줄 알았어요!”발을 쾅 하고 굴리더니 손가희의 목소리가 여덟 옥타브는 올라간 듯싶었다.“그렇게 여자 일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남자는 원래 믿을 수 없는 거예요!”고아린은 순간 멍해졌지만 곧 웃음이 터졌다.‘그래. 그런데 난 무려 7년이 걸려서야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네.’두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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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그건 그녀가 4년 전 남긴 작품이었다.“띠링.”출입문에 달린 종이 불현듯 울렸고 고아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어서 오세요, 달빛 공방...”말이 중간에 뚝 끊겼다.문 입구에는 역광 속에 키 큰 남자 한 명이 우뚝 서 있었다.검은색 쓰리피스 수트가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를 날렵하게 감싸고 있었고 넥타이 위의 금속 핀에서는 미세한 빛이 번뜩였다.그가 몸을 약간 틀자 반사된 빛이 날카롭게 번져나갔다.강도윤.성북시에서 그 이름만으로도 모든 걸 움직이게 만드는 사내가 지금 이 순간 고아린의 도자기 공방 안에 서 있었다.더 황당한 건 그의 왼손에는 핑크색 딸기 곰 백팩이 들려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양 갈래머리를 땋은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고아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강, 강 대표님?”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석양이 기울며 강도윤의 윤곽이 점점 또렷해졌고 그제야 고아린은 그의 콧대 위에 얇은 금테 안경이 걸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에어컨 바람은 계속해서 습기 섞인 실내를 식히고 있었고 물레는 일정한 속도로 계속 돌아가며 기계음만 또박또박 울렸다.그 순간, 강도윤이 입을 열었다.“아린 씨.”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지만 낮고 단단했다.“오랜만이네요.”고아린은 잠깐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가 멍해졌다.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불과 이틀 전, 웨딩숍에서였다.하지만 곧 깨달았다.강도윤 같은 사람은 몇억짜리 계약도 우습게 다루는 대기업 대표이지 않은가.그날 같은 일은 그의 기억 한 켠에 남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고아린 역시 그날은 꽤나 예의 없게 굴었으나 사실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았다.그 사이, 강지민은 체크 무늬 원피스를 입은 채 공방 안을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곧 고아린의 시선이 진열장 두 번째 칸을 들여다보려고 까치발을 들고 있는 작은 아이에게 닿았다.‘혹시 강 대표님의 딸인가?’성북시 언론이 온갖 수를 써도 강도윤의 사생활은 단 한 줄도 캐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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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말이 나오자마자 고아린은 바로 후회했다.아이 체험에 보호자가 함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지금 상대는 강도윤이 아닌가.고아린의 시선이 무심결에 그의 고가 수트 위아래를 훑었다.이런 쓰리피스 차림은 이 공방 분위기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행동 하나, 말 한마디도 세상의 이목을 끄는 사람이 진흙을 만진다니...전지훈조차 도자기를 ‘지저분한 짓’이라며 천하게 여겼는데 강도윤은 오죽할까.고아린은 마음속으로 자조적으로 웃었다.“그럼 고맙겠네요.”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 고아린은 눈이 번쩍 뜨였다.강도윤은 이미 안경다리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곧 그가 여유롭게 수트 상의를 벗자 셔츠 아래로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 라인이 드러나 눈에 들어왔다.벗은 수트를 팔에 걸친 채 길고 뚜렷한 손가락으로 소매 단추를 툭 풀었다.그리고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리자 선명한 팔 선과 함께 잔잔한 핏줄이 드러났다.고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은은하게 퍼지는 설송 향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감돌았고 그 향은 마치 교묘하게 틈을 비집고 코끝을 파고들었다.‘이런 재벌가 도련님들은 외투 하나 벗는 것도 다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나?’“아린 씨?”강도윤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조금 전까지 고아린이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손이 지금은 허공에 머문 채 앞치마를 받아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제야 고아린은 정신을 차렸다.“죄송해요.”급히 선반에서 어린이용과 같은 디자인의 성인용 앞치마를 꺼내 건넸다.그런데 앞치마를 건네는 순간, 손끝이 살짝 맞닿았고 그 찰나에 등줄기를 전류가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고아린은 깜짝 놀란 듯 손을 빼고 그의 수트 상의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두고는 허둥지둥 강지민 곁으로 가서 쭈그려 앉았다.목소리에도 어색함이 묻어났다.“자, 지민아, 선생님이 알려줄게...”분명 몇 미터는 떨어져 있는 거리인데도 고아린은 그 뒤에서 들려오는 아주 미세한 웃음소리를 분명히 들었다.목덜미가 찌릿해졌다.고아린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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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와! 삼촌 진짜 대단해요!”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강지민의 눈에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고아린 역시 넋을 놓고 바라봤다.중심 잡기, 물레 돌리기 같은 기초 과정은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사실은 힘의 세기와 각도를 정교하게 조절해야 가능한 일이었다.타고난 사람이라 해도 처음 시도에 이렇게 완벽하게 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역시 강 대표님이네.’강지민은 물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은 그릇을 보며 두 발을 통통 구르듯 뛰었다.“선생님, 우리 삼촌 진짜 대단하죠?”고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도자기도 이렇게 잘하실 줄은 몰랐네요.”손가락 사이에 낀 진흙을 씻기 위해 물에 손을 담그고 있던 강도윤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고아린을 바라보았다.그러더니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조금 해본 적 있습니다.”물방울이 그의 또렷한 손가락을 따라 미끄러지더니 검은색 슬랙스 위에 스며들며 흐릿한 물 자국을 남겼다.그의 시선은 아래로, 고아린의 손끝에 묻은 진흙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천천히 그녀의 눈동자에 닿았다.“아린 씨도 그렇죠.”그 말은 조용한 호수에 돌 하나가 떨어진 듯,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고아린은 그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한참이 지나서야 이해했다.‘내가 도자기를 할 줄 안다는 것에 놀란 건가?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는 고아린은 전지훈 곁에서 무미건조하게 서류를 들고 다니는 비서일 뿐이니까.’“저, 대학에서 도예 전공했어요.”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그리고 무의식중에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를 문질렀다.벌써 5년, 도예를 전공했다고 스스로 먼저 입 밖에 꺼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잊고 지냈던 과거의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콧등이 시큰해진 고아린은 고개를 살짝 돌려 눈을 피했다.그래서 놓쳤다.강도윤의 눈빛 속에 번지던 놀람이 아닌 안타까워하는 듯한 기색을.“그랬군요.”그는 티슈 두 장을 집어 천천히, 아주 정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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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강도윤은 이미 다시 안경을 쓴 상태로 처음 마주했을 때의 고고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되살아났다.하지만 그 얇은 렌즈 아래 갈색 눈동자에는 그녀가 읽어낼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석양이 사선으로 기울자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서로 얽혀들었다.저녁 햇살이 공기 속에 금빛 그물을 드리우고 떠오른 먼지들이 춤을 추듯 반짝였다.꿈결 같은 풍경 속에서 시간이 문득 멈춘 것만 같았다.그 순간, 고아린은 아주 흐릿한 실루엣 하나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열여덟 살의, 그때의 자신을 말이다.한 시간의 도자기 체험 수업은 금세 끝났다.강지민은 고아린이 선물한 도자기 토끼 인형을 두 손에 꼭 쥐고 내려놓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고아린은 메모지에 날짜와 이름을 적어 강지민이 만든 작은 그릇 옆에 붙였다.“진흙이 마르면 유약을 발라서 구울 거야. 완성되면 직접 가지러 와도 되고 택배로도 보내줄 수 있어.”강지민은 기대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지민이는 언제쯤 그릇이 구워졌는지 알 수 있어요?”고아린은 아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그리고 시선의 끝에서 멀찍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강도윤을 곁눈질로 바라봤다.그는 옆모습을 그녀들 쪽으로 비켜 세운 채 무표정하게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한 손은 헐겁게 휴대폰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강지민의 분홍색 딸기 곰 백팩이 들려 있었다.“도자기는 두 번 굽고 유약도 발라야 해서 완성까지 한 달쯤 걸려. 다 되면 매장 직원이 연락 줄... 아.”말하다가 고아린은 문득 깨달았다. 그 연락 담당 컴퓨터는 지금 손가희가 들고 나간 상태였다.강지민은 눈을 또르르 굴리더니 고아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럼 지민이, 선생님이랑 카카오톡 친구 할 수 있어요? 그릇 다 구워지면 선생님이 메시지 주세요. 삼촌한테 가지러 가달라고 할게요!”“어...?”고아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럼. 당연히 되지.”그녀는 다정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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