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By:  율희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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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한 지 7년이 되던 해, 고아린은 자신이 4년 동안이나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약혼을 깨고, 늘 따라붙던 착한 여자니 단정한 여자의 틀을 벗어던졌다. 그렇게 고아린은 다시 태어났다. 아름답고, 차갑고,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사람으로. 사실 인생의 새로운 장이 열릴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성북시의 그 까다롭고 고고하기로 유명한 남자, 강도윤은 언제부터인지 자꾸 옆에 나타났다. 늘 적당히,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고아린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 듯 들어왔다. 솔직히 고아린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왜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도대체 무슨 의도로 다가오는지. 고아린이 모르는 사이에 강도윤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조용히 그녀를 기다려왔다는 걸 티도 안 내면서. 성북시 명문가의 후계자, 강도윤. 그는 상류 사회에서 손꼽히는 완벽한 신사였다. 가문의 규율 321조가 그의 뼛속에 새겨져 있을 만큼 절도 있고, 냉정하며, 단 한 치의 흠도 없는 남자.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강도윤은 이미 10년째 한 사람만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고아린. 그가 보는 건 언제나 그녀뿐이었다. 고아린이 비열한 남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작은 미소 하나에도 아파하던 그 시간 동안 강도윤은 단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 그는 가문의 규율을 지키며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고아린이 결국 모든 걸 버리고 떠나버렸다. 그때야 강도윤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성북시 사람들은 모두 안다. 강씨 가문의 강도윤은 구슬처럼 맑고 단정한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고아린은 안다. 그 단정함 뒤에, 절제된 미소 아래에 얼마나 깊고 광기 어린 열망이 숨어 있는지. 어느 날, 전 남자 친구가 찾아와 후회한다며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순간 강도윤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한걸음에 고아린을 벽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아린아, 전 남자친구는 이제 보지 마. 나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 강씨 가문의 가훈 제321조에 타인의 약점을 이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어. 하지만 상대가 너라면 난 죄인이 되어도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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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그녀가 열여덟 살이던 해, 나는 대학 강당 맨 뒷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까치발로 서서 신입생의 꿈을 적는 벽면에 자신의 미래를 적던 여자.

그녀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나는 그녀가 늘 가던 카페 창가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꽃 한 다발을 품에 안고 다른 남자의 우산 아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27살이 된 지금, 나는 직접 그녀의 약혼남이 바람피우는 영상을 그녀의 메일함으로 보냈다.

그녀가 웨딩숍 안에서 울다시피 내 품으로 달려오던 순간을 나는 조용히 지켜봤다.

사실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적이 있어도 괜찮았고 그녀가 나를 잊은 적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10년을 걸쳐 준비한 일, 그 마지막엔 결국 그녀는 내 아내가 될 것이다.

...

전지훈의 외도를 처음 발견한 건, 고아린이 그의 휴대폰으로 업무 메시지를 회신하던 순간이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숨겨진 아이콘을 눌러버리자 화면이 전환되며 바탕화면이 바뀌었다.

거기엔 전지훈이 한 여자의 이마에 입 맞추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 여자를 고아린은 알고 있었다.

석 달 전 본사 비서실로 새로 전입된 공지연.

사진 속 전지훈은 그토록 다정했다.

그녀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연애 7년. 그는 태연하게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아무거나 봐도 된다고 말했다.

이제야 알았다.

그건 ‘이중 시스템’ 덕분이었다는 걸.

손이 덜덜 떨렸지만 고아린은 채팅 기록을 열어보았다.

대화의 시작은 4년 전, 마지막 메시지는 30분 전이었다.

[자기야, 그 여자가 웨딩드레스 입은 게 그렇게 예뻐? 내가 빨간색 치마를 입은 때보다? 내가 이렇게 섹시한데?]

[그 치마. 오늘 밤에 입고 나한테 보여줘.]

[흥. 안 입을 거야. 아침에 그 늙은 여자를 키스한 벌로.]

[굳이 너랑 걔를 비교할 필요 있나? 늘 굳은 얼굴에 재미도 없고 남자 흥미 다 떨어지게 생겼지. 안 그랬으면 내가 왜 7년 동안 손도 안 댔겠어?]

[쳇, 입만 살아서는! 내일은 그 여자랑 웨딩드레스 보러 가지 마.]

[알겠어. 네 말이 곧 명령이니까.]

화면 속 글자 하나하나가 고아린의 목을 죄는 듯했다.

아침에 삼켰던 식은 죽이 속에서 역류하며 그들이 말한 단어들이 날 선 칼날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마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

고아린은 곧 결혼할 사람이 이런 대화를 불륜녀랑 나눈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5년 전, 대학을 갓 졸업하자마자 전지훈은 그녀를 회사로 불렀고 그는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린아, 회사는 이제 막 시작이야. 네가 내 비서가 돼주면 좋겠어. 조금만 안정되면 다시 네 일 시작하자. 그러면 우리 매일 함께 있을 수 있잖아.”

그때의 고아린은 도자기 전공자였다.

치마 끝에 마르지 않은 흙이 묻어 있었고 꿈이란 단어를 믿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묵묵히 기다렸다.

무려 5년 동안.

그 5년 동안, 고아린은 화려한 색의 옷을 버리고 검은 정장과 단정한 올림머리를 택했다.

술자리에서 전지훈을 대신해 술을 마셔주고, 거래처의 눈치를 보며 심한 모욕도 꾹 삼켰다.

오로지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고아린, 넌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녀는 결국 회사에서 프로페셔널한 비서로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전지훈에게는 ‘재미없는 여자’로 불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믿었다.

그 모든 희생이 결국 사랑으로 돌아올 거라고.

결혼이 눈앞이라며 행복을 꿈꿨다.

하지만 진실은 전지훈의 눈에 고아린은 단지 지루한 ‘노처녀’였다.

20살부터 27살까지,

고아린의 가장 빛나던 시간은 전지훈의 ‘이중 계정’ 뒤에 숨겨진 농담거리에 불과했다.

“고 비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고아린은 재빨리 모든 창을 닫고 다시 원래의 시스템으로 돌아왔다.

곧, 전지훈이 몇몇 임원들과 함께 걸어왔다.

“고 비서, 잠깐 들어올래?”

“무슨 일이세요?”

사무실 문이 닫히자 그는 곧바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고아린은 미묘하게 몸을 피하며 고개를 들었다.

늘 그렇듯 깔끔한 정장, 부드럽고 진심 어린 눈빛.

‘정말 역겹네.’

불과 30분 전, 전지훈은 다른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지금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있다.

“네 핸드폰, 아까 대신 몇 개 업무 메시지 보냈어.”

그는 태연했다.

“고작 그거였어? 요즘 회사 일 좀 많지. 이번만 지나면 같이 여행 가자.”

전지훈은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받아 들며 손으로 고아린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솔직히 고아린은 속이 뒤집혀 당장 토할 것 같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검사는 안 해봐? 내가 혹시 작은 비밀이라도 봤을지 몰라.”

그러자 전지훈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린아, 내 폰은 언제든 봐도 돼. 내가 뭐 숨길 게 있겠어?”

‘숨길 게 없다고?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지?’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켰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곧, 전지훈이 다시 다가와 고아린의 허리를 감싸안고 입을 맞추려는 순간 그녀는 몸을 틀며 피했다.

꽉 쥔 주먹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만큼 정신이 또렷해졌다.

“내일 오후 5시, 웨딩드레스 피팅 있어. 잊지 마.”

고아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전지훈의 표정은 잠깐 굳었지만 이내 다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다만 내일 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너 먼저 가 있어. 최대한 빨리 갈게.”

그는 일부러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요즘 퍼스트 룩이 유행이래. 결혼식 당일, 처음 보는 신부의 모습이 제일 감동적이잖아.”

고아린은 그 말을 들으며 전지훈을 똑바로 바라봤다.

혹시라도 그의 얼굴에서 죄책감의 그림자를 찾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세상 모든 바람난 남자는 이토록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지훈아, 우리 결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그녀는 낮게 물었다.

5년 동안, 고아린은 전지훈을 ‘전 대표님’이라고 불렀고 전지훈은 그녀를 ‘고 비서’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고아린이 필요하면 늘 다정하게 다가와 ‘아린이’라고 불러줬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수 십 억짜리 프로젝트도 네가 다 해내잖아. 결혼식 하나로 날 실망시키지 않겠지? 고아린, 넌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 말이 또다시 귓가에 울렸다.

사실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린아, 난 네가 필요해.”

“고아린,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 조금만 더 여자답게 굴어줄 순 없을까?”

수없이 들었던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난 대체 뭘 기대한 거지? 후회? 아니면 사과?’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깨달았다.

희망을 놓지 못한 어리석은 광대 같았다.

“물론이지.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그제야 전지훈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나가봐.”

고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떠나려했지만 손은 덜덜 떨렸고 발걸음은 허공을 밟는 듯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곧이어 화장실에 가자마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심하게 구토했다.

아침에 먹은 죽과 위산이 뒤섞여 올라와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팠다.

거울을 올려다보니 창백한 얼굴, 번진 화장, 검은 정장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이게 고아린이었다.

전지훈의 말대로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여자.

그녀는 거울 속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고아린, 넌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웨딩숍에서 온 확인 문자였다.

[내일 오후 5시, 예약 확인되었습니다.]

[네, 시간 맞춰 갈게요.]

답장을 보낸 고아린은 머리핀을 뽑았다.

단정히 묶였던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단추 몇 개를 풀자 숨이 조금은 쉬어졌다.

고아린은 5년 만에 처음으로 전지훈이 만들어놓은 규칙과 틀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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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그녀가 열여덟 살이던 해, 나는 대학 강당 맨 뒷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까치발로 서서 신입생의 꿈을 적는 벽면에 자신의 미래를 적던 여자.그녀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나는 그녀가 늘 가던 카페 창가에서 커피를 마셨다.그리고 그녀는 꽃 한 다발을 품에 안고 다른 남자의 우산 아래로 뛰어들었다.그리고 그녀가 27살이 된 지금, 나는 직접 그녀의 약혼남이 바람피우는 영상을 그녀의 메일함으로 보냈다.그녀가 웨딩숍 안에서 울다시피 내 품으로 달려오던 순간을 나는 조용히 지켜봤다.사실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적이 있어도 괜찮았고 그녀가 나를 잊은 적이 있어도 상관없었다.10년을 걸쳐 준비한 일, 그 마지막엔 결국 그녀는 내 아내가 될 것이다....전지훈의 외도를 처음 발견한 건, 고아린이 그의 휴대폰으로 업무 메시지를 회신하던 순간이었다.손가락이 미끄러져 숨겨진 아이콘을 눌러버리자 화면이 전환되며 바탕화면이 바뀌었다.거기엔 전지훈이 한 여자의 이마에 입 맞추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그 여자를 고아린은 알고 있었다.석 달 전 본사 비서실로 새로 전입된 공지연.사진 속 전지훈은 그토록 다정했다.그녀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연애 7년. 그는 태연하게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아무거나 봐도 된다고 말했다.이제야 알았다.그건 ‘이중 시스템’ 덕분이었다는 걸.손이 덜덜 떨렸지만 고아린은 채팅 기록을 열어보았다.대화의 시작은 4년 전, 마지막 메시지는 30분 전이었다.[자기야, 그 여자가 웨딩드레스 입은 게 그렇게 예뻐? 내가 빨간색 치마를 입은 때보다? 내가 이렇게 섹시한데?][그 치마. 오늘 밤에 입고 나한테 보여줘.][흥. 안 입을 거야. 아침에 그 늙은 여자를 키스한 벌로.][굳이 너랑 걔를 비교할 필요 있나? 늘 굳은 얼굴에 재미도 없고 남자 흥미 다 떨어지게 생겼지. 안 그랬으면 내가 왜 7년 동안 손도 안 댔겠어?][쳇, 입만 살아서는! 내일은 그 여자랑 웨딩드레스 보러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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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음 날 오후, 웨딩숍.직원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고아린 씨, 오늘도 혼자 오셨네요?”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결혼 날짜를 확정한 이후로 지금까지 예식장 예약, 웨딩드레스, 반지, 청첩장 모든 걸 혼자 준비했다.그리고 전지훈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네가 알아서 해. 난 다 좋아.”하지만 그때 고아린에게 가정을 만들자고 약속하며 차가운 마음을 녹여주겠다고 말한 사람도 바로 전지훈이다.전신 거울 앞, 직원이 드레스의 주름을 매만지며 말했다.“이 드레스, 정말 고아린 씨를 위해 만든 것 같아요!”은은한 조명 아래, 웨딩드레스가 부드럽게 빛났고 옆구리가 트여있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따라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거울 속 고아린은 화장은 완벽했지만 눈빛은 공허했다.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말이다.“신랑분이 보시면 분명 놀라실 거예요.”직원이 감탄하듯 웃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저 무미건조할 뿐이었다.그러자 직원은 잠시 그녀를 살피더니 급히 말을 바꿨다.“아! 어제 프랑스에서 새로 들어온 신상 드레스가 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로 가져올게요.”고아린이 말릴 틈도 없이 직원은 달려 나갔다.조용한 드레스룸 안, 고아린은 손바닥으로 드레스의 매끄러운 천을 천천히 쓸었다.무명지에 낀 반지가 조명 아래서 반짝였다.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전지훈이 반지를 끼워주던 그날의 말.“아린아, 내가 꼭 완벽한 결혼식 만들어줄게.”완벽한 결혼식?드레스 피팅조차 한 번 안 따라오는 신랑이 그걸 완벽이라 부를 수 있을까.전지훈은 고아린의 손가락에 이 반지를 끼워주던 순간 정말 두 사람의 미래를 생각했을까, 아니면 공지연을 떠올렸을까.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보낸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는 익명 메일, 그 문자엔 영상 하나가 첨부돼 있었다.터치하는 순간, 피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화면 속, 전지훈의 차 뒷좌석에는 공지연이 그의 다리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붉은 드레스가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고 입술로 그의 귓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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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전지훈은 멀지 않은 곳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서 있었다.곧, 고아린은 강도윤의 품에서 조심스레 벗어나 드레스를 정돈했다.그래서 그녀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강도윤의 눈빛이 전지훈을 보는 순간 한층 싸늘하게 더 식어버린 걸.전지훈이 성큼 다가오더니 고아린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고는 마치 아무것도 못 본 듯 너스레를 떨었다.“강... 강 대표님? 여기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목소리에는 방금까지의 오만함이 흔적도 없었다.강도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릿하게 소매를 정리하며 시선을 고아린 쪽으로 옮겼다.“고아린 씨, 자신에게 맞지 않는 건 미련 두지 말고 빨리 바꾸는 게 좋습니다.”그녀는 순간 멍해졌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너무 길게 끌린 드레스 자락이었다.그제야 고아린은 깨달았다.이 드레스, 화려하긴 해도 결국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전지훈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는 어디서나 환대받는 사람이었다.그런 전지훈이 누군가에게 무시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강 대표님, 제 약혼녀가 좀 철이 없어서 실례를 끼쳤네요.”그 말에 강도윤은 마침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전 대표님은 회사 일로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약혼녀가 늘 혼자 웨딩드레스를 고를 정도면 말이죠.”그 말에 전지훈의 안색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지만 그는 여전히 고아린의 손목을 세게 쥐고 있었다.손끝이 하얗게 변할 만큼 센 힘에 고아린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다.몇 번이고 전지훈의 손을 뿌리치려 애썼지만 움직일수록 더 깊게 파고드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전 대표님.”강도윤의 목소리는 이번엔 확실히 차가웠다.“사랑하는 사람을 다루는 법은 그보다 훨씬 섬세해야 합니다.”고아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뭐지? 나를 두둔해 주는 건가? 직원들의 수군거림을 듣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전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결국 그는 억지로 그녀의 손을 놓았다.고아린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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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고아린의 온몸이 굳어버렸고 발끝에서 시작된 냉기가 순식간에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끝까지 퍼졌다.마치 몸속의 피와 신경이 한순간에 얼어붙은 느낌에 휘청거렸다.‘방금 뭐라고 한 거지?’고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자신이 7년 동안 사랑했던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그런데 지금 그 얼굴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미소와 노골적인 시선이 얹혀 있었다.전지훈은 마치 그녀를 감상하듯, 아니, 평가하듯 보고 있었다.그 순간, 고아린의 마음속엔 단 하나의 단어만이 떠올랐다.실망, 끝도 없어 바닥을 알 수 없는 실망.‘정장 입지 말라고? 내가 치마를 입으면 기분이 좋아?’전지훈이 방금 내뱉은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돌았고 그 말은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그의 목소리 하나, 억양 하나하나가 독처럼 흘러들었다.고아린은 입을 뻥긋거렸지만 가슴 한가운데에 돌덩이가 걸린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대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소리 없는 절규가 터져 나왔다.‘내가 그 올드한 정장이 좋아서 입는 줄 알아? 예쁜 옷을 싫어해서 안 입는다고 생각해? 전지훈, 너 정말 잊었어?’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지난 5년 동안 수없이 많은 밤들, 하이힐을 신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날들.그때 전지훈은 이런 말을 했었다.“아린아, 넌 정말 대단해. 오늘 너 완전 여왕 같았어. 아무도 너 무시 못 하겠더라.”그런 말을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가벼운 말투로 상처를 주는 말을 툭툭 던지고 있었다.전지훈의 말투는 상냥하게 들렸지만 그 속엔 오만과 권태, 그리고 고아린을 장식품으로 여기는 시선이 숨겨져 있었다.그보다 잔인한 조롱이 또 있을까, 그보다 어이없는 사랑의 파괴가 또 있을까.고아린은 그 웃음을 보며 속이 뒤집혔고 지금 이 남자가 낯설어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전지훈은 평소 같았으면 그녀의 미묘한 기분 변화를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린아, 널 갖고 싶어.”자신의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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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전지훈은 밖에서 한참 기다리다 점점 짜증이 올라와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빨갛게 타오르던 불빛이 거의 다 닳아 꺼질 때쯤, 거센 밤바람이 불어왔고 그의 눈빛엔 조급함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때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무심히 화면을 열어보니 공지연이 보낸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검은 스타킹에 싸인 긴 다리 한 쌍.“쳇.”전지훈은 혀를 끌끌 차며 담배꽁초를 꺼버렸다.왜인지 요즘 공지연에게서 도무지 벗어나질 못했다.그런데도 아까 웨딩숍에서 봤던 고아린의 허리, 그 얇은 선 옆으로 살짝 드러난 붉은 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아마 가지지 못한 게 늘 더 자극적인 법이겠지.’하지만 공지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전지훈은 한참을 멈칫하다가 결국 짧게 답장을 보냈다.[기다려. 조금 늦을 거야.]그렇게 일단 공지연을 달래놓고 다시 메인 화면으로 돌아왔다.이 밤, 마침내 고아린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흥분이 피어올랐다.시간을 보니 벌써 10분이 넘게 흘렀지만 고아린은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전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문 쪽으로 걸어가 노크를 했다.“자기야, 다 됐어? 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안쪽은 고요했지만 이상하게도 전지훈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기를 느꼈다.다시 한번 노크하려던 그때 문손잡이가 돌아갔고 고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전지훈은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나 걱정했잖아.”고아린은 손을 빼고 싶었지만 역겨운 감정을 꾹 눌렀다.그저 그가 손을 잡고 침실로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전지훈의 손이 차가운 손바닥 위에 닿아 있었지만 고아린은 그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술 한잔할까? 아니면 영화 볼까? 우리... 너무 오래 못했잖아.”그의 목소리는 낮고 손끝엔 은근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고아린은 아무 대답 없이 전지훈이 들어간 침실을 바라봤다.이 집.그녀가 모든 정성과 마음을 쏟아 꾸몄던 이 공간이 이제는 숨조차 막힐 만큼 더럽게 느껴졌다.고아린의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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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긴말을 쏟아내고 나서야 전지훈은 마치 속이 후련해진 듯 숨을 내쉬었다.그는 셔츠 단추를 느슨하게 풀고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고아린, 넌 너무 강하고 너무 의심이 많아. 그게 나를 숨 막히게 만들어.”공기가 얼어붙은 듯 방 안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전지훈은 담배를 꺼내 또다시 한 대를 피웠고 희뿌연 연기가 그의 얼굴을 가리며 천천히 흘러내렸다.그 순간, 고아린이 7년 동안 사랑해 왔던 그 얼굴이 연기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그와 함께 그녀의 일방적인 7년 간의 사랑도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고아린은 침대 끝에 앉은 채 전지훈이 늘어놓는 자기합리화를 묵묵히 들었다.‘내가 강해서? 내가 의심이 많아서?’그의 말들이 공허하게 귓가를 스쳤다.그녀는 잘 알았다.전지훈이란 남자는 이미 썩어 있다는 사실을.다만, 그게 처음부터 그랬던 건지, 아니면 함께한 세월 속에서 천천히 무너진 건지는 모르겠다.담배 한 대가 다 타들어 가자 전지훈은 다시 다가와 마치 조금 전 독설을 쏟아낸 사람이 아닌 듯 억지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아린아, 나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마. 조용히 좀 생각해. 내가 한 말들, 곰곰이 되새겨봐. 난 먼저 갈게.”그는 무심하게 재킷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고아린은 그대로 무너져 바닥에 주저앉았다.‘전지훈... 역시 넌 다 잊었구나.’3년 전,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던 사람도 전지훈이고 평생 자기를 챙겨달라고, 사랑한다고 하던 사람도 전지훈이다.하지만 그는 다 잊어버렸다.정말 남자란 다 똑같은 걸까.사랑을 말하던 그 입으로 변명과 비난을 쏟아내는 게 그렇게도 쉬운 걸까.그들은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는다.대신 여자가 너무 완벽해서, 너무 강해서, 너무 많이 원해서 그렇다며 책임을 전가한다.그리고 여자는 그때마다 바보처럼 믿었다.남자의 말 한마디, 그 순간의 온기를 사랑이라 착각하며 결국 자신을 갈가리 찢어놓는다.창밖에 바람이 일더니 비가 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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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다음 날 아침, 회사에 들어서는 순간 수많은 시선이 고아린에게로 향했다.엘리베이터의 반짝이는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검은 정장, 깔끔한 셔츠, 단정한 똘똘함.늘 그랬던 고아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오늘은 달랐다.5년 만에 처음으로 그 검은 유니폼을 벗었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짧고 경쾌한 하이힐 소리가 사무실 바닥을 따라 울렸다.비서팀,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공지연.그녀는 몇몇 동료에게 둘러싸인 채, 카푸치노 장미를 품고 있었다.연한 커피색 꽃잎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금방 배달된 아주 비싼 꽃다발.그리고 포장, 꽃, 향기는 너무나 익숙했다.전지훈,‘경찰서에 끌려가서도 꽃은 꼭 챙겨 보냈구나.’“와, 남자 친구 진짜 대박이네요. 며칠에 한 번씩 꽃 선물이라니!”“그러니까요. 제 남자 친구는 이런 센스가 없어요, 꽃이라면 싸구려 카네이션이 전부라니까요.”공지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흐뭇해하고 있었다.“제 남자 친구도 처음엔 잘 몰랐는데 제가 카푸치노 장미 좋아한다고 말한 뒤로 이제는 매번 이 꽃만 보내요.”그 말이 고아린의 귀에 그대로 박혔다.‘아, 그랬구나. 기억을 못 한 게 아니라 애초에 나에겐 관심이 없었던 거야.’전지훈이 보내던 이유 없는 핑계들.헷갈려서, 바빠서 잊었다는 그 모든 말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다.향기로운 장미 냄새가 코끝을 찔렀지만 이젠 향이 아니라 독처럼 매캐했다.고아린은 소파 팔걸이를 잡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지연 씨, 그 목걸이 혹시 A사 신상 아니에요? 이거 천만 원은 기본일걸요? 예약도 3개월 전에 해야 된다던데...”동료의 말에 공지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목에 걸린 로즈골드 하트 목걸이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네. 며칠 전에 선물 받았어요. 남자 친구가 이게 저한테 제일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그 반짝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고아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3개월 전 생일이 임박할 무렵, A사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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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 말을 꺼내며 공지연의 입가엔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전지훈은 절대 사람들 앞에서 고아린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공지연은 그걸 믿고 있었기에 오늘 고아린이 망신당하는 걸 직접 보고 싶었다.“아,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아린 언니, 불편하시면 굳이 안 보여주셔도 돼요.”입으로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지만 그 눈빛은 이미 기대감으로 반짝였다.사무실 안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누구 하나 말은 안 했지만 모두의 표정엔 그 소문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설마 정말 나이 50이 넘은 대머리 부자인가? 그래서 숨기고 있었던 건가?’사람들의 눈빛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 모두가 고아린에게 쏠려 있었다.그때 고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불편하다니요? 공개하면 되죠. 왜 안 되겠어요?”그 한마디에 공지연의 표정이 굳어버렸고 방금까지 여유로웠던 웃음이 그대로 멎었다.“네? 그게... 언니, 그런 건 혼자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거예요? 언니 약혼자도 알고 계신가요?”순간, 공지연 스스로도 자기가 너무 많이 안다는 듯 말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고아린은 눈썹을 살짝 올리고는 아주 느리게, 아주 의도적으로 공지연에게 시선을 돌렸다.“공 비서님.”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공기 속엔 팽팽한 긴장감이 번졌다.“제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 많으신가요? 그 정성으로 업무 처리도 조금만 신경 써주시면 좋겠네요. 지난번 협력 문서가 반려된 건... 몇 번째였죠? 세 번째였나요?”순간, 사무실은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얼마 후, 주변의 동료들이 눈치를 보다 급히 나섰다.“아린 언니, 지연 씨도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맞아요. 맞아요!”그때, 인턴인 은지나가 긴장한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사실 그녀는 회사의 뒷이야기를 잘 몰랐다.“하하, 맞아요. 그런데 언니 약혼자분은 정말 멋있을 것 같아요!”그 말이 끝나자 사무실은 또다시 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은지나는 뒤늦게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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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하지만 그 전화는 끝내 아무도 받지 않았다....이제 고아린은 마음을 정했다.전지훈과 완전히 선을 긋기로.그렇다면 더 이상 전성 그룹에 남을 이유도 없었다.고아린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회사 시스템에 접속해 사직서를 업로드했다.컴퓨터 화면 위의 커서가 깜박이는 동안 그녀는 문득 지난 5년을 떠올렸다.인정해야 했다.그 시간 동안 전지훈은 그녀를 철저히 신뢰했다.핸드폰 비밀번호, 이메일 계정, 심지어 회사 최고 관리자 계정까지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공유했다.회사의 거의 모든 승인 절차는 고아린의 손을 거쳐야만 통과됐다.그만큼 그는 고아린을 믿었다.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그날 전지훈의 휴대폰 속 이중 시스템을 발견하기 전까지는.고아린은 코웃음을 치며 전지훈의 계정으로 로그인해 자신의 퇴사 신청서를 직접 승인 처리했다.[최고 경영자 승인 완료.]시스템 창에 녹색 체크 표시가 뜨는 순간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이제 정말 끝이네.’이제 남은 건 단 한 가지. 퇴직 보고서에 전지훈의 친필 서명을 받는 일.시계를 힐끔 본 그녀는 문밖 유리문 너머를 바라봤다.‘곧 도착하겠지?’잠시 후, 복도 끝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전지훈이 들어섰다.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평소의 말쑥하고 여유로운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었다.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눈, 삐뚤어진 넥타이, 구겨진 셔츠 자락.모든 게 전지훈이 지금 얼마나 불안정한지 말해주고 있었다.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공지연이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전지훈은 소리를 질렀다.“꺼져!”그 한마디에 공지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고아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올렸다.‘신고 효과가 꽤 빠르네.’그는 어제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명백한 음주 운전이었다.게다가 신흥 재벌 전성 그룹의 CEO라면 이런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회사 이미지에 치명적이었다.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사방에서 불 끄느라 정신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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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너... 오늘은 왜 이렇게 입었어?”전지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고아린의 몸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옅은 블루 원피스의 자락에서 정교하게 그려진 화장까지 더해진 그녀의 모습에 목젖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눈빛에는 혼란보다 놀라움과 감탄이 더 짙었다.고아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흔들리는 치맛자락은 마치 한 송이 만개한 푸른 장미 같았다.“별로야?”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비쳐 들어와 고아린의 얼굴에 닿았다.그 빛은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사람처럼 아른거렸다.그 순간, 전지훈의 머릿속에는 7년 전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자기에게 달려오던 소녀의 모습이 스쳤다.그리고 어젯밤, 결혼식 신혼방에서 자신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혹시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던 걸까?오늘 이렇게 치마를 입은 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었을까?화해의 신호라도 보내는 걸까?‘결국 또 고개를 숙였다는 뜻인가?’그 생각이 드는 순간, 전지훈의 가슴 한편이 이상하게 후련해졌고 묘한 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동안 술 때문에 잡혀간 일로 쌓였던 짜증도 절반은 사라진 듯했다.“예쁘네. 정말 예쁘다. 너 진작 이렇게 입었으면 좋았을 텐데.”그는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며 늘 그렇듯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 뒤에는 익숙한 계산과 오만이 깃들어 있었다.전지훈은 고아린이 자신 앞에서 고개 숙이는 그 순간들을 가장 좋아했다.마치 길들여진 고양이를 쓰다듬듯, 그녀가 결국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확신.그게 전지훈에게는 행복한 일이자 만족스러운 일이었다.“어제는 내가 좀 심했지. 말투가 그랬어.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이윽고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하지만, 아린아. 너도 알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사랑해. 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그 말들, 입에서 나오는 위선적인 말들이 다시 고아린의 귀에 들렸다.그녀는 이런 얼굴이 너무나 익숙했다.전지훈은 언제나 자신이 고아린을 완전히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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