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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화

송시운의 태도는 순식간에 바뀌었다.‘건축설계 업계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의 조언을 받을 수 있다면 설계안은 무조건 통과야!’눈앞의 이득을 생각하자, 자존심도, 체면도 모두 아깝지 않았다.“설희야, 이런 중요한 걸 왜 진작 말 안 했어? 나도 같이 인사드렸을 텐데.”박연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까지의 망신은 생각도 하기 싫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이 기회였다.하지만 진서은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원래는 설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었는데 이렇게까지 소란이 일어난 마당에 저도 피곤하네요. 오늘 일은 없는 걸로 할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우아하게 일어나 임설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서준호의 팔을 끌어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 자리에 남겨진 세 사람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진서은을 화나게 한 것도 문제지만 더 무서운 건 바로 서준호였다.그가 만약 지금 이 일에 기분이 상해 협력까지 취소해 버린다면 두 집안의 사업은 그대로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조급해진 송시운이 말을 쏟아냈다.“설희야, 제발 가서 서 부장한테 잘 말씀 좀 드려줘. 우리 두 회사 협력은 절대 끊기면 안 돼!”“맞아, 설희야. 지금이라도 가서 부탁드려!”최현숙도 다급하게 말했다.“설희야, 네 마음이 어떤지는 알지만 그래도 회사를 생각해서라도...”박연우도 뒤늦게 입을 맞췄다.임설희는 황당함을 넘어 허탈한 웃음만 새어 나왔다.‘대체 이 셋의 머릿속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남이 들으면 얼굴이 화끈거릴 말들을 본인들은 너무도 당연한 듯 내뱉고 있었다.그녀는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며 한 모금 마시려다가 문득 떠올랐다.‘그 사람, 오늘은 술 한 방울도 마시면 안 된다고 했지.’그가 자리에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약속을 어기긴 싫었다.‘그렇다면 낭비할 순 없지.’임설희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잔 안의 붉은 액체를 그대로 송시운의 얼굴에 시원하게 끼얹었다.“임설희!”붉은 와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송시운이 낮게 으르렁거렸고 임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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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임설희는 뒤에서 꽂히는 뜨거운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국을 들이켰다.‘확실히 맛있네. 성종 그룹의 호텔이 다르긴 달라.’그때, 송영석이 성준 쪽으로 다가가며 은근히 웃었다.“성 대표, 나랑 자네 어머님은 꽤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네. 자네도 내가 어릴 때부터 지켜봤고 말이야.”말끝에 은근히 선을 긋듯, 자신이 ‘어른’임을 강조하려는 듯한 태도에 성준은 미소만 짓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국만 들었다.송영석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게다가 성준이 여전히 앉아 있는 탓에 자연스레 몸을 숙여야 했고 평소 남에게 허리를 굽혀본 적이 없는 편이라 그조차 쉽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임설희에게 자리 좀 내어주라고 눈짓을 보냈다.하지만 임설희는 보는 척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국을 한입 떠서 입에 가져갔다.“성 대표님, 호텔 주방장 진짜 솜씨 좋으시네요.”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성준의 입가에 웃음이 조금 더 깊게 배었다.“배부르면 그만 드세요.”임설희는 속으로 혀를 찼다.‘꼭 같은 말도 저렇게 해야 속이 시원할까.’한편 송영석은 완전히 공기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오늘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오기 힘들기 때문에 체면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는 더 가까이 다가오며 끈덕지게 말을 이었다.“성 대표, 젊은 나이에 능력도 대단하시다 들었어. 해외에서 투자 쪽으로도 큰 성과가 많다고... 우리 집 시운이랑도 학창 시절 동문이라던데 인연이 깊어 그래. 이참에 연락처 하나만 줘 봐. 시운이가 조만간 따로 식사 자리 마련할 테니 젊은 사람끼리 친하게 지내다 보면 서로 배울 것도 많고...”“켁!”그 말이 얼마나 민망하고 어설펐는지 듣고 있는 사람조차 숨이 막힐 정도였다.‘서로 배울 게 뭐가 있다고.... 기어들어 가면서 아첨하는 주제에 밥 한 번 사겠으니 연락처를 달라고? 아부를 하려면 납작 엎드려서 잘 하던가.’성준은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송영석을 바라봤다.“말씀 안 하셨으면 몰랐을 뻔했네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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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성준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목적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탁이라면 다른 사람이었으면 단칼에 무시했을 것이다.그러나 임설희에게만큼은 삼 분이든 오 분이든, 그보다 더 길어져도 상관없었다.“그렇게 하죠.”연회가 끝날 무렵까지 임설희는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원래는 대리운전을 부를 계획이었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주차장에 도착해 자신의 차 앞으로 걸어가는 순간, 어디선가 송시운이 나타났다.“설희야, 나 여기서 한참 기다렸어. 우리 같이 집에 가자.”송영석 부부와 박연우는 이미 먼저 떠난 듯 보이지 않았다.“이제 당신 집이랑 내 집은 다르잖아. 그러니까 각자 가는 게 좋겠어.”그녀가 차 문을 열자 송시운이 손목을 잡고 애원하듯 말했다.“설희야, 오늘 일은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임설희는 냉정하게 손을 뿌리쳤다.“됐어, 사과할 필요 없어.”“내가 질투한 건 너를 사랑해서야. 널 아끼니까 그랬던 거야. 네 입장에선 이해 못 할 수도 있지만...”“맞아. 이해 못 해.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아무튼 오해였잖아. 다 풀렸으니까 우리 이제 그 얘긴 그만하자.”그녀는 비웃듯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정말 말은 쉽게 하네.’그 순간, 송시운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 위로 향했다.“지금 너 어깨에 걸친 그 옷, 누구 거야?”“당신이랑 상관없잖아.”임설희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기분이 꽤 괜찮았고 이런 남자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조용히 운전석에 올라탔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송시운이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오늘 술 좀 마셨더니 머리가 띵하네. 집에 가서 해장국 좀 끓여줘.”“내리라고.”하지만 그는 못 들은 척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그 눈빛엔 묘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오늘은 집에서 자자. 우리 꽤 오래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잖아.”임설희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까지 말해야 알아들어? 꺼지라고!”송시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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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클라이언트가 말을 아끼고 싶어 할 땐 절대 먼저 입을 열지 말 것, 그건 임설희가 오랜 시간 현장을 뛰며 몸에 밴 생존 법칙이었다.그래서 성준이 눈을 감고 있자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자리를 지켰다.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앞쪽에서 사고가 난 듯, 차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멈춰 섰다.긴장이 풀려서였는지 임설희는 크게 하품을 하더니 고개를 창가 쪽으로 살짝 기댄 채 졸음을 버텨보려 애썼다.하지만 결국 무겁게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누군가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천천히 눈꺼풀이 들렸다.“임설희 씨, 댁에 도착했습니다.”“도착했다고요?”어렴풋이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너무 깊게 잠들었던 탓인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그때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잠깐, 이 편안함은 뭐지? 설마 침이라도 흘렸나?’어리둥절한 상태로 고개를 숙이자 눈앞에는 까만 옷감이 보였고 그녀는 무심결에 손가락으로 그것을 툭툭 건드렸다.‘뭐야, 이거? 쫀쫀하고 탄력도 있네...’자세히 보려던 순간, 그 표면 위에 자그마한 수분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설마... 내가 흘린 침?’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정신은 몽롱해도 매너는 본능이라 그녀는 급히 손을 뻗어 그 물 자국을 쓱쓱 닦기 시작했다.그런데 그 ‘무언가’가 꿈틀하며 움직였다.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그녀의 손이 얼어붙었고 다음 순간 거칠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낚아챘다.“이런 수법은 또 처음이네.”익숙하면서도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분노에에 임설희는 그제야 자신이 방금까지 그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눈앞에 펼쳐진 검은 바지 위 얼룩을 본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그... 그게요!”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말도 안 돼. 그냥 잠깐 눈 붙인 것뿐인데 어떻게 이 사단이 난 거야?’“내려요.”차가운 목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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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너, 나한테 거짓말했지! 분명히 그 남자랑 잤을 거야!”“송시운, 내가 당신인 줄 알아?”“그게 무슨 뜻이야?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의심할 것도 없지. 애초에 그건 사실이니까.’“난 너한테 늘 진심이었어. 한 번도 변한 적 없고.”“하.”임설희는 비웃듯 숨을 뱉었다.그 조소 어린 표정은 송시운의 속을 뒤흔들었고 그는 결국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끈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소리쳤다.“옷은 왜 찢어진 건데?! 그 자식이 그렇게 급했어? 넌 어땠는데? 그렇게 당하는 게 좋았던 거야? 아니면 네가 먼저 들이댄 거냐, 어?!”짝!임설희는 참아왔던 분노를 그대로 실어 그의 뺨을 후려쳤다.“정말, 최악이다. 넌.”그 한 대에 그제야 송시운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잡아당긴 채로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옷 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둥지둥 손을 놓았다.“난 그냥 널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네가 자꾸 날 밀어내니까 너무 상처받아서...”“내 눈앞에서 꺼져.”임설희는 그를 밀쳐내며 바닥에 떨어진 옷과 가방을 주워들었다.“오늘 그 잘난 ‘성공한 남자’들이랑 많이 만나니까 이제 날 무시하는 거야? 내가 못나 보여?”그의 목소리가 계속 뒤에서 쫓아왔다. 하지만 임설희는 그가 능력 없는 사람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게 된 것도 아니었다.“임설희! 네가 자격지심 가질까 봐, 내가 일부러 평범한 척한 거였다고!”그 말에 임설희는 코웃음을 쳤다.‘저렇게까지 뻔뻔하게 말하는 것도 재주야, 정말.’“임설희!”송시운은 마침내 울컥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쳤다.“내가 꼭 증명해 보일 거야! 금원 그 프로젝트, 내가 직접 맡아서 성공시킬 거야! 그때 가서...”“그때 가서 뭐?”임설희는 되레 궁금해진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시선이 정면으로 꽂히자 송시운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그때가 되면, 너랑 이혼할 거야!”그녀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기대할게. 그 약속 꼭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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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이렇게 대뜸 거액을 쾌척하면서 정작 아무 말도 없이 돈만 보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지... 돈 많고 성격 괴팍한 김 회장.”임설희는 굳이 왜 한밤중에 돈을 보냈는지 따져 묻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올 대답은 분명 기상천외할 테니까.그녀는 휴대폰을 휙 던져 침대 위에 떨어뜨리고는 다시 몸을 눕혀 눈을 감았다.다음 날 아침, 임설희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 동네를 조깅한 뒤 땀이 살짝 배인 채로 집에 돌아왔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식탁에 앉아 있는 송시운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왜 그렇게 노려봐? 여긴 누가 봐도 내 집인데.’“어머, 설희야! 아직 자고 있을 줄 알고 아침은 따로 안 챙겼어.”주방에서 나오던 박연우가 그녀를 보고 일부러 놀란 척했다.“괜찮아. 배 안 고파.”임설희는 짧게 대답하고는 곧장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어젯밤 내가 무슨 말 했는지 기억하지?”송시운이 뒤에서 말을 붙이자 임설희는 냉소적으로 웃었다.‘기억하지. 아주 생생하게. 문제는 네가 그걸 기억 못 할까 봐 걱정이라는 거지.’“금원 그 프로젝트, 내가 반드시 성공시켜서 증명해 보이겠어. 난 쓸모없는 남자가 아니야!”“굳이 나한테 증명할 필요 없어.”“그 계약을 성사시키는 날, 그게 바로 우리 이혼하는 날이야!”그 말에 임설희는 헛웃음을 지었다.‘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이혼이람.’더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임설희! 넌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샤워를 마친 임설희는 곧장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어젯밤 진서은이 건넨 의견들을 토대로 금원 쇼핑몰의 전체 콘셉트를 재정비하고 성종 플라자 거리와의 연계 구조를 고려한 설계 초안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그렇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은 어둑해졌고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 뒤에야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실감했다.집엔 아무도 없었고 식사를 준비할 사람도 없자 그녀는 결국 배달을 시키기로 했다.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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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송씨 가문의 대문 앞을 지나던 임설희는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식탁에 둘러앉은 송씨 일가와 박연우는 저녁 식사를 하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대화가 어지간히 웃겼는지 모두가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그 화목한 풍경을 보는 순간, 괜히 심술이 치밀었다.‘이렇게 유쾌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라면 살짝 망쳐줘야 제맛이지.’임설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서준호 이름으로 저장해둔 가짜 번호로 박연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번 프로젝트가 너무 지연되고 있어요. 내부 논의 끝에 새로운 디자인 회사와 접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쪽은 알아서 하세요.」마치 폭탄처럼 날아든 그 한 줄의 메시지를 박연우는 도저히 숨기고 넘길 수 없었다.그녀는 당장 송영석에게 내용을 보고했고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분노가 몰려오자 송영석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식탁을 쾅 내리치며 고함이 터졌다.“이게 다 네 탓이야!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 해?!”박연우는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고 그녀를 감싸려던 송시운까지 덩달아 불똥을 맞았다.“너도 똑같아!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들뿐이야!”자존심에 금이 간 송시운은 벌떡 일어나 의자를 거칠게 걷어차고 씩씩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최현숙은 남편을 말리려다 도리어 밀쳐져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고 박연우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눈치만 살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속이 다 시원하네.’마음이 후련해지자 오히려 식욕까지 돋는 기분이었다.임설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기분 좋게 배달 음식을 가지러 발걸음을 옮겼다.식탁에 앉아 따끈한 밥을 한 숟갈 뜨고 있던 참에 문이 열리더니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의 박연우가 들어섰다.“설희야... 혹시 서 부장한테 다른 회사 찾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해줄 수 있을까?”임설희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싫어.”“설희야, 제발. 나 좀 도와줘. 부탁이야...”박연우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애원했다.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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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두 사람이 떠난 뒤, 임설희도 옷을 갈아입고 곧장 집을 나섰다.손에는 정갈하게 개어놓은 성준의 자켓이 들려 있었고 그걸 직접 얼굴 보고 돌려주려는 심산이었다.하지만 성종그룹 건물 로비에서 들은 소식은 뜻밖이었다.“출장이요? 어디로 갔나요? 언제쯤 돌아오는데요?”생각보다 놀란 탓에 그녀는 무심결에 그런 질문을 툭 던졌고 말이 끝나자 민망함이 물밀듯 밀려왔다.어차피 비서가 대답해 줄 리 없겠지 싶던 순간, 의외로 그 비서는 꽤 친절하게 말했다.“대표님께서 청화포로 출장을 가셨어요. 돌아오시는 날짜는 아직 미정이고요. 개인적인 일정도 포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임설희는 급히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자켓을 다시 손에 들고 건물을 나섰다.차도 이미 송시운에게 돌려준 상태였기에 그녀는 왕복 모두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 안에서 생각이 많아졌다.‘이 며칠 안에 성종 그룹에서 시공이라도 시작하면...”그녀는 이내 목적지를 바꿔 금원으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주저 없이 서준호의 사무실에 들어섰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고급 선물 꾸러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박연우 씨가 보냈어요. 우리 부서 새 팀장... 그러니까 임 팀장님께 보내는 축하 선물이래요.”서준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임설희는 탁자 위 물건들을 대충 훑어본 뒤,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부서 사람들한테 나눠주세요.”“전부 다요? 임 부장님은 안 받으시려고요?”“내가 이걸 받고 무슨 소리 들으려고요.”서준호는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그럼 우리 팀 직원들은 받아도 괜찮을까요...”“최종안을 통과시키는 건 제 결정이지 여기 직원들 아니잖아요. 그냥 맛있게 먹고 잘 쓰면 돼요.”“그건 그렇죠.”서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하지만 임설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그녀는 성종그룹 쪽에서 최근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인맥을 통해 확인해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다.왠지 모르게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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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박연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따가 그 여자 부장이 오면 절대 말 붙이지 못하게 막아야 해요.”“걔가 감히 끼어들기라도 해 봐. 내가 어떻게 쪽팔리게 만드는지 보여줄 테니까. 회사에서 잘린 주제에 아직도 회사 일에 들러붙을 생각을 하다니, 그 뻔뻔함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정말이지 염치도 없는 인간이야.”최현숙은 이를 갈 듯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예전엔 저러진 않았잖아요...”“아니야. 난 예전에도 걔가 영 못마땅했어. 그땐 참을성이 있어서 그냥 넘긴 거지. 근데 지금은? 이기적이고 말도 막하고 윗사람 대하는 태도도 영 아니야. 반드시 시운이한테 이혼하라고 할 거야. 이 집안에서 당장 쫓아내고 말겠어.”“나중에 제가 다시 잘 다독여볼게요...”“헛수고야. 사람 본성은 안 바뀌어.”두 사람이 그렇게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는 사이 웨이터가 테이블로 다가와 커피와 디저트를 내려놓았다.임설희는 여유롭게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맞은편에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두 사람의 투덜거림은 마치 토크 콘서트를 보는 기분이었고 웬만한 예능보다 훨씬 흥미진진했다.“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거야? 정말 낯짝도 두껍지.”최현숙이 눈치를 채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고 박연우는 조심스럽게 소곤거렸다.“우린 신경 쓰지 말죠. 여자 팀장님 곧 올 거예요.”둘은 다시 목을 길게 빼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그 ‘여자 팀장’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 손님 한 명조차 들어오지 않았다.“혹시 안 오는 거 아니야?”최현숙이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그럴 수도 있죠. 하아...”박연우도 시무룩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우린 얼굴도 모르는데...”“프로젝트 책임자까지 됐으면 나이도 좀 있고 보면 딱 알아볼 수 있을 거야.”“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안 되면 내일 또 오면 되죠.”“나는 다시 안 와. 이렇게 오래 앉아 있으니 허리도 아프고, 등도 쑤시고 죽겠어.”“제가 주물러드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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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다음 날 아침, 임설희는 청화포행 배에 몸을 실었다.갑판 위로 나와 바닷바람을 맞던 찰나,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 순간 그녀는 확신했다.‘금원 쪽에서 누가 내 동선을 흘렸나 보네.’송시운과 박연우 역시 그녀를 발견하고는 의외라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설희야... 너 설마 우리 따라 여기까지 온 거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박연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따져 들었고 송시운은 차갑게 눈을 좁혔다.“설마 우리가 금원이랑 프로젝트 성사시키는 걸 방해해서 이혼을 피하려는 건 아니겠지? 진짜 그런 속셈이라면 턱도 없다는 걸 알아둬.”‘헛소리도 이쯤 되면 병이지...’임설희는 두 사람을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묵묵히 객실로 들어갔다.오후 두 시, 배에서 내린 임설희는 예약해 둔 호텔로 향하며 무심코 SNS를 넘기다가, 문득 눈에 익은 피드를 발견했다.강도진의 계정이었다.업로드된 사진은 호텔 수영장에서 물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남자의 옆모습이 찍혀 있었고 넓은 어깨, 물기를 머금은 단단한 등 근육, 매끄러운 팔 선 그리고 반쯤 보이는 옆얼굴을 보는 순간, 임설희의 심장이 철렁했다.‘성 대표! 지금 수영장에 있다는 거잖아?’그녀는 핸드폰을 단단히 쥔 채, 걸음을 재촉했다.호텔 로비에 도착하자, 하필 또 그곳에서 마주친 건 송시운과 박연우였다.“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설마 우리랑 같은 호텔까지 잡은 거야?”송시운은 또다시 얼굴을 찌푸리며 날을 세웠지만 임설희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곧장 프런트로 향해 예약 확인을 마치고는 수영장 위치를 물은 뒤 짐도 풀지 않은 채 서둘러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녀가 자리를 뜨자 로비에 남겨진 송시운의 표정은 금세 싸늘하게 식었다.자신이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호텔 수영장은 별도로 떨어진 실내 공간에 있었고 방마다 프라이빗 풀장이 마련되어 있어 은밀함은 충분히 보장된 구조였다.임설희는 다른 객실들을 하나씩 지나며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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