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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부군의 형님: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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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유소영은 매우 완강했다.기왕 이 집안으로 시집을 온 이상, 명실상부한 세자 부인이 되고자 했다.부부의 실상이 없다는 것쯤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준형이 자신을 아내로 여기지 않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또다시 몇 숨의 침묵이 흘렀다.유소영이 더는 참을 수 없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눈앞의 면사포가 갑자기 들춰졌다.그녀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고, 깊고 어두운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고준형의 손에는 아직도 옥여의가 들려 있었다.“만족했소?”유소영은 고개를 숙였다.“세자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고준형은 신혼부부의 뜻이 원만하길 바란다는 의미를 지닌 그 옥여의를 내려놓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부인의 면사포를 곧바로 들추지 않은 건 훗날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이렇게까지 고집이 셀 줄은 몰랐군.”“세자 부인의 자리가…... 그대에겐 그토록 좋은 것이오?”이렇게까지 모든 걸 걸고 남은 생을 후원에서 보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단 말인가?그는 이런 여인들이 왜 그토록 위로 오르려 애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높이 오를수록 떨어질 때 더 아프다는 걸 모르는 것일까?아무리 존귀한 황후의 자리라 한들, 영원한 방패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하물며 세자 부인의 자리는 더더욱 그러할 텐데.유소영은 가만히 앉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처럼 복에 겨워 복인 줄 모르는 사람이 그가 평범하다 여기는 것, 심지어 하찮게 여기는 것이 다른 이들에겐 가시덤불을 헤치고 몇 개의 산을 넘어야만 겨우 손에 닿을 수 있는 자리라는 걸 어찌 알 수 있겠는가.……황궁.황제는 이삭의 보고를 듣고 크게 노했다.“군량 사건은 반드시 철저히 조사하라! 이삭, 이 일은 그대가 맡도록 하라.”이삭은 즉시 명을 받들었다.황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쓸 뻔한 유씨 가문을 떠올리며 표정을 다소 누그러뜨렸다.이 유씨 가문은 공을 논해 상을 내려야 마땅했다.그들이 제때 군량을 보내지 않았다면 양나라 대군은 적에게 섬멸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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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임유정은 본래 유소영이 설령 세자와 혼인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게 될 거라 여겼다.청우각에 머물며 일 년 내내 세자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삶.청우각과 월하각은 같은 큰 정원 안에 있긴 하나, 하나는 남쪽, 하나는 북쪽에 자리해 마치 두 개의 세상으로 갈라진 듯했다. 살아 있으되 홀로 지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유소영 역시 마땅히 그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계집이 향설원에 들게 되었다니! 향설원은 월하각과 고작 담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였다.예전에 그녀가 몇 차례나 세자에게 향설원으로 옮기고 싶다고 청했지만 세자는 단 한 번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그런데 유소영, 그 상인 출신의 딸은 아무 노력도 없이 그곳에 들어가다니!천한 계집! 도대체 왜!임유정은 이를 악물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질투와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천한 출신의 여인이 자신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이건 명백한 모욕이었다!“부인, 장군께서 지금 안채에서 목욕 중이십니다.”몸종 진수가 낮은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임유정은 억지로 분노를 눌렀다. 고장훈 앞에서 만큼은 늘 온화하고 현숙한 아내로 남아 있어야 했다.세자 쪽은 이미 기회가 사라졌다. 이제는 반드시 고장훈의 마음을 붙들어야 했다.잠시 뒤, 임유정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안채로 들어갔다.마침 고장훈이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오는 참이었다.그녀와 마주친 순간, 고장훈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응어리가 차올랐다. 고장훈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부군, 제가 막 들어가 시중을 들려던 참……”그러나 고장훈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부인, 한 가지만 묻겠소. 예전에 내게 군량을 보낸 이가 유씨 가문이라는 사실을 부인은 이미 알고 있었소? 장인어른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오.”임유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제가 어찌 그런 일까지 알았겠어요. 저는 그저 안채에 머무는 여인일 뿐인걸요.”“하지만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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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유소영은 당당한 세자가 거처하는 곳이 이토록 초라할 줄은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따로 마련된 욕실조차 없었다.그녀는 결국 침실에 놓인 욕조에서 몸을 씻어야 했다.방은 통풍이 되지 않아 금세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목욕을 마치고 나와 보니, 사방 벽뿐인 데다 지나치게 간소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서 그녀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남은 인생을 이곳에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래서 잠시 바람이나 쐬고자 밖으로 나왔다.정자에 앉자, 산들바람이 불어와서야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밤공기는 빠르게 차가워졌고 아민은 그녀의 겉옷을 가지러 자리를 비웠다.……“소영!”유소영이 돌아보니, 고장훈이 서 있었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뒤편을 힐끗 보았다.유경원의 경비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렇게 허술하다니.고장훈은 성큼성큼 정자 안으로 들어왔다.유소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이 밤중에 작은 아주버님께서는 세자를 찾으러 오신 겁니까?”그 말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고장훈도 그 뜻을 알아들었다. 하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 그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들이 이제 시동생과 형수 사이라는 점이었다.심지어 마지막에는 형까지 들먹이며 그를 경고하기까지 했다.그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녀가 이렇게 말끝이 날카로운 여인이었을 줄은......고장훈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를 더 긴장시키고 싶지 않았다.“군량 일 말이오. 아, 아니 군량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도 있소. 그동안 나는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가 오직 이익만 좇고 계산뿐이라 여겼소. 하지만 이제야 내가 그와 유씨 가문을 오해하고 있었단 걸 알게 되었소. 그래서 사과하러 왔소. 그리고 조만간 직접 유 대감께도 사과드리러 갈 생각이오.”“사실…... 그건 내가 유씨 가문에 진 빚이오. 그때 그 군량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내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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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유소영은 마음이 어수선한 채로 방으로 돌아왔다.아민은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채고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씨, 혹시 고장훈이 겁이라도 준 거예요?”유소영의 입술은 희미하게 창백했다.“유경원의 경비가...… 원래 이렇게 허술한가?”아민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예전부터 듣기로는 유경원 경비가 후작부에 가장 삼엄하다고 들었어요. 폐하께서 직접 선발해 보내신 이들도 섞여 있다던데, 다 세자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죠. 그런데 아씨,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유소영은 낮게 중얼거렸다.“그렇다면 일부러 그랬다는 뜻이네.”세자가 일부러 경계를 느슨하게 풀어 두었던 것이다. 그녀와 고장훈을 떠보기 위해서.하지만 대체 왜? 나중에 그녀를 내쫓을 빌미로 삼기 위해서일까? 아민은 방금 전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아씨, 뭐라고 하셨어요?”“아니야. 그만 자자.”유소영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생각을 아민에게 굳이 털어놓지 않았다.아민은 침상을 정리하러 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이 방은 너무 작고 낡았어요. 청우각보다도 못해요. 심씨 어멈은 우리가 여기 머무는 게 큰 은혜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던데요. 하! 세자의 그 외실 여인이었다면 절대 이런 데서 살게 두지 않았을 거예요.”유소영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기로 했다. 게다가 그녀의 지참금이면 이 방을 새롭게 단장하기에 충분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민조차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 터였다.똑똑.“세자 부인, 주무십니까? 궁에서 사람이 와 폐하의 하사품을 전하러 왔습니다!”심씨 어멈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그 하사품은 바로 남해 명주였다.유소영의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만큼 커다란 진주였다.이는 변방에서 조공한 보물로, 오직 황실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상인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고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아민은 신기한 듯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빛이 나서 밤을 낮처럼 밝혀준다는데, 정말인지 모르겠네요.”유소영은 감상할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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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노부인, 세자 부인께서 차를 올리러 오셨습니다.”국씨 어멈이 문밖의 기척을 살피며 고 부인에게 일렀다. 불임약 사건 이후, 고 부인은 영선화를 후작부에 들일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기에 유소영이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영선화와의 대화를 끊었다. 영선화는 유소영의 의기양양한 꼴을 보기 싫어 서둘러 물러났다. 마주 오는 길에 맞닥뜨렸으나, 영선화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방 안. 유소영이 법도에 따라 차를 올리자 고 부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향설원에 머문다지. 세자와는 거리가 제법 가깝구나.”곁에 있던 아민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가깝긴 뭐가 가까워? 세자는 어젯밤 향설원에 머무르지도 않았는데. 면사포만 걷어 주고는 곧바로 월하각으로 돌아갔는데 뭘.이어 고 부인이 덧붙였다. “다만 명심해라. 세자는 아직 약을 복용 중이라 합방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그 아이의 몸을 상하게 한다면 내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아들을 위하는 척했지만, 실상은 유소영이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유소영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말씀대로 세자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기겠습니다.”……난향원. 임유정은 잠에서 깨어난 뒤에야 어젯밤 폐하께서 유소영에게 남해 명주를 하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분노했다. 둘째 오라버니를 부추겨 고발하게 하지만 않았더라면 유씨 가문을 멸문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결국 남 좋은 일만 시켜 주고 유씨 가문을 공신으로 만들어 준 셈이 되고 말았다!그녀가 약을 먹고 있을 때, 진수가 어두운 안색으로 들어왔다. “부인, 재상께서 오늘 아침 돌아오셨습니다. 부인께 지금 당장 친정으로 오라 하십니다.”임유정은 아버지가 왜 이토록 서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 일 때문일까? 하지만 둘째 오라버니가 유씨 가문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 않은가.그녀가 찾아낸 죄증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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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진실을 알게 된 임유정은 큰 공포에 휩싸였다. 온몸의 기력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군량이 그토록 늦게 도착하게 한 주모자가 아버지였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을 궁지로 내몰려다가, 오히려 자기만 궁지로 내몰린 꼴이 되었다.바로 그때, 어젯밤 유소영이 군량 사건의 의문점을 제기하며 철저한 조사를 제안했던 것이 떠올랐다! 유소영이 자신을 향해 지었던 묘한 미소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임유정은 그제야 이해되었다. ‘분명히 진작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 “아아아악!” 임유정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참을 수 없는 굴욕감과 후회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임유정은 숨이 막힌 듯한 손으로는 가슴팍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닥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죽여버릴 거야!”임유정은 갑자기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유소영이 저를 궁지로 내몰려고 꾸민 겁니다! 유소영은 아버지까지 노린 겁니다!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임 재상의 눈빛이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어젯밤의 일만 아니었다면, 그는 암암리에 고장훈의 대군에 군량을 보낸 이가 유씨 가문이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유씨 가문이라. 별 볼 일 없는 장사꾼 주제에 감히 남몰래 모략을 꾸며?’ 하지만 지금 유씨 가문을 상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불길이 자신에게 옮겨붙지 않도록 군량 사건을 먼저 수습하는 것이었다.난리가 난 재상부에 비해, 후작부의 서원은 평화로웠다. 유소영은 영향원에서 나와 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겨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노부인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대혼례에서 벌어진 일은 나도 전해 들었다. 다행히 유씨 가문의 결백이 증명되었다더구나. 너도 많이 놀라겠구나?”유소영이 미소를 띠며 답했다. “아닙니다, 그 정도 겁박은 견딜 수 있습니다. 며칠간 찾아뵙지 못했는데, 할머님의 기체는 어떠신지요?” “네가 지어준 처방대로 약을 마셨더니 몸이 아주 가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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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점심을 준비할 때, 아민이 상에 반찬 몇 가지를 더 올리려고 하자, 심씨 어멈은 단칼에 반대했다.“세자께서 낭비를 막기 위해 점심은 반찬 세 가지와 국 하나로 제한하라고 하셨다네. 세자 부인 혼자 드시기엔 충분한 양이네. 오늘은 첫날이라 급히 준비하느라 이 정도로 넘어가겠지만, 앞으로는 부인의 식사량에 맞춰 엄격하게 양을 조절하여 되도록 잔반이 남지 않게 할 것이네.” 아민은 이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고리타분한 규칙을 누가 견뎌낼 수 있단 말인가!’ 아민은 즉시 내실로 달려가 유소영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유경원은 어떻게 사람을 사람 취급도 안 한대요! 아씨, 생각할수록 청우각이 나았던 것 같아요. 세자랑 멀리 떨어져 있어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것 같아요!”유소영도 살짝 놀랐다. 전에는 유경원의 규칙이 이토록 까다로운 줄 몰랐다. 고 부인이 절약하며 집안을 꾸린다는 말은 들은 적 있었다. 이렇게 보니 세자는 청출어람이었다. 전에 평강방의 꽃병 하나를 3만 냥에 샀다는 소식을 듣고 숨겨둔 거금이라도 있는 줄 알았으나, 지금 보니 다 이렇게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인 모양이었다.오후가 다 지나도록 세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민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외실은 병이 얼마나 중하기에 세자께서 하루 종일 곁을 지키시는 거래요. 신혼 첫날부터 집을 비우시다니, 아씨 체면이 뭐가 되냐고요!” 그사이 유소영은 임유정이 생모가 병이 들어 며칠 머물다 오겠다며 친정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유소영은 임유정이 핑계를 대며 간 것이라고 여겼다. 이번에 친정으로 가면 분명 임 재상의 거센 분노를 살 것이다.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심씨 어멈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세자 부인, 세자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막 앞마당에 도착하셨으니 어서 마당 밖으로 나가 영접하시지요!” 아민은 속으로 비웃었다. ‘뭐야, 다 큰 성인이 길이라도 잃을까 봐, 직접 마중까지 나가라는 거야?’유경원 정문 밖. 유소영은 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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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고준형은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신방에서 고집스럽게 면사포를 걷으라고 요구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세자 부인으로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이러는 것이라 짐작한 고준형이 입을 열었다.“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향설원에 머물겠소.” 의외의 반응에 유소영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가 머문다는 것이 그저 잠자리를 함께하는 시늉일 뿐, 부부의 정을 나누는 일은 아님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것을 차치하고라도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자기 체면을 세워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허울뿐인 체면이 아니었다.“할머님께서 한시라도 빨리 아이를 갖기를 바라시기에, 세자의 몸 상태로 합방하기엔 무리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저희 말이 엇갈리면 곤란할 것 같아 미리 귀띔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소영이 갑자기 한 걸음 다가섰고,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향설원에 머물다 가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세자께서 만수무강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고준형의 미간이 흔들렸다. ‘만수무강이라니.’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주먹을 살짝 쥐어 입가에 대고 너무 크게 웃지 않으려 자제하는 듯했다. 휘어진 눈가에는 봄날의 햇살 같은 온기가 서려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유소영은 그 온화한 겉모습 너머로 그의 자조 섞인 감정을 느꼈다.“만수무강이라…” 그는 혼잣말로 한숨을 내쉬었다. “과부가 될까 봐 두려운 것이오?” 남자는 그녀에게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유소영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세자의 몸에는 아직 잔독이 남아있고, 저는 세자를 구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세자께서 살아계셔야 저도 세자 부인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요.” “호의는 고맙게 받겠소. 하지만 만수무강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오.” 고준형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찰나의 순간, 그녀는 그의 눈동자 밑바닥에 깔린 적막과 고독을 엿보았다. 그는 이 세상에 어떤 미련도 없는 사람 같았다. 유소영이 미간을 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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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분노가 극에 달한 임유정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내가, 내가 유씨 가문을 도왔구나! 유성천을 도왔구나!” 그녀가 아니었다면 유씨 가문이 어찌 화가 복이 되는 기회를 얻었겠는가! ‘아버지 말씀이 옳았어, 내가 멍청했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유씨 가문이 적과 내통하여 군량을 밀수했다고 고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임유정은 죽을 만큼 후회하며, 밥상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음식을 전부 바닥으로 쓸어버렸다.충용 후작부. 향설원. 세자의 규칙을 깰 수 없었고, 따로 작은 주방을 만들려던 계획은 틀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군량을 운송한 공을 인정받아 황제 상인이 된 것이다! 앞으로 물건을 운송하거나 공문 승인을 받을 때 훨씬 편리해질 것이다. 유 대감은 이제 문서 한 장을 받기 위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접대하지 않아도 되고, 물건의 매입가도 예전보다 훨씬 낮아질 것이다.아민은 유독 흥분한 기색이었다. “아씨, 아씨! 이제는 임유정이 불쌍해질 지경이에요. 이걸 뭐라고 하죠?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격이라죠?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 피를 토하며 쓰러질 거예요!” 유소영은 기쁜 내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 일은 그녀에게 큰 즐거움을 줄 만큼의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하사품을 받는다 해도 오라버니를 잃은 슬픔은 메울 수 없었다. 대혼례가 무사히 끝났으니, 이제 그녀는 오직 오라버니의 사건을 조사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서가 너무 적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단서가 거의 없었다.문득 오라버니가 남기고 간 왕불지의 서첩이 떠올랐다. 왕불지는 오나라 시대의 대가로, 그의 서첩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해 수집가들 사이에서도 찾기 힘든 보물이었다. 이 서첩의 유래를 파헤치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유소영은 즉시 이 일을 벙어리에게 맡겼다. 다른 정예 호위들까지 불러 모아 인력을 총동원하라고 일렀다.저녁이 되자, 심씨 어멈이 반찬 두 가지와 국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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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유 대감은 내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일을 우선시했다. 세자가 폐하의 중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집에서 요양하며 한가히 지내는 듯 보여도, 폐하는 수시로 그를 불러 정사를 논하곤 했다.딸과 사위와 함께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이 다시 배웅해야 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이 아까울 따름이었다.두 각 후. 객잔. 강지영이 머무는 천자호 앞에 도착한 고준형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유소영 혼자 들여보냈다.유소영은 의아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내외를 할 필요가 있을까? 혹 너무 아끼는 나머지 아직 정분을 나누지 않은 것일까? 세자께서 워낙 고지식하고 예를 중시하는 분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그는 사랑하는 여인일수록 충분히 존중하며, 확실한 명분이 생긴 뒤에야 가까이할 위인이었다.안으로 들어간 유소영은 다시 강지영을 마주했다. 고양이를 안고 의자에 기대앉은 소녀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전에 봤던 몸종이 그녀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몸종은 유소영을 보자마자 며칠 전 객잔 1층에서 강지영을 귀찮게 했던 그 여인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세자 부인이셨습니까?” 몸종은 무척 놀란 눈치였다. ‘그날 마주친 사람이 세자의 정실부인이 될 분이었다니.’ 몸종은 이전의 당돌한 태도를 버리고 공손히 예를 갖췄다. “세자 부인을 뵙습니다. 제발 우리 아씨를 진찰해 주십시오! 아씨께서 어제 낮부터 두통이 심하셨습니다. 평소엔 잠시 아프다 말았는데, 어제는 밤늦도록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겨우 조금 나아지셨어요.” 소녀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고통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지 입술을 달싹이며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유소영은 자리에 앉아 그녀의 맥을 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단이 나왔다.“침을 놓아 사혈해야 한다. 하지만 강 소저의 기력이 지금은 너무 약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다른 약은 모두 끊고, 내가 지어준 약을 제때 복용하게 하거라. 기운을 차린 뒤에야 침을 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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