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이정은 서류를 빠르게 훑어봤다.“그러면 여기로 엄마 치료비 지원을 신청할 수 있다는 말이야?”이에 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련의 진료 기록을 함께 꺼냈다.“이 사업은 특수 환자를 기준으로 심사해. 보호자가 없거나 재산이 없는 경우도 포함되고, 발병 사례가 극히 드문 특이 질환도 대상이야.”석현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었다.“어머님 병은 희귀병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진행 양상이 기존 사례들과 많이 달라.”“그러니 그 점을 근거로 삼으면 가능성이 있다고 봐. 그래서 한번 도전해 보자는 거야.”이정이 숨을 삼키며 물었다.“그럼 내가 해야 할 건 뭐야?”“이미 다 준비해 뒀어.”석현은 서류 맨 아래를 가리켰다.“신청서는 거의 다 작성해 뒀고 보호자 서명란에 네 서명만 있으면 돼.”석현의 준비는 빈틈이 없었다.이에 이정의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석현아, 이렇게까지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친구 사이에 그런 말은 너무 오글거리지 않나?”석현이 웃으며 말했다.“진짜 고맙다면 밥 한 끼 사 주던지.”그러자 이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병원 근처의 소박한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했다.식사하는 동안 석현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고, 이정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면서도 남자의 호의를 외면할 수 없어서 웃으며 받아들였다.의료재단 지원 신청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사흘도 채 되지 않아 승인 통보가 나왔다.이제 박수련의 치료비는 당분간 재단에서 부담하게 됐고, 석현도 계속해서 박수련을 살펴보겠다고 했다.그 덕분에 이정의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은 한결 가벼워졌다.병원을 나서며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본 이정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없는 동안 넌 꽤 즐겁게 지낸 모양이네.”이정의 몸이 굳어지면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봤다.“대표님? 출장 가신 거 아니었어요?”“예정보다 일찍 돌아왔지.”중건은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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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서문그룹에 생긴 문제는 생각보다 컸다.중건은 순식간에 업무에 매달리게 되었고, 이정의 일은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났다.중건의 간섭이 사라지자 이정은 오히려 숨이 트였다.이정은 이미 퇴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어차피 회사를 나올 생각이라면, 다음 자리를 먼저 정해 두는 것이 맞았다.그래서 며칠 동안 이정은 온 힘을 다해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봤다.며칠이 지나고 드는 생각은 하나였는데, 이는 단지 어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중건이 예전에 말했던 그대로였다.이정을 받아줄 회사를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먼저 예전에 협업했던 몇몇 회사에 연락을 돌렸는데, 의사를 밝히자마자 돌아온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마치 폭탄을 피하듯 모두가 서둘러 선을 그었다.이정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중건을 적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대표의 비서가 이직한다는 건 곧 중건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은 깡이 아무리 있어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몇 차례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다른 회사들도 알아봤고 결과는 역시나 같았다.중건이 당시 강하게 걸어 둔 까다로운 겸업 금지 조항 때문에, 어느 회사도 이정을 받아주지 않았다.취업이 좀처럼 진전이 없자 이정도 점점 초조해졌다.박수련 쪽에는 재단의 의료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모든 비용을 대신해 주는 것은 아니었기에 본인이 부담해야 할 금액은 여전히 컸다.게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하정혁도 있었다.어느 날 갑자기 돈을 요구하며 나타날지 몰랐다.일을 구하지 못하면 지금 가진 돈으로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그렇게 이정이 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 중건은 회사의 문제를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떠올렸다.병원 앞에서 불편하게 헤어진 이후, 중건은 그 일을 이정이 부린 작은 투정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하지만 바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이정은 태도가 누그러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차갑게 굴었다.연락해도 반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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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이정의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차분했다.한 글자씩 또렷하게 내뱉는 말에 중건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검은 눈동자에 순식간에 냉기가 덮이면서, 중건의 목소리는 위험하게 가라앉았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말하는 거야.]“알고 있어요. 그리고 확실하게 얘기하는 거예요.”“이미 말했잖아요. 더는 대표님 옆에서 부르면 오고, 버리면 버려지는 개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요. 그런 생활은 이제 질렸다고요.”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냈다.중건은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켜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전혀 뜻대로 되지 않았다.[하이정.]중건이 냉정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준 게 너무 많아서 이제는 선을 넘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너무나 어이없는 중건의 말에 이정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준 게 너무 많다고요?”“대표님, 돈 말고 제게 준 게 뭐가 있나요?”“모욕, 무시, 대표님이 마음에 둔 사람의 대타, 두 사람 사이 감정을 위한 장치.”“그걸 말하시는 거라면 정말 많이 주셨죠.”[무슨 말을 하는 거야?]중건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나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걱정 안 하셔도 돼요.”이정은 일부러 가볍고 자조적으로 말했다.“저는 아주 비열하고 아주 뻔뻔하니까요. 저 같은 사람은 살아갈 방법이 늘 있어요. 그러니 그건 대표님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에요.”그 말은 중건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나가면 다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차갑게 마지막 말을 한 뒤 중건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가슴속에 눌러 담아 두었던 말을 모두 쏟아내자, 이정은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몇 번이나 웃어 보려고 했지만 웃는 모습은 울 때보다도 더 일그러져 보였다.‘하, 난 왜 이러는 걸까? 이제 떠나는 건데 이제야 해방되는 건데 기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심장 쪽이 이렇게 답답하게 아파 오는 걸까?’이정은 억지로 웃으려고 했지만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아무리 마음이 무너졌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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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나연이 출장을 떠나 있는 데다 중건은 일부러 이정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기에, 요 며칠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오후가 되자, 업무를 정리한 이정은 서류를 챙겨서 중건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이 서류 검토하시고 결재해 주세요.”이정은 철저히 업무적인 태도로 말했다.서류를 보고 있던 중건은 그 말을 들었음에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이정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이정은 이 정도 대우가 일반 직원에게는 흔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말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중건이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나한테 줘요. 내가 서명할게요.”느긋한 여자 목소리가 울리더니, 나연이 사무실 안쪽에 딸린 작은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안색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보였다.이정은 그 작은 침실을 한 번 스쳐보듯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중건은 결벽증이 심해 개인 공간을 극도로 중시했다. 그 침실은 이정조차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이었는데 나연은 그 안에서 잠까지 자고 있었다.“하 비서, 뭐 해요? 서류 좀 주세요.”나연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이 프로젝트는 대표님이 직접 결재하셔야 해서요.”나연은 가볍게 웃었다.“그 서류 위스트 프로젝트죠?”나연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중건 씨가 그 프로젝트를 전부 나한테 맡겼어요. 그러니 내가 서명하는 게 맞아요.”나연의 입가에는 노골적으로 도발하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초반 작업은 전부 내가 해 놓고 마지막 결과만 가져간다는 건가?’머리가 지끈해진 이정은 눈을 잠시 감았다. 뭐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고 중건이 어떤 사람인지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가슴 한쪽이 막힌 듯 불편했다.그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던 중건이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 행사 준비해요.”시선은 분명 이정을 향하고 있었다. 다만 태도는 냉담했고 눈에는 온기가 전혀 없었다.“중건 씨, 오늘 행사에 하 비서가 가는 건 좀 그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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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대표실에서 돌아서 나오며, 뒤에서 들려오는 나연의 놀란 비명을 듣는 순간 이정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풀렸다.어차피 자신은 곧 떠날 사람이라 더 이상 나연의 비위를 맞춰 줄 이유도 없었다.이정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나연은 속이 좁은 사람답게 그 커피를 마신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이정을 괴롭히기 시작했다.권한을 모조리 빼앗고 손에 쥐고 있던 프로젝트도 전부 가져갔고, 심지어 회사 사람들까지 은근히 이정을 멀리하게 했다.나연은 잔꾀를 부리며 계속해서 이정을 자극했다. 그리고 이 목적은 분명했다.이정이 화가 나서 중건에게 따지러 가도록 만드는 것.그리고 이정이 울먹이며 매달리면, 귀찮은 걸 싫어하는 중건의 성격상 분명히 이정을 더 싫어하게 될 거라 계산한 것이었다.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고 이정은 전혀 말려들지 않았다.어느 순간부터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프로젝트를 빼앗겨도 무표정한 얼굴로 자료를 건네줄 뿐이었고, 어떤 도발에도 반응하지 않았다.이정은 원래 다음 직장을 구한 뒤에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나연의 반복되는 행동에 신경은 쓰지 않는다 해도 솔직히 지쳤다.마지막 문장을 입력하고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이정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이제 정말 끝이었다.퇴사하면 중건과 더 이상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었다. 중건은 여전히 높은 자리에 있는 서문그룹 대표로 남고, 이정은 이정의 세계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띠링’ 소리와 함께 메일을 보낸 지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답장이 도착했다.이정이 메일을 열어 보자 화면에는 차갑기만 한 두 글자가 떠 있었다.[반려.]‘왜 반려야? 왜 아직도 놓아줄 생각이 없는 거지?’이정은 답답함에 이를 악물었다. 결국 사직서를 출력해 들고 직접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사표 낼게요.”이정은 사직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했다.곧 중건의 눈이 가늘게 찢어지면서, 얼굴에는 노골적인 분노가 떠올랐다.“그 사직서 반려하죠.”“이미 끝난 사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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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회사 규정상 계약을 위반하고 퇴사하는 경우, 위약금을 분할 납부하려면 첫 번째 분할금을 내야만 회사를 떠날 수 있었다.중건은 이 규정이라면 이정이 회사에 조금 더 머물 거라고 생각했다. 분할이라고 해도 첫 금액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사표를 낸 다음 날, 이정은 출근하지 않았다.중건은 얼굴을 굳힌 채 인사팀을 불렀고 인사팀은 다시 재무팀을 불렀다.결국 대표실 안에 빙 둘러선 사람들은, 중건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모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이정은 전날 밤 이미 첫 번째 위약금을 냈고 오늘부로 공식 퇴사 처리되었다는 보고였다.중건은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위약금 납부 확인 화면을 노려보았다.곧 중건이 미간을 깊게 찌푸리더니 얼굴은 얼음처럼 굳어졌다.중건이 갑자기 휴대폰을 책상 위로 던지자, 둔탁한 소리가 대표실 안에 울렸다.‘정말로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것도 이렇게 신속하게? 이렇게 서둘러 떠날 만큼, 이곳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괴로웠다는 건가?’중건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지만,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그때 나연이 커피를 들고 대표실로 들어왔다.자연스럽게 한 바퀴 둘러본 뒤 상황을 파악한 나연은 부드럽게 웃었다.“중건 씨, 잠깐 쉬는 게 어때?”커피를 내려놓으며 휴대폰 화면을 힐끗 본 나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이렇게 빨리 첫 위약금을 낼 줄은 몰랐네.”아무 생각 없는 척 말을 이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이 없던 사람이 이렇게 큰돈을 한 번에 내다니. 역시 능력이 대단해.”그 말은 노골적으로 이정이 이미 다음 스폰서를 찾았다는 뜻이었다.중건은 속이 더 뒤집혔는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다들 나가요.”대표실에 있던 사람들이 마치 사면이라도 받은 듯 급히 나가자, 나연이 중건의 뒤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내가 좀 주물러 줄게. 요즘 너무 피곤해 보여.”그러니 손이 닿기도 전에 중건이 나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너도 나가.”“중건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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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중건이 요즘 내내 딴생각을 하며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손톱이 나연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하 비서가 중건에게 이렇게까지 중요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여우 같은 년. 이미 떠나 놓고도 끝까지 중건의 마음을 흔들어 놓다니.’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혹시 퇴사조차도 하 비서가 일부러 밀당하려고 하는 거라면.’나연의 마음에 위기감이 밀려왔다.이에 나연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몇 번 터치한 뒤, 이정의 퇴사 이후 모든 동선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회사 안이 얼마나 뒤집혀 있는지 이정은 알지 못했다.회사에서 완전히 발을 뗀 뒤 이정이 느낀 건 단 하나였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는 사실이었다.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은 줄줄이 밀려왔다.어머니의 이후 치료비도 미리 준비해야 했지만, 경쟁업체 제한 조항은 이정의 선택지를 거의 막아버리고 있었다.여러 회사를 돌며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그래서 이정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분히 생각했다.‘한 길만 고집할 필요는 없어. 나하테는 능력도 인맥도 있어.’‘그러니 아예 새로운 사업 분야로 방향을 틀어도 괜찮을 거야.’몇 차례 전화를 돌리고, 며칠 밤을 새워 자료를 찾아본 끝에 이정은 몇 개의 회사를 추려냈다.그중 몇 곳에서 먼저 면접을 봤지만 대부분 조건이 까다로웠고, 새로운 분야로 들어온 이정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제안된 자리는 대부분 보조적인 역할뿐이었다. 그저 가장 기본적인 일을 하며 가장 기본적인 급여를 받는 자리였다.이정은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기에 한 회사씩 계속 면접을 봤고, 결국 마지막으로 한 곳만 남았다.세인컬쳐 회사.이 회사는 성장 가능성과 월급 조건 모두 이정이 골라낸 회사 중 단연 최고였다.그럼에도 마지막으로 남겨둔 이유는 단 하나였는데 바로 대표의 평판 때문이었다.감정 기복이 심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데다가, 신입을 누르기 좋아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또한 경험 없는 신입이 이 회사에서 인턴 기간을 버틴 적이 거의 없다는 말까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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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뻔한 자기소개는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봐요.”이신영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이정을 바라봤다.“예를 들면, 서중건 대표의 전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사람으로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금 이렇게 된 건가요?”회사 대표가 할 법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이정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금전적 관계였어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관계였고요. 더 이상 원하는 걸 얻을 수 없게 되면 자연스럽게 끝나는 거죠.”“멋지네요.”이신영은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다.“사랑할 땐 확실하고 끝낼 땐 깔끔하다니. 내가 딱 원하는 인재예요.”이신영은 이정에게 손을 내밀었다.“우리 회사에 온 걸 환영해요.”그 말에 이정은 잠시 멍해졌다.‘이게 끝이라고?’대표님이 너무 즉흥적인 것 같아 속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이정은 곧바로 손을 내밀고 형식적으로 악수하면서 말했다.“기회 주셔서 감사드려요.”뒤에 앉아 있던 면접관들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자기 회사 대표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얼굴들이었다.“내가 왜 엉뚱해 보이는 질문 하나로 이정 씨를 합격시켰는지 궁금하죠?”이신영은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이정에게 고개를 까딱였다.“가요. 마침 시간도 있으니까 회사도 구경시켜 주고 이유도 말해줄게요.”그 뒤로 이신영은 이정을 데리고 회사를 한 바퀴 돌며 기본적인 구조와 업무 흐름을 설명해 줬다. 그 과정에서 이정은 왜 자신이 채용됐는지도 알게 됐다.“서문그룹 대표님은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 사람 밑에서 5년이나 버텼고 인정까지 받았다면, 능력은 말할 것도 없죠.”“하지만 능력만으로는 부족해요. 나는 과거에 집착하면서 질질 끄는 사람은 딱 질색이에요.”“만약 오늘 서문그룹 대표님 얘기를 조금이라도 길게 했거나 세세한 감정을 섞었으면 나는 절대 안 뽑았을 거예요.”“그런데 이정 씨 대답은 충분히 냉정하고 깔끔했어요.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그래서였구나.’이정은 속으로 씁쓸하게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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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석현이 그동안 이정을 많이 도와줬기에, 새 직장을 찾은 뒤 식사 한 번 대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석현은 흔쾌히 약속에 응했고, 두 사람은 분위기가 꽤 좋은 프라이빗 한식당에서 만났다.“새 일자리 찾은 거 축하해. 새로운 이정의 시작이네.”석현은 웃으며 돈봉투 하나를 건넸다.“좋은 기운 받으라는 의미니까 안 받으면 오히려 이상할 거야.”이정이 거절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석현이 서둘러 덧붙였다.“이런 걸 믿는 편인진 몰랐네?”이정도 더 사양하지 않고 웃으면서 돈봉투를 받았다.두 사람은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주로 석현이 화제를 꺼내고 이정이 답하는 식이었다. 이야기는 대부분 새 회사에 관한 내용이었고, 분위기도 편안해서 식사는 부담 없이 끝났다.“술 마셨으니까 내가 데려다 줄게.”석현은 병원에 급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술을 마시지 않았고, 이정만 조금 마신 상태였다.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원래도 하얀 피부였던 이정은 그 붉은 기가 더해져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 살짝 취기가 오른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석현의 시선이 잠시 멈췄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면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괜찮아. 나 혼자 돌아갈게.”석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이정은 손사래를 치면서 밖으로 나섰다.이미 밤이 깊어 공기는 제법 차가워져 있었다. 술기운으로 몸에 열이 나서 외투도 걸치지 않았지만, 찬 바람을 맞자 이정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뒤따르던 석현이 그 모습을 보고 곧장 외투를 벗어 이정에게 다가갔다.“어렵게 새 직장 구했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지.”외투가 이정의 어깨에 걸쳐졌다. 이정은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를 떠난 뒤로는 꽤 즐겁게 지내는 것 같네, 하이정.”익숙한 목소리에 이정의 심장이 순간 움찔했다.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중건이 서 있었다. 그 뒤로 몇 명이 더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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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서 대표님, 아까 그 여자 누구길래 감히 그렇게 무례하게 구나요?”이정과 신석현이 자리를 뜨자, 중건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그 중 노란 머리를 한 여자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에 옆에 있던 사람이 급히 팔꿈치로 그 여자를 찔렀다.노란 머리 여자는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서둘러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이미 중건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서 대표님, 어디 가세요? 식사는 안 하세요?”중건이 아무 말없이 돌아서자 사람들이 급히 불렀다.그러나 차가운 중건의 시선에 다들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남자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사람들은 숨을 돌리며 수군거렸다.“아까 왜 나를 말렸어요? 그 여자 도대체 누구예요?”노란 머리 여자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막 귀국해서 모르나 보네요. 하이정이라고 예전에 대표님 비서이자 연인이기도 했어요.”“최근에 나연 씨가 돌아오면서 신분 상승의 그 여자 꿈이 실패했고, 그 일로 대표님이랑 완전히 틀어졌거든요. 그건 이 바닥에서 꽤 소문난 사실이죠.”“그래서 요즘 대표님 기분이 그렇게 안 좋았던 거군요.”“글쎄요. 약혼자 때문에 정리한 거라면 그렇게까지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겠죠.”“내가 보기엔 나연 씨랑은 급이 다르던데요? 남자 꼬시는 재주는 제법 있는 것 같더라고요.”그 말을 끝낸 순간, 말을 했던 남자는 등 뒤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중건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서, 서 대표님. 아직 안 가셨어요?”뒤에서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오늘 중으로 비서에게 전달하세요. 이번 원박그룹의 최신 프로젝트에서 서문그룹은 투자를 철회한다고요.”서늘하게 한마디를 남긴 중건은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고 그대로 돌아섰다.원박그룹 대표는 방금 이정을 헐뜯던 바로 그 남자였다. 남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튀어나올 듯하면서 그대로 굳어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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