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By:  주현군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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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건의 첫사랑이 귀국하자, 하이정은 이제 자신이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이정은 자신이 중건의 곁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정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곳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돌아섰다. 그 모습은 마치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단호했다. 중건은 이정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은 분명했다. 이정이 자신을 뼛속까지 사랑하고 있기에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남아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저택에는 이정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중건은 완전히 무너졌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중건은 이정의 집 앞을 막아섰다. “이정아. 떠나지 마.” “널 내 마음속에 품은 사람도 나였고, 그 사람을 잃어버린 것도 나야.” “돌아와 주면 안 돼?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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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한남더빌 펜트하우스.

이정은 중건에게 밀려 통유리 앞에 붙잡혀 있었다.

앞쪽에서는 유리의 차가운 감촉에 움찔했고, 등 뒤에서는 남자의 체온이 뜨겁게 밀려왔다.

수치심을 삼킨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이정이 숨을 쉴 때마다 신음 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며칠간 출장을 다녀온 중건은 그날 밤 유난히 거칠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정이 더는 서 있을 힘조차 잃었을 때야 뒤에 있던 중건은 손을 놓았다.

힘이 풀려서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은 이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바지를 챙겨 입는 중건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땀에 젖은 잘 발달된 복근에서는 온몸에서 팽팽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차가워 서늘한 느낌만이 고스란히 전달될 뿐이었다.

중건은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더니 불을 붙였다.

그렇게 담배 한 모금 빨고는 느리게 말했다.

“주말 비행기표 취소해.”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이정은, 바닥에 떨어진 원피스를 주워 애써 상반신을 가리며 말했다.

“주말에 I국에서 진행되는 협력이 중요해요. 우리...”

그러나 이정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중건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취소해.”

그 한마디에 곧바로 입을 다문 이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설득할 방법을 떠올렸다.

이번 거래의 이익은 적지 않았다.

성사되기만 하면 어머니의 두 달 치 수술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제약회사와 협력 중인 그 회사와의 협상이 잘 풀리면, 특효약에 대한 소식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정은 중건의 곁에서 연인이자 비서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왔기에 이 남자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내린 결정은 그 누구도 바꾸지 못했다.

이정은 계약 서명까지 문턱 하나만 남겨둔 이 시점에 왜 모든 걸 접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중건이 입을 열었다.

“주말에 포시즌호텔 예약해. 나연이 귀국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던 이정은 뭔가를 깨달은 듯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이나연 때문이었다.

발렌타인데이인 주말에 중건이 모든 걸 내려놓는 이유는 결국 나연때문이었다.

나연은 중건이 해외에 있던 5년 동안 마음에 품어온 첫사랑이었다.

이정은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중건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나연 덕분이라는 얘기를.

나연과 얼굴이 닮은 이정은 결국 대체자에 불과했고, 니즈가 맞아 이어진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끝내 마음을 내주고 말았다.

이제 진짜가 돌아왔으니 더는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이상하게 아려 왔다.

“알겠어요. 그럼 최대한 빨리 정리하죠.”

처음부터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같이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진짜가 돌아왔으니 대체품은 이만 물러나는 게 옳았다.

중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를 비벼 껐다.

“왜 정리해?”

이정은 손가락을 꽉 움켜쥐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건을 바라봤다.

“그분이 이미 돌아왔잖아요. 그리고 난 세컨드로 남지는 않을 거예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이정을 바라보던 중건은 냉소를 흘리며 재떨이에 꽁초를 힘주어 눌렀다.

“어떤 자리인지는 내가 정해. 너한테 선택권 따위는 없어.”

“그러니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말을 마친 중건은 간단히 씻은 뒤 더 머무르지 않고 곧장 나갔다.

창밖에는 네온사인이 반짝거렸고 한남더빌의 밤은 금빛으로 빛났다.

난방을 켠 실내는 충분히 따듯했지만, 이정은 왠지 자신의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유리에 기대선 채, 한참이 지나서야 이정이 낮게 중얼거렸다.

“서중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말 잘 듣는 인형으로만 본 거야?”

“그럼 이번만큼은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

그 일로 중건은 모든 일정을 뒤로 미뤘다.

다행히 사정을 이해해 준 I국 프로젝트의 협력사가 계약을 바로 접지는 않았기에, 이정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업무를 마치고 밤이 깊어지자, 이정은 침대에 누워 푹 쉬려 했다.

그때 핸드폰에 중건의 전화가 들어왔다.

이정이 전화를 받자, 전화 너머에서 취기가 오른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와서 데려가.]

그러자 이정은 시계를 확인했다.

“대표님, 지금은 업무시간이 아닌 제 휴식 시간이에요.”

그러나 중건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 바로 와.]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비서로 지낸 5년 동안, 휴식 시간에도 늘 호출을 받곤 했었다.

한 달 뒤 받을 연말 보너스를 떠올리면서, 이정은 그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옷을 챙겨 입었다.

중건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문 안쪽에서 대화가 들려왔다.

“형, 오늘은 왜 나연 씨 안 데려왔어?”

지인들이 웃으며 질문했으나 중건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다문 채,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기색이 스쳤다.

“이 자리는 나연이랑 어울리지 않거든.”

“하 비서쪽이 더 익숙하니 편해.”

이후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중건은 첫사랑을 보석처럼 애지중지 대하면서도, 이정이 이런 자리를 좋아하는지는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정도 돈이 필요했기에, 중건이 시키는 대로 부르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야 했다.

떠나기로 마음먹었는데도 그런 말을 직접 듣자, 그녀의 가슴은 칼에 베인 듯이 아팠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은 이정은 노크하며 말했다.

“대표님, 도착했어요.”

“그래.”

담배를 쥔 중건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가 불을 껐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이정을 보는 중건의 시선은 싸늘했다.

“먼저 차 대기시켜. 잠시 후 내려갈 테니까.”

이에 이정은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차에 앉자마자 가장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울렸다.

[이정아! 돈은? 이번 달 돈 왜 입금이 안 되어 있는 거야?”

[네 엄마 입원비 다 떨어졌어. 지금 안 주면 네 엄마 죽는 꼴 보게 될 거야.]

이에 이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주에 2천만 원 보냈잖아요.”

[무슨 2천만 원?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졌으니까 4천만 원 더 보내.]

“돈이 없어진 건 아빠가 도박에 써서 그렇잖아요.”

이정은 이를 악물었다.

“아빠, 정말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여야 만족할 거예요? 나보고 어디서 4천만 원을 구하라는 거예요? 계속 그러면 엄마 치료비는 어떻게 하라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소란이 일면서, 마치 누군가에게 밀린 듯한 남자의 말투는 더 거칠어졌다.

[도박 안 했다고! 이번 달 돈 자체를 못 받았다니까!]

[곧 병원에서 병원비 내라고 독촉할 거야. 돈 많은 남자친구가 있다면서, 그 사람한테 받던지.]

[돈을 안 보내면 네 엄마는 끝이야.]

통화는 그대로 끊겼다.

운전대를 꽉 쥔 이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씩씩거렸다.

중건에게 말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에게는 약혼녀가 있었다.

자신은 절대 드러낼 수 없는 연인이었고 이 관계는 끝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업무 외에 중건의 곁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모욕적인 말은 익숙했으나 그날따라 유독 숨이 막혔다.

휴대폰을 열어 어머니의 의료보험 카드 잔액을 다시 확인했다.

확실히 떠나기 전까지 치료비와 이후의 생활비를 위해서라도 연말 보너스만은 필요했다.

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중건은 내려오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정은 둘만 있을 때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결국 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 섰을 때 안에서 웃음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형, 하 비서가 다른 데로 갈까 봐 걱정은 안 돼?”

“나연 누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오늘 하 비서 옷차림 봐. 일부러 그런 거 아냐?”

“형이 있는데도 부족한 거야? 우리는 그런 여자는 감당 못 해.”

“내기할까? 지금쯤 형이 없는 걸 알면 들어와서 우리한테 돈을 뜯으려고 할 걸? 그 여자, 돈이 급하잖아?”

이정은 눈을 감았다가 문을 열었다.

“대표님.”

문이 열리자, 잠시 이정을 보던 중건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정말 그렇게 돈이 필요해?”

그 질문에 이정은 애써 웃었다.

“I국 협력 건...”

그러나 눈빛이 차가워진 중건은 더 듣지 않고 말을 끊었다.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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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한남더빌 펜트하우스.이정은 중건에게 밀려 통유리 앞에 붙잡혀 있었다. 앞쪽에서는 유리의 차가운 감촉에 움찔했고, 등 뒤에서는 남자의 체온이 뜨겁게 밀려왔다.수치심을 삼킨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이정이 숨을 쉴 때마다 신음 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며칠간 출장을 다녀온 중건은 그날 밤 유난히 거칠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정이 더는 서 있을 힘조차 잃었을 때야 뒤에 있던 중건은 손을 놓았다.힘이 풀려서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은 이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바지를 챙겨 입는 중건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땀에 젖은 잘 발달된 복근에서는 온몸에서 팽팽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차가워 서늘한 느낌만이 고스란히 전달될 뿐이었다.중건은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더니 불을 붙였다. 그렇게 담배 한 모금 빨고는 느리게 말했다.“주말 비행기표 취소해.”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이정은, 바닥에 떨어진 원피스를 주워 애써 상반신을 가리며 말했다.“주말에 I국에서 진행되는 협력이 중요해요. 우리...”그러나 이정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중건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취소해.”그 한마디에 곧바로 입을 다문 이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설득할 방법을 떠올렸다. 이번 거래의 이익은 적지 않았다. 성사되기만 하면 어머니의 두 달 치 수술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게다가 제약회사와 협력 중인 그 회사와의 협상이 잘 풀리면, 특효약에 대한 소식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그러나 이정은 중건의 곁에서 연인이자 비서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왔기에 이 남자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내린 결정은 그 누구도 바꾸지 못했다. 이정은 계약 서명까지 문턱 하나만 남겨둔 이 시점에 왜 모든 걸 접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때, 중건이 입을 열었다.“주말에 포시즌호텔 예약해. 나연이 귀국했어.”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던 이정은 뭔가를 깨달은 듯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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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중건은 이미 사건의 진상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씨 집안과 이씨 집안의 결혼은 양가의 이해 관계가 걸린 중대 사안이었고, 맞은편에는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협업사의 이의연 대표가 앉아 있었다. 그랬기에 중건은 나연의 체면을 깎을 수 없었다.“사과하세요.”중건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정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이정은 잠시 멍한 얼굴로 중건을 바라봤고, 남자가 자신에게 사과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대표님, 이 일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 조작해서 저를 모함한 겁니다.”“예전에 하 비서와 일할 때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본적인 실수를 할 줄은 몰랐네요.”쯧쯧 혀를 차면서, 이의연은 사과를 기다리는 눈빛으로 이정을 바라보았다.중건 옆에 선 나연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고, 눈에는 승리의 기색이 가득했다.“대표님, 저는 진상을 밝히고 싶습니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금속 펜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곧이어 중건의 강한 압박이 담긴 목소리가 울렸다.“사과하세요. 아니면 해고예요. 선택은 본인이 하세요.”이미 말투에 인내심이 없어진 걸 보고 이정은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이정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었다.“이 대표님, 죄송해요. 이 프로젝트로 인해 발생한 손해는 제가 최선을 다해 만회하겠습니다.”그러나 이의연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그래도 나연 씨는 대처가 참 빠르더군요. 사고가 나자마자 수습에 나서서 다시 보게 됐어요.”나연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중건 씨 일이 곧 제 일이니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죠.”그 화목한 장면을 보며 이정의 마음은 더 차가워졌다.중건이 진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중건은 자신을 선택지에서 지워버렸다.이미 무감각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심장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날카로운 통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멍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퇴근 시간이 됐다.“하 비서, 오늘 저녁에 중건 씨랑 술자리가 있는데 제가 알코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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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정은 더 이상 중건을 보지 않았다.위가 아파 살짝 구부렸던 등을 곧게 세우고, 나연의 득의만만한 눈빛과 구경꾼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차례로 훑었다.“경찰에 신고하세요.”이정이 놀라울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뜻밖의 말에 나연이 순간 멍해졌다.“뭐요?”“경찰에 신고하자고요.”이정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귀중품 분실은 신고 대상이에요. 그리고 몸수색은 불법이죠. 나연 씨는 법을 모르세요?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불법을 저지를 생각이세요?”나연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이정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하 비서, 그만 좀 하지?”중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단 몇 마디였지만 말끝에는 압박감이 실려 있었다.“몸수색하면 바로 결백이 증명되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죠? 정말로...”중건의 뒤를 믿고 나선 나연은 다시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그러게요. 설마 겁나는 거 아니에요?”여기저기서 웅성거리자 이정은 또다시 모든 시선의 중심에 서자 분위기는 단숨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이때, 부드럽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울렸다.“잠깐만요.”석현이 옆 테이블에서 일어섰는데, 손가락 사이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들려 있었다.“이나연 씨, 제가 테이블 아래에서 주웠어요. 이 귀걸이, 이나연 씨 거 맞죠?”석현은 앞으로 걸어 나와 귀걸이를 내밀었다. 표정은 차분했고 시선도 흔들림이 없었다.순간, 파티장은 또다른 느낌으로 술렁거렸다.하얗게 질렸던 나연의 얼굴이 곧 붉어지더니 당황한 듯 귀걸이를 받아 들며 말했다.“아! 그랬군요. 아마 실수로 떨어진 것 같아요.”그리고 이정을 돌아보며 말했다.“제가 착각했어요. 미안해요.”그 가볍고 공허한 그 사과는 진심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이정은 나연도 중건도 보지 않고, 그저 석현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고마워.”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석현의 눈빛에는 말없이 건네는 위로가 담겨 있었다.중건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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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이정이 잠시 멈칫하다가 입술을 꾹 다물고 말했다.“미안해.”“괜찮아.”석현이 가볍게 웃었다.“집까지 데려다 줄게. 지금 상태로는 혼자 보내기 좀 걱정돼서 말이야.”부드럽지만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목소리였다.석현의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이정은 자신이 사실 갈 곳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근처 호텔 아무 데나 내려줘도 돼.”“회사 근처에 작은 아파트가 하나 있어. 계속 비워둔 곳인데 괜찮다면 당분간 거기서 지내.”“괜찮아.”그러나 거절하려던 말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이정아, 날 친구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계속 밀어내지 마.”운전석에 앉은 석현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이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신세 좀 질게, 석현아.”중건을 떠난 뒤에도 돈이 들어갈 곳은 많기에,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아끼는 게 맞았다.“자꾸 신석현 이름 석 자로 부르지 마. 너무 거리 두는 것 같잖아. 그냥 석현이라고 불러.”차는 오래 달리지 않아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아파트 단지 앞에 멈췄다.이정을 집까지 바래다준 석현은 위장약과 숙취해소제를 사다 준 뒤, 다음 날 퇴근 후 병원에서 박수련의 치료 문제를 함께 상의하기로 약속했다.석현이 떠난 뒤, 이정은 혼자 창가에 서서 바쁘게 오가는 차들을 내려다봤다.그 순간, 마음이 텅 빈 듯 멍해졌다.지난 몇 년 동안 이정은 늘 중건의 곁에 있었다.일도, 생활도 거의 모두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갔다.이제 중건을 떠나기로 결심하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면서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모를 것 같았다.그렇게 멍하니 있을 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중건 전용의 벨 소리라서 이정은 받지 않기로 했다. 그저 모르는 전화처럼 두고 저절로 끊기기를 기다렸다.중건의 성격상, 한 번 전화를 안 받으면 두 번째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지만 오늘은 달랐다.전화가 연달아 걸려오자, 화면에 뜬이름을 바라보던 이정은 핸드폰을 꽉 쥔 채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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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다음 날, 이정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재무팀으로 불려 갔다.“하 비서님, 축하해요.”팀장 정지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정을 향해 윙크하자, 여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무슨 축하해요?”“에이, 모르는 척은요. 오늘 아침에 대표님이 직접 오셔서 말씀하셨어요. 하 비서님 월급 50퍼센트 인상하라고요.”지현은 부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이 월급을 올려줬다고?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예전엔 다들 하 비서님이랑 대표님이 커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연 씨가 들어오면서 끝인가 싶었거든요.”“그런데 이걸 보니까, 대표님은 아직 하 비서님을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네요.”‘신경 쓴다고?’이정은 속으로 냉소했다.‘아마도 이건 이나연을 대신한 보상이겠지.’“말씀 고마워요, 팀장님.”이정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아 간단히 인사만 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그렇게 막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에 알림이 떴다.이체 알림이었는데 금액은 3천만 원이었다.중건이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이정이 파티 끝까지 남아 있지 않았음에도, 약속한 돈은 그대로 들어와 있었다.이체 알림과 함께 메시지도 도착해 있었다.[출장 가니까 일 생기면 내가 돌아온 뒤에 이야기해.]이정은 그 메시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따로 답장은 하지 않고 화면을 껐다.“대표님 출장 가셨어요?”이정이 옆자리 동료에게 물었다.“네, 나연 씨랑 같이요. 최소 닷새에서 엿새는 걸린다던데요?”이에 긴 한숨을 내쉰 이정은 출장이라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되었다.그동안 마음을 정리하고 미래를 준비할 시간이 생긴 셈이었다.“아, 진짜 나연 씨 부러워요.”동료가 무심코 말을 이었다.“회사 들어오자마자 대표님이 직접 챙겨 주시고, 프로젝트도 길을 다 닦아주잖아요. 그냥 결과만 받아도 되는 구조예요.”“이번 출장 프로젝트도 나연 씨 인맥 넓히라고 일부러 만든 거래요.”한참을 떠들던 동료는 갑자기 이정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아, 죄송해요, 하 비서님. 제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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