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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재벌가의 이혼각서: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박성주 씨, 당신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요?”소찬미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휘감겼고 한 손은 유독 세게 쥐어졌다.그 그림은 국학 대가인 그녀의 할아버지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으로, 오직 손녀의 혼수로 남겨두기 위해 그려진 것이었다.액자가 너무 커서 이사할 때 잠시 두고 온 것이지, 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원희는 이전부터 은근슬쩍 박성주에게 말을 꺼냈었다. 요즘 시대극을 찍게 됐는데, 그 그림을 잠시 빌리고 싶다고.소찬미는 사랑에 자존심까지 내려놓을 만큼 어리석었어도 그 그림만큼은 끝내 내어주지 않았다.그런데 박성주는 바로 그걸 노리고 있었다는 듯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요구했다.고원희는 속으로 환희에 차올랐지만 겉으로는 양보하는 척 연기를 했다.“찬미야, 정말 그 그림이 그렇게 소중하면 내가 잠깐 빌리는 걸로 할게. 촬영 끝나면 꼭 돌려줄게.”박성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그림 한 점이잖아. 내일 바로 사람 보내서 촬영장으로 옮겨.”소찬미는 이를 꽉 깨물었다.“박성주 씨, 내 물건을 왜 당신 마음대로 인심 쓰듯 내줘요?”박성주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소찬미, 이성적으로 행동해.”“엄마, 이모가 그랬어요. 잘못했으면 책임져야 한다고요!”박우환이 딱딱하게 말했다.“그게 엄마 옷이니까 엄마가 책임지는 게 맞아요.”소찬미는 어이가 없다 못해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내가 놔둔 쥐약을 들개가 훔쳐 먹고 죽었으면 그것도 내가 책임져야 하니?”박우환은 말문이 막혔다.그 옷은 전에 엄마를 졸라서 쑥으로 향을 들인 것이었다. 그럼 그들이 쥐라는 말인가?그 순간, 박은심이 미쳐버린 새끼 짐승처럼 소찬미를 세게 밀쳤다.“엄마,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못 될 수가 있어요? 이모한테서 떨어져요! 우리한테도 가까이 오지 마요!”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몸이 많이 쇠약해진 소찬미는 그대로 몇 걸음이나 휘청거렸다.그때, 따뜻한 작은 손이 그녀를 붙잡았고 그제야 그녀는 몸을 가눌 수 있었다.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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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고원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옆에 있던 박은심과 박우환의 표정 역시 보기 좋지 않았다.“그만해.”박성주는 얼어붙은 얼굴로 소찬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소찬미,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나? 기어이 아이까지 부추겨서 네 편을 들게 하고 싶어?”소찬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 게 죄인가요, 아니면 남편이 불륜 상대를 데리고 부부 침실에 들어와 내 잠옷을 입혔을 때, 당장 뛰쳐나와 막지 않은 게 죄인가요?”박성주의 눈빛에 실망이 어려 있었다.“당신,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어? 말마다 사람을 몰아붙이고 있잖아.”소찬미는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사람을 몰아붙인다니, 박성주 눈에는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만약 오늘 알레르기 반응으로 쓰러진 게 그녀였다면 그는 과연 병문안 한 번이라도 왔을까?아니, 오지 않았을 것이다.지금 그녀가 이 꼴로 된 건 그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이제 정말 지쳤다.소찬미는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우리 이혼해요.”“꺄아악!”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끝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병원복 차림의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과일칼이 들려 있었다.“개같은 것들! 같이 죽어!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자고!”여자는 흉기를 휘두르며 사람들 쪽으로 돌진했다.아침이라 막 깨어난 환자와 보호자들이 복도에 가득했고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고원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성주 씨!”박성주는 반사적으로 고원희와 아이들을 제 뒤로 감쌌다.혼란 속에서, 소찬미는 누군가에게 떠밀려 미친 여자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밀려났다. 그녀는 풀썩 바닥에 넘어졌고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다.“성주 씨!”본능적으로 도움을 청했지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남편이 첫사랑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보호하는 모습이었다.소찬미의 고운 눈매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고 눈가도 새빨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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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그 말을 듣자 박성주의 미간이 풀렸다. 그는 곧장 소찬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옆에 있던 박은심이 갑자기 외쳤다.“아빠! 원희 이모가 쓰러졌어요!”박성주는 걸음을 멈추고 급히 고원희에게로 달려갔다.병원과 경찰 인력이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고 소란은 순식간에 수습되었다.“그 여자는 임신 9개월째에 남편이 자신의 절친과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됐대요. 게다가 큰딸까지 남편 편에 서서 그걸 숨겼다더군요. 그 충격으로 아이를 유산했고 그 이후로 정신 상태가 많이 불안정해졌다고 합니다. 오늘은 또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참...”소찬미는 그날 의식을 되찾은 뒤, 병원 관계자를 통해 사건의 경위를 들었다.그것은 그 여자를 완전히 무너뜨린 마지막 한 방이었다.소찬미는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그 사람을 용서할 권리는 없어요. 우선 다친 남자분의 뜻을 물어야죠.”“아, 그런데 그분은 이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먼저 소찬미 씨의 의사를 여쭙는 거예요.”예상치 못한 말에 소찬미는 침대 머리맡의 종이 한 장을 발견하고 잠시 멍해졌다.“우선 치료부터 받게 해주세요.”그녀를 구해준 남자는 이미 떠났지만 연락처 하나만은 남겨두었다.소찬미는 그 종이를 집어 들어 적힌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했다. 메시지 창을 여는 순간, 뜻밖에도 박성주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옷 일은 그냥 없던 거로 하자.]소찬미는 피식 웃은 후 그 메시지를 지워버렸다.그때부터 연예 뉴스 속보가 미친 듯이 뜨기 시작했다.[고원희, 박호 그룹 브랜드 모델 확정][박호 그룹 대표, 통 큰 투자로 고원희 직장 예능 첫 출연 성사][고원희 응급실행. 박성주, 심야에 명의 총동원]그중에는 박성주와의 인터뷰 영상도 포함돼 있었다.“원희에게 빚진 건 몇 배, 아니 몇백 배로 갚을 겁니다.”영상이 끝나자, 소찬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아까 그 사건 직후, 박성주는 현장에서 곧바로 고원희를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그녀가 상처라도 입을까 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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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비서는 저도 모르게 놀랐다.‘대표님이 정말로 사모님을 신경 쓰고 계신다고?’지금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며칠 전 병원에서 흉기 사건이 있었고, 그때 사모님이 거의 찔릴 뻔했다는 얘기를 들었다.설마 대표님이 그 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휴대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지켜봐. 밖에서 죽지 않게.”그제야 비서는 단번에 알아들었다.소찬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고, 또 그게 파파라치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박씨 가문이 곤란해진다는 뜻이었다.지금 박호 그룹은 해성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니 여자 하나 때문에 평판을 망칠 수는 없었다.비록 박성주와 소찬미가 비공개 결혼을 하긴 했지만 상류층 사회에서는 이런 문제에 유난히 민감했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경쟁사들이 물고 늘어질 게 분명했다.‘역시 대표님은 계산도 빠르셔.’이건 관심도 죄책감도 아닌 게 분명했다.그렇게 생각한 비서는 속으로 조용히 안도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자신이 고원희 쪽에 섰던 선택도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알겠습니다.”비서는 형식상 병원에 들러 소찬미의 전원 절차를 직접 밟을 생각이었다.사모님이 그동안 대표님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조금만 말 잘 얹으면 인심 하나쯤은 챙길 수 있을 터였다.“유 비서님, 성이 소 씨인 분이 당일 퀵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청강구에서 온 건데, 대표님께 전달해 드릴까요?”박성주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프런트에서 내선이 걸려왔다.“아니요. 바로 자료실에 보관하세요.”최근 박호 그룹이 해성으로 사업을 넓히자 작은 회사들이 여기저기서 협업 제안서를 보내오고 있었다.유 비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병원으로 향했다.그런데 병원에 도착해서야 소찬미가 어제 퇴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유 비서는 살짝 놀랐다.사모님은 원래 외출 하나도 대표님께 알리던 성격이었다. 그런데 왜 이번엔 퇴원한 것도 알리지 않은 걸까?하지만 이미 퇴원했다면 몸 상태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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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곳은 모든 디자이너들의 꿈이었다.소찬미는 지금도 그 초청장을 받아 들었을 때의 설렘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 단 하나뿐이던 유학 기회는 노설아가 날짜를 잘못 적어 넣는 바람에 탑승해야 할 항공편을 놓치고 말았다.그리고 다음 날, 노연정의 SNS에는 ‘로열 예술학교 유학 일상’이라는 글이 올라왔다.여기까지 오니, 더 이상 모를 것도 없었다.큰아버지네 가족은 거머리처럼 부모가 남긴 마지막 흔적까지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그녀의 학력도 포함돼 있었다.소찬미는 큰아버지 부부의 위선적인 만류를 외면한 채 그날 밤 바로 짐을 싸서 나왔다.이후 어렵게 경진대에 합격했다. 완전하진 않아도 자신의 꿈에 조금이나마 손을 뻗은 셈이었다.“야, 내가 말하고 있잖아. 귀먹었어?”회상에서 빠져나온 순간, 노연정이 거만한 얼굴로 길을 막아섰다.소찬미는 그녀를 굳이 좋게 대할 생각이 없어 그대로 지나치며 담담하게 말했다.“비켜.”노연정은 바로 뒤쫓아오며 빈정거렸다.“어머, 박씨 가문 사모님이 되셨다 이거야? 네 남편은 널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여배우랑 매일같이 실검 오르내리던데, 잘난 척은.”소찬미는 도발을 무시한 채 병실 앞에 멈춰 섰다.그제야 노연정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소찬미가 들고 있는 식기를 힐끗 보고 병실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저 안에는 그 사람뿐이었다.최근 박성주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때문에 위기감을 느끼고 저 사람에게 접근하려는 건가?노연정은 표정을 바꾸더니 또각또각 다가와 소찬미의 팔을 붙잡았다.“소찬미, 뒤로 서 대표님 정보 좀 알아냈다고 대충 음식이나 들고 와서 아양 떨면 네 남편한테 협찬이라도 끌어올 줄 알아?”소찬미가 반박하지 않자 노연정은 확신이 선 듯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꿈 깨. 미리 말해주는데 너처럼 침대부터 기어오르려는 여자는 옷 다 벗고 앞에 서 있어도 서 대표님은 눈길 한 번 안 줄 거야.”잠시 후, 소찬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노연정은 분을 참지 못하고 손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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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노연정의 손바닥은 허공을 갈랐다.그녀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서, 서 대표님? 왜 나오셨어요?”남자는 환자복 차림이었다.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회색 눈동자가 무심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병색이 있었지만 재벌 특유의 기세는 여전히 숨을 조이듯 압도적이었다.서경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그쪽은 누굽니까?”노연정은 재빨리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억지로 웃으며 설명했다.“아, 안녕하세요 서 대표님. 저는 노연정이라고 합니다. 디자인부에 새로 들어온 직원이에요. 대표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얘길 듣고 부서를 대표해서 문병을 왔는데 문 비서님이 대표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고 해서요.”그녀는 인맥을 동원해 서경수가 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른 아침부터 보양식까지 챙겨 찾아왔지만 비서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채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기다리다 지쳐 돌아가려던 찰나, 하필이면 소찬미와 마주친 것이다.‘젠장,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대표님이 나오는 거야!’서경수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반쯤 내리깔고 피곤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자고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문 앞에서 그렇게 떠들었습니까?”“아, 아니에요...”노연정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디자인부가 언제부터 그렇게 한가했지?”오늘 그는 안경도 쓰지 않았다. 높은 눈썹뼈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는데 밝은 빛 속에서 오히려 더 신비로워 보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걸 내려다보는 듯한 거리감 또한 실려 있었다.노연정은 그 눈빛에 넋을 잃었다. 위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한 걸음 더 다가가려 했다.“그게 아니라 대표님 몸이 걱정돼서요...”그 순간, 문 비서가 재빨리 나서 그녀를 막아섰다.“노연정 씨, 이만 돌아가시죠.”병실 문은 그대로 닫혔다.문이 닫히기 직전, 서경수의 손이 여전히 소찬미의 손목을 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노연정은 화가 나 새로 한 네일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주었다.문 비서는 문 앞을 지키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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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소찬미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문 비서는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화성이 지구랑 충돌이라도 했나? 아니면 블랙홀이 소행성으로 메워지기라도 한 건가?대표님이 그렇게 싫어하던 보양탕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마시다니!유능한 비서의 직업병이 발동하며 문 비서의 호기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서경수가 그를 힐끗 내려다봤다.“문 비서, 그렇게 한가해?”문 비서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갑자기 회사에 급하게 결재해야 할 서류가 하나 떠올라서요. 대표님, 먼저 가보겠습니다.”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끝낸 뒤, 그는 순식간에 현장을 벗어났다.어르신이 대표님에게 얼마나 많은 혼처를 물색해 왔는데, 유부녀 타입만은 완전히 놓치셨구나!부처처럼 살아오던 대표님이 한 번 불붙으니까 이렇게 파격적으로 변한다고?문 비서는 자신의 5.0 시력으로 똑똑히 봤다. 방금 소찬미가 탕을 먹일 때 대표님의 시선은 거의 달라붙다시피 했다는 걸.아, 그래서 예전에 어깨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도 집에서 버텼던 사람이 이번엔 굳이 입원까지 하고 의사에게 그렇게 과하게 붕대를 감게 했구나!그 상처는 사실 입원 첫날 밤에 이미 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퇴원하지 않고 있다니.이 사실을 어르신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문 비서는 괜히 기대감이 생겼다.재벌가의 사랑이란 역시 소설보다 더 막장이었다....소찬미는 서경수에게 한 숟갈, 한 숟갈 정성껏 탕을 먹였다.마지막 숟갈까지 비운 뒤, 남자가 어딘가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이게 다입니까?”소찬미는 잠시 손을 멈췄다.이 보양탕은 약재가 들어가 일반적인 국물처럼 고소하거나 부드러운 맛은 아니었다. 오히려 은근히 쓴맛이 도는 편이었다.예전에 아이들에게 끓여준 적이 있었는데 두 아이 모두 그 자리에서 그릇을 내려치며 마시던 탕을 그대로 토해냈을 정도였다.“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 다음엔 조금 더 넉넉하게 끓여 올게요.”소찬미는 차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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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박우환은 통화가 끊긴 휴대전화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순간적인 혼란이 스쳤다.“엄마가 내 전화를 끊었어?”그의 기억 속에서 엄마가 먼저 전화를 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럴 리가.”박은심도 화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엄마가 그럴 리 없어. 손이 미끄러졌겠지. 이모는 더는 못 기다리니까 오빠, 얼른 다시 걸어 봐.”박우환은 반신반의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엔 연결조차 되지 않고 곧바로 통화 중 알림이 떴다.그 순간, 박우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엄마가 일부러 그런 거야. 정말 유치해! 어른이 돼서 이런 아이 같은 짓을 하다니...’이모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것도 원래는 엄마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모가 우유를 그의 몸에 쏟지 않았다면 어쩌면 자신도 알레르기가 올라왔을지 모른다.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던 박우환은 휴대폰을 움켜쥔 채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오빠!”박은심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이모 아직 밥도 못 먹었어!”“내가 알아서 할게!”한편, 소찬미는 병원을 나선 뒤 아들이 걸어온 전화를 끊었다.곧이어 임세영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소찬미는 메시지를 확인한 뒤, 바로 전화를 걸었다.“그 고객이 꽤 까다로워. 회사 디자이너들이 낸 시안만 해도 백 세트는 넘는데, 아직도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대.”전화 너머에서 임세영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난감해 보였다.“찬미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한번만 맡아줄 수 있을까?”소찬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어떤 방향인데요?”즉각 거절하지 않는 걸 듣자 임세영은 직감적으로 가능성을 느꼈다.“영기 회복을 테마로 한 활력 콘셉트의 스포츠웨어 라인이야. 세부 조건은 조금 있다가 메일로 보낼게. 네가 평면 디자인을 오래 안 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 일단 보고 결정해도 돼. 네가 하겠다고 하면 그때 내가 고객한테 이야기할게.”소찬미는 조용히 들은 뒤 말했다.“좋아요. 해볼게요.”“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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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서송희의 솔직한 생각을 들은 소찬미는 웃으며 말했다.“일리가 있네.”그러자 서송희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와! 너무 좋아! 예쁜 이모가 드디어 이혼하네.’...박우환은 소찬미에게 전화를 몇 통 더 걸었으나 역시 모두 거절당했다.‘휴대폰을 갖게 된 이후로 엄마가 전화받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여러 번이나.’이에 마음이 조금 상했던 박우환은 병원에서 나왔다가 소찬미가 그 꼴 보기 싫은 여자아이를 안고 다정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예전에 엄마는 오직 나한테만 저렇게 웃었는데.’박우환이 주먹을 불끈 쥔 채 일부러 그들 앞을 지나가는 척하자, 그를 발견한 소찬미가 무의식적으로 불렀다.“우환아!”하지만 박우환은 콧방귀를 뀌더니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가슴을 당당히 편 채 앞으로 걸어갔다.‘예전엔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엄마는 온갖 방법으로 나를 달래곤 했었어. 그러니 이번에도 엄마가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 상대해 주지 않을 거야.’그가 곁눈질하여 슬쩍 쳐다보니 소찬미의 손에는 음식함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평소 국을 담던 보온병이 들어 있었다.이를 본 박우환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엄마가 고 이모에게 한 달 내내 보양국을 끓여주겠다고 약속해야만 용서해 줄 것이야.’하지만 소찬미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아서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았다.소찬미는 서송희를 한 번 안아주고 나서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한 뒤, 음식함을 든 채 차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엄마! 가면 안 돼요!”박우환이 참지 못하고 달려와 소찬미의 옷자락을 잡자, 소찬미는 미소를 거두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왜 그래?”“고 이모가 엄마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있는데 왜 이렇게 이기적이세요?”“그녀가 날 짝사랑이라도 한다더냐?”이에 박우환은 얼굴이 빨개진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이모가 엄마를 짝사랑할 리 없으니 자기도취에 좀 그만 빠지고 당장 고 이모에게 국 가져다주며 사과하세요. 고 이모는 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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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소찬미의 속셈을 꿰뚫어 본 것처럼 박우환은 씩씩거리며 토라진 듯 등을 돌렸다.“아빠가 엄마를 고 이모만큼 사랑하지 않을 거니까 소란 피우지 말고 그냥 포기하세요. 엄마가 좀 불쌍하긴 하지만 만약 잔소리를 줄이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다면 아빠의 태도가 좋아질 거예요. 그러니 어서 제게 화낸 것에 대해 사과하세요.”말을 마친 박우환이 한참 기다렸으나 소찬미의 사과는 없었다.그래서 몸을 돌려 보니 소찬미는 이미 문 앞에 주차된 차를 타고 출발한 상태였다.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박우환은 차가 떠난 방향을 향해 분풀이했다.“엄마가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저와 은심, 그리고 아빠는 영원히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박우환의 넋이 나간 채 병실로 돌아오자, 박은심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오빠, 엄마가 끓인 국 가져오러 간 거 아니었어? 그런데 국은 왜 안 보여? 고 이모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내가 반드시 가져올 테니 걱정하지 마!”박우환은 큰 소리로 말했다.하지만 그날 밤, 그는 갑자기 고열이 났다.“엄마... 엄마, 국...”중얼거리는 박우환의 옆에서 박성주가 눈에 피로가 가득한 채 앉아 있었다.“박 대표님, 사모님과는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아요.”비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사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소동을 피운 게 이번이 두 번째인 것 같은데.’박성주가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내더니 드물게 화를 냈다.“삐졌다고 자식도 무정하게 대하다니. 소찬미, 내가 너를 너무 얕잡아 봤어.”아파트.소찬미는 임세영이 보내온 고객 요구 사항을 저장하고 주의 사항까지 확인한 뒤, 디자인을 기획하려고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녀는 디자인을 기획할 때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하는 습관이 있었다.과거 표창장을 받은 첫 작품도 7일 동안 밤낮을 작업실에 머물며 완성한 것이었으니.외부의 방해가 있으면 생각이 흐트러질 수도 있기에 일단 일을 시작하면 그녀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다.번뜩이는 영감을 붙잡아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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