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소찬미는 누렇게 변색한 혼전 계약서를 낚아채더니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결혼하기 전에는 이 인간에 대한 기대를 잔뜩 품고 있었지. 비록 늘 나를 차갑게 대해도 언젠가는 사랑해 줄 것으로 믿었어.’당시 철이 없었던 그녀는 인터넷에 어떻게 하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냐고 네티즌들에게 묻기도 했었다.그래서 네티즌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혼전 계약서를 작성했으나 실은 커플 수칙이나 다름없었다.제1조, 남편은 매일 아내와 세 번 포옹한다.제2조, 남편은 외출할 때 아내의 이마에 키스한다.제3조, 남편은 매일 진심으로 아내를 한 번 칭찬한다.제4조, 일주일에 네 번 성생활을 한다....이를 본 소찬미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라 고개를 돌렸다.‘이 인간이 미쳤네!’“이혼합의서에 서명하다 말고 왜 갑자기 혼전 계약서를 꺼낸 거예요?”소찬미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내가 이 계약서를 내밀었을 때, 이 인간은 그저 한 번 쓱 훑어본 뒤에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어. 그러고는 혐오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쓰레기를 다시는 자기 앞에 들이밀지 말라고 으름장까지 놓았지.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이 왜 금고 안에 있는 거야? 필체는 내 것이 맞아.’박성주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소찬미의 옆으로 다가갔다.“이게 당신이 줄곧 원하던 게 아니었어? 당신 요구를 어느 정도는 들어줄 테니 이제 그만해. 아이들이나 가족, 심지어 다른 사람들까지 영향받잖아. 난 더 이상 당신과 이 유치한 게임을 할 생각 없으니 이 혼전 계약서에 서명하고 이쯤에서 끝내. 신혼방으로 이사 온다면 이대로 이행하겠다고 약속할게.”박성주가 그윽한 눈빛으로 소찬미를 바라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자, 소찬미는 소름이 끼쳐 그의 손을 뿌리쳤다.“성주 씨의 눈에는 제가 지금 장난하는 것으로 보여요?”그러자 박성주가 소찬미를 내려다보며 답했다.“그럼 아니야?”“성주 씨가 이렇게 비열한 인간인 줄 몰랐어요!”‘이혼합의서로 나를 낚은 다음
서경수가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소찬미가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박성주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찬미야, 할 얘기가 있으니 신혼집으로 와.][질질 끈다면 이혼합의서를 안 받아줄 거야.]이를 본 소찬미가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자, 손톱이 하얗게 변했다.‘이혼합의서를 받아서 다행이야.’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서경수와 서송희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미안한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정말로 미안해요.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니 다음에 살게요.”서송희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예쁜 이모, 그렇게 중요한 일이에요?”“응. 아주 중요해.”소찬미는 서송희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은 후, 서경수를 바라보며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먼저 갈게요, 서 대표님. 흉터 제거 수술은 제가 최대한 빨리 방법을 찾아볼게요.”서경수는 고개를 숙인 채 안경 너머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며 문서를 집어 들어 보기 시작하더니 소찬미가 떠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이를 보던 문 비서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큰일 났어. 오늘 무조건 야근해야 할 것 같아.’...소찬미는 곧바로 보산 별장으로 돌아왔다.“사모님.”그녀가 돌아오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퍼즐과 블록을 정리하고 있던 집사와 가정부들이 인사를 건넸다.예전에 소찬미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스스로 치우게 했기에 이리 난장판이 된 적이 없었다.그래서 이들은 소찬미가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소찬미가 두 아이를 총애한다고는 하나 고원희처럼 응석받이로 키우지는 않았던 것.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두 아이와 고원희가 보이지 않아서 2층으로 올라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서재로 들어간 소찬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혼합의서는 다 보셨나요? 의문이 드는 점은 있던가요?”“왜 이렇게 급해?”박성주는 서명하다 말고 물었다.“얘기 좀 할 수 없을까? 대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난 모르겠어.”
서경수가 손을 움켜쥐며 흉터를 가린 후에 낮은 목소리로 달래듯 말하자, 소찬미의 눈가가 더 붉어졌다.“미안해요... 제가 책임질게요.”문 비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도련님이 십수 년 전의 흉터로 찬미 씨를 속이다니. 쯧쯧. 점점 날강도로 변해가고 있어. 방금 강제로 끌려가 발치 당한 꼬마 아가씨에게도 도련님의 이 모습을 보였더라면 좋았을 텐데.’“어떻게요?”서경수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손으로 소찬미의 눈가에 맺힌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을 닦아 주려 했다.하지만 소찬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옷자락으로 눈을 닦았다.“돈을 모아 서 대표님을 위해 가장 좋은 성형외과 의사를 찾아드릴게요.”“???”“푸...”직업의식이 투철한 문 비서가 참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소찬미는 눈앞 남자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진지하게 설명했다.“요즘 미용 수술이 매우 발달했거든요. 해성에도 손 흉터 제거 수술하는 좋은 의사들이 있다고 들었으니 그분들을 모셔 올 게요.”서경수는 겉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찬미 씨는 돈이 많군요. 그분들을 모시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이리 급하게 나와 선을 긋겠다는 건가? 야박한 사람 같으니라고. 내가 구해준 것을 아주 깨끗이 잊어버렸어.’“그렇게 많지는 않아요...”소찬미는 그의 빈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열심히 돈 벌어 대표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예요.”‘곧 성주와 이혼하게 되나 박씨 가문의 처사를 본다면 그의 재산을 내가 한 푼도 못 받을지도 몰라. 그러니 돈을 빨리 벌어야 해. 이런 흉터는 수술이 늦을수록 회복이 더 어려워.’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서경수도 진지한 척했다.“그때까지 기다릴게요.”“다만 제 남편의 돈으로 의사를 모시지는 않을 거예요.”서경수가 오해할까 봐 소찬미는 한마디 덧붙였다.“알았어요.”서경수는 국그릇을 건네받은 후, 숟가락으로 국을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박성주의 돈을 쓰지 않겠다는 걸 보니 그에게 완전히 실망한 모양이
이런 일이 셀 수도 없이 많았으니.뺨을 맞은 얼굴의 통증은 여전히 여운이 남아 있었다.서경수는 더 이상 웃지 않고 소찬미 얼굴의 상처를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어간 거예요?”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문 비서가 이 장면을 보더니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세상에! 도련님이 그렇게 급히 달려왔는데도 막지 못했나 보군.’“왜 반격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맞기만 한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찬미 씨가 무슨 마이너한 취향이라도 있는 줄 알겠어요.”그 말에 코가 시큰거린 소찬미가 입술을 깨물었다.김영화에게 뺨을 맞았을 때, 박성주가 김영화의 편을 들 때,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고원희를 쫓아갔을 때도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으나 서경수의 이 말 한마디에 죄책감이 느껴졌다.‘이 남자는 아마도 나를 골칫거리로 생각한 모양이야. 하긴 만날 때마다 내 뒷수습만 했으니.’소찬미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려고 할 때 눈가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서 대표님.”그녀의 뜨거워진 눈가를 본 서경수는 마음속으로 자책했다.‘서경수, 왜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 어쩌면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르잖아.’문 비서는 속이 타들어 갔다.‘도련님, 이 기회를 놓치시면 안 돼요. 달래고 위로해 주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서경수는 감정을 가다듬은 후, 허리를 곧게 폈다.그런 다음 한참 후에야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더 할 말이 없어요?”문 비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뭐야! 이러면 진짜로 끝나는데.’그 순간 서경수가 문 비서를 힐끗 쳐다보며 눈짓했다.그러자 문 비서는 즉시 말을 꺼냈다.“제가 찬미 씨에게 약을 가져다드릴게요.”그럴 필요 없다고 소찬미가 말하려 하는데 문 비서는 이미 자리를 떴다.서경수는 몸을 돌려 살짝 열려있던 병실 문을 밀더니 피식 웃었다.‘역시 잠겨 있지 않았군. 아마도 너무 예의를 차리느라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야.’“쓰레기
박성주는 표정이 굳어진 채 눈을 가늘게 떴다.‘엄마한테 뺨을 맞았을 때조차도 찬미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그가 소찬미의 품에 있던 음식함을 빼앗으려 하자, 소찬미는 음식함을 죽어라 껴안았다.그러자 뺨을 맞아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차라리 개를 주면 줬지, 이 인간들에게는 절대 안 줘!’그렇게 실랑이하던 중에 박성주가 짜증을 냈다.“이 손 놓지 못할까!”소찬미가 입술을 깨물며 버티려 했으나 남자의 힘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그녀가 음식함을 빼앗기려던 찰나, 옥처럼 아름다운 손이 갑자기 나타나 그 음식함을 잡았다.그와 동시에 낮고 느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제 구역에서 소란 좀 그만 피우시면 안 되겠습니까?”그 말에 실랑이는 바로 끝났다.소찬미는 거의 엎지를 뻔한 음식함을 꼭 끌어안은 채 고마운 눈빛으로 나타난 이를 바라보았다.체구가 큰 서경수가 환자복이 아닌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어서 엄청남 압도감이 느껴졌다.게다가 폭풍우가 휘몰아치기 직전 같은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소찬미도 고개를 숙인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서경수의 시선을 피했다.서경수는 시선을 소찬미의 얼굴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스치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한편, 서경수가 음식함을 잡은 순간 박성주는 손을 빼며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익숙한 얼굴인데? 지난번에 찬미를 구해줬던 사람이 아니던가?’박성주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느껴졌다.고원희는 세 사람을 살피더니 박성주의 팔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혹 서 대표님 맞으시죠? 소란 피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즉시 갈게요.”박성주는 무언가 알아차린 듯 명함을 내밀며 말을 꺼냈다.“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서 대표님.”서씨 가문에는 아들이 2명 있었다.실질적인 권력자는 차분한 성격의 장남 서봉길로, 이미 결혼해서 딸을 하나 두고 있었다.차남 서경수는 국내보다는 주로 해외에서 머물다 보니 박성주는 당연히
소찬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쏘아보았다.“제가 마지막으로 어머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제가 그리도 싫다면 어머님의 아들더러 하루빨리 이혼에 동의하라고 하세요.”소찬미의 시선에 섬뜩함을 느껴 김영화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이 계집애가 며칠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변한 거지?’“아, 맞다. 우환의 열이 내려가지 않는 이유는 어머님의 아들과 손자에게 물어보세요.”비록 얼굴에 커다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으나 소찬미는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치켜들며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박성주와 박우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박성주가 차가운 눈빛으로 소찬미를 쳐다보며 물었다.“오늘따라 왜 말이 이리 많은 거야?”그는 내막을 알고 있으니 체면 때문에 박씨 가문의 후계자인 박우환에게 이를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박성주의 감추려는 의도를 눈치챈 김영화는 가슴을 부여잡더니 울부짖으며 말머리를 돌렸다.“성주야, 네가 아내로 맞이한 이년이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드니 당장 이혼해!”박성주는 통곡하는 김영화를 부축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소찬미를 쳐다보았다.“찬미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사태를 서둘러 수습하고 싶었던 그가 이어서 말했다.“엄마가 널 때린 건 잘못이나 그래도 윗사람인데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네가 평소에 보였던 양보와 배려는 다 어디 갔어? 꼭 이렇게 따져야 직성이 풀리는가 말이야!”이에 대해 소찬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자신과 김영화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마다 박성주는 늘 김영화의 편에 섰기에.‘어머님이 내게 손찌검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그는 양쪽이 다 잘못했다는 식으로 넘어갔지. 아니야, 오히려 나더러 어머님께 사과하라며 잘못을 내게 돌렸어.’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박성주의 말이 이어졌다.“엄마한테 사과하고 이 일을 여기서 끝내자.”하지만 소찬미는 그저 억울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내가 지난 6년 동안 눈 앞의 남자를 위해 얼마나 많이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