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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계연수는 노부인이 자신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이 집안에 노부인이 계시니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이토록 순박하고 진심이 담긴 말을 하는 사람은 계연수밖에 없었다.사씨 노부인은 사람을 보는 자신의 안목을 의심치 않았다. 계연수는 노인이 생각한 대로 솔직하고 입 발린 말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사람을 대할 때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대했다.‘이 아이도 한때는 계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였는데…’계씨 가문이 한창 잘나갈 때, 계 상서는 어디를 가든 딸을 데리고 다녔고 계연수 역시 경성에서는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계 상서는 평생 계연수의 모친 한 사람만을 곁에 두었으니 뒷방 여인들의 더러운 수작질을 계연수는 보지 않고 자랐을 것이다.이명유는 이기적이고 사리사욕이 강한 사람으로, 겉으로는 완벽할지 몰라도 그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사씨 노부인은 늘 이명유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느낄지언정, 호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노인은 계연수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너무 마음 쓸 것 없어.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옥현이와 둘이 잘 지내거라. 앞으로는 모든 것이 순탄할 게야.”계연수는 움찔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노부인이 돌아간 후, 계연수는 다시 침상 위에 엎드렸다.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하얀 뺨을 반쯤 가리고 몸에 덮고 있던 비단 이불도 허리춤으로 내려가 요염하고 잘록한 허리를 드러냈다.용춘은 재빨리 다가와 이불을 잡아당겨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고 조심스레 물었다.“부인, 왜 그러시나요?”계연수는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자신을 향한 노부인의 자애로움 때문에 죄책감과 속상한 마음만 깊어졌다.이 집안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죄송한 사람이 사씨 노부인이었다.그녀는 손목에 찬 옥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이는 당년에 그녀가 사씨 가문에 시집온 지 다음 날, 노부인이 그녀에게 선물한 팔찌였다. 노인은 많은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계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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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영향관, 이명유는 흰 소복을 입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한참 울었는지 빨갛게 부은 눈과 선명한 눈물자국까지… 누가 봐도 측은지심을 느낄만큼, 안쓰러운 모습이었다.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사옥현을 보자 눈가에 기쁨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오라버니는 역시 내게 달려와줄 줄 알았어.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까….’그녀에게 있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아껴주는 사람이 바로 사옥현이었다.힘들게 그와 계연수가 이혼 얘기가 나오기까지 버텨왔는데 사옥현이 이혼을 거절했다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북받쳤다.원래는 계연수가 결백과 명성을 잃게 만들어 사옥현이 완전히 그녀에게 혐오를 느끼게 할 생각이었는데, 상대에게 역으로 당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나마 다행인 건, 서역 점주가 불임약에 관한 얘기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안 그랬으면 그녀는 진작에 이 집에서 쫓겨나고 이모인 임씨도 절대 그녀를 두둔해 주지 않을 것이다.사실 이명유도 사옥현에게 그런 약을 먹이고 싶지 않았다. 다만 평소에 계연수와 접촉이 너무 적고 그녀는 먹는 음식을 매우 조심해서 다뤘기에 몇 번을 시도했지만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옥현에게 약을 먹인 거였다.3년을 기다려서 계연수가 회임을 못하면 당연히 시집에서 쫓겨나겠거니 생각했는데 노부인과 대감 나으리가 이렇게까지 계연수를 두둔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녀는 생각할수록 서러워서 사옥현이 들어오자마자 울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이렇게 올곧고 준수한 오라버니는 내 것이어야만 해!’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다.사옥현은 품에 안겨 흐느끼는 창백한 얼굴의 이명유를 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다급히 물었다.“시녀에게 들었는데 쓰러졌다면서?”이명유는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그 일은 제가 지시한 게 아니에요. 상희가 제 처지가 처량해서 스스로 벌인 짓이에요.”“저는 그 아이가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오라버니, 저를 믿어주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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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사옥현이 들어온 순간, 방 안에 있던 시종들은 모두 조용히 물러갔기에 이명유는 더 이상 그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그녀는 계연수가 혼서를 들고 찾아오기 전까지는 사옥현이 분명히 자신을 연모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혼례를 올린 후에도 그는 그녀에게 더 애정을 주었던 것이다.사옥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울고 있는 이명유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명유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이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기분 나쁜 티를 낼 수 없었다.사실 외모로 따지면 계연수가 훨씬 청순가련하고 예뻤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부드러운 머리카락, 빨간 입술과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가슴이 뛸만큼 어여쁘고 안쓰러웠다.그러나 계연수는 거의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생각해 보면 사옥현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예전의 계연수는 그에게 순종적이었지만 이명유처럼 이렇게 그에게 다가와서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그는 계연수라는 여인은 상심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라 느껴서 그녀에게 더 소홀했던 것도 있었다.그러나 이명유는 달랐다.이명유는 청순한 외모를 가졌지만 키는 계연수보다 조금 더 컸다. 그러나 그녀는 늘 속상한 일이 있으면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다가와 하소연했다.그래서 그는 이명유를 볼 때마다 보호욕구가 치솟았다.아마 그는 무의식적으로 이명유는 계연수보다 더 연약한 존재로 인식해서 그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사옥현은 이명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처음으로 정색해서 그녀에게 말했다.“명유야, 연수는 내 부인이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화리하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화리하면 그 사람은 갈 곳도 없고 난 그런 그 사람을 내칠 수 없어. 내가 널 걱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야.”이명유는 구슬픈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그럼 저는요?”사옥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명유야, 너는 이제 이 저택에 더는 머무를 수 없어. 넌 큰 잘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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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비록 마중을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연일 억압되어 갑갑하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그는 계연수가 생각을 정리하고 처소로 돌아온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역시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녀는 비록 토라졌어도 오래 가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사옥현은 괜히 걱정스러운 어투로 어멈에게 물었다.“작은 마님은 좀 괜찮아졌느냐?”어멈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예, 작은 마님께서는 탕약을 드시고 오후에 깊게 잠드셨더니 이제는 통증이 많이 가셨는지 별말씀이 없으셨습니다.”사옥현은 안심하고 약간은 조급한 걸음걸이로 안방을 향해 걸어갔다.안방에 들어서니 침상 위에 기대어 서책을 읽고 있는 계연수가 보였다.그녀는 들어온 사옥현을 보자 손에 들었던 책을 내려놓았다.오늘 안방으로 돌아온 것은 노부인을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문진을 오는 의원도 있는데 부부가 각방을 쓴다는 사실을 들켜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그녀는 사옥현이 오늘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할지도 예상이 갔다.사옥현은 계연수를 본 순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병풍 옆에 서서 약향기가 진한 이 방안에서 조용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기력한 느낌이 들면서 뭔가가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이런 느낌은 언제면 끝이 날까.그는 앞으로 다가가 기억 속의 온화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사옥현은 길게 숨을 내뱉고 최대한 감정을 추스른 후에,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계연수는 예전처럼 먼저 그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그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그녀는 마치 그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전에는 당연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모든 게 바뀐 것 같았다.그는 침상 앞으로 다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직도 아프냐?”계연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베개에 기대고 앉아 시선을 땅바닥에 두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사옥현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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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계연수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보자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치밀었다.결국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입을 막으며 헛구역질을 했다.사옥현의 말은 그녀의 예상과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아무런 주저 없이 이명유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이다.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그녀가 이명유 때문에 침상에 누워 앓고 있는데도 그는 결국 이명유를 먼저 걱정했다.이제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괜찮았고 그녀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와의 접촉은 참을 수 없었다.다른 여인을 안았던 손으로 자신을 어루만지는 이 손이, 한때는 그녀에게 따뜻함과 기대를 주었던 손이 지금은 그저 더럽고 역겹게 느껴졌다.사옥현은 힘겹게 입을 틀어막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과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이 촛불 아래에서 더 선명하게 보였다.조금 전까지 반갑게 느껴졌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그와 계연수는 벌써 두 달째 동침하지 않고 있었다.계연수는 싸늘해진 그의 눈빛을 보고는 몸을 일으키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괜한 생각 하지 마십시오, 나으리. 중독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증상입니다.”사옥현은 또 그녀를 오해할 뻔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연수야, 네가 할머니를 찾아가서 사정한다면 내 명유를 설득해서 네게 사과하게 하겠다.”계연수는 바로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온순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께 가서 이명유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사정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사옥현은 청초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내려 했다.여전히 온순하고 순종적인 모습에 그가 원하던 말을 해주고 있었다.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할머니께 찾아가서 명유에 대한 처벌만 철회하게 한다면 무슨 조건이든 들어주겠다.”어차피 계연수가 원할만 한 거라면 그가 처소로 자주 돌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는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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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화리뿐입니다. 반달 전부터 나으리께 제 뜻을 말씀드렸는데 어찌 제게 이기적이다 하시는 겁니까?”“이명유가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제 조건을 들어주십시오. 사씨 가문의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것입니다.”사옥현은 벌떡 일어나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실망과 충격에 빠진 눈으로 계연수를 한참을 노려보았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왜 꼭 화리를 하겠다는 거지?”계연수는 진지한 눈빛으로 사옥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예전부터 화리를 바라왔습니다. 오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게 아니에요.”사옥현은 또 한걸음 뒷걸음질쳤다.계연수는 계속해서 말했다.“나으리, 저와 시간을 끄는 것은 이명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나으리도 그 애가 병약해서 처벌을 버티기 힘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저는 그 애의 사죄가 필요없습니다. 제가 이 집을 떠나면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 애의 몸상태로 처벌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으리께서 그 애를 안쓰럽게 여기는 것도 이해하고요.”“하지만 저도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잘 고민하고 제게 답을 주세요.”사옥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계연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럴수록 가슴이 옥죄어드는 것 같았다.단지 이명유를 집에서 내쫓지 말라고 할머니에게 사정해 달라고 한 것뿐인데 이런 식으로 자신을 협박할 줄이야.그는 그녀가 왜 굳이 이혼하자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이명유를 위해 할머니를 설득하기 싫다는 뜻이 아닐까?예전에 늘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계연수를 떠올리면 그녀가 지금 한 말들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저 잠깐 바라만 봐줘도 기쁨의 미소를 짓던 그녀였으니, 지금 이러는 것도 토라진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일 것이다.‘넌 나를 못 떠나. 네가 어떻게 우리 집안을 떠나겠어.’그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붓을 가져오라 명했다.잔뜩 성이 난 그의 목소리에 밖에 있던 어멈들마저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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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원망, 상심, 슬픔, 후회와 걱정, 그녀의 얼굴에서는 그런 감정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늘 순수하고 깨끗하던 눈망울에 예전과는 다른 색채가 담겨 있었지만 그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자신이 원하던 감정은 전혀 보지 못했다.그제서야 그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계연수가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져 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생각과 결정을 제멋대로 조종할 수 없고 그녀는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그녀는 그와의 화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사옥현은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네다섯 걸음만 걸으면 닿는 거리인데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거웠다.계연수는 조용히 옆에 서서 사옥현이 화리서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기만을 기다렸다.책상 앞에 마주선 사옥현은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려 계연수를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정녕 네가 원하는 것이냐? 여기에 서명하면 나중에 네가 돌아오고 싶다고 해도 난 절대 널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계연수는 멈칫하며 고개를 들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다.“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으리.”붓대를 쥔 사옥현의 손이 멈칫 떨리더니 먹물이 화리서에 떨어졌다.그는 고개를 숙여 어지럽혀진 화리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붓대를 던지더니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화리서가 더러워졌으니 서명은 다음에 하겠다.”말을 마친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그는 병풍을 지나 문을 열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밖으로 나갔다.망토도 두르지 않은 상태라 찬바람이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그는 비틀거리며 오솔길을 지나 호숫가로 갔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그는 이제 와서야 계연수가 진심으로 자신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계연수는 진심으로 화리를 원하고 있었다.따라온 시종이 망토를 그의 어깨에 걸쳐주며 다급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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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사옥현이 떠난 후, 방에 남은 계연수는 멍하니 더럽혀진 화리서를 바라보았다.약간의 실망과 아쉬움으로 가슴이 갑갑했다.그 뒤로 이틀이 지나도록 계연수는 사옥현을 보지 못했다.3일째가 되었을 때, 계연수는 옷을 차려입고 시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아침부터 임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계연수를 보고 뭔가를 말하려다가 어색하게 입을 다문 적도 몇 번 있었다.그러더니 뒤늦게야 계연수도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건성으로 물었다.“몸은 좀 괜찮아졌느냐?”계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온순하게 답했다.“예, 많이 나아졌습니다.”임씨는 담담한 시선으로 계연수를 훑어보고는 갑자기 말투를 바꿔서 물었다.“이제 기쁘냐? 속이 시원하니?”계연수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집안에 시집온 이후로 그녀는 줄곧 최선을 다해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침 문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드렸다. 비록 집안 관리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한가히 보낸 적은 없었다. 그녀는 사옥현의 처소를 완벽하게 관리했고 3년동안 집안의 다른 친척들과 큰 충돌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물론 이런 것들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녀가 집안을 위해 헌신한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 임씨에게서 마치 자신이 이명유를 궁지로 몰아넣은 듯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니 억울함을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임씨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이게 기분 좋거나 속 시원한 일이라고 여긴 적도 없고요.”“만약 어머니께서 이 일이 속 시원하고 좋은 일이라 생각되신다면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무서울 뿐이에요.”임씨는 멍하니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냉소를 지었다.“이제 시어미인 내게도 예의를 안 차리는구나. 노부인이 너를 두둔해주니 거리낄 게 없다는 거니?”계연수는 고개를 저었다.“어머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어머니의 질문에 답을 해드렸을 뿐입니다. 제가 이 일로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유라도 알아야 어머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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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계연수는 노부인이 겨울에 들어 두통을 자주 호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토끼털로 손수 만든 귀마개를 가지고 찾아왔다.그녀를 본 사씨 노부인은 반가워하며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노인은 자세히 그녀를 훑어보았다. 연녹색 바탕에 탐스러운 모란꽃을 수놓은 비단치마에 단아한 자태로 앉아 있는 모습은 노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노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안색이 좋아 보이는 걸 보니 나도 안심이구나. 어제 심씨 저택에 초대장을 보냈다. 네가 다 나으면 같이 찾아뵙고 감사인사를 하기로 하였는데 그 댁의 노부인은 설명절 때문에 바쁘다고 하더구나.”계연수는 심씨 집안 이야기가 나오자 긴장했다가 안 가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심서준은 치밀한 사람이었다.계연수는 미소를 머금고 귀마개를 노부인에게 건네며 말했다.“근래 한가해서 노부인을 위해 손수 뭔가를 만들어 드리고자 이걸 만들었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 한번 보세요.”계연수의 수놓이 실력은 최상급이었다. 금사로 수놓은 무늬도 노부인의 취향을 잘 반영했다. 노부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근래 옥현이가 널 곤란하게 하지는 않더냐?”계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나으리께서는 저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제가 노부인을 찾아와 이명유에 대한 처벌을 이만 중지해 달라고 사정했으면 하시더군요.”사씨 노부인은 실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어리석은 녀석, 대체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이명유가 널 그런 식으로 해하려 하였는데 부군으로서 어찌 남을 두둔한단 말이냐.”말을 마친 노부인은 계연수의 손을 꼭 잡았다.“상심하지 말거라.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 그만큼 오래 길러줬으니 배은망덕하여서는 안 되지.”“난 더 이상 그 아이가 집안에 불란을 가져오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잠시는 처소에 가둬뒀다가 설명절이 지나면 내보낼 생각이다.”계연수는 고개를 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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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잔뜩 화가 난 노부인의 모습을 보고 어멈들이 다가와 위로했다.그러나 아무도 이명청을 두둔하지 않았다.서원에서 뛰쳐나온 것도 모자라 노부인께 문안도 드리지 않고 대문 밖에서 울고 있으니, 담 밖에 지나가던 사람이 들으면 이 집에서 아이를 학대하는 줄 오해할지도 모른다.그러니 노부인이 어찌 화가 안 나겠는가.두 남매는 사씨 가문 자제도 아니고 큰 부인의 친척으로서 노부인을 공경해도 모자랄 판에 무언의 협박을 하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었다.‘서원에서 대체 뭘 배웠길래 어린 나이에 못된 수작만 배웠구나!’계연수는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문 앞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노부인은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저 아이는 신경 쓸 것 없다. 그렇게 꿇고 싶으면 꿇으라고 해. 이 나이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느냐? 정 안 되면 그냥 내쫓든가 해야지!”노부인은 옆에 있는 어멈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하거라.”어멈이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계연수가 노부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소년은 가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은 객기 때문인지, 자존심 때문인지 오전내내 허리 한번 굽히지 않고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했다.계연수가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소년은 그녀에 대한 증오심을 숨기지도 않고 빤히 그녀를 노려보았다.계연수는 이렇게 음침하고 섬뜩한 눈빛은 처음이었다.그녀는 멈칫하다가 조용히 소년의 옆을 지나쳤다.고개를 들었더니 멀리서 사옥현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그는 계연수를 보자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곧바로 성큼성큼 다가왔다.사옥현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문득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곧이어 사내의 분노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또 할머니께 뭐라고 고자질한 거지?”“계연수, 이 정도로 부족해서 이제는 명유의 동생까지 내쫓으려는 거니?”계연수는 고개를 들어 잔뜩 분노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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