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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주문춘귀: Chapter 1 - Chapter 10

10 Chapters

제1화

한겨울의 깊은 밤, 휘몰아치는 폭설 소리가 귀가를 스쳤고, 휘장이 바람에 날려 탁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계연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휘날리는 휘장을 걷어내고 짙은 눈이 덮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눈보라 속에 섞여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뒤에서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촌 형수님, 사촌 오라버니가 우릴 데리러 올까요?” 계연수는 휘장을 걷고 대답 없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사옥현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눈보라라도 그는 올 것이었다. 오늘 그녀는 원래 이명유와 함께 온천 별장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옥현이 명유가 감기에 걸렸으니 사촌 형수로서 그녀도 명유를 돌봐야 한다고 해서 간 것이었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하더니 당연한 듯 모든 것을 준비했다. 다만 돌아올 때, 큰 눈이 길을 막았고 바퀴가 갈라져 마차가 도중에 갇힌 것이었다. 마부가 말을 타고 돌아가서 소식을 전한 지 거의 두 시진이 지났으니 이제 곧 올 것이었다. 멀리서 전해오는 말발굽 소리는 눈보라 치는 밤에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가까워질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마침내 말소리가 울리더니 마차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유야.” 곧이어 휘장이 젖히더니 길고 큰 손이 들어왔다. 계연수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분명 자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명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촌 오라버니,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이명유는 부드러운 손을 사옥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너무 두려웠던 탓인지, 나비처럼 그의 품에 달려들어 흐느꼈다.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는 눈이 내리는 밤에 길고 따뜻한 봄 풍경처럼 사람들을 빠져들게 했다. 계연수는 묵묵히 이명유의 등에 놓인 길쭉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품에 안긴 사람을 꼭 껴안았다. 곧이어 두툼한 여우털 옷이 가녀리고 수려한 어깨에 걸쳐졌다. 계연수는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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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차가운 눈보라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계연수는 밤까지 기다렸지만, 숯불은 이미 다 식어버렸고, 마차 꼭대기에서 흔들리는 등만이 희미한 빛을 발했다. 그녀를 데리러 온다고 했던 마차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오늘 밤, 눈이 많이 내려서 그녀는 마차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긴 밤의 끝에 곧 여명이 찾아왔다.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올 무렵에야 마차가 느릿느릿 도착했다. 마부는 달려와 손에 든 여우털을 건네며 말했다. “어젯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마침 출장을 가는 관리 때문에 눈을 치우지 않았다면 소인은 지금도 소부인을 데리러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소부인께서 혼자 눈 속에서 어떡하겠습니까?” 계연수는 여우털을 꽉 잡고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휘장 밖의 마부는 계속 말을 했다. “원래 손난로도 준비했는데, 지금쯤 다 식었을 것입니다. 마차 안의 숯불도 많이 준비하지 않아 다 타버렸습니다.” 계연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더니 비난하지 않고 휘장을 열었다. 눈보라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고, 새하얗게 뒤덮인 눈이 그녀의 눈을 아프게 했다. 마부는 계속 말했다. “어제 나리님께서 소부인과 사촌 아가씨께서 눈 길에 갇혀 있다는 걸 알고 긴장해서 당장 오려고 했습니다. 나리님처럼 바쁜 사람이 공무를 돌볼 시간도 없을 텐데 어젯밤에 글쎄…” 그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뭔가 알아챈 듯 멈추고 몰래 계연수의 눈치를 살폈다.다만 소부인의 드리워진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뺨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는 방금 꺼낸 말을 후회하며 얼른 발판을 놓았다. 계연수는 소리 없이 여우털 옷을 꼭 여미고 마차에서 내렸다. 훼손된 마차에서 내릴 때, 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 두꺼운 눈 속을 밟았지만 뻣뻣한 몸은 이미 감각이 없었고 심지어 눈 속에 있는 발의 감각도 이미 사라졌다. 몇 번이나 넘어지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용춘이가 부축해서 일으켰다. 용춘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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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계연수 뒤에 서 있던 용춘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 ‘이명유가 해당화의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한 건, 일이 부인 뜻대로 되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나리님과 소부인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이명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를 하려고 했다. 소부인이 해당화를 좋아하는 건 가주 부인께서 해당화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계 씨 가문의 가주께서 직접 부인을 위해 정원을 가꾸셨고, 당시 가주님과 부인께서도 해당화로 인해 인연을 맺었던 것이었다. 해당화는 소부인의 정신 의탁이었는데 이명유의 말 한마디에 나리님께서는 소부인께서 직접 심은 해당화를 전부 뽑으라고 명령했지. 거의 2년이 다 된 일인데 굳이 끄집어내는 건 소부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아닌가?’ 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 씨 가문으로 시집온 그 해에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사옥현과 알콩달콩 평생을 함께 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사옥현은 청렴하고 단정해서, 그녀는 진작에 그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해당화를 심은 것은 자신이 여기서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직접 심은 모든 꽃에는 정성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창밖은 이미 아무것도 없어졌고, 한눈에 평평한 흰색만 있을 뿐 다른 색깔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그녀도 슬퍼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고, 어머니와 외조모가 함께 슬퍼하게 할 수는 없으니 밤에 혼자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계연수의 손끝은 여전히 약간 차가웠고 따뜻한 차도 온몸을 녹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당화는 어디서나 볼 수 있으니 사람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계연수의 태도에 이명유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이명유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끝까지 잡고 놓지 않을 줄은 몰랐다. 다만 가세가 기울었을 뿐인데 자존심도 없다니.이명유는 그런 사람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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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 생각에 계연수는 멈칫했다. 이런 심문에도 아무런 슬픔이 없다니. 그녀는 사옥현이 정말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졌다고 생각했다. 기억 속의 옥처럼 따뜻했던 사옥현, 가세가 기울었을 때 그녀의 가정 형편을 신경 쓰지 않는다며 혼인을 청하러 왔던 사옥현, 외부인들에게 청렴한 군자인 사옥현,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졌다. 그녀가 잠시 딴생각을 하자 사옥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수야, 넌 명유처럼 침착한 법을 배워야 해. 후원에 틀어박혀 질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다시 걸어 나갔다. 계연수는 사옥현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책을 펼쳤다. 사 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지 3년 동안 그녀는 정성을 다해 후원을 관리했고,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을 준비하며 그가 사소한 일로 신경을 쓰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어머니가 가끔 가혹하게 굴어도, 그녀는 그에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사옥현의 부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질투심 많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따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옥현의 마음이 이미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용춘은 계연수 곁에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요 몇 년 동안 소부인과 나리님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나리님을 다시 모셔올 테니 소부인께서 몇 마디 설명하십시오. 사촌 아가씨께서 앞으로도 이간질을 할 텐데 시간이 지나면 더 멀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계연수는 입술을 가리고 기침을 두 번 하더니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다.” 그녀는 예전에 천만 번 설명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눈보라에 휩쓸린 연회처럼, 설명을 해도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회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믿거나 말거나,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드디어 자신을 알게 되었다. 눈 속에서 그녀가 사옥현에게 마음이 식었다면, 방금 사옥현에 대한 그 지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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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오늘의 눈보라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계연수는 방에서 나가자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 그녀는 몸에 걸친 여우털 망토를 꽉 여미고 등 위에 쌓인 자욱한 눈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앞길에 자욱한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시어머니 임 씨도 요 며칠 병이 나서, 후원의 사람들이 모두 병문안을 갔다. 계연수가 갔을 때는 이미 방안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계연수는 방으로 들어간 후, 망토를 풀어 용춘의 손에 놓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마마가 그녀를 위해 휘장을 열자, 시끌벅적한 인사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휘장이 열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고 다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시집온 지 이삼 년 동안, 사 씨 가문의 사람들은 매번 이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녀를 사 씨 집안의 며느리로 여기지 않았고 가까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계연수는 여전히 평소처럼 시어머니 임 씨에게 다가가 문안을 드렸다. 임 씨는 계연수에게 몇 마디 관심을 하더니 그녀의 병을 물어본 후에야 한쪽에 앉혔다. 또 한 차례의 인사가 오갔고, 아무도 그날 밤 그녀가 홀로 버려진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녀의 일을 외면했고, 오히려 모두 이명유의 혼사를 토론했다. 이때 둘째 부인이 입을 열었다. “명유가 성인이 된 지도 벌써 1년이 되었고, 여러 가문을 소개해주었는데 옥현이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니… 명유에게 어떤 부군감을 골라줘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명유는 옥현이가 보고 자랐으니 당연히 부군감을 잘 골라줘야지요.” 이때 어떤 형수가 이명유에게 물었다. “경성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느냐? 네가 마음에 든다면 대부분의 가문엔 모두 시집갈 수 있단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명유의 아버지는 선주의 지부였고, 한 지역의 부모관으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다만 어느 해 선주에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이명유의 아버지가 직접 방역을 하다 그의 부인과 감염되어 모두 세상을 떠났고 어린 이명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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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이명유의 안색이 음침하게 굳었다. 그녀는 계연수가 뒤돌아서 자리를 뜰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계연수를 따라왔던 용춘은 조금 전 그녀의 말을 듣고 통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걱정도 되었다.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만약 또 나으리께 가서 고자질을 하면….”이런 일은 처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명유는 겉보기에 온순하고 선한 인상을 주지만 뒤에서 간사한 술수를 부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필 사옥현은 그녀를 편애하며 한 번도 부인인 계연수의 말을 믿은 적이 없었다.계연수는 요 며칠 안에 사옥현과 화리에 관한 일을 상의할 생각이었으니, 이명유가 고자질을 하든 말든 중요치 않았다.그녀와 사옥현은 처음부터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 말고 먼저 돌아가자꾸나.”긴 치맛자락이 축축이 젖은 돌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죽림을 지날 때,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아침에 입도 벙긋 못하는 거 봤나요? 아무리 분해도 지가 참는 것 외에 더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애초에 그런 초라한 혼수를 들고 시집을 온 게 뻔뻔한 거지. 옥현이 아니면 누가 그런 거렁뱅이를 거두어 주겠어?”말을 마친 그녀는 또 한숨을 쉬었다.“그년만 끼어들지 않았으면 옥현이도 명유도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되었을 텐데.”계연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좀 불쌍하지 않나요?”“계씨 집안이 건재할 때 얼마나 위풍당당했나요? 저희 가문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자리에 있었죠. 하루아침에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또 다른 목소리가 비웃음을 터뜨렸다.“동정할 필요 없어. 이게 팔자인 것이지.”“형님이 왜 그년에게 살림을 안 맡기는지 아니? 그년이 집안의 돈을 빼돌려서 병든 자기 어미의 탕약을 사는데 보탤까 봐 그러는 것이지. 외조부 가문도 몰락했으니 그런 년에게 살림을 맡기면 집안살림이 다 거덜 날 것이야.”“형님은 줄곧 그년을 경계하고 있었다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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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전에 매번 그와 이명유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계연수는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분명 자신은 그의 부인인데 마치 남남처럼 보란듯이 이명유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매번 그런 모습을 볼 때면 그녀는 자신은 이곳에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켰다.그러나 지금은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았다.어쩌면 그녀 역시 그에게 그리 깊게 마음을 준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그녀는 애초에 진심으로 그녀와 혼인하고 싶다던 사옥현을 사랑해서일 수도 있었다.탕약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 코끝에 쓴 향기가 맴돌자, 계연수는 단숨에 탕약을 들이마시고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사옥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책망하듯 말했다.“명유가 너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계연수는 싸늘한 눈길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명유와 함께 있을 때면 그는 늘 인상을 찌푸리며 이런 말투로 그녀를 비난했다.그녀가 뭘 하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탕약을 마시고 있었습니다.”사옥현이 멈칫했다.계연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명유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지?”이명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계연수의 손을 잡았다.“옥현 오라버니 방에서 서책 몇 권을 빌려 가려고 왔는데 형수, 신경 쓰실 건 아니죠?”“형수가 또 제게 예의 없다고 책망하실까 봐 미리 양해를 구하러 온 것이니, 오라버니께 화내지 마세요.”“그리고 오늘 제가 말실수를 해서 형수께서 많이 화가 나신 것 같은데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큰 서러움이라도 당한 것처럼 눈물까지 글썽였다.사옥현은 싸늘한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명유가 내게 책을 빌리러 온 것이니, 속 좁게 굴지 말거라.”“그리고 말실수를 했어도 형수로서 넓은 도량을 보여주어야지.”계연수는 피로가 몰려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있었는데 그는 벌써 속 좁게 군다는 죄명을 그녀에게 덮어씌웠다.고개를 돌려 이명유의 눈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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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화장대 앞에 마주앉은 계연수는 머뭇거리는 용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말을 마친 그녀는 동거울 속에 비친 수척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장신구를 천천히 풀었다.“용춘아, 아무 말도 하지 마렴. 나는 내가 뭘 하는지 잘 알고 있어.”그녀는 사씨 가문의 며느리이자 사옥현의 부인이었다. 사옥현은 가문에서 가장 출세한 장손이었다. 수많은 눈들이 그녀를 감시하며 그녀의 실수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예전에는 화목을 위해, 집안의 평화를 위해 실수할까 늘 마음을 졸이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못했고, 늘 양보하며 사옥현과의 평화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에게 민폐를 끼칠까 두려워서였다.그러나 이렇게 뻔히 보이는 무겁고 고단한 삶이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만약 평생을 이렇게 침울하고 무기력한 굴레에 갇혀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계연수는 사옥현이 오늘 밤 이곳에 머물지 않을 것을 알았다. 비슷한 일은 예전에도 적지 않았고 그는 화가 나면 여계와 같은 예법서를 그녀의 방으로 보냈다.그럴 때면 그녀는 혼자 쓰라린 마음을 삼키며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반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그녀가 잘해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결코 좋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느릿느릿 세안을 바치고 밖에 있던 시녀를 부르자, 그가 오늘 밤도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다.언제쯤이면 그와 단둘이서 화리 얘기를 꺼낼 수 있을지도 막막했다.그녀는 턱을 괴고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센 바람 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마치 계시 가문에 변고가 생겼을 때처럼, 불안에 떨던 그때와 비슷했다.계연수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그날 밤 사옥현은 끝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를 마주치니 얼굴은 냉랭하고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차가운 시선은 늘 그렇듯 무정했고 마치 계연수에게 어서 타협하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졌다.계연수는 본체만체하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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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오전에 의원이 와서 진맥을 하고 병세가 호전을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침은 쉽게 낫지를 않으니 며칠 휴양할 것을 권했다.계연수는 풍한이 전보다 호전된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밤에 기침을 심하게 하긴 했지만 낮에는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그러나 시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계연수는 며느리로서 병수발을 갔다. 임씨는 구토가 멈추지 않았다. 어의는 위가 상했다고 처방을 지어줬고 집안 안팎은 혼란스러웠다.둘째네와 셋째네가 문안을 왔다. 약 냄새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섞여 방안은 더 덥고 혼잡했다.계연수는 사람들에게 밀려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다행히도 사람들은 문안 인사만 하고는 임씨가 말도 못할 정도인 것을 보고는 각자 돌아갔다.텅 빈 방에는 계연수 홀로 남게 되었다.계연수도 풍한이 완전히 나은 상태가 아니었고 오후 내내 시모를 돌보느라 바쁘게 보낸 탓에,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렸다.곁에 있던 어멈이 달려와서 그녀를 부축하더니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마님께선 주무시는 중이니 작은 마님도 좀 쉬시다가 의원을 불러 진료를 보세요.”마침 밖에서 들어온 이명유는 탁자에 몸을 기대고 있는 계연수를 보며 말했다.“이모님은 제가 돌볼게요. 형수는 먼저 쉬러 가세요.”계연수는 오한이 들어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녀는 용춘의 손을 잡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찬바람이 땀에 젖은 이마를 스치자 한기가 스며들었다. 눈앞에 등불들이 겹쳐져 보이고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다. 계연수는 어릴 적 아버지께서 밖에서 공무를 다 보시고 돌아와 자신을 업고 밤길을 산책하던 장면을 떠올렸다.울컥 눈물이 차올랐지만 그녀는 억지로 참아냈다. 차가운 눈꽃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 의식이 점점 돌아왔다.그녀는 용춘에게 기댄 채, 힘겹게 처소로 향했다.용춘은 창백한 그녀의 안색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작은 마님, 왜 그러세요?”계연수는 눈을 감고 힘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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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계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춤추는 등불을 묵묵히 바라보았다.서신은 외할머니께서 보낸 것인데 금의군 동사방 교위가 국자감에서 글공부를 하는 사촌 오라버니 고준을 잡아갔다는 내용이었다.오늘이면 아마 북진부사에 끌려갔을 것이다.북진부사에서 어떤 대우를 받게 될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북진부사의 형옥과 고문은 누구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여 얼마 못가 자백을 하거나 죽는 이 또한 적지 않았다.외할머니가 왜 급하게 서신을 보냈는지 계연수는 잘 알고 있었다. 사씨 가문의 큰딸인 사금희의 부군이 북진부사의 관부사였다.그가 고준을 풀어주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계연수는 두통이 몰려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고준이 교위에게 끌려간 것은 사적인 자리에서 둔갑병법과 태을서에 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보는 관점에 따라 죄질이 달라지고 어떻게 판결할지는 판결관의 뜻에 달려 있었다.조정은 요서를 엄격히 단속했고 연루된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일을 크게 벌이면 고씨 가문도 연좌죄에 엮일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의 고씨 가문은 풍랑 속의 작은 가지와도 같아서 더 이상 풍파를 견딜 수 없었다.계연수는 지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큰딸 사금희는 부인 임씨의 장녀로 오만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가서 부탁한다고 들어줄 사람이 아니고 사옥현이 직접 부탁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사옥현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헛수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에게 그녀는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니, 고씨 가문 또한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부탁을 해도 귓등으로 들을 가능성이 컸다.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섞이며 점점 무력해졌다. 계연수는 서신을 베개 밑에 넣고 용춘에게 부축해 일으켜 달라고 했다.용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작은 마님, 어디로 가시려고요?”한번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아프고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눌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힘겹게 말했다.“서재로 가자.”용춘이 걱정스레 말했다."뒤뜰의 서재로 가려면 또 찬바람을 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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