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극 로맨스 / 주문춘귀 / Chapter 121 - Chapter 130

All Chapters of 주문춘귀: Chapter 121 - Chapter 130

148 Chapters

제121화

계연수가 뒤돌아서 그를 지나쳐 떠나갈 때까지, 사옥현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아련한 향기가 사라진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복잡한 감정이 꿈틀대기 시작했다.그는 계연수가 그와 이혼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명청을 불러다 괴롭힌다고 생각했다.대문 앞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어멈은 참지 못하고 사옥현에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나으리, 오해하셨습니다. 명청 공자께서는 오전부터 와서 이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그때 작은 마님께서는 노부인과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작은 마님은 독에 당하신 이후로 3일간 요양을 거쳐 오늘에야 건강을 회복하여 노부인께 문안드리러 온 것입니다. 작은 마님께서는 명청 공자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사옥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그는 그제야 계연수가 독에 당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적독충의 독성이 매우 강하여 이틀이나 고통에 시달리며 몸져누워 앓았다던 시종들의 말도 떠올랐다.부군으로서 아픈 부인의 곁을 지켰어야 하지만, 그날 밤 이후로 그는 한번도 처소에 들지 않았다.사옥현은 계연수와의 만남을 일부러 피하고 싶었다.생각이 점점 깊어지자 그는 계연수가 이토록 결연하게 화리를 고집하는 이유가 어쩌면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이명청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형님, 저희 누님을 구해주십시오. 이렇게 누님을 집에서 내쫓지 말아주십시오.”조금전까지 표독스럽게 계연수를 쏘아보던 소년은 사옥현이 나타나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사옥현은 고개를 숙여 이명청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건 누구한테 들었니?”이명청이 울먹이며 답했다.“누님 곁의 어멈이 사람을 시켜 제게 서신을 보냈습니다.”사옥현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노부인은 만나뵈었어?”이명청은 노부인 얘기가 나오자 눈가에 증오심이 살짝 스쳤다.“노부인은 저를 만나주려 안 하세요. 누님에 대한 처벌을 철회할 때까지 저는 이곳
Read more

제122화

옆에 있던 어멈이 냉소를 지었다.이 집안 자제도 아닌데 학당에 안 가는 걸로 누굴 협박한단 말인가? 나이가 어려서 고집만 앞서는 어리석은 소년이었다.사옥현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이명청의 손을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가며 노부인에게 직접 사죄드릴 테니 시종들에게 전갈을 전하라 명했다.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노부인이 노곤하여 쉬러 들어가셨으니 만나기 불편하다는 내용이었다.사옥현은 이명청에게 화가 난 노부인이 방문을 거절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짜증이 치민 그는 그대로 소년을 끌고 밖으로 향했다.한편, 이명유는 처소에서 조바심을 태우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온 시녀에게서 노부인이 남동생을 만나 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문 앞에 주저앉았다.상처투성이로 문 앞에 기대어 소식만 기다렸는데 이런 결과일 줄이야.장씨 어멈은 다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가씨, 부상도 심한데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이명유는 울먹이며 어멈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다가 분을 못 이겨 욕설을 내뱉었다.“그동안 내가 잘 보이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거금을 들여 불상까지 사다 줬는데! 매정한 할망구 같으니라고!”장씨 어멈은 다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아가씨, 그런 말은 절대 하면 안 돼요. 소문이라도 나면 일만 커집니다. 밖에 지키고 있는 사람들 모두 노부인의 사람인 걸 잊으셨습니까?”이명유는 눈물을 흘리며 장씨 어멈에게 물었다.“유모, 이제 저는 어떡해야 하나요? 이 집을 나가면 더는 기댈 곳이 없어요.”“앞으로 어디로 가죠? 설마 정말 아무나 잡고 시집을 가야 하나요? 숙부와 삼촌들은 호시탐탐 제 혼수만 탐내고 있을 텐데… 시집을 가더라도 친정 어른이라는 신분을 내세워 제 것을 빼앗으려 할 거예요…”“저는 옥현 오라버니가 좋단 말이에요. 오라버니와 혼인하고 싶어요….”장씨 어멈은 이명유를 달래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이명유는 멍하니 장씨 어멈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그건….”장씨
Read more

제123화

계연수는 이명유의 동향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명청이 노부인의 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소란을 피운 사실은 둘째네와 셋째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둘째네와 셋째가 알게 되면서 아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자 건너건너 소문이 퍼지면서 온 집안이 다 알게 되었다.이날, 계연수는 노부인과 함께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노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말했다.“어쨌거나 집안 망신이라 어떻게든 덮으려고 했다만… 비록 이명유를 내쫓기로 했지만 사람들에게는 우리 집안에서 성년례까지만 돌봐주기로 했다고 말하고 그 아이가 시집을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집을 떠났다고 말하려 했었지. 앞으로의 인생은 그 아이의 것이니 굳이 어린 처자의 명성을 더럽힐 이유가 뭐가 있겠어.”“그런데 그 애의 남동생이 내 처소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이 일을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녀석은 일을 크게 벌이면 사람들이 나를 악독한 노인데라고 비난할 줄 알았겠지만, 사씨 가문의 노부인으로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왔겠어? 어디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 따위가 나를 협박하려고 들다니!”“내가 어느날 화가 나서 그 애들의 이모를 사당 앞에 무릎 꿇려도 아무도 나한테 뭐라 못해. 이제 일이 커졌으니 하루라도 빨리 그 애를 내쫓을 수밖에. 다 자업자득이지.”계연수는 묵묵히 노부인을 부축하여 의자에 앉혔다.노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계연수에게 물었다.“연수야, 이제 속이 좀 후련하니?”계연수는 고개를 들고 노부인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노부인에게 속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기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그리 후련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서 유감일 뿐입니다. 아무도 이런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요.”노부인은 멈칫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누군들 집안이 화목하길 바라지 않겠느냐. 그러나 자꾸 불란을 조성하는 이가 있으니.”노부인은 계연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그 일이 있고 옥현이와는 이야기를
Read more

제124화

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대체 사옥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노부인의 뜻은 명확했다. 노부인은 여전히 그녀와 사옥현의 사이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기대하는 모양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었다. 가슴에 묻어둔 말을 이제는 꺼낼 때가 온 것 같았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노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3년 전 나으리와 혼례를 올리고 그분의 부인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저는 한 번도 그분을 원망한 적 없습니다. 애초에 제가 혼서를 들고 찾아왔을 때, 나으리는 저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지요.”“지난 3년간 저는 나으리가 제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입술을 깨물었다.“노부인께 서러움을 하소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제 작심하고 화리를 결정하였고 저와 나으리를 강제로 묶어놓는다 한들, 연모하는 이를 멀리 떠나보낸 나으리가 제게 원망을 품을까 걱정됩니다. 원망이 쌓이고 쌓이면 점점 서로에게 미움만 남겠지요.”계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부인에게 정중히 예를 행했다.“노부인, 제 뜻을 허락하여 주십시오.”“화리하고 앞으로 나으리께서 이명유와 혼인한다 해도 저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노부인은 비통한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 어질 수가 있을까.’그녀는 단 한마디 원망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이렇게 좋은 며느리가 어디 있을까.그러나 식견이 짧고 만족을 모르는 임씨는 늘 계연수에게 시비를 걸고 첩을 들이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사옥현은 멀리서 계연수가 노부인에게 예를 행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하여 성큼성큼 그곳으로 향했다. 정자에 도착한 그는 계연수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다짜고짜 물었다.“또 뭘 꾸미는 거지? 난 이미 명유를 멀리 시집보내는데 동의했는데, 왜 그 애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것이야!”사씨 노부인은 그 말을 듣고 굳은 표정으로 계연수를 옆으로 이끌었
Read more

제125화

“앞으로 서로 남남처럼 지내면 됩니다. 누가 물어봐도 절대 사씨 가문에 대하여 안 좋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나으리의 출셋길에 방해가 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정중히 사옥현에게 예를 행했다.“시집온지 3년동안 후사를 보지 못한 것은 부덕한 제 탓이니, 더 이상 이 집에 남아 있을 체면이 없습니다. 이는 사씨 가문의 잘못도 아니고 나으리의 잘못도 아닙니다.”“모두가 웃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저희가 갈라서야 한다고 봅니다.”노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연수야, 왜 그런 바보 같은….”사옥현은 멍하니 서서 자신에게 예를 행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변함없이 온화하고 순종적이었고 말투에서는 억울함이나 원망 같은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예전부터 이런 사람이었다. 그가 오해하고 안 좋은 말을 해도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상심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오래전부터 습관이 된 것처럼, 어쩌면 진작부터 이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그녀는 아주 공손하고 온화한 자태로 그와 다른 여인을 축복해주고 있었다.예전에는 늘 명유를 시기하여 불란을 조성하던 여인이 대범하게 그를 다른 여인에게로 보내겠다 말하고 있으니, 온몸에 기운이 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당장 모든 걸 잃을 것 같은 고통이 가슴에서 퍼져나갔다.그는 이 고통의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어제 분명 노부인 앞에서 결단을 내리고 이명유를 멀리 시집을 보내기로 했는데 왜 화리를 고집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왜지?’원래대로라면 오늘 그녀에게 직접 이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심지어 그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의 반응도 상상해 보았다.어쨌거나 이번에는 이명유와 그녀 사이에서 그녀의 편에 서주었으니 그녀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이번 사건에서 그녀는 독에 당하여 고통에 시달렸으니 한번쯤은 두둔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그는 이렇게 천천히 그녀와 좋았던 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앞으로도 그에게 여인은 그녀뿐이고 서로 이해
Read more

제126화

심서준은 도찰원 의사당에서 사옥현을 다시 만났다.사옥현은 예전에 봤던 것처럼 귀티나고 진중한 분위기는 전혀 없고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사씨 가문은 빈곤한 출신의 세가로서 조상님 중에 대학사로 지낸 분이 있고 집안의 어르신들도 모두 진사 출신이었다. 집안의 자제들은 경성의 여느 귀족 공자들처럼 건방을 떨지 않으니, 대대로 전해지는 가풍은 나쁘지 않았다.다만 사옥현의 대에 와서 풍기가 흐트러졌다.부인을 두고 사촌 여동생과 미묘한 정을 나누는 것은 양반가문 자제답지 않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다.심서준은 비웃음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사옥현을 바라보았다. 지금 보면 이 모든 일은 그가 자초한 결과였다.심서준이 중독 사건을 먼저 까발리지 않은 것은 사옥현이 좀 더 조바심을 태우고 고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였다.그는 담담히 시선을 거두고는 정리한 안건 문서를 가져오게 했다.이제 이틀만 지나면 설명절이라 사옥현은 미루고 싶어도 미룰 핑계가 없었다.심서준은 문서를 보지도 않고 바짝 긴장하여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옥현을 바라봤다. 턱에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것을 보아, 온화하고 귀티 나던 귀공자는 이미 용모에 신경 쓸 여유도 없는 듯했다.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에게 말했다.“보아하니 사 시정은 문서들을 정리하느라 많이 고생한 모양이군.”사옥현은 비꼬는 말투를 알아듣고 잠시 움찔했지만 힘겹게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나으리. 저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사옥현은 착각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심 후작의 눈빛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언제 이 귀한 분의 눈밖에 난 행동을 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심서준은 다시 사옥현을 힐끗 노려본 후에 시선을 문서로 돌렸다.남은 사건은 많지 않았지만, 그는 깐깐하게 살피며 종종 사옥현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사옥현은 억지로 정신줄을 바짝 붙잡고 있었다.그렇게 그는 오전내내 꼿꼿이 서서 심 후작의 질문세례를
Read more

제127화

그러나 불만이 있어도 입밖으로 낼 수는 없으니 억울함을 안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심서준은 의자에 기댄 채 떠나가는 사옥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부하에게 눈짓했다.그의 뜻을 알아들은 부하는 조용히 사옥현의 뒤를 따라갔다.점심 때가 되어 돌아온 부하가 심서준의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사옥현은 최근에 저택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당직방에 머물렀다고 했다.부하는 작은 소리로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갔다.“듣기로 사 시정은 어젯밤에 술에 잔뜩 취해 돌아왔다고 하는데 아마 집안일로 상심이 큰 모양입니다.”심서준은 손에 든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그래? 집안일이라고?”경성 곳곳에는 도찰원의 눈과 귀가 있었다. 동사방, 병마사, 거리 곳곳, 금의군까지, 도찰원 세력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니 마음먹고 사옥현에 대해 알아보는 건 심서준에게 일도 아니었다.문무백관을 감시하는 역할인 도찰원은 경성의 곳곳에 그물망처럼 세력이 분포되어 있었다.“사 시정은 평소에 술을 잘 안 마시는 사람인데 어젯밤에는 거의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셨다고 합니다. 술에 취해서는 헛소리를 지껄였는데 시정 부인과 다툰 것 같기도 하고… 술 취한 채로 부인의 이름을 부르더랍니다. 이 일로 대리시 내부에서는 사 시정이 부인을 참으로 연모한다고 소문이 났더군요.”심서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비웃음을 터뜨렸다.부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저희 쪽 첩자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사 시정이 최근 들어 잔뜩 풀이 죽어 있는 이유가 부인께서 그에게 화리를 제기한 일 때문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사 시정은 이 일로 당황하여 친우를 찾아가 고민을 토로했답니다.”심서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한편, 계연수는 그림을 안고 포산루에 당도했다가 장 선생의 방에 앉아 있는 심서준과 마주쳤다.그와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 계연수는 바짝 긴장했다.그는 조용히 앉아 장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장 선생은 한창 그림을 펼치고 공손한 태도로 그
Read more

제128화

그는 은자를 계연수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지난번 그림은 9백냥에 낙찰되었습니다. 여기 560냥을 넣었으니 확인해 보세요, 부인.”계연수는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장 선생도 그녀의 신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양반가문인 사씨 가문에 시집을 간 부인이 그림 팔이를 한다고 하면 집안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었다.계연수는 자연스럽게 은자를 챙겨 품에 넣었다. 지난 2년 동안 믿고 거래해온 장 선생이기에 굳이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수고가 많으십니다, 장 선생님.”장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수고는요. 오히려 부인께서 그림을 안 가져오시면 어쩌나 걱정이랍니다.”그는 조금 숨을 돌리고 한마디 덧붙였다.“그런데 어찌 이번에는 한달도 안 되어 그림을 가져오셨습니까? 혹시 수중에 은자가 부족하십니까?”장 선생이 이렇게 묻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처음 그가 계연수를 찾아갔을 때는 계연수의 어머니가 귀한 약재로만 겨우 연명하고 있었으니 그녀가 가장 은자가 궁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계연수는 그에게 선금을 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최근에는 두세 달에 한 번씩 찾아왔는데 이번에는 한 달도 안 되어 찾아왔으니 걱정되어 물어본 것이다. 장 선생은 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속삭였다.“부인, 은자가 급히 필요하시면 제가 미리 좀 더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약 심서준과 아예 모르는 사이였다면 아무런 느낌이 없었겠지만 하필 궁핍한 모습을 그에게 들키고 나니 수치심이 들었다.장 선생도 자신을 배려해서 물어본 것이니 원망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부족하지 않습니다. 다만 곧 설명절이고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외출할 겨를이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온 거예요.”장 선생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며 말했다.“부인, 은자가 필요하시면 그림을 좀 더 많이 그려주세요.”말을 마친 그는 계연수에게 몰래 손짓을 했다. 그녀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많으니, 많이 그려도 다 팔 수 있다는 의미였다.계연수는 영문을 몰라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선생
Read more

제129화

“수중에 은자가 부족하십니까?”갑작스러운 질문에 계연수는 숨이 턱 막혔다.은자가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예전에는 은자 부족을 걱정할 일이 없었지만, 수중에 돈이 있어야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고 뭘 하든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스스로 자립하고 뭔가를 하려면 은자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 궁핍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궁핍하지는 않습니다.”사실 그렇게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아직은 여유가 충분하고 금령에서도 저택을 수리하고 있다는 서신을 받았다. 굳이 호화 저택에 살 필요가 없고 아껴 쓰면서 서화관을 잘 경영한다면 아마 충분할 것이다.심서준은 줄곧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자신과는 눈도 안 마주치는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릴 때도 그의 앞에만 서면 애써 예의를 지키며 바짝 긴장하던 그녀였다.긴 소매 아래로 그녀의 하얗고 고운 손가락이 긴장하여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심서준은 여전히 앳되고 마치 속세의 고난을 모르는 것처럼 순수하고 맑은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사씨 가문은 범인을 찾아 처벌하였습니까?”계연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예.”그녀는 고개를 들고 감격 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예를 행했다.“심 대인의 도움이 있었기에 쉽게 범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바짝 긴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심서준은 고요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부인은 어떻게 보답하고 싶습니까?”계연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큰 도움을 줬는데 건성으로 넘길 수는 없어, 장 선생이 건넨 은 주머니를 심서준에게 건넸다.“지금 가진 건 이것뿐입니다. 답례가 적다고 서운해하지 말아주세요.”계연수는 그가 준 도움에 비하면 보답이 너무 약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물론 그가 은자가 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심
Read more

제130화

그 순간 그녀는 도망치고 싶었다.계연수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제게는 이것 말고는 가진 게 없습니다.”심서준은 조용히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초승달처럼 가는 눈썹에 살짝 눈을 내리깔 은 모습은 마치 조용히 호수에 스민 달빛을 떠오르게 했다.밝은 햇살이 창문에 스며들어 그녀의 희고 고운 자태를 감쌌다. 심서준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책상이 넘어설 수 없는 담벼락처럼 느껴졌다.자꾸만 꿈속에서 그녀를 그리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그는 얼마든지 그녀에게 선을 긋고 자신의 세상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밀어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 자신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순수하고 맑은 처자는 늘 자신을 위엄 있고 공명정대한 어른으로 대하는데 만약 자신의 소유욕과 집착을 알게 된다면, 아마 영원히 그에게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먼저 그의 영역으로 들어온 이후로 그녀에 관한 일은 썰물처럼 그의 삶에 녹아들었다.그녀의 부군이 마음을 딴데 두고 있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쩌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줄 게 없다고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만 가지고 있었다.심서준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고 치미는 감정을 참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부인, 그렇게 답례를 하고 싶다면… 절 위해 차를 따라주세요.”생각지도 못했던 단순한 부탁에 계연수는 잠시 멈칫했다.곧이어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심서준이 대가를 바라지 않아서 한 말이라는 걸 알지만, 적어도 그를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에 시름이 놓였다.상 위에는 옥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녀도 아는 잔이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이 주전자와 찻잔을 쓰고 있었고 어딜 가든 챙겨 다니는 모양이었다.‘본디 청결을 중시하는 분이니 당연히 타인의 찻잔을 쓰려 하지 않으시겠지.’그녀는 종종걸음으로
Read more
PREV
1
...
101112131415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