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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Chapters

제131화

어쩌면 그녀는 진심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대체 이미 혼인한 유부녀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그는 손을 뻗어 계연수가 건넨 찻잔을 받았다. 차가운 그의 손길이 옷깃을 스치자, 눈에 띄게 긴장한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심서준은 시선을 거두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부군과 화리를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상 위에 놓였던 그림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계연수는 당황한 얼굴로 주저앉아 그림을 주웠다.심서준은 조용히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늘한 눈빛이 풍만한 가슴과 가녀린 허리 사이를 오가다가 마침내 바짝 긴장한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계연수는 그림을 잘 말아 상 위에 올려놓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심 대인,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심서준은 탐구의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며 무심한 듯 말했다.“최근 사 시정이 며칠째 당직방에 머문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도찰원에 왔는데 혼이 반쯤 나가 있길래 대리시 동료에게 물어봤을 뿐입니다.”계연수는 사옥현이 며칠째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벌써 사람들이 그와 그녀의 화리 소식을 알게 된 것일까.심서준은 묘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답을 재촉했다.“부인, 아직 제 질문에 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계연수는 멍한 눈빛으로 심서준을 올려다보았다.어차피 하게 될 화리인데 지금 부인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 일인지 심서준 앞에서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어릴 때도 그녀는 늘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그는 그때보다도 더 높은 사람이 되었는데 그녀는 부군과 불화가 일어 곧 화리하게 될 유부녀로서, 신분 차이가 너무도 극명하게 느껴졌다.‘난 부군의 애정도 받지 못하는 사람인데….’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계연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애매모호한 답을 했다.“아마… 그럴지도요….”심서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마 그럴지도 모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설마 아직도 무능하고도 딴마음을 품은 부군의 곁을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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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예상치 못한 질문에 계연수는 말문이 막혔다.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을 줄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왜 이 일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는 걸까?심서준은 계연수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근래 들어 사 시정이 자꾸 실수를 저지르길래 영문이 궁금했습니다. 이번에 조사를 맡은 형부 문서 도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봐야 사 시정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이 설 것 같았지요.”계연수는 조정의 공무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심서준이 이렇게 하는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심서준처럼 냉철하고 치밀한 사람이 괜히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닐 것이다.그녀는 말하기는 껄끄럽지만 숨기려니 언젠가 화리하게 되면 알려질 사실이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예, 화리를 고민하고 있습니다.”심서준은 깨물어서 빨갛게 된 계연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도톰한 입술에 옅은 물기가 감돌고 있었다.가슴이 고동치며 온몸에 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의복 너머로 그녀의 몸에서 전해오는 부드러운 체온이 느껴지자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살짝 손을 뻗었다. 당장 그녀에게 닿고 싶었다.그가 아는 것은 오직 하나, 그녀가 화리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체내에서 끓어오르는 열망은 점점 억제하기 힘들어졌다. 다시 고개를 든 순간, 당황한 얼굴로 뒤로 물러서는 계연수의 모습이 보였다. 어색하게 붉어진 얼굴과 몽롱해진 눈동자,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흔들리는 귀걸이가 모두 눈에 들어왔다.“심 대인,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허공에 뻗은 심서준의 손은 결국 그녀의 옷깃에 닿지 못했다.다소 흐트러진 걸음걸이에서 그녀의 복잡한 심정이 엿보였다.문이 열리며 끼익 소리가 날 때까지 심서준은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몸은 여전히 그녀가 잠깐 머물다간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계연수는 밖으로 나온 후에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검고 깊은 심서준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한층 더 조여드는 느낌이었다.조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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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용춘은 괜히 은자가 아까워 작게 속삭였다.“부인, 좀 아껴 써야 하지 않나요?”용춘은 화리 후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워질 텐데 은자를 좀 더 모아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계연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나름 모아둔 게 좀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그렇게 옷감 점포를 지나다가 둘은 사씨 저택의 둘째 부인과 며느리를 마주치게 되었다.마침 용춘은 점주를 시켜 구매한 옷감을 고씨 가문에 보내려 하고 있었다.이 점포의 옷감은 모두 값어치가 상당했으니, 경성에서도 손에 꼽히는 점포라 할 수 있었다.둘째 부인은 면사포를 쓴 계연수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용춘을 알아보았다.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계연수를 아래위로 훑더니 말했다.“연수, 너는 참으로 친정 걱정을 많이 하는구나.”계연수는 살짝 면사포를 걷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난번 외조부 댁에 갔을 때 사촌동생들이 입은 의상이 마음에 들어서 옷감을 좀 받아왔었는데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똑같은 옷감을 발견해서 돌려주려고 샀습니다.”그녀는 잠깐 숨을 고르고 한마디 덧붙였다.“이 점포의 옷감들은 다들 질 좋고 예쁘네요. 둘째 숙모님도 한번 골라보세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그 말을 들은 둘째 부인은 옷감을 힐끗 쳐다보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화려한 무늬는 어린 처자들이나 입지, 나처럼 나이든 사람이 어떻게 이런 걸 입겠어.”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정하게 예를 행했다.“그럼 둘째 숙모님, 남아서 천천히 고르세요. 저는 먼저 집으로 돌아갈게요.”둘째 부인은 계연수가 자리를 뜨자마자 점주에게 그녀가 사간 옷감의 가격을 물었다.점주에게서 한필에 80냥이라는 답을 들은 둘째 부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옆에 있던 며느리가 말했다.“듣기로 큰댁 나으리께 시집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고 평소 집안에서 치장도 소박하게 하고 다니더니. 어디서 난 돈으로 저렇게 비싼 옷감을 샀을까요?”“최근에 큰댁 나으리와 다퉜다고 하던데 일부러 나으리의 관심을 사려고 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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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처음 사씨 저택에 시집올 때, 고씨 노부인은 아무런 혼수도 마련할 수 없는 손녀가 시댁에서 잘 대접받기를 바라서 사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니 계연수가 사씨 가문에서 받은 것은 없었다.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뒤뜰의 각 처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당을 꾸미고 먼지를 쓸고 설명절에 쓸 물건들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계연수는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그녀는 지난해 연말에 이들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던 자신을 떠올렸다.시녀들을 시켜 마당을 새롭게 정리하게 하고 복도에는 새로 만든 등불을 걸고는 시녀들에게 포상을 주느라 온 마당이 떠들썩했었다.그녀는 또한 사옥현을 위해 따뜻한 차를 끓이고 향을 피웠다. 비록 그가 싫은 내색을 팍팍 내며 불편한 기색을 했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어르고 달랬다.처소에 들어선 순간, 계연수는 세월이 훌쩍 지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입구에 있던 어멈은 그녀를 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올해는 마당을 어떻게 꾸밀지 물었다.다른 집들은 일찍이 준비를 시작하여 떠들썩한데 본래라면 일찍부터 꾸몄어야 할 이 집안은 쓸쓸하기만 하고 명절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어멈은 계연수가 어서 결정을 내리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마당에 들어서니 처소의 시녀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눈빛도 어멈처럼 초조해 보였다.계연수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관리인 임씨 어멈만 안방으로 불렀다.임씨 어멈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오늘 부관이 새로운 장신구와 옷감을 보냈고 또 이전에 맞췄던 옷과 차, 그리고 다과와 과일 같은 것들을 모두 안방에 두었다고 전했다.이것들은 매년 각 처소에 지급하는 것으로, 그녀는 큰댁 적자의 부인으로서 매년 받는 물건들은 모두 양질의 물건들이었다. 임씨 역시 이런 것들로 며느리를 박대한 적은 없었다.계연수는 어멈의 보고를 듣고도 그저 말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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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임씨 어멈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다른 처소의 새댁들은 모두 혼수와 여윳돈을 가지고 있어 평소에도 화려하게 차려입는데 계연수는 아무것도 없어 집안에서 공동으로 지급하는 것만으로 살림을 이어가니, 평소에 수수한 차림만 하고 다니다가 다른 새댁들의 웃음거리가 되고는 했다.그런 계연수가 유일하게 화려한 차림을 입을 때가 친정으로 돌아갈 때였다.화장함의 장신구는 열 개를 넘지 않았다. 모두 큰 부인이 계절마다 각 처소에 고르라고 보낸 것들일 뿐, 스스로 마음에 드는 것을 따로 장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계연수는 사옥현의 총애를 받지 못하다 보니, 다른 처소의 새댁들처럼 부군에게서 선물을 받지도 못했다. 사옥현은 처소에 머무르는 일조차 드물었으니, 언제 부인을 위해 뭔가를 사올 생각을 하겠는가.오히려 이명유는 수시로 계연수를 찾아와 알게 모르게 사옥현에게서 받은 물건을 자랑하고는 했다.어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어떤 면으로 따져도 부인이 이명유보다 훨씬 나은데 사옥현은 유독 이명유만 챙기고 이명유만 바라봤다.부인의 처지를 아는 그들로서 부인에게서 이 많은 은자를 받을 수 없었다.임씨 어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처소의 하인들은 작은 마님의 선한 마음씨를 다 알고 있습니다. 옷이든 은자든 받을 수 없어요.”계연수는 눈물을 흘리는 어멈을 보고 전에 잘해줬던 것들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진심을 이들을 대했고 이들도 진심으로 그녀에게 보답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은자를 다시 어멈에게 내밀었다.“받으세요, 어멈. 아마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요.”“올해 저희 처소는 따로 단장을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평소처럼 청소나 하고 만약 집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돌아가서 명절을 보내도록 해요. 여느 때처럼 어멈이 기록하고 관리해 주세요. 설 기간에는 적어도 절반의 인원은 남아서 시중을 들어야 해요.”어멈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도 알 수 없지만, 가슴이 먹먹했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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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계연수는 그저 이 상황이 불편할 뿐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그가 가까이 다가오거나 신체적 접촉이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고 사옥현의 눈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나으리, 저는 한 번도 예전의 나날들을 좋아한 적 없습니다. 해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요.”“우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이 변했다고 이해하셔도 좋습니다.”마음이 변했다는 말은 비수가 되어 사옥현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연수야, 홧김에라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우린 줄곧 좋았잖니.”계연수는 마치 큰 상처라도 입은 듯한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혐오감이 들었다.“우린 좋았던 적이 없습니다. 나으리께서 그게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나으리의 생각입니다.”“지난 3년은 저에게 악몽과도 같았습니다.”사옥현의 손이 흠칫 떨렸다.“그동안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지 않으냐? 서러운 게 있었다면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왜 갑자기 화리부터 꺼내느냐? 그건 내게 화가 나서 그런 거겠지.”“그날 밤은 내가 잘못했다. 부인인 너를 먼저 데려갔어야 했는데 너는 명유보다 건강하니 괜찮을 줄 알았어. 미안하구나….”늦은 사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계연수는 평화롭게 갈라서기를 바랐지만 사옥현은 그것마저 원치 않는 듯했다.그녀는 사옥현 앞으로 처음으로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이 순간에서야 계연수는 싫고 귀찮은 사람에게는 참을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마치 예전에 사옥현이 그녀만 보면 냉랭한 표정으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귀찮아했던 것처럼.이제 그녀는 그에게서 그런 느낌이 어떤 것인지 배웠다.계연수는 싸늘한 눈길로 사옥현을 바라보며 말했다.“3월이 되면 뜰 안의 배나무에 배꽃이 활짝 피겠네요. 꽃 필 때는 참으로 아름다웠죠.”“이제 곧 꽃필 때가 다가오니, 나으리도 기뻐하시겠죠.”“저는 나으리께서 앞으로 맞게 될 부인과 백년해로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나으리, 제가 3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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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사옥현이 떠난 후, 방안에 남은 계연수는 바닥에 쏟아진 조각난 자기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사옥현과의 3년은 지금 발아래 보이는 난장판과 다르지 않았다.밖에서 사옥현은 청렴하고 공정한 대리시의 관원이고 어린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은 귀공자였다. 하지만 안채에서 그는 집안일을 상관하지 않고 지금처럼 모든 잡다한 일을 그녀에게 떠넘겼다.그는 언제든 귀찮으면 떠날 수 있고 그녀의 입장은 생각해 준 적 없었다.밖에서 들어온 용춘이 계연수의 발아래에 흩어진 파편들을 보고 다급히 다가왔다.계연수는 용춘을 달래준 후에 물었다.“물건들은 다 정리됐겠지?”용춘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다 정리됐어요.”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용춘을 시켜 장부를 가져오게 했다.그녀는 의자에 앉아 장부를 펼치고 용춘이 말한 내용들을 일일이 기록하기 시작했다.이 장부는 그녀가 매년 지급되는 보급을 기록한 것으로, 가끔 시어머니가 선심을 쓰듯 보내주는 물건들까지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용춘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부인, 어차피 떠날 텐데 왜 기록하시나요?”계연수는 붓대를 내려놓고 담담히 말했다.“사씨 집안사람들은 내가 혼례식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고 내가 혼서 한장만 들고 스스로 찾아온 것은 모두 사씨 가문의 부귀를 탐한 것이라 생각하지.”“이것들을 일일이 기록해 두어야 내가 이 집에서 뭔가를 가져가지도, 사용하지도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 집안에서 보급된 비단들은 모두 창고에 그대로 보관해 두었고 건드리지도 않았지. 설령 사용했다 해도 나으리의 의복을 지어준 것뿐이고, 나 자신은 계절마다 보내오는 기성복을 입었지, 직접 옷을 지어 입은 적은 없었어.”“장신구들도 잘 보관해 두었고. 이 장부만 있으면 이혼하고 이 집을 떠날 때 그들이 내게 그동안의 지출을 청산하라고 해도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있어.”용춘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럼 부인이 3년동안 사씨 가문을 위해 헌신한 시간은 뭐가 되나요?”계연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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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계단을 내려가니 찬바람이 망토를 뚫고 목덜미에 스며들었다. 계연수는 조용히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옮겼다.시어머니의 처소에 도착하자, 문 앞을 지키던 시녀가 안으로 들어가 전갈을 전했다. 계연수가 뜰에 들어서니 대청 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둘째 부인의 목소리였다.“형님,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제가 굳이 이 일을 떠벌리려는 게 아니고 우리 집안도 그까짓 물건이 궁핍해서가 아니라, 누가 봐도 신경 쓰이지 않겠어요?”“마치 몸에 모기가 앉아서 피를 빨아먹고 있는 느낌이지 않나요. 비록 출혈이 크지는 않고 쉽게 쳐낼 수도 있지만 보기에 안 좋잖아요.”그 후로는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계연수는 입가에 잔잔한 비웃음을 머금고 안채로 들어가 망토를 벗고 문안을 드렸다.방 안에는 시어머니와 둘째 부인 장씨, 그리고 며느리인 여씨가 앉아 있었다.세 사람은 마치 죄인을 보는 눈길로 계연수를 훑어보았다.임씨는 냉랭한 눈길로 계연수를 빤히 보더니 자리를 권했다.계연수는 아무도 앉지 않은 오른쪽 자리에 앉아 시녀가 건네준 따뜻한 차를 받아들었다. 차의 향기가 은은히 피어오르자 그녀는 고개를 숙여 한 모금 마셨다.여씨는 계연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흰색 바탕의 평범한 치마에 보라색 비단 저고리를 입었다.2년 전에도 입었던 옷인데 지금까지 입고 다닐 줄이야.계연수의 귀에는 송녹석 금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머리에 한 금비녀와 목에 한 진주목걸이도 오래된 구식이었다.그러나 워낙 아름다운 얼굴 덕분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기품이 흘러 넘쳤다.평범한 사람이 입었으면 촌티가 났을 텐데도 계연수는 워낙 피부가 하얗고 고와서 저도 모르게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창밖에서 비쳐들어온 햇살이 그녀의 곁에 머무니 그녀의 주변으로 은은한 빛이 감도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시집을 오기 전부터 여씨는 계연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그때의 계연수는 경성 여인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계씨 가문의 외동딸로서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서화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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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임씨는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아니면 집안에서 지급한 물건들을 팔아서 은자로 바꿔 고씨 가문에 보태준 것이냐?”계연수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을 2년이나 입었다. 그러나 그녀의 옷은 그렇게 적은 편이 아니었다. 겨울 옷이라 몇 번 입을 기회도 없었다.그녀는 임씨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아무리 고씨 가문의 형편이 안 좋다고 해도 사씨 가문의 며느리인 제가 시댁 물건을 팔아 보태줄 만큼 궁핍하지는 않습니다.”임씨는 냉랭한 목소리로 반박했다.“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한필에 80냥이나 하는 비단을 눈도 깜짝 안 하고 사서 고씨 집안으로 보냈다더구나. 참으로 통이 크기도 하지. 네 월 녹봉이 고작 다섯 냥인데 그 많은 은자가 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네 명의로 된 점포 하나가 있는 줄은 안다만, 장사가 그리 잘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고씨 집안의 두 여동생에게 옷감을 사주는데 그리 아끼지 않게 썼으니 다른 이들에게는 또 얼마나 썼겠느냐? 그 은자는 결국 사씨 가문의 것이 아니더냐?”옆에 앉은 둘째 부인 장씨가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연수야, 이 숙모가 참견하려는 것은 아니다만, 어쨌든 너도 사씨 집안에 시집을 왔는데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우리 집안 상황에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줄 수 있다지만, 그래도 재물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친정에 보태주고 싶어도 숨기지는 말았어야지. 이런 식으로 하면 좋을 것 하나 없어. 네가 먼저 네 시어머니와 부군에게 말했더라면 어떻게든 도와줬지 않겠느냐.”장씨는 원래 소란을 만들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집안이 혼란스러울수록 그녀는 은근히 좋아했다.장씨의 부군은 경부통판으로 평소에 접촉하는 귀부인들이 많았다. 계연수는 이번에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면 이 일은 둘째 숙모의 입을 통해 온 경성에 퍼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둘째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숙모님,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왜 제가 몰래 집안의 재물을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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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계연수가 갑자기 장부를 내밀자, 임씨는 흠칫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두터운 장부를 받아들었다.계연수가 이런 걸 다 기록하고 있을 줄은 예상 밖이었다.장부를 펼치니 계연수가 시집을 온 날부터 지금까지 날짜와 시간, 언제 누가 뭘 보냈는지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크게는 포상으로 준 은자, 작게는 어느 날 기분이 좋아 계연수에게 준 과일까지도 기록에 남아 있었다.집안에서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보급 말고도 집안의 모든 사람들의 이름과 누가 언제 뭘 가져왔는지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그리고 왕래를 위해 선물을 보낸 기록도 상세하게 남아 있었다.계연수는 충격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임씨에게 또 다른 장부를 건넸다. 거기에는 사옥현의 처소에서 나간 모든 지출과 하인들에게 준 포상, 수리 비용과 정원 유지 비용, 왕래를 위한 지출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다 헤아려 보면 매달 지급되는 다섯 냥으로 부족할 때도 있었다.사씨 가문 사람들은 사교를 많이 하고 사옥현은 장손이니 누구네 집에서 무슨 일이 있다 하면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 보내야 했다. 이는 지출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계연수는 임씨에게 마지막으로 장부를 하나 건넸다.그것은 그녀의 점포의 최근 몇 달 간의 수익 내역이었다.비록 장사가 크지는 않지만 지출을 빼고 계산하면 월 백 냥 정도가 남았다.임씨는 장부를 덮고 멍하니 계연수를 바라보았다.계연수는 담담히 시어머니와 시선을 마주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사람을 시켜 제 처소로 보내 장부의 사실여부를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창고 안 물건은 종류별로 확인하기 쉽게 정리해 두었어요.”임씨는 착잡한 시선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물었다.“이걸 다 네가 기록했니?”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오가는 물건이 많으니 처음에는 창고 정리를 쉽게 하려고 기록을 시작했습니다.”둘째 부인도 장부를 살펴보고는 세세한 것들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한 것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작은 소리로 임씨에게 말했다.“기록은 상세하지만 만약에 아무렇게나 적은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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