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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화

눈처럼 고운 소리가 가는 눈발 속에 스며들어 그녀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을 머금었다. 심서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바로 뒤에 서 있던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이미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반쯤 마른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렸는데, 창백한 얼굴에 흘러내린 잔머리 몇 가닥이 찬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그녀는 맑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며 천천히 다가오다가 멈춘 자리에서 규범을 어기지 않는 정중한 태도로 깊이 감사의 만복례를 올렸다.힘이 덜 실린, 그러나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눈발 사이로 흘러왔다.“이번 일은 심 대인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수없이 흩날리는 눈송이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내려앉았다.심서준은 고개를 낮췄고, 시선은 오로지 계연수의 창백한 얼굴에만 머물렀다. 하얀 눈이 그녀의 머리칼과 어깨 위에 내려앉고 찬바람이 옷자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가냘픈 모습이었다.그는 눈썹을 낮추어 정리하듯 내리며 시선의 끝으로 그녀의 가늘고 흰 목덜미를 보았다.잠시 후,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 그녀 앞에 섰다.심서준이 물었다. 차갑고 절제된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의 흔들림도 실려 있지 않았다.“누가 한 짓인지 알고 있습니까?”그 말의 뜻을 계연수는 곧바로 알아들었다.조금 전, 용춘이 욕실에서 적독충 이야기를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마침 이명유가 가까이 다가왔던 순간 몰래 독충을 자신의 소매 속에 넣었다는 사실을 확신한 참이었다.‘그래서였구나. 그 여자가 그토록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살폈던 이유가.’다만, 심서준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계연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낮고 깊은 시선을 마주했고, 이내 가슴 한편이 다시 긴장으로 조여 왔다.아까 용춘이 전해준 말들이 문득 떠올랐다. 열에 들떠 제 옷깃을 붙잡았다는 이야기.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심서준 앞에서 예를 잃은 몸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에게 있어 그는 어른이었고 범접할 수 없는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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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그녀 자신에게는 그 은혜를 갚을 방법조차 없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 오히려 번거로움만 더해 줄 뿐이었으니.계연수는 고개를 숙였다.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지만 심서준 앞에서는 끝내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늘 이런 식으로 초라한 모습만 보이게 되는 자신이 스스로도 혐오스러워졌다. 마치 자신이 무엇인가 크게 잘못해 온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는 모두가 말하던 청풍명월 같은 군자를 믿고 기대를 품은 채 시집을 갔을 뿐인데 어째서 인생의 끝자락이 이토록 처참한 잔해로 남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계연수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이미 붉어진 눈을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애쓰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송구합니다…”고개를 숙인 채 단정히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귀걸이가 가볍게 흔들리고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아 분홍빛 옷자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심서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눈을 감았다.그래, 그만두자. 계연수가 무엇을 알겠는가?그녀는 이미 남의 부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대체 무엇을 깨닫게 하려 했단 말인가?그녀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놓지 못한 쪽은 오히려 그, 자신이었으니.자신의 몽롱한 욕망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여 가장 친밀한 일들을 꿈속에서 저질러 온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계연수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갖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탐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어쩌면 이게 나을 지도...만약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꿈속에서 자신이 그녀에게 저지른 일들을 알게 된다면…그녀는 틀림없이 자신을 독사처럼 피해 다닐 것이 분명했다.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그의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서 있는 계연수가 보였다. 그 모습에 심서준은 다시 미간을 좁혔다.“그렇게까지 제가 무섭습니까?”계연수는 이를 악물고 아주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심서준의 눈살이 더욱 깊어졌다.“계연수, 고개 들어.”늘 그렇듯 차갑고 엄한 목소리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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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차가운 바람이 계연수의 몸에 밴 온기를 머금은 채 그를 휘감았다.심서준은 손을 절반쯤 들어 올렸다가 그녀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눈동자는 맑고도 무구했다. 그 안에는 그를 향한 고마움과 조심스러운 경외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심서준은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가 끝내 움직임을 거두고 길게 탁한 숨을 내뱉었다.“제가 더 도와줄 일은 없습니까?”계연수는 잠시 얼어붙은 듯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심스레 되물었다.“정말 도와줄 겁니까?”심서준은 눈썹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는 몸을 돌리며 단 한 글자만을 남겼다.“네.”텅 빈 뜰에 계연수만이 남았다. 문하는 그 자리에 머물다 그녀 곁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씨 부인, 바깥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가 쉬시지요.”그는 이어 덧붙였다.“우리 나으리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좀 더 회복된 뒤에 떠나셔도 된다고요. 그리고 염려 마십시오. 이곳은 저희 나으리의 거처라 뜰 안의 하인들은 이미 물러났고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않습니다.”계연수는 문하를 바라보았다. 그가 심서준 곁을 지키는 측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한 걸음 물러서 정중히 예를 갖췄다.“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다. 게다가 이제 몸도 한결 나아졌으니 더 머물 이유도 없어.”그녀가 몸을 돌려 나서려 하자 문하는 급히 앞을 막아 섰다. 아직 복도 아래 화로에서 달이던 약도 다 마르지 않은 터였다.주인의 분부를 떠올린 그는 서둘러 말했다.“부인,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약이 곧 다 달여질 터이니 드시고 가시는 것이 나으리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길입니다. 게다가 이미 말도 맞춰 두셨습니다. 심씨 부인께서 부인을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셨다는 전갈을 시댁에도 전해 두었으니 조금 늦어져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계연수는 잠시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심서준은 늘 이렇듯 빈틈이 없었다.문득, 오래전 물에 빠졌던 해가 떠올랐다.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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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계연수는 바깥쪽 작은 응접실에만 머물렀다. 용춘은 무하가 건네준 손난로를 두 손에 쥐고는, 그녀의 뒤에 서서 온풍 화로로 젖은 머리칼을 천천히 말려 주고 있었다.그의 자세는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이곳이 심서준의 거처라는 사실을 의식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함부로 두지 않고 황단으로 짜인 원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차갑고 엄숙한 기운이 감도는 이 작은 응접실 안에서 그녀 몸에 걸친 한 줄기 연분홍빛은 마치 봄날의 풍경을 그대로 들여온 듯했다.문하는 무심코 시선을 훔쳐보다가 문득 생각했다.만약 이곳에 언젠가 정말 여주인이 생긴다면 이 차가운 공간은 어떤 빛깔로 바뀌게 될까?다시 계연수를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사옥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혼인한 여인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젊었고 눈매에는 가을 물결 같은 윤기가 깃들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오랫동안 곱게 보살핌을 받아온 듯한 부드러운 기운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연약해 보이기만 한 여인이 아니라 살이 찰 곳은 차 있고 가늘 곳은 가늘어 균형이 잡혀 있었다. 요즈음 유행하는 병약한 미감과는 사뭇 다른 아름다움이었다.문하는 괜히 또 생각이 번져갔다. 후작이 이 부인을 두고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춘 것이 정말로 단순한 우연일까하는 생각 말이다. 그는 스스로의 뺨을 슬쩍 때리며 정신을 차렸다. 이런 생각이 밖으로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머리칼이 거의 말라갈 즈음, 계연수는 창밖으로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몸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 속에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문득 밀려왔다.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조심스레 펼쳤다. 그 안에는 찾아낸 그 벌레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이 일의 끝이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지 그녀는 가늠할 수 없었다.측문으로 나서자 사옥현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이명유도 곁에 서 있었다.계연수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옥현은 그녀의 망토 위에 내려앉은 눈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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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계연수는 이미 마차에 올라타 있었다. 마차 안은 널찍했고 이명유는 계연수의 뒤를 따라 올라탔다.그는 방금 계연수를 본 순간부터 줄곧 그녀를 훑어보고 있었다. 겉모습부터 속까지 샅샅이 살피듯, 머리칼 한 올 한 올까지도 놓치지 않았다.그러나 계연수는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었다. 단정하고 침착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머리 모양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비녀가 꽂힌 위치조차 변하지 않았다.그런데도 어딘가 이상했다. 이명유의 시선이 계연수의 치맛자락에 머물렀다. 곧이어 마지막으로 올라탄 사옥현을 힐끗 보고는 계연수에게 물었다.“형님, 옷을 갈아입으신 겁니까?”이명유의 말에 사옥현도 계연수 곁에 앉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심부에서 옷을 바꿔입었느냐?”계연수는 담담히 답했다.“심씨 부인과 말씀을 나누던 도중 시녀가 차를 올리며 실수로 옷을 적셔서요.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사옥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심씨 부인이 너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니, 의외군.”그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계연수의 부친은 예전에 심가의 노수보에게 총애받던 제자였고 심씨 부인이 계연수를 몇 번 본 적이 있다면 따로 불러 옛정을 나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이명유는 사옥현이 계연수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소매 속 자신의 주먹을 아프도록 세게 움켜쥐었다.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형님, 오늘 말도 없이 먼저 가셔서 저희가 한참을 찾았잖아요. 형님께서 외진 쪽으로 가시는 걸 봤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곳이 심 후작의 거처더라고요. 혹시라도 귀인을 노엽게 하신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무사히 나오셔서 다행입니다.”계연수는 이명유를 한 번 바라보았다. 말은 모호했고 듣는 이로 하여금 괜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뉘앙스였다.그녀는 가볍게 웃었다.“제가 어디로 갔는지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참 감사합니다.”이명유는 잠시 굳어 있다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전 늘 형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다만 형님께서는 혼자 계시는 걸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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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계연수는 사옥현의 그 공허한 말들이 몹시도 괴로웠다. 겉으로는 늘 평온과 체면을 유지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사실 그녀는 묻고 싶었다. 그의 아내라면 모든 것을 그의 뜻에 맡겨야 하는 것인지, 눈 오는 날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인지, 모든 편애와 배려는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 정상인지, 그 후에 밀려오는 씁쓸함까지 곧 그의 아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지.그러나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끝내 그 말들을 삼켰다. 얘기를 꺼내는 순간, 그것은 원망이 되고 불평이 되며 지난 시간에 대한 분노가 될 게 뻔하니까.그렇다면 오랫동안 쌓여 온 억울함을 그에게 쏟아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그건 아직도 그에게 기대가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그런 기대 따위는 사라진 뒤였다. 계연수는 얼굴에 드러난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이마를 짚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나으리, 정말 피곤합니다.”그 짧은 한마디에는 짙은 피로가 스며 있었다. 그 순간, 사옥현의 목까지 차오르던 말들이 한꺼번에 막혀 버렸다.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계연수 앞에서 이렇게 손쓸 수 없는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무력감이 그를 집어삼켜 마치 자신이 그녀 앞에서 한없이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그녀가 자신을 싫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때는 창가마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기 위해 켜 두었던 등불이 있었고 귀에는 늘 그녀의 부드러운 안부가 맴돌았는데...이명유가 곁에 있지 않았다면 그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초조하고 무력한 짐승처럼 포효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명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늘 차갑기만 하던 사옥현의 얼굴에 스친, 어딘가 애써 누그러뜨린 기색까지도.그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옥현에게 이렇게까지 거절할 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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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그녀는 말을 잇다가 문득 사옥현을 바라보았다.“아가씨와 함께 원숭이 연희를 보러 가는 일이 급한 거라면 저는 길가에서 다시 마차를 부르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로 나으리를 탓하는 게 아닙니다.”그 순간, 사옥현의 곧게 펴 있던 등이 갑자기 눈에 띄게 무너졌다. 그는 계연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 얼굴에 스치는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라보다가 문득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먼저 너를 집에 데려다준 다음에 명유와 나가겠다.”계연수는 사옥현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의 이런 결정은 솔직히 말해 예상 밖이었다.사옥현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건 이명유였다. 사실 그녀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기에 길가에서 내려 혼자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옥현이 이렇게 말한 이상 더 다툴 기력도 없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제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계연수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차 안은 잠시 적막에 잠겼고 차륜이 구르는 소리만이 낮게 이어졌다.이명유는 계연수를 힐끗 보다가 이번에는 사옥현을 향해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형수님, 혹시 화가 나신 겁니까?”그러고는 다시 말했다.“오라버니 저는 나중에 데려가셔도 괜찮습니다. 전 안 봐도 됩니다.”사옥현의 시선은 줄곧 계연수 쪽으로 흘러가 있었다. 계연수는 턱을 괴고 창가에 기대어 앉아 바람에 따라 들썩이는 발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마차 벽 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고 이쪽을 향한 시선은 단 한 번도 주지 않았다.예전에는 늘 먼저 그의 곁으로 다가오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사옥현은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한때 계연수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자신의 바람대로 멀어져 버리자 마음 한편이 텅 빈 듯 허전한듯 했다. 그는 계연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명유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만을 담고 있었고 정이 가득 차 있었다.원래는 이명유에게 다음으로 미루자고 말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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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사옥현의 말에 계연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고개를 저었다.“원숭이 연희는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나으리께서는 굳이 저를 챙기실 필요 없습니다. 어서 가보세요.”그 말에 사옥현은 문득 그날 눈 내리던 밤을 떠올렸다. 그날도 그녀는 같은 말을 했다. 명유가 기다리고 있으니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고.너무도 당연하고 지나치게 너그러운 태도였다. 마치 부군이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가는 일이 그녀에게는 이미 일상이 된 것처럼 말이다. 가슴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점점 자리를 넓혀 갔고 무력감은 어느새 공포로까지 번지고 있었다.사옥현은 계연수를 깊게 바라보며 쉬어 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계연수… 네가 원한다면 내가 남아 줄게. 너와 이렇게 오래 함께하지 못한 지도 꽤 됐으니까.”계연수는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나으리, 저는 필요 없습니다.”그녀는 말하며 사옥현이 붙잡고 있던 손목에서 바로 손을 빼냈다. 그리고 단정히 예를 갖춰 인사를 한 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눈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니 어서 가보시지요. 아가씨께서 몸도 약한데 이런 날 밖에 오래 서 있으면 감기에 들 겁니다.”그 말을 끝으로 계연수는 더는 사옥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려 하지 않았다. 곧장 몸을 돌려 붉은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사옥현의 얼굴에 스친 그 미묘한 바람을.그러나 그 표정이 이제는 역겨웠다.아마 그는 늘 그녀가 자신을 좇고 묵묵히 상처받는 것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더는 아파하지도 매달리지도 않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진 것일 터.계연수는 그가 갑자기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이 모든 행동은 죄책감이나 후회가 아닌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버린 그녀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그는 이때까지 그녀의 인내와 순종을 당연하게 여겨 왔었다. 그런데 그녀가 더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 움직이지 않자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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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이제 막 술시가 지났기에 그가 그리 늦게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예전의 계연수는 이렇게 이른 시각에 잠든 적이 없었다. 설령 먼저 잠자리에 들었더라도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만 들리면 곧바로 일어나 그의 옷을 갈아입혀 주곤 했다.오늘은 밖에서 이명유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길에서 동료들을 마주쳤는데 이명유는 휘장을 쓰고 있었기에 그들로서는 곁의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자연스레 그녀를 그의 아내로 여겼다. 사람들은 그에게 부부 사이가 참으로 화목하다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옥현의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듯했다.그의 아내인 계연수와는 단 한 번도 단둘이 거리를 걸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예전에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마음속이 온통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계연수가 좋아한다고 했던 꿀대추떡을 내려다보았는데, 꿀대추떡은 이미 식어 있었다.사옥현은 문을 열려다가 손을 허공에서 멈췄다.사실 그는 계연수가 불만이 있다면 차라리 그에게 따져 묻고 화를 내고 터뜨리기를 바랐다. 그래야 적어도 그녀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야 아직도 그녀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을 테니까.그런데 그녀는 왜 더 이상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걸까?어쩌면 그녀가 너무 그를 신경 쓰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사옥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연수의 이런 행동이 못내 이해되지 않아 내쉬는 무력한 한숨이었다.그는 그저 그녀가 더 이상 이명유를 겨냥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그녀는 늘 모든 것을 이명유와 겨루려 들었고 이제는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사옥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결국 문을 힘주어 밀어 열었다.실내는 어둑했고 은은한 먹향과 과일 향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자세히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소박한 대나무 침상으로 시선을 옮겼다.방 안에는 계연수 혼자 잠들어 있었다. 날이 추웠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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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꿀대추떡을 좋아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아가씨였어요. 그리고 저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으니 나으리께서도 이만 돌아가세요.”사옥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결국 네가 바라는 건 내가 너를 더 신경 쓰는 것 않니더냐? 내가 명유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보다 많다고 느끼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고. 앞으로는 최대한 안채로 돌아와 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 되지 또 무슨 성질을 부리는 것이냐?”말끝과 함께 그의 시선이 계연수의 얇은 옷 아래로 흐르듯 내려갔다. 등불 아래 드러난 얼굴은 꽃처럼 곱고 선이 살아 있는 몸선은 은근한 요염함을 띠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따뜻한 향이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사옥현은 그녀와 한 침상에 드는 일이 많지 않았음에도 계연수의 몸이 자신을 흔들어 놓는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낮아졌고 눈빛에는 미묘한 열기가 실렸다.“아이를 하나 낳자. 아이만 생기면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니까.”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계연수는 조용히 고개를 틀어 피했다.사옥현의 손끝은 허공에 멈췄고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계연수라면 결코 피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계연수는 이런 위선적인 말투에 익숙해졌기에 그의 친근함이 더 이상 은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한 듯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나으리,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합니다. 그리고 나으리께서 아가씨 곁에 있는 걸로 제가 괴로워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말을 마치고 손을 내린 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사옥현을 바라보았다.목소리는 늘 그렇듯 부드러웠다.“저는 괴롭지도 않고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느끼는 건 나으리입니다. 헌데 이렇게 말해도 아마 믿지 않으시겠지요.”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여긴 제 서재입니다. 나으리의 서재는 아무나 못 들어오게 하시잖아요. 헌데 왜 제 서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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