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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Capítulos

제11화

모습을 보아하니 그는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얘기를 듣고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어머니를 보러 다녀온 듯했다.그런데 이 시간에 안채로 찾아온 것은 아침에 했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계연수가 시녀들을 물리고 이혼 얘기를 꺼내려던 순간, 사옥현은 싸늘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니께서 병환이 깊으시다 들었는데 내가 돌아왔을 땐, 명유가 혼자 어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맏며느리로서 어찌 이토록 시어머니를 소홀히 대할 수 있지?”“어찌 병약한 명유를 홀로 그곳에서 고생하게 할 수 있지?”계연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옥현을 바라보았다.“소홀히 대한 적 없습니다. 오전에 어머니께서 병환이 깊으시단 전갈을 듣고 바로….”사옥현은 잔뜩 실망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을 끊었다.“연수야, 난 네게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다.”“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모두가 네게 잘못한 것처럼, 혼자만 피해자인 것처럼 구느냐?”계연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 놓인 희고 고운 손가락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부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사옥현의 눈빛은 차갑고 냉담했다.“단지 그날 밤 내가 먼저 너를 구출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서 사사건건 명유를 물고 늘어지며 내게 압력을 넣고 있지 않느냐?”“불만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면 되지, 어찌하여 어머니의 병중에 이런 불란을 만드는 것이냐?”“지금 이 순간까지도 명유는 어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다.”계연수는 쓴웃음을 억누르며 사옥현을 바라보았다.“그러니까 부군께서는 제가 시어머님 곁에 있지 않은 것이, 부군에게 감정이 상해서 일부러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사옥현은 실망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심술인지 아닌지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 다만 이런 성품으로 어찌 집안의 안주인으로 임할 수 있으며 또 어찌 후원을 관리할 수 있겠느냐?”“내 비록 공무가 다망하지만 네가 시집 온 이후로 집안에서 너를 한번이라도 소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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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녀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사옥현은 이미 고씨 집안이 변을 당한 일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 일로 그녀가 자신에게 부탁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처음부터 그가 도와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귀로 듣고 나니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어깨에 걸쳤던 겉옷이 미끄러지고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가 한쪽으로 쏠렸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는 피로와 병색이 가득했지만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는 그 모습마저 안개처럼 포근해 보였다.용춘은 서둘러 다가와 떨어진 겉옷을 다시 걸쳐주며 안타까워했다.“나으리께서 뭔가 오해하고 계신가 보네요. 잘 설명만 드리면 이해하실 거예요.”계연수는 이혼서를 다시 용춘에게 건네주며 잘 보관하라 명했다. 그러고는 조금 전 몸이 기울며 깨끗한 종이 위에 떨어진 작은 먹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고 회복될 수 없었다.다음날 아침, 사옥현은 안채에 들르지 않았다. 그저 시종을 시켜 옷만 서재로 가져갔을 뿐이었다.계연수는 그가 또 한동안 처소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무덤덤한 그녀에 반해 용춘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부인, 나으리께 어서 설명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계연수는 탕약을 마시고 빈 그릇을 용춘에게 건네며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번에는 들어줄지 모르지. 그럼 다음에는?”용춘은 안쓰러운 눈길로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들어보니 나으리께선 이미 명유 아씨를 위해 혼처를 알아보신다고 해요. 내년 봄이면 혼사를 정한다고 하던걸요.”“명유 아씨만 시집을 가시면 더 이상 두 분의 사이를 이간질할 사람이 사라질 테니, 그때쯤이면 나으리도 반드시 마음을 돌릴 거예요.”계연수는 탄식하며 말없이 창밖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일어섰다.사옥현은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를 뵈러 갔다. 임씨는 아들을 보며 낮게 탄식했다.“일찍 조회에 나가야 하는데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사옥현은 어머니 앞으로 다가가 입술을 앙다문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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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임씨는 의아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마도 아들이 여전히 이명유를 연모하기에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거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고 아들은 비록 냉담한 성격이지만 오직 이명유에게만 다정했다.임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네 생각이 어떻든 나는 그저 손주를 빨리 봤으면 좋겠구나.”사옥현은 입술을 꾹 깨물며 밖으로 나가다가 시종을 시켜 계연수에게 약재와 보양품을 보내라고 분부했다.그는 어젯밤 가자마자 그녀를 나무란 것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오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일찍 돌아가서 달래주리라 생각했다.사옥현은 그제서야 요즘 바빠서 계연수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이날도 계연수는 아침 일찍 시어머니에게 문안을 갔다.임씨는 병색이 짙어진 그녀의 안색을 보고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너도 많이 아프니 당분간은 시중을 들러 오지 않아도 된다.”“시녀와 어멈들이 있고 명유도 자주 와서 말동무를 해주니, 너는 안심하고 몸부터 잘 추스르렴. 그래야 아이를 빨리 가질 수 있지.”계연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어머님을 모시는 것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임씨는 조용히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창백하긴 해도 눈처럼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요염함 속에 온화함이 있고 자태는 곱고 아리따웠다. 이런 용모라면 사옥현도 그녀를 냉대할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아이가 생기지 않고 있으니 의아할 따름이었다.의원과 태의도 여러 번 와서 진맥을 했지만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임씨는 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하고는 계연수에게 이만 물러가라고 했다.방에서 나온 계연수는 평소처럼 어멈에게 임씨의 병세를 묻고 음식에 관해 주의할 점을 일러준 뒤, 밖으로 나왔다.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주오는 둘째 부인이 보였다. 둘째 부인은 계연수를 힐끗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걱정의 말을 건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임씨에게 아부하는 둘째 부인을 힐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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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밖에서 고준안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담자색 치맛자락에 수려한 자태가 보이자 그는 손에 땀을 쥐고 걸음을 늦춘 후, 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연수야.”오랜만에 만난 고준안은 어릴 때보다 준수하고 빼어난 외모에 안정된 느낌까지 주었다. 그는 더 이상 기억 속에 항상 그녀를 놀리던 그 고준안이 아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미소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준안 오라버니, 잘 지내셨나요?”고준안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잘 지냈지.”말을 마친 그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이때, 밖에서 고씨 가문의 큰 부인과 둘째 부인이 들어왔다.둘째 부인은 아들 걱정 때문에 눈빛이 퀭하고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반면, 큰 부인은 여전히 단정하고 우아했다. 그녀는 계연수를 보고도 반가운 기색 하나 없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오기 전에 연락이라도 보내지 않고?”계연수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급하게 오느라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했네요. 다음엔 주의하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큰 부인 곁에 있는 여인이 안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웃었다.“몇 달 만에 림이도 많이 컸네요. 키가 더 커진 것 같아요.”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큰 부인 등 뒤에 선 고준안만 할 말 많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계연수를 대신해 나서주고 싶었지만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평생 나에 대한 원망을 기억하고 살 거니….’사탕을 받은 세 살 고림만 꺄르르 웃으며 계연수를 반겼다.둘째 부인이 계연수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며 물었다.“네 부군과는 얘기를 해봤니?”“이번에 도와주면 우리 집안에서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얼마가 필요하든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말을 마친 둘째 부인은 울음을 터뜨렸다.“우리 집안은 완전히 무너졌어. 네 외삼촌들은 네 아버지 일에 연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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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계연수는 감정을 숨기는데에 능숙했다. 그녀는 시뻘겋게 충혈된 둘째 숙모의 눈을 마주하니 그 애타는 마음을 알 것 같아 차마 심한 말을 할 수 없었다.“준이 오라버니가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가슴이 아프고 초조해요. 최선을 다하겠지만, 조급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외할머니를 일단 만나보고 얘기해요.”옆사람들도 둘째 부인을 말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방씨는 계연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대청을 나온 계연수는 팔목에 선명히 찍힌 자국을 보며 무력감이 몰려왔다.예전에 두 외삼촌들은 모두 그녀에게 다정히 대해주었다.하지만 아버지가 변을 당한 그날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다.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병조 판서로, 그때 즈음 호인족들이 서부를 빈번히 침범하고 전장에서 계속 패배하면서 불과 일년 사이에 성 200개를 잃은 사건이 있었다.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병부 좌시랑으로 경약을 추천하고 또 몇몇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장령으로 추천했으니, 원래대로라면 무조건 이기는 전장이었다. 그러나 후방에서 군량미 조달이 늦어지고 아버지와 불화가 있던 병부 부관이 공로를 탐내어 함부로 진격하였으며, 학사들이 분분히 재촉하는 바람에 출병의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 크게 패하게 되었다.그번 패배로 그녀의 아버지는 수많은 탄핵을 맞았고 당파를 형성하고 직위 임명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아버지의 실수는 아니었으나 결국 죄는 정해졌고 가문의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두 외삼촌은 단지 아버지의 천거를 받은 적이 있고 친척이란 이유만으로 연좌되어 경성밖으로 좌천되었다.결국 둘째 외삼촌은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그후 계씨 가문과 친분이 두터웠던 이들은 자신들에게 피해가 갈까, 하나둘씩 관계를 끊었다.외조부 가문도 풍파를 피하지 못했다.지난일들은 비록 5년이 흘렀어도 다시 떠올리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하룻밤 사이 혈육의 정마저도 옅어져 버린 것이다.영안당에 도착하니, 문 앞까지 마중 나온 어멈이 계연수를 맞아주었다.“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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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고씨 노부인은 애틋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주름진 손가락이 매끈한 얼굴을 스치더니 곧이어 눈가가 붉어졌다.“연수야, 네가 힘든 건 할미도 알고 있다. 의지할 친정도 없이, 사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으니 그들이 너에게 잘해줄 리 없겠지.”“두 숙모들도 속으로 원망이 많단다. 네 아비 사건으로 네 외숙들까지 연루되었다며 네게 원한을 품고 있어.”“하지만 너무 마음 쓰진 말거라. 이번 일은 네 힘 닿는 데까지만 도와주고 절대 옥현이와 정분을 상하지 않게 하렴. 안 그러면 가문에서 더 힘들어질 테니.”“이 할미는 너를 잘 알아. 넌 항상 안 좋은 일은 가족에게 말하지 않지. 네 숙모들은 이 할미가 막아줄 테니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준이가 돌아오든, 돌아도지 못하든 그건 다 운명이야. 이 할미는 그저 네가 시댁에서 잘 지내기만을 바란단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그 말을 들은 계연수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감정을 추스른 후, 외할머니의 어깨에 기댔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끝내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시댁에서 처지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고 말할까?준 오라버니를 구해낼 자신이 없다고 말할까?부군인 사옥현은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고, 자신과는 남남이 되어버려 할머니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말할까?하지만 모든 걸 털어놓아도 힘들어할 사람만 늘어날 뿐이었다.따뜻한 손길이 다가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계연수의 눈가가 또다시 젖어들었다.“저… 부군과 이혼하고 싶습니다. 할머니, 저를 원망하실 건가요?”고씨 노부인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계연수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노인은 외손녀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말헀다.“연수야, 그동안 사씨 가문에서 고생 많이 했구나. 내 어찌 너를 원망하겠어.”말을 마친 노인은 계연수의 등을 토닥이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사씨 가문에서 너를 그렇게 푸대접한다면 일찍 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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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외할머니의 방을 나선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살짝 닦고 용춘에게 물어 울었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야 안심했다.어머니의 처소로 발길을 돌리는데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꽃송이가 얼굴에 부딪쳐도 그리 차가운 느낌도 들지 않았다.혜란원 문 앞에 나와 기다리던 시녀는 계연수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허둥지둥 달려나왔다.“아씨께서 오셨다는 얘기를 방금 들으시고 부인께서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아씨께서 좋아하시는 산군차와 몸을 데우는 생강차를 끓이고 아씨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계연수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서 다정하게 물었다.“어머니 몸은 좀 나아지셨느냐?”춘화가 급히 답했다.“아씨, 걱정 마세요. 부인은 요즘 정신이 훨씬 맑아지셨습니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춘화가 다가와 망토를 받아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부인께서도 며칠 전에 아씨 얘기를 하셨는데 한번 나오시기 쉽지 않으니, 부인께서도 오늘 아씨를 보시면 힘이 나실 거예요.”계연수의 시선이 실내의 물건들을 스쳤다. 여러 해가 지났어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이곳은 어머니가 시집 가기 전 살던 처소였는데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난로에서는 탕약이 끓고 있고 처마 아래에 매달린 풍령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그녀는 그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춘화에게 말했다.“내가 보낸 서신들, 어머니께선 다 보셨니?”춘화가 답했다.“아씨께선 늘 좋은 일만 알리시니, 부인께선 매번 서신을 여러 번 읽으시곤 하신답니다.”“아씨의 서신을 보실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서 일어나서 걸으실 때도 있었어요. 부인께서는 아씨가 좋은 낭군을 만나 시집을 잘 갔다고 기뻐하셨습니다.”계연수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며 소리 없는 미소로 표정을 감추었다.그러고 나서 느린 걸음으로 부엎으로 향했다.장롱을 여니 안에 든 보신용 보약은 많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자주 드시던 하수오나 해삼은 이미 오래전에 떨어져 없었다.귀원과 황정 같은 평범한 보신 약재만 남아 있을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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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병풍을 지나치니 침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가 보였다.고씨는 방 안에서 양털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병색이 만면한데도 여전히 용모가 아름다웠고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지만 일거수일투족이 여전히 우아했다.계연수는 조용히 침상으로 걸어갔다.그녀를 본 고씨의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몸을 약간 일으켜 앉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눈길로 계연수를 아래위로 꼼꼼히 훑어보았다.최상급 옥비녀에 비싼 비단옷, 그리고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도 색채가 아주 좋았다.고씨는 이에 안심했다. 밖에서 무어라 말하든, 두 형수가 면전에서 딸이 시댁에서 잘 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빈정대든, 그녀는 믿지 않았다.그녀는 오직 딸이 하는 말만을 믿었다.고씨는 계연수의 손을 꼭 잡고 입을 열었다.“네 외할머니와 숙모들을 뵙고 오는 길이니?”계연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예, 안심하세요.”고씨의 표정에 약간의 울적함이 스쳤다.“네 숙모들은 네가 어릴 때부터 너를 귀여워하셨지만, 이제는 많이 다르구나. 너는 신경 쓰지 말거라. 그래도 가족인데 어떻게 네가 잘 되길 바라지 않겠니.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계연수는 미소를 머금고 어머니에게 말했다.“다 알고 있습니다. 마음 상한 적 없어요.”고씨는 딸의 미소를 보며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녀는 계연수의 손을 토닥이며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난 괜찮으니 앞으로는 나 보러 일부러 오지 않아도 된다.”말을 마친 고씨는 손을 뻗어 계연수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정리해 주었다. “요즘 네 사촌 오라버니 일도 아직 결론이 안 났고 네 어려움도 알지만, 한 집안 식구들이니 네가 도울 수 있으면 도와주렴.”“내 걱정은 할 것 없어.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네가 걱정스러워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진작에 네 아버지를 따라갔을 게야.”“지금 네게 중요한 일은 어서 사위와의 아이를 배는 것이야. 젊은 나이에 출세한 사람이니, 늦도록 아이를 못 가지면 지금은 첩을 들이지 않아도 나중엔 어떻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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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계연수는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손에는 그림을 든 채, 안내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3층 입고에는 비단옷을 입은 수려한 소년이 서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는 급히 앞으로 나와 길을 인도했다. 병풍 두 개를 지나니, 서재에 이르렀다.눈앞에 펼쳐진 것은 자단목 나무로 만든 커다란 책상이었다. 책상 뒤에는 나이 마흔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책상 위에 가득 펼쳐진 그림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선택된 그림들은 오늘 오후 사람들에게 경매로 제공될 그림들이었다.사내는 계연수를 보자 급하게 일어나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탁자 위에는 따뜻한 차와 화병이 놓여 있었다.계연수는 그림을 건네며 공손한 목소리로 물었다.“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장해는 급히 두 손으로 그림을 받아들고는 한숨을 쉬었다.“부인의 그림은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합니다. 그저 석란거사라는 이름만 내비쳐도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원할 것입니다.”석란거사는 계연수의 호가 아니라 그녀 아버지의 호였다.장 선생은 그녀 아버지와도 친우였고 그녀의 그림은 모두 아버지에게 직접 전수받은 것으로, 그리는 사람이 바뀌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그녀는 처음에 아버지의 호를 쓰고 싶지 않았으나, 장 선생이 그녀에게 서신을 보내 포산루에 석란거사의 그림이 사라진 이후로 손님이 많이 줄었다고 하여 그녀에게 붓을 다시 들어줄 것을 청했다. 경매로 낙찰된 은화는 여전히 4대6으로 나누기로 했다.그녀가 사씨 가문에 시집을 간 후, 시어머니는 그녀를 경계하여 매달 마땅히 지급될 물건들은 결코 박대한 적이 없지만 손에 현금이 없었다.시종들에게 포상을 주거나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게다가 어머니는 약을 끊을 수 없고 비록 외할머니께서 걱정 말라고 했지만 숙모께서 집안을 관리하시니, 날이 갈수록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조금 더 보태주면 어머니께서 외조부 댁에서 지내시는 날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었다.계연수는 장 선생의 초대를 받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석란거사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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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계연수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가 다시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이곳에서 심서준을 만날 줄이야.그는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주가 어떻게 납작 엎드리며 아첨하든,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그는 두 손을 등 뒤로 하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지만 우아한 몸짓과 체형은 곁에 있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계연수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심서준은 타고나길 냉랭한 사람이고 차갑기로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아첨하려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는 늘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었다.몇 걸음 사이, 두 사람은 계단 위에서 마주쳤다.심서준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고 방금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외에는 그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그녀는 가장자리로 조용히 물러섰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냉향이 풍겨왔다. 그는 그녀를 지나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계연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서신을 읽었을지, 아니면 귀찮아서 한쪽에 내팽겨쳤을지 궁금했다.결국 그와 그녀는 하늘과 땅 차이였고, 어릴 적 나눈 하찮은 연정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일 것이다.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천천히 그를 따라갔다. 그녀는 천천히 힘겹게 입을 열었다.“심 대인….”입을 여는 순간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 어릴 적 그를 서준 오라버니라 부르던 기억이 났다.아버지가 진사시험에 응시하던 해, 심 재상이 과거시험을 관장했고 그해 급제한 진사들은 자연스레 심 재상을 스승으로 삼았다.그해 탐화랑이었던 아버지는 노재상의 눈에 들어 문하에서 가장 중시하는 제자가 되었다.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심씨 저택을 방문하였고 매번 그 집에 방문할 때면 그녀는 그를 쫓아다니고는 했다.비록 얼굴은 늘 냉랭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그를 따라 서재에서 책 읽는 것을 지켜볼 때도, 그는 그녀를 내쫓은 적이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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