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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화

벌써 혼인한 지 삼 년이 다 되어 가니 자식 문제를 걱정해 일부러 처방까지 써서 가져다주었건만, 문전에서 사람을 만나주지도 않고 체면만 차리다니.사금희는 한 번 더 냉소를 흘렸다.이대로 가다가는 사옥현이나 시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텐데 그때 가서 울며불며 찾아와 애원해 봐야 소용없을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소매를 여미고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섰다.방 안의 시녀는 이 광경을 보고 사금희가 노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대놓고 나으리 앞에 가서 작은 마님의 흉을 볼 수도 없어 마음속으로만 근심이 쌓였다.이 사금희라는 사람은 본디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인물이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렸고 나으리와 작은 마님의 화목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불씨를 부추기는 데 익숙한 그녀였다. 그나마 계연수가 참고 넘기니 이 정도지, 조금이라도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더라면 사금희가 올 때마다 마당이 한바탕 뒤집혔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계연수는 사금희가 사옥현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괜히 말을 아끼지 말고 차라리 불을 더 키워 주었으면 싶었다. 사옥현이 분노에 휩싸여 그 이혼서에 단번에 이름을 적어주게 말이다.어젯밤 갈기갈기 찢겨 나간 이혼서를 떠올리자 계연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한 획 한 획 정성 들여 쓴 것인데 다시 써야 하다니.계연수는 종이를 펼치며 바깥 하늘을 힐끗 보았는데, 이미 빛이 가라앉기 시작한 시각이었다. 속으로 대충 시간을 가늠한 뒤 고개를 살짝 돌려 용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반 시진 뒤에 나가서 마차 하나를 부르거라. 후문에 세워 두고 나를 기다리게 해.”용춘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사씨 댁에도 마차가 있잖아요.”계연수는 붓을 들어 이혼서를 다시 쓰며 짧게 답했다.“불편해.”사씨 댁의 마차에는 모두 집안 표식이 붙어 있었기에, 지금은 쓰기 어려웠다.계연수가 집을 나선 것은 마침 유시 무렵이었다. 앞채에 있던 어멈은 그녀가 이 시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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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사실 계연수는 어린 시절 심서준과 자주 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두어 달에 한 번씩 심부를 찾았는데, 그마저도 대부분은 공적인 일 때문이었기에 계연수가 매번 그를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이나 일곱 살 즈음, 기억이 또렷해질 무렵부터 자연스레 몸에 밴 습관처럼 계연수는 심서준의 훤칠하고 길게 뻗은 체구와 놀랄 만큼 단정하고 빼어난 얼굴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문득문득 그를 찾아가고 싶어졌다. 한편, 심서준은 처음부터 계연수를 반기지는 않았다. 그때의 계연수는 아직 어렸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어렴풋이나마 느낄 줄은 알았다. 다만 심서준은 너무도 잘생겼고 그의 방 안에는 좋은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노수보는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라, 늘 웃는 얼굴로 계연수를 맞이해주었다. 게다가 심서준이 항상 혼자서만 지내니, 그녀에게 자주 찾아가 말을 붙여 주고, 함께 나가 걸어달라고 부탁도 했었다.그 무렵의 계연수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 겁이라는 것을 잘 몰랐다. 비록 심서준을 밖으로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서재에 들어가도 쫓겨나지는 않게 되었다.그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계연수는 다보각 앞에 서서 그의 보물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고 그가 자리에 앉아 글씨를 쓰면 계연수는 맞은편에 엎드려 조용히 그의 손놀림을 바라보았다.심서준은 그녀가 자신의 물건을 만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계연수가 먼저 다가가 소매를 잡으면 굳이 떼어내지는 않았다.그날은 초가을이었고 햇빛은 유난히도 맑았다. 열두 살이 된 계연수는 이미 남녀의 분별을 알고 있어 예전처럼 심서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계연수는 글과 그림을 좋아했고 심서준의 서재에는 이름난 서예와 화첩들이 가득했다. 그가 안쪽 방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계연수는 병풍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에서 그가 모아 둔 고화들을 찬찬히 감상했다.열두 살을 넘긴 뒤로 두 사람은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마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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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그녀가 도착했을 때, 심서준은 이미 그곳에 서 있었다. 얼마나 먼저 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계연수가 이렇게 가까이서 심서준을 바라본 것도 꽤 오래만이었다. 이만큼 가까이에서 보니 그는 훌쩍 더 자라 있었고 예전보다도 훨씬 준수해 보였다. 경성에서 심서준이 지나가는 곳마다 여인들이 앞다투어 시선을 던진다는 말이 괜한 소문은 아니었다. 그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면 사람들 또한 이유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그 당시 심서준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연수는 단 한 번도 그의 속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차갑고, 높고, 손이 닿지 않는, 나이가 들수록 그녀는 그 앞에서 점점 더 위축되었다. 그 두려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심서준은 마치 구천 위의 신불 같았다. 칠정도 없고 희로애락도 없으며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심판하는, 감정 없는 대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의 앞에 서면 누구나 저절로 몸가짐을 가다듬게 되는 것 같았다.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순간마다 계연수의 마음은 이유 없이 흔들렸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그날, 심서준은 그녀의 허리에 찬 옥패를 가리켰다. 그가 건넸던 그 옥연환이었다. 선물이라 하기엔 애매한 물건.그는 옥패를 가리키며 앞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차고 다니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 말에 계연수는 그가 옥패를 준 것을 후회하는 줄 알고, 가슴이 조여 오는 듯 불안해져 급히 옥패를 풀어 그에게 돌려주려고 했다.그녀의 반쯤 뻗은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추위에 얼어 손끝이 붉어져 있었지만 심서준은 그것을 받아 들지 않았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옥패는 그녀의 생일 선물이라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거든 그 옥패를 지니고 찾아오면 그가 한 번은 도와주겠다고 했다.그날, 열여섯의 심서준은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와 몸을 숙였고, 귀 가까이에서 낮게 말했다.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고. 아무리 큰 부탁이라도, 설령 약조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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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깊은 밤, 거위털 같은 큰 눈발이 두 사람 사이에서 어지럽게 흩날렸다. 마치 흰 장막처럼 서로를 갈라 두 개의 세계를 만들어 놓은 듯했다.심서준의 좌우에는 네 명의 수행원이 따르고 있었고 그들의 손에 들린 유리등에서 흘러나온 밝은 빛이 그의 검은 여우 모피 대공 위로 떨어졌다. 길고 곧은 그 실루엣은 말없이도 보는 이들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그녀의 등 뒤에는 어수선하게 무너진 현실이 있었고 그의 앞에는 그가 데려온 냉랭하고 차가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계연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간 채, 투명한 베일 사이로 그를 바라보며 한마디 말이라도 건네기 위해 노력했다.그러자 심서준 곁에 서 있던 수행원이 급히 그녀를 막으려 했으나 심서준은 그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고, 수행원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계연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골목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꽤나 매서웠다. 그 바람은 그녀의 얇고도 고운 몸선을 향해 몰아치며,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 드리운 흰 베일을 스치며 눈처럼 고운 피부 위를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베일 아래로 드러난 작은 턱과 코끝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또렷한 살구빛 눈동자는 조급하면서도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그 안에는 기대와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금빛 무늬가 박힌 붉은 망토에 감싸인 작은 몸. 그녀가 가느다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손목에 드러난 희디흰 선이 눈에 띄었다.하지만 심서준은 그저 그녀의 얼굴을 스치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거의 그의 앞에 다다르려는 순간, 그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대문 쪽으로 향했다.심서준은 계연수 앞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이 여인은 애초에 이렇게 여러 번 그의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그의 뜻을 알아챈 수행원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 계연수의 길을 가로막아 더 이상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게 했다.눈앞을 가로막은 건장한 호위를 사이에 두고 계연수는 그의 길고도 곧은 뒷모습이 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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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밖의 눈보라와도 같이, 아무리 거부해도 바람은 결국 틈을 찾아 스며드는 법이었다.심서준은 밖에 있던 문하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심서준은 서안 뒤에 앉은 채 마치 아무 생각 없다는 듯 물었다.“갔느냐?”문하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대답했다.“아직인 듯합니다.”심서준은 문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긴 침묵이 흐른 뒤, 서안 위에 놓인 옥패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덧붙였다.“그럼 들이거라.”문하가 정문으로 갔을 때, 그 여인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밤에 계속 바깥에 서 있던 것이었다.문하는 그녀의 신분을 가늠해 보려 했으나 마차는 표식 하나 없는 평범했으며, 어느 세가의 것처럼은 보이지도 않았다. 눈 속에 선 여인은 체구가 작았고 은여우 망토를 걸친 채 베일 달린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이나 미모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무엇이 이 여인을 특별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으나 문하는 끝내 공손한 태도로 계연수에게 다가가 편문으로 안내하겠다고 청했다.한밤중에 여인이 방문한 만큼 후작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문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지는 않겠지만 혹여 들키기라도 한다면 곤란했다.계연수는 얼굴이 드러날까 두려워 모자에 달린 흰 베일을 손끝으로 꼭 붙잡았다. 이런 배려는 사실 그녀가 바란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심서준과 어떤 관계를 엮어 세상의 입에 오르내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평생 숨기고 가려 했던 그 옥패를 결국 도움을 구하는 데 쓰게 될 줄이야.지금의 그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존재와도 같았다. 어쩌면 자신을 잊었을지도 모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 번 얼굴을 봐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감사할 따름이었다.심서준의 서재는 유난히 고요했다. 이곳은 계연수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여러 해 동안 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스며드는 익숙함이 있었다.시종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외실로 향했다. 얼어붙어 붉어진 손으로 김이 오르는 찻잔을 꼭 쥐고 있으면서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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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그녀는 오랜 인사도, 지난 인연을 상기시키는 말도 하지 않았다.계연수는 알고 있었다. 심서준은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그는 이 옥패로 자신이 그를 찾는 것 역시 달가워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해의 약속은, 어쩌면 그의 무심한 한마디였을 뿐일지도 모른다.오늘 그녀가 온 것도 결국은 물건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함이고 이제 다시는 이 옥패를 들고 그를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심서준의 시선은 줄곧 바닥에 꿇은 그 짙푸른 빛의 몸선에 머물러 있었다.그녀가 마루 위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희고 고운 귓불에 달린 청옥 귀걸이가 턱 아래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고 있으니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그는 숨김없이 그녀를 살폈다. 그녀의 검은 머릿결은 이미 쪽진 머리로 단정히 올려 묶여 있었고 꽃비녀 하나가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보수적인 암문이 들어간 높은 깃은 목선을 빈틈없이 가려 가느다란 목덜미의 살결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에 걸린 녹송석 영락이 그녀 앞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얼굴 위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는 것이, 그녀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몇 해 만에 보는 그녀는 여전히 눈처럼 흰 피부에 아담한 체구였다. 두터운 비단 옷자락 속에 몸을 숨기고 있음에도 선은 또렷했고 곡선은 은근히 살아 있었다. 의식하지 못한 채 풍기는 요염함과 부인이 된 뒤의 약간의 풍만함이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심서준은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그녀에게 눈길을 오래 두고 싶지 않았고 더는 그녀에게서 생각을 빼앗기고 싶지도 않았다. 비록 그의 곁눈질은 여전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지만 말이다.손에 들고 있던 붓을 붓걸이에 올려두고 책상 위에 고요히 놓인 옥패를 한 번 바라본 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사씨 부인… 당신은 나를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이 말은 일부러 계연수를 몰아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정으로 보나,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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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정말 그 말이 맞습니까?”계연수의 가슴이 미세하게 조여 왔다.그녀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심서준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사옥현은 당신을 도울 능력이 없습니까? 굳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을 만큼의 일인가요?”담담한 어조였으나 그 말들은 살을 에는 칼처럼 그녀의 마음을 베어 냈다. 심서준 앞에서 그녀가 사가에서 결코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볍게 드러나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부군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말, 단 한 번도 그의 온기를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은… 자신을 먼지보다도 더 낮은 곳으로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그녀 또한 자신 스스로가 비참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예전의 계연수가 아니었다. 집도, 아버지도 잃었고 혈육과는 멀어졌으며 같은 베개를 쓰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무능한 사람일지도 모른다.한편, 따뜻한 실내에는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심서준은 굳이 그녀의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귓가의 옥 장식이 가늘게 흔들리며 그녀의 난처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심서준은 입술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녀를 만난 것 자체가 옳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기혼의 여인을 따로 만난다는 사실이 그 자신에게조차 우스워 보였으니 말이다.그러나 다시 한 번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을 때,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희미한 물기를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책상 위에 놓여 있던 옥패를 집어 들고 그녀 앞에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그녀에게서 은은하고 부드러운 체온의 향기가 전해졌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모습이 눈에 더 또렷하게 들어왔다.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녹아내린 눈의 흔적, 턱선에 걸린 잔머리 한 올, 어쩔 줄 모르는 눈빛, 연녹색 귀걸이가 가볍게 흔들리며 드러내는 길고 고운 목선.수수하고 절제된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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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따뜻하고 은은한 황색의 사등 아래에서 계연수는 감히 몸을 피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억누를 뿐이었다. 심서준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는데, 손끝 아래 닿은 그녀의 피부는 따뜻했고 극도로 아름다운 눈에는 놀람과 동요가 서려 있었다. 짙고 풍성한 검은 머리칼이 붉은 입술과 새하얀 이를 더욱 또렷하게 돋보이게 했다. 마치 무산의 비와 안개가 어른거리는 듯, 노련한 매의 발톱 아래 웅크린 어린 토끼처럼 연약해 보였다.더욱 괴롭히고 싶을 만큼 위태로웠다.몇 해 만에 다시 본 그녀는 예전보다 한층 더 요염해져 있었다.턱을 붙잡고 있던 손가락이 물러나자 곧이어 차분하고 냉정한 음성이 울렸다.“사씨 부인, 마음은 정하셨습니까?”계연수는 마지막 구명줄을 붙잡듯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정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심 대인께서 제 사촌 오라버니만은 살려 주시길 바랍니다.”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서 미세하게 살아나는 빛을 그는 분명히 보았다. 단 한 번뿐인 기회를 그녀는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써 버렸다. 마치 예전에 그가 옥패를 건네주었을 때, 그녀가 그 말을 마음에 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끝내 그녀는 이 옥패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심서준은 그저 그녀가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길 바랄 뿐이었으니. 심서준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빛은 한층 더 차가워진 채로, 옥패를 그녀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도와주겠습니다. 다만 이 옥패는 본래 제가 준 것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이미 손을 댄 물건이기도 하니, 굳이 돌려받을 생각도 없고요.”말을 마치자 그는 몸을 일으켰고 계연수에게도 나가라는 뜻을 전했다.눈앞을 덮고 있던 그림자가 물러나자 계연수는 그 자리에 놓인 옥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그가 내뱉은 말은 조용히 그녀의 마음을 찔렀다. 자신이 만진 것을 그는 더는 원치 않는다는 뜻이었다.그럴 법도 했다. 그는 언제나 하늘 위의 사람처럼 군림해서, 곁에 다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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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겉모습만 보아도 부유한 집안임은 분명해 보였다.유리등의 빛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눈 속 베일 아래에 숨겨진 그녀의 얼굴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그럼에도 단정하고 우아한 몸선과 가늘고 깨끗한 손가락만으로도 베일 아래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문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후작께서 정말로 이 여인에게 마음을 두신다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노수보는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노부인 역시 연로했다. 후작을 따라 궁에 들어가 황후를 알현할 때마다 황후는 늘 은근히 재촉하곤 했다.경성에서 이름난 규수라면 누구든, 황후는 온갖 방법을 써서 후작에게 한 번쯤 보게 하려 했지만 후작이 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령 나간다 해도 후작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머무는 일은 없었다.누가 되어도 상관없다 말해 놓고서는, 막상 혼담 이야기가 오르내리면 또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경성에서는 그와 후작 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까지 돌아 문하 본인조차 아가씨들에게 슬며시 외면당하는 처지가 되었다.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문하는 더욱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직접 작은 문으로 빠져나와 그녀를 마차 앞까지 배웅했고 사람을 붙여 귀가길을 호위하려고까지 했다.물론 속셈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마차가 지나치게 평범해 아무 단서도 잡히지 않으니, 어느 집안 아가씨인지라도 알아두어야 훗날 실수하지 않을 것 같았다.계연수는 이렇게까지 정중히 배웅 받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사촌 오라버니의 일도 일단락되었고 어지럽게 엉켜 있던 나날 속에서 겨우 한 갈래 길이 잡힌 듯해, 어느새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가 풀려나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았다. 심서준이 약속한 이상 반드시 그를 빼내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서준의 사람들까지 이토록 공손하니 계연수는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이만하면 충분하다. 내가 갈 곳은 멀지 않아.”그러고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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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사부 안, 큰 마님 임씨의 정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사금희는 아직 자리를 뜨지 않았고 이명유 역시 방 안에 함께 있었으며, 사옥현은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다.사옥현의 눈빛에는 은근한 피로가 배어 있었고, 다시 한 번 미간을 문지르며 사금희를 향해 말했다.“누님, 걱정 마세요. 이미 돕지 않겠다고 말했으니까요.”사옥현의 분명한 말에 사금희는 그제야 안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이것만큼은 꼭 기억해. 그녀가 무슨 수를 써서 네게 매달려도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안 돼! 보고 죽게 내버려두라는 말은 아니고… 고준 집안이 지금 어떤 꼴인지 너도 잘 알잖니. 네가 한 번 손을 대주면 그 집안의 엉망진창인 일들이 전부 네 몫으로 돌아올 거야. 네 형부도 말했어. 고준의 죄는 형부에서 어떻게 판결하느냐의 문제지, 북진부사는 그저 심문만 맡을 뿐이라고. 죄가 크든 작든 진무사와는 상관없고 우리와도 상관없는 일이야.”“게다가 고씨 집안이 우리 사가와 무슨 대단한 인연이 있다고 그래? 연수 외가일 뿐이잖아. 이미 사가에 시집왔으면 늘 외가 일만 걱정할 게 아니라 네 쪽에 마음을 둬야 하는 거 아니니?”사옥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한구석이 이유 없이 불편해졌다. 그는 문득 전날 밤, 계연수가 그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내 안채로 돌아오지 않았고, 아침에 떠날 때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사옥현은 연수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늘 온순했고 그가 나무랄 때도 대개는 두어 마디 말다툼으로 그쳤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는 그 일을 꺼내지 않았다.대부분의 일에서 그녀는 그의 뜻을 따랐지 이처럼 끝을 보겠다는 태도를 보인 적은 지금껏 없었다.그는 문득, 어젯밤 이혼을 입에 올리던 계연수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에는 드문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기에 단순한 투정으로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또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결혼한 지 삼 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이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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