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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장씨 어멈은 계연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하인일 뿐.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는 처지라,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오전 무렵, 계연수는 안채로 돌아와 용춘에게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 서재로 옮기라고 했다. 애초에 그녀가 이 집에 들고 온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아, 짐이라고 해봐야 고작 그 몇개 뿐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은 사옥현과 혼인할 때 사씨 집안에서 마련해 준 것들이었다. 화장대 위의 연지와 분부터 시작하여 작은 함에 담긴 장신구들까지.옷장 속의 옷들 가운데 진짜 그녀의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나중에 떠날 때 모양새가 구차해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계연수는 용춘에게 자기 물건만 챙기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라고 했다.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사옥현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이고 그게 잘못된 일은 아니었으니.애초에 자신이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이명유와 서로 마주 앉아 평온한 부부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연수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원망을 하는 대신 양쪽 모두의 체면을 지키고 싶었다.정리된 짐은 놀라울 만큼 적어, 작은 나무 상자 하나의 반도 채 채워지지 않았다. 휘장 밖에 서 있던 시녀는 용춘이 그 작은 상자를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얼굴빛이 흔들리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뜰에 곧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막 떠오른 햇살이 조각창을 지나 방 안으로 스며들었고 무늬진 창살 사이로 흩어진 빛이 계연수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그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방의 모든 배치 하나하나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그녀가 공을 들여 꾸민 것들이었다. 그 당시 그녀는 사옥현과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다. 그와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정성을 다해 꾸몄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다보각 위에 놓인 두 개의 작은 흙인형은 사옥현과 이명유가 어린 시절 함께 빚은 것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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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계연수는 가슴끝이 조여 오는 듯, 점점 숨이 막혀왔고,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상심이 번졌다. 그녀는 유씨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숙모, 부디 저를 믿어 주세요… 이 일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이 되면 반드시 답을 드리겠습니다.”그러나 유씨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고, 얼굴엔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이게 벌써 며칠째인데 아직도 시간을 끌겠다는 것이냐? 네 사촌 오라버니가 그런 혹독한 형벌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말이 통하지 않으면 나를 데리고 옥현이를 만나게 해주거라. 내가 직접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빌 것이니.”계연수는 눈을 감았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사옥현은 저희를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그를 찾아가도 소용없어요.”유씨의 눈이 커졌다.“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사옥현의 부인인데, 그가 어찌 네 말을 안 듣겠느냐? 아니면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게 아니냐? 이건 고작 한마디만 하면 될 일인데 그가 왜 안 도와주겠어?”계연수는 쓴웃음을 지었다.“외숙모께서는 사촌 오라버니께서 요서를 숨겨 둔 일이 가볍다고 생각하시나요? 게다가 사촌 오라버니는 아직도 북진부사에 구금된 상태입니다. 북진부사의 진무사(주로 민심 안정과 치안 유지, 사건 조사 및 관리 감독을 담당하는 고위 관료) 로원이 사람을 풀어주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일은 간단하게 해결 될 겁니다. 사옥현이 매형에게 한마디만 건네면 되니까요. 이 일이 터진 뒤, 고준 오라버니께서도 분명 제 이야기를 꺼냈을 겁니다. 로원 역시 사람을 보내 사옥현의 뜻을 물었을 테고요. 사옥현의 의중이 곧 로원의 판단이 됩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그 뜻은… 외숙모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사옥현이 돕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어쩌면 그는 오히려 로원에게 공정하게 처리하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일부러 붙잡아 두고 있는 건 로원이 아닌 것이지요.”그날 밤 그녀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려 했을 때부터, 사옥현이 이미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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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계연수는 몸을 숙여 위로의 말을 건네려다가, 정작 자신도 가슴이 먹먹해져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안색이 희미하게 창백해진 채, 그녀는 작은 평상 모서리를 손끝으로 꽉 붙잡고 있었다. 앞에 놓인 찻잔 두 개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고 김은 여전히 피어올랐다.방금 들은 말, 쓸모없다는 그 한마디가 그녀의 심장 한가운데를 그대로 베어 버렸다.그녀의 삶은 오로지 부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존재해 왔기에, 마치 그 부군이 자신을 사랑하지도,받아주지도 않으면 곧장 무가치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계연수는 작은 탁자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 슬픔이 고스란히 담긴 용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곧 지나갈 거야.”그렇게 감정을 정리한 계연수는 곧이어 밖으로 향했고, 용춘이 황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부인, 어디 가시나요?”계연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은 채 어느새 마당 어귀에 이르렀다. 외숙모가 떠난 방향을 보자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시어머니를 찾아갔을 터였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뒤늦게 따라 나섰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방금 전의 말들만으로는 그 사람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옥현은 모른 척할 것이고 임씨는 더더욱 손을 내밀지 않을 터. 아직 정청 문턱도 넘기도 전에 임씨 특유의 냉엄한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고씨 둘째 부인은 이 돈으로 우리 사씨 집안의 명성을 모욕하겠다는 겁니까? 우리 사씨가 언제부터 법을 어기며 연줄로 살아야 할 만큼 몰락했답니까? 우리 집 가장은 선주에서 지부(행정 책임자)로 재임 중이지 유배를 간 것도 아니고 집안이 끊긴 것도 아닌데, 이런 식의 모욕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그 순간, 계연수는 처마 위로 드러난 앙상한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한겨울의 냉기가 매섭게 내려앉아 하늘까지 음울해져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사씨 집안을 붙잡는 일은 애초에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사람은 자신 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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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예전의 계연수는 견딜 수 있었다. 자신이 사옥현의 집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았고 사옥현이 무엇보다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일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그래서 그녀는 늘 삼켰다. 그의 앞에서는 언제나 집안이 화목한 듯한 모습을 유지했고, 밖에서는 사씨 집안을 헐뜯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시비를 가릴 만한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사람들이 그녀 앞에서 거리낌 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명령하듯 말해 온 것도 그녀의 뒤에 더는 기대설 사람 하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니라.계연수는 고개를 들어 사금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소매를 여미고 꼿꼿이 섰다. 평소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듣기 좋았으며 말투에는 늘 온화함이 배어 있었지만이번에는 달랐다. 그 말 끝에는 아주 옅은 냉기가 실려 있었다.“형님께서까지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사씨 집안에 시집온 지 삼 년이 되어가는데 어떤 큰 골칫거리를 안겼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왔으니 부디 구체적으로 짚어 주시지요. 외가의 일 가운데, 이번 일을 제외하고 사씨 집안에 폐를 끼친 일이 과연 있었습니까?”“제 어머니께서 중병으로 누우셨을 때조차, 큰 어르신께서는 저와 함께 친정에 가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데 제가 언제 사씨 집안을 곤란하게 했단 말입니까?”사금희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계연수가 이렇게 맞받아 말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늘 집안의 맏딸로서 앞장서 지적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던 그녀로서는 하인들과 어멈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그대로 깎여 나간 셈이었다.“지난 일들을, 오늘 굳이 꺼낼 필요는 없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한데 오늘 네 외숙모가 찾아온 일은 어떠냐? 그것도 네가 불러온 일도 아니지 않느냐?”계연수는 담담한 눈길로 사금희를 바라보았다.“대체 무슨 폐를 끼쳤다는 말씀이십니까?”사금희의 안색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네 외숙모를 시켜 우리 어머니를 번거롭게 하고 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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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그럼 도리가 완전히 뒤틀리는 것 아닙니까?”아랫자리에 있던 유씨는 이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레 정당 한가운데 서 있는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계연수가 이 집에서 어떤 처지로 살아왔는지를.충동적으로 찾아와 한바탕 소동을 벌인 것이 도리어 연수에게 화를 불러왔다는 사실도 그제서야 실감했다.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씨 집안의 지난 일들은 어디까지나 집 내부의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시집간 사금희까지 나서서 저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듯 연수를 몰아붙이는 꼴을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게다가 임씨가 방금 내뱉은 말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유씨의 귀에는 조롱처럼 들렸다.그제야 유씨는 분명히 알았다. 아무리 더 빌어도 이 집안 사람들은 결코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는 것을.그러자 조금 전 계연수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정말로 도와줄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시간을 끌지 않고 진작부터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유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임씨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시댁의 덕을 보았다고요? 제 외조카가 이 집에서 무슨 덕을 봤다는 겁니까? 어찌하여 자기 분수를 지키며 묵묵히 살아온 아이에게 이제 와서 헛된 허물을 뒤집어씌우시는 겁니까?”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오늘은 제가 이 아이 말도 듣지 않고 찾아온 겁니다. 사실 큰일도 아니고 인척 간의 연이니, 그저 부탁이나 해보자고 한 거고요. 한데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유씨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말을 이었다.“우리 고씨 집안은 지금 몰락했기에 사씨 집안에 비할 바도 안 되지요. 그래도 기개는 있습니다. 제 외조카가 이런 식으로 헐뜯김을 당하는 건 도저히 볼 수가 없군요.”그녀는 가져온 은전 상자를 두 손으로 단단히 안은 채, 임씨를 똑바로 보았다.“오늘은 제가 괜한 발걸음을 한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 폐를 끼친 것도 모자라, 이런 수모까지 겪게 했군요. 그러나 제 마음은 떳떳합니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이 문턱을 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아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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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말이 마침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지난 삼 년 동안, 사가의 사람들은 모두 계연수가 사옥현에게 시집온 일을 사가의 시혜로 여겼다. 심지어 사옥현 본인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위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거리낌 없이 손짓하며 훈계하며, 옳고 그름을 재단했다.임씨는 아래에 서 있는 계연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연한 먹빛의 옷자락,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눈빛, 푸른빛 귀걸이는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늘 그랬듯 공손하게 서 있었을 뿐인데 오늘따라 임씨의 가슴은 이유 없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임씨는 계연수를 가리켰지만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 혼사가 어떻게 맺어졌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임씨는 알고 있었고, 사옥현의 부친도, 집안의 어르신들조차도 모두 알고 있었다.당시 계연수의 부친 계정윤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낸 인재였다. 용모는 준수했고 과거에 급제해 탐화에 올랐으며 당시 권세를 쥔 심 수보(首辅: 재상) 대제학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다. 아무 배경 없는 가난한 서생이었지만 불과 칠 년 만에 감찰어사에 올랐다.감찰어사는 고작 칠품관에 불과했으나 권한이 막강했고 공적을 세우기 쉬운 자리라 서너 해만 지나도 승진이 가능했다. 역시나 몇 해 지나지 않아서 그는 대리사 소경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바로 그 무렵, 그녀의 집에 일이 하나 생겼다. 당시 그녀의 부군은 염운사 동치로 있던 중 정적의 모함을 받아 뇌물을 받고 소금을 불법 유통했다는 죄목이 씌워졌는데 계정윤이 형부의 판결을 뒤집어 누명을 벗겨 준 것이었다. 사가는 감사의 뜻으로 여러 차례 사례를 보냈지만, 모두 되돌아왔고 끝내 보답할 길을 찾다 두 집안의 혼담을 꺼냈다. 처음에는 계가에서 거절했으나 사가 쪽에서 간곡히 청하며 평생 한 아내만 두고 첩을 들이지 않겠다는 약조까지 하자 그제야 혼사가 성사되었던 것이다.이 모든 일은 임씨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과거였다. 그런데 방금 고씨 집안 사람이 무심코 한마디를 꺼내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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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사금희가 말을 이었다.“제 부군 말로는 아주 큰 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다만 부군이 옥현에게 한 번 물어봤는데 옥현이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해서 그 뒤로는 더 묻지 않았어요.”임씨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옥현의 성정이 그렇지.”사금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제 생각에도 애초에 도와주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손을 내밀면 끝이 없을 테니까요. 고씨 집안도 이제 그 정도인데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습니까?”임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도 일리는 있구나.”계연수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귀비탑에 몸을 기대고는 몇 차례 연달아 기침을 했다. 손에는 손난로를 꼭 쥐고 있었고 발치에 놓인 화로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천천히 몸을 타고 올랐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용춘에게 시각을 물었고 다시 고개를 숙여 숯불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한편, 로원은 걸음을 재촉해 도찰원 의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섰다. 소리 없이 앞장서는 아전을 따라 이당으로 향하는 동안, 그의 심장은 정신없이 뛰었다. 도대체 어찌하여 도어사 대인이 자신을 부른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기때문이다. 오늘 도찰원에서 그의 부하인 소기 두 명까지 불러들였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마음이 더 가라앉질 않았다. 심서준이 도어사로 부임한 뒤로 그는 ‘철면염아’라고 불렸다. 정에 이끌리는 법이 없었고 경성에서 감히 그와 정면으로 부딪칠 사람은 없었기에 붙여진 별명이었다.게다가 황후의 친동생이자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난다면 목숨이 붙어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경성 곳곳에 도찰원의 눈과 귀가 깔려 있었다. 로원은 이십여 년 관직 생활 동안 저질렀을지도 모를 일들을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훑어보며 혹시라도 빠뜨린 것이 있을까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는 긴장한 탓에 안으로 들어오라는 부름조차 듣지 못하다가 문가에 있던 사람이 등을 떠밀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황급히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갔다.이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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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로원은 이 순간, 그 두 사람이 정말로 은전을 받았는지 여부를 두고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심서준이 직접 사람을 이 자리에 불러들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확실한 증거를 쥐고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말꼬리를 잡아 부인하는 건, 오히려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뿐이었다.더구나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잡혀 들어온 자들 사이에서 기름을 짜내는 일은 예삿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윗사람에게 성의를 보이는 것도 관례처럼 굳어 있었다. 로원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한쪽 눈을 감아왔다. 정말로 깊이 캐묻기 시작하면 불똥은 결국 자신에게도 튈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럼에도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서준이 이런 하급 인원들까지 들여다보고 있을 줄은… 소기 두 명의 비위까지 꿰고 있다는 사실에 로원은 심서준이라는 인물에 대한 두려움이 한 겹 더 깊어지는 걸 느꼈다. 평소 아무리 조심스럽게 처신해왔다 해도 만에 하나 꼬투리가 잡히기라도 한다면 어떡한단 말인가?이번 일만 해도 정말로 죄를 물을 작정이라면 직무 태만과 수하 관리 소홀이라는 한 줄 상소만으로도 그의 관직은 그대로 날아갈 수 있었다.바로 그때, 심서준이 길게 뻗은 몸을 움직여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로원 앞에 멈춰 섰다.“내가 입수한 바에 따르면 그 두 소기에게 뇌물을 건넨 이가 바로 고씨 집안의 둘째 부인이라더군.”심서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내가 알기로 고준은 동사방에서 체포돼 네가 있는 곳으로 이송됐고, 아직 자백은 하지 않았지. 고준이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그 뒤에 어떤 연줄이 있는지 너도 잘 알 텐데. 사씨 집안에서 어찌 아무도 나서서 청을 넣지 않았단 말이냐?”이쯤 되자 로원은 더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의미는 분명했다. 자신의 수하 둘이 고씨 둘째 부인의 은전을 받고 처남댁의 체면을 봐 일부러 고준을 느슨하게 다뤘다는 혐의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는 것이었다.억울한 마음이 치밀었지만 로원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에는 분명 그 역시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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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그 순간 로원은 더는 아무것도 가릴 여유가 없었다.지금 이 자리에서 말 한마디만 잘못 내뱉어도 곧 만겁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심서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도어사 대인, 부디 제 변명을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고준은 비록 제 처제의 부인 쪽 친족이기는 하나 제 처남 사옥현은 대리사에서 근무하며 줄곧 공정무사하기로 이름난 인물입니다. 게다가 처남과 그 부인의 사이는 실로 좋다고 할 수 없고 그 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 여인을 위해 제게 청을 넣을 리는 더더욱 없지요.”로원은 이제 사옥현의 집안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어떻게든 스스로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부디 대인께서 명철하게 살펴주십시오.”심서준은 눈길을 살짝 비껴 로원을 내려다보았다. 그와 마주친 것은 공포로 일그러진 눈빛이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심서준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그런가? 본관이 알기로는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혼약이 정해졌다고 들었다. 한데 사옥현이 정실 부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로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심서준이 이 정도까지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심서준은 도찰원의 도어사로서 손에 쥔 사건마다 한 치의 허점도 남기지 않는 인물이고, 그에게 걸린 자 중, 온전히 빠져나간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로원은 이제 더 숨길 것도 없어 모두 털어놓았다.“대인께서 모르시는 사정이 있습니다. 바로 어릴 적부터 정해진 혼사였기에 제 처남은 그 혼인을 내심 달가워하지 않았던 겁니다. 허나 처남은 언제나 몸가짐이 단정하고 예를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기껏해야 서로 예를 지키는 부부일 뿐이고, 사가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전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를 위해 고준의 일을 청할 리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고준은 본래 법을 어긴 혐의가 있는 자이니, 제가 사적인 연으로 그를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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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로원이 물러난 뒤, 심서준은 고개를 들었는데, 높이 걸린 현판 위에 ‘숙기정강’ 네 글자가 창밖에서 스며든 빛에 걸려 먼지처럼 흩날리고 있었다.심서준은 그 아래에 한동안 서 있었는데,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누구도 쉽게 읽어낼 수 없었다.그러나 방금까지 병풍 너머에 서 있던 문하는 달랐다. 늘 곁에서 심서준을 보좌해 온 그는 방금 대인께서 로원에게 던진 마지막 한마디에서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대인은 사람을 칭찬하지 않는다. 더구나 국자감의 하찮은 감생 하나를 눈에 담을 분은 더더욱 아니었다. 방금 그가 한 말은 분명 로원에게 던진 암시와도 같았다.그동안 아무리 큰 연줄이 찾아와도 대인이 나서서 봐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바쁜 와중에, 이렇게 사소한 일 하나로 로원을 불러 문책한 것이 이례적인 일이기에, 문하는 그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전날 우연히 마주친 그 여인이 떠올랐다. 그때도 대인이 평소보다 잠시 더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가?문하는 생각이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 느끼고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이쯤에서 멈춰야 했다.그날 오후, 사금희는 계연수의 처소를 찾았는데, 정침에는 아무도 없었다. 묻고 나서야 계연수가 뒤채 서재에 있다는 걸 안 그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불렀다.한편, 계연수는 의자에 앉아 어제 다 보지 못한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자신의 재산을 하나하나 정리해 두어야 앞으로의 일을 계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사금희가 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지만 계연수는 주판을 튕기며 눈길조차 들지 않았다.뒤에서 짐을 정리하던 용춘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작은 마님을 괴롭히러 또 오셨네요. 늘 그렇잖아요. 와서는 꼭 가르치듯 한마디씩 하고 말입니다.”계연수는 마지막 계산을 마치고 장부에 숫자를 적어 넣은 뒤에야 붓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용춘을 바라보며 물었다.“다 정리됐느냐?”용춘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원래 짐이 많지 않아서요. 혹시나 떠나게 되더라도 금방 끝날 거예요.”계연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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