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의 모든 챕터: 챕터 471 - 챕터 480

558 챕터

제471화

‘또...?’희정은 해인이 억울하다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고한지 하소연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희정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사람들 앞에서 연달아 두 번이나 물을 뒤집어쓴 건 너무나 모욕적이었다. 희정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흠뻑 젖은 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하지만 유호가 그 자리에 있었다. 희정은 자기 이미지를 지켜야 했기에, 결국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꽉 쥔 주먹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고, 몸까지 가늘게 떨렸다.해인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그런데 물을 끼얹고도 해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아하게 몸을 돌려서 그대로 나가 버렸다. 희정에게 다시 입을 열 틈조차 주지 않았다.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우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고는 유호와 희정을 향해 콧방귀를 뀌더니, 급히 해인을 따라갔다.희정은 간신히 분노를 억눌렀지만 곧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유호야, 너도 봤잖아. 해인 씨가 저렇게 제멋대로 굴면서 내 체면은 조금도 생각 안 해.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나만 괴롭히잖아.”희정은 피부가 흰 편이었다. 물 온도가 조금 뜨거웠던 탓에 붉어진 자국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유호가 말했다.“여기서 고자질할 시간이 있으면 약이나 찾아서 발라. 얼굴 망가져도 괜찮아?”그 말에 희정은 뒤늦게 겁이 났다.해인 때문에 자신이 늘 자랑스럽게 여겨 온 얼굴이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손해였다.희정은 영어가 서툴다는 핑계를 대며 유호를 붙잡고 밖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약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뺨의 붉은 자국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직원은 희정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손님, 다치신 곳은 없어 보이는데요.”희정은 거울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겨우 안심했다.희정이 직원에게 어설프게 ‘땡큐’라고 말하는 사이, 유호는 이미 약국 밖으로 나가 있었다. 유호는 손바닥으로 바람을 막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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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2화

유호가 호텔 로비 쪽으로 몸을 돌리자, 희정은 급히 걸음을 재촉해 유호를 따라붙었다.“유호야, 왜 이래? 네 아내가 방금 나한테 물을 끼얹었잖아. 설마 이 일을 그냥 넘어가겠다는 거야?”“그럼?”유호가 걸음을 멈추고 웃었다.“네가 우리를 따라서 B국까지 왔는데, 내 아내가 화도 못 내?”희정은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어떻게 안 거야?’희정은 얼른 변명했다.“내가 먼저 와 있었잖아. 그런데 왜 내가 너희를 따라온 게 돼?”“희정아.”유호는 희정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마치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내가 꼭 끝까지 말해야겠어?”여기까지만 말한 건 희정에게 최소한의 체면을 남겨 주기 위해서였다. 희정이 너무 난처해지지 않게 하려는 배려이기도 했다.하지만 희정은 모르는 척하며 유호를 바보 취급했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유호의 반감을 산 것이다.희정은 그대로 굳어졌다.유호는 출국 전 공항에서 희정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다. 희정이 B국에 있다는 말이 너무 작위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까 화장실에 다녀오며 잠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그제야 알게 됐다. 하루 전, 누군가 항공사 쪽을 통해 유호의 일정을 몰래 조회했다는 사실을...누구든 남이 몰래 들여다보는 걸 좋아할 리가 없었다. 희정의 행동은 떳떳하지 않았다. 유호의 일정을 확인했다면, 이번 여행에 유호가 누구와 함께 나왔는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터였다.유호와 해인이 부부 여행을 온 걸 알면서도 굳이 해인 앞에 나타났다. 그런 행동을 뭐라고 해야 할까? 도발인가? 상대가 유부남인 줄 알면서도 끼어드는 짓인가? 희정은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했다.유호의 기본적인 예의와 마음속 기준으로는 그런 행동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그래서 유호는 희정을 볼 때마다 이유 없이 ‘호감’ 비슷한 감정이 생긴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희정이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어서는 모습에는 정이 뚝 떨어졌다.오히려 해인이 희정에게 물을 끼얹은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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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3화

희정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웃었다.“M국 나온 지 너무 오래됐잖아. 언어 감각도 안 쓰면 무뎌지는 법이야.”말을 주고받는 사이, 구급차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유호는 희정이 구급대원의 도움을 받아 들것에 실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차 안에서 희정은 애처로운 눈으로 유호를 바라봤다.“정말 나 병원까지 안 데려다 줄 거야?”마침 구급대원이 다가와 말했다.“동행자분 맞으시죠? 발목 부상이라 접수와 수속을 도와줄 보호자가 필요합니다.”유호는 눈가가 붉어진 채 무력하게 앉아 있는 희정을 바라봤다.유호는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그런 뒤 구급차에 올랐다....한편 해인은 마침 유호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일이 생겨서 조금 늦게 들어갈게.]소파에 앉아 있던 조우도 메시지 내용을 봤는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형수님 남편을 센스 있다고 해야 해, 없다고 해야 해? 센스가 있다고 하자니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 안 돌아왔어.” “딱 봐도 차희정 그 여자랑 같이 있는 거잖아. 센스가 없다고 하자니 그래도 보고는 또 하네.”해인은 답은 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조우는 소파에 앉은 채 다시 말했다.“형수님, 내가 전에 말한 애 데리고 도망가는 거 진지하게 생각해 봐. 이걸 참을 수 있어? 저 사람들이 지금 형수님 머리 위에 올라앉으려고 하잖아.”해인에게 지금은 참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배가 이렇게 부른 상태에서 이혼을 꺼냈을 때 한씨 가문에서 받아들일지, 아이를 두고 다투게 될지, 해인에게 승산이 얼마나 있을지 모든 걸 다 따져 봐야 했다.확실한 준비 없이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게다가 해인은 이미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헤어질 수 있는 시기를 지나 있었다.어른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다. 아이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래야 했다. 임신한 몸으로 이혼을 밀어붙이면 가장 고생하는 건 결국 해인 자신이었다.적어도 아이를 무사히 낳는 일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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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4화

새벽이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 유호가 돌아왔다.침대 위의 해인과 조우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해인의 잠을 방해할까 봐 유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조심조심 어둠 속을 더듬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런데 막 침대에 앉으려던 유호는 이불 안에 또 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원래 유호가 누워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조우가 잠결에 놀라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반대편에 누워 있던 해인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유호가 미간을 찌푸렸다.“너 왜 여기 있어?”조우는 잠이 확 달아난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내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당연히 형수님이 남아도 된다고 해서 있는 거지. 날 다 밝아 가는데 이제야 들어와? 들어오긴 왜 들어와? 밖에서 자는 게 불편했어?”“누가 잤대?”유호는 해인을 한 번 바라봤다. 해인은 옆으로 누운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깊이 잠든 듯 보였고, 아직 깨지 않은 것 같았다.유호는 해인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목소리를 낮췄다.“나 밤새 못 잤어. 너 저리 가. 저쪽 소파 비어 있잖아.”“내가 왜 소파로 가? 먼저 온 사람이 임자라는 말 몰라? 이 침대에 형 이름이라도 써 있어?” “내가 이미 자고 있었는데 형이 나한테 소파로 가라니. 소파로 가야 할 사람은 형 같은데?”조우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심지어 해인 쪽으로 조금 굴러가더니, 팔로 해인을 느슨하게 감싸는 시늉까지 했다. 표정에는 의기양양함이 가득했다.유호는 조우가 몹시 거슬렸다. 그래도 조우가 아직 어리니까 참는 것뿐이었다. 조금만 더 컸다면 유호가 이렇게 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유호는 곧바로 조우를 번쩍 들어 올렸다. 병아리라도 옮기듯 조우를 소파 위로 툭 던져 놓았다.나름의 ‘호의’를 보인답시고 이불 하나까지 던져 주었다.“침대에 누운 사람은 내 아내야. 내가 같이 자는 게 맞겠어, 안 맞겠어?”조우는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은 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그러자 억울하다는 듯 벌떡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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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5화

조우의 명령조 말투에 유호의 미간이 바로 일그러졌다. ‘위아래도 모르는 어린 폭군이라 이건가?’‘오냐오냐 받아 주면 사람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다더니.’한씨 가문 사람들은 전부 조우를 봐줬지만, 거기에 유호까지 포함되는 건 아니었다.유호가 칼날 같은 눈으로 조우를 노려보자, 조우는 방금 전 귀를 잡아당기던 통증을 떠올리고 바로 기가 죽었다. 조우는 이불 속으로 쏙 숨어들더니, 해인의 품 쪽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해인이 뒤를 봐 주기만 하면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태도였다.하지만 유호는 예전부터 이 어린 약삭빠른 녀석을 마냥 아이로만 본 적이 없었다. 유호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조우를 번쩍 들어 올렸다. 곧바로 손을 들어 조우의 엉덩이를 때리려는 자세까지 취했다.조우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와, 형 진짜 폭력적이다! 형수님이 예전에 형 어디가 좋아서 결혼했는지 모르겠네!”“형수님, 형수님...” 조우는 유호보다 해인을 더 살갑게 부르고 있었다.유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네 형수는 나처럼 폭력적인 남자를 좋아해.”조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온세상이 무너진 사람 같았다.“형수님, 취향이 너무 이상해.”말을 마치자마자 조우는 또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형수님, 살려줘! 형수님 남편이 내 엉덩이 터지게 때리려고 해!”조우와 유호는 원래 서로 건드리지 않고 지내는 사이였다. 한씨 가문에서도 별문제 없이 지내 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이 시작된 뒤 조우가 계속 유호를 건드렸고, 유호도 이 이복동생에게 한 번쯤은 제대로 따끔하게 알려주고 싶었다.해인은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지친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적당히 해. 천 여사 아들 때렸다가 나중에 천 여사가 당신한테 따지러 오면 어쩌려고?”유호가 차갑게 웃었다.“내가 천 여사를 무서워할 것 같아?”“당신은 안 무섭겠지. 나는 무서워.”해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해인은 베개에 기대앉은 채 말을 이었다.“나는 이제 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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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6화

조우는 엉덩이를 문지르다가 해인과 유호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예민하게 알아차렸다.조우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유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누가 너랑 아이를 해치게 두지 않을 거야.”해인은 멈칫했다. 놀란 눈으로 유호를 바라봤다.요즘 들어 유호가 해인에게 정면으로, 분명하게 보호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하지만 해인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말 한마디일 뿐이었다. 최근 유호가 보여 준 행동들과 비교하면 그 말 하나로 달라질 건 없었다.해인은 유호가 정말 자신과 아이를 아낀다고 순진하게 믿을 생각도 없었다.어쩌면 유호에게 조금의 죄책감이 생긴 것뿐일지도 몰랐다. 연인을 데리고 같은 나라까지 와 오로라를 보게 만든 죄책감. 게다가 어젯밤 유호는 희정을 밤새 달래고 오지 않았던가.해인은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나가서 좀 걷고 올게. 당신과 도련님은 쉬어.”유호의 미간이 좁아졌다.‘왜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거야?’유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조우가 해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형수님, 나도 같이 갈래. 나도 안 잘래. 형수님이랑 같이 나가서 걸을래.”해인은 조우를 한 번 바라봤다. 거절하지 않았다.해인과 조우가 외투를 걸치려 하자, 유호가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아직 날도 제대로 안 밝았는데 어딜 나가? 돌아와서 자.”해인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유호의 태도는 강했고, 물러날 뜻은 전혀 없어 보였다.“조우는 한창 클 나이고, 넌 임신 중이라 쉬어야 해. 쓸데없이 힘 빼지 마.”해인은 그저 마음이 불편했다.지금은 새벽과 아침 사이였다. 유호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고, 어쩌면 방금 희정의 침대에서 내려온 것일지도 몰랐다.해인은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그런 부분에 민감했다. 유호와 같은 침대에 눕는 일을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웠다.실제로 최근 두 사람은 함께 잔 적이 없었다. 한씨 가문 본가에 있을 때도 한 사람은 침대에서, 한 사람은 바닥에서 잤다.유호는 해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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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7화

희정의 부상은 심하지 않았다.발목을 삔 부위가 조금 붓고 붉어진 정도였다. 그날 밤 병원에서 소염 주사를 맞고 하루 입원했더니,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거의 괜찮아져 있었다.“차희정 씨, 퇴원하셔도 됩니다.”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말했다.희정은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떴다.“퇴원...? 저 벌써 괜찮아진 거예요?”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크게 다치신 건 아닙니다.”희정은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걸어 보았다. 정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유호는 어젯밤 병원을 떠나기 전 이미 병원비를 결제해 두었다. 퇴원 수속까지 빠르게 마친 희정은 병실을 나섰다.희정은 복도를 걸으며 전화를 걸었다.“유호야, 여기 너무 외진 곳이라 택시가 안 잡혀. 어젯밤 그 병원으로 나 데리러 와 줄 수 있어? 아직 발목이 좀 아파.”이미 오후였다. 시차에 겨우 적응한 유호는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이었다.이곳은 하루 중 스무 시간 가까이 밤이 이어지는 지역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일행은 식사를 마친 뒤 도시 외곽으로 나가 오로라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이 시간에 병원까지 다시 돌아갔다 오는 건 일정 전체를 미루는 일이었다.유호의 시선이 해인에게 닿았다. 해인은 천천히 나이프와 포크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동작은 차분하고 단정했다. 어려서부터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해인은 유호가 누구와 통화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잘라 놓은 스테이크의 절반을 조우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유호 쪽으로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유호는 입술을 가볍게 다물었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핸드폰 너머 희정에게 말했다.“나 지금 일정이 있어. 기사도 같이 나가야 해. 차 잡기 힘들면 HRF 앱을 써.”HRF는 B국 현지에서 많이 쓰는 호출 차량 앱이었다. 희정도 앱으로 차를 부를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다만 유호가 다친 자신을 거절할 줄은 몰랐기에 희정은 멍해졌다.분명히 어젯밤에는 유호가 직접 희정을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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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8화

“네가 자는 동안 날 세 번 찼어.”그 나이대 아이가 잠버릇이 얌전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유호는 조우의 행동에 사적인 감정이 섞여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귀를 잡아당긴 건 기억하라고 그런 거야. 덤으로 사람 사는 법도 좀 가르쳐 주고. 면전에서 사람 씹는 버릇 들이지 마.”조우는 울상이 됐다.“아, 형 진짜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 자고 있었잖아. 내가 찼는지 안 찼는지 어떻게 알아?”조우는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리고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그게 왜 면전에서 씹은 거야? 형수님, 빨리 남편 좀 말려. 이러다 진짜 내 귀 떨어지겠어.”해인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이어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나 다 먹었어. 먼저 나가서 좀 걸을게. 싸움 끝나면 찾아와.”“형수님, 형수님!”조우는 울먹이는 얼굴로 해인을 불렀다.“나 버리고 가는 거야? 나 형수님 남편한테 진짜 당할 것 같은데.”해인이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유호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조우가 해인에게 보내는 구조 요청 같은 눈빛도 유호의 몸에 가려졌다.“네 형수한테 도와 달라고 해도 소용없어. 혼날 건 혼나야지. 이게 바로 형의 권위라는 거야.”조우는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그러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설마 형이... 내가 아까 침대에서 형수님 안고 자서 질투하는 거야? 그래서 나 같은 애한테 화풀이하는 거지?”유호가 멈칫했다. 조우는 갑자기 핵심을 짚었다는 듯 신이 나서 떠들었다. 말투가 너무 진지해 오히려 웃음이 날 정도였다.“이거 완전 수컷 경쟁이잖아!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잖아! 형 진짜 너무해!”해인도 잠시 할말을 잃었다.요즘 아이들은 무섭도록 빨랐다. 조우가 ‘수컷 경쟁’ 같은 표현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하지만 해인은 유호가 정말 조우와 경쟁심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호가 거듭 해인을 외면했던 일들을 겪고 나니, 해인은 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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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9화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쪼그리고 앉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인은 개의치 않았다.어린 고양이는 소시지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해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착하게 먹어.”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배불리 먹어야 또 돌아다닐 힘이 나지.”그 말을 들은 유호는 해인의 말이 뜻밖이라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너는 기껏 먹여 놓고, 다시 떠돌아다니라고 하는 거야?”해인은 고개를 돌린 뒤에야, 유호가 어느새 호텔에서 나왔다는 걸 알았다.유호는 천천히 해인에게 다가왔다. 해인을 내려다보는 말투에는 나른함이 섞여 있었다.“그럼 다음 끼니는 어떻게 하고?”B국의 이 계절은 온통 눈과 얼음뿐이었다. 어디를 봐도 새하얀 세상이었다. 이런 곳에서 길고양이가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겨울을 넘기기도 어려웠고, 유호가 보기엔 죽음은 늦고 빠름의 문제일 뿐이었다.해인은 유호를 보지 않았다. 열심히 먹고 있는 작은 고양이에게만 시선을 둔 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내가 다 책임질 수는 없잖아.”고양이는 고개를 콕콕 숙이며 먹는 데 집중했다. 모습은 무척 귀여웠지만,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말라 있었다. 그런데 배만은 이상할 정도로 불러 있었다.해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제야 해인은 이 고양이가 새끼를 밴 암컷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유호도 당연히 그 사실을 눈치챘다.“네가 마음에 들면 데려가서 키워도 돼.”해인은 멈칫했다. 유호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해인의 기억이 맞다면, 유호는 결벽증이 있었고 원래 작은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왜 갑자기 이런 선의를 보이는 거지?’ 이곳에서 마르고 임신한 고양이를 데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해인이 조용히 말했다.“너무 멀어. 게다가 임신했잖아. 데려가는 게 오히려 위험할 수 있어.”새끼를 밴 암컷 고양이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강했다. 해인이 먹이를 주고 있는데도 고양이는 끝까지 조심스러운 태도를 풀지 않았다.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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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0화

교외에서 오로라를 보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조우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소파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나 아직 한창 클 나이인데,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아.”조우는 오로라를 보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넓은 산길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그 나이대 아이답게 에너지가 넘쳤지만, 얼마 가지 않아 스스로 지쳐 버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해인의 어깨에 기대 잠들기까지 했다.“형수님, 조금 쉬었다가 우리 밥 먹으러 가자.”해인은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임신이 이 정도 시기에 접어들자, 확실히 금방 배가 고파졌다.하지만 며칠째 스테이크와 피자만 먹다 보니 슬슬 질리기도 했다.“집밥이 좀 먹고 싶네.”조우가 중얼거렸다.“여긴 외국이잖아. 집밥 찾기가 어디 그렇게 쉬워? 나는 피자랑 치킨도 맛있던데.”그 말을 듣던 유호가 해인을 한 번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했다.“나 잠깐 나갔다 올게. 금방 돌아와.”해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해인과 유호는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해인에게도 유호의 동선을 일일이 묻는 습관은 없었다.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30분쯤 뒤 유호가 돌아왔을 때, 손에는 커다란 식재료 봉투가 들려 있었다.근처 재래시장 같은 곳에 다녀온 듯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도 함께 사 온 모양이었다.조우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뭐야? 이렇게 많이 사 온 거, 설마 요리하려고?”유호는 봉투를 주방으로 가져가 안에 든 식재료를 하나씩 꺼냈다. 그러고는 해인에게 시선을 두었다.“반찬 네 가지에 국 하나면 돼?”해인은 멈칫했다.‘일부러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나를 위해 밥을 해 주려는 거야?’조우도 놀란 얼굴로 물었다.“진짜 밥을 하려고?”“응.”유호의 시선이 조우에게 향했다. 명령하듯 말했다.“와서 채소 씻어.”조우가 얼떨떨한 얼굴로 자기 코를 가리켰다.“나한테 지금 일을 시키는 거야?”“그럼 먹지 마.”조우도 유호의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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