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의 모든 챕터: 챕터 481 - 챕터 490

558 챕터

제481화

해인은 할 말을 잃었다.유호는 어린 시절 납치되어 팔려 갔을 때의 일을 입에 올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옆에 앉아 있던 조우도 멍하니 굳어 버렸다.“그때는 하루에 생선을 수십 마리씩 손질했어.”유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느긋하게 말했다. 말투에는 희미한 비웃음마저 섞여 있었다.“비늘을 벗기고 아가미를 뗀 뒤에 배를 가르고 내장을 뺐지. 대충했다간 내가 무사했겠어?”따지고 보면 당시 유호는 지금의 조우와 비슷한 나이였다.해인은 유호가 그 세월을 어떻게 버텼을지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문득 영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유호가 처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몸 곳곳에 상처가 많았다고 했다. 오랫동안 맞고 욕을 먹으며 살아온 흔적이 한눈에 보였다고.인신매매범들이 유호에게 다정했을 리 없었다. 생선을 손질하는 솜씨도 아마 그때 몸에 새겨진 반응일 터였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몸은 잊지 못한 것이다.해인은 갑자기 매운탕을 넘기기가 어려워졌다.이 맛 뒤에 유호가 얼마나 많은 매질과 모욕을 견뎠을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유호에 대한 응어리가 있다 해도, 지금만큼은 해인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해인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앞으로는 이거 하지 마.”유호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맛없어?”“맛있어.”유호는 해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동자 안에 낯선 기색이 스쳤다.“그럼 불쌍해서?”해인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나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만 9살의 한유호가 너무 힘들었겠다 싶어.”유호의 표정이 굳어지며 어딘가 깊은 곳을 정통으로 맞은 사람처럼 잠시 숨을 멈췄다.해인은 국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 들고 크게 한 모금을 삼켰다. 유호가 만든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듯이.“매운탕은 정말 맛있어. 나도 마음에 들어. 당신이 매운탕 끓이는 솜씨는 식당을 차려도 될 만큼이야.”“하지만 그 뒤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나는 이 매운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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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2화

식사를 마친 뒤, 해인은 호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산책하며 소화를 시켰다.이 도시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자연이 빚어낸 풍경은 어디 하나 모자람 없이 웅장하고 섬세했다. 해인은 며칠 내내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마치 현실이 아닌 선계에 들어온 것 같아.’해인이 혼자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뒤에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로라가 그렇게 예뻐?”해인은 걸음을 멈췄다. 희정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리고 몸을 돌렸다. 해인은 침착한 눈으로 희정을 바라보았다.“예뻐. 꽤 낭만적이야.”희정의 표정에는 감추지 못한 질투가 잔뜩 어려 있었다.“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봐야 낭만이지. 유호 마음속엔 너 같은 거 없어. 혼자 뭐가 그렇게 좋아?” “유호가 정말 원해서 B국까지 온 줄 알아? 가족들한테 떠밀려서 온 거야. 임무를 끝내려고...”해인이 희정의 말을 끊었다.“원해서 왔든 떠밀려서 왔든, 어쨌든 유호는 왔잖아. 너는 그렇게 애타게 따라왔는데, 유호는 오로라도 같이 안 봐 줬고.” “속이 뒤틀려 죽겠지? 그래서 뒤에서 이런 말이나 하는 거고.”말을 마친 해인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해인의 뒷모습을 보며 희정은 분해서 주먹을 꽉 쥐었다.“강해인, 두고 봐! 오늘 밤 유호랑 오로라 아래에서 키스할 거야. 네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 줄게!”해인은 그 말을 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걸음을 이어 갔다.오후가 되자, 해인이 막 침대에 누워 쉬려던 참에 유호의 핸드폰이 울렸다.둘은 전날 밤 오로라를 보고 돌아온 데다 시차까지 겹쳐서 낮과 밤이 조금 뒤바뀐 상태였다.유호는 마침 샤워를 끝내고 욕실에서 나왔다. 문이 열리자 뽀얀 김이 방 안으로 밀려 나왔다.핸드폰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해인이 무심코 시선을 던졌고, 화면에는 희정의 이름이 떠 있었다.유호는 천천히 다가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뒤, 미간을 아주 살짝 찌푸리더니 창가로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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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3화

해인이 미간을 찌푸렸다.“당신...”어쩐지 유호가 계속 조우를 제 방으로 보내 자게 하려고 하더라니. 겨울방학 숙제할 시간을 주는 거라고 말했지만, 결국 속셈은 따로 있었던 셈이었다.해인은 유호와 한 침대에 누운 지 너무 오래된 탓에 이 상황이 낯설었다.유호가 고개를 돌려 해인을 바라보았다.“너도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 그렇게 내가 희정이를 보러 가길 바랐어?”해인은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당신... 예전엔 늘 그랬잖아.”말을 마친 해인은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운 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다시 머릿속으로 밀려왔다. 해인은 유호에게 적잖이 실망했던 자신을 떠올렸다.유호가 해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침대 위에 팔을 짚고 반쯤 일어난 유호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배어 있었다.“내가 늘 그랬다는 게 무슨 뜻인데? 나 그런 적 없어. 전에 차희정을 만난 건 일 얘기 때문이었어.”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믿은 건지, 믿지 않은 건지 알 수 없는 침묵이었다.유호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해인의 턱을 단단히 붙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그러니까 내가 집에 안 들어갔던 밤마다, 혼자 별별 상상을 다 했다는 거야?”해인은 어쩔 수 없이 유호의 시선을 마주했다. 눈빛은 피하는 기색 없이 담담했다.“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겠지.”말뜻은 분명했다. 해인은 유호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유호는 조금 난감해졌지만,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아직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유호가 아무리 말해 봐야 헛수고일 뿐이었다. 신뢰라는 건 하루 이틀 만에 쌓이는 게 아니니까.해인이 지친 듯 눈을 감고 쉬고 있자, 유호도 다시 자리에 누웠다.유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자. 푹 쉬어.”해인은 입술을 조금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희정은 문을 두드리고 찾아온 왕 박사를 실망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왕 박사는 희정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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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4화

휴가가 끝나고, 해인 일행은 돌아갈 준비를 했다.조우는 캐리어 옆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아, 이 조우님의 첫 해외여행이 이렇게 끝나다니!”해인은 캐리어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빠뜨린 물건이 없는지 살폈다.“내가 보기엔 집에 돌아가서 학교 가고 숙제하기 싫은 거 같은데.”속마음을 들킨 조우가 머쓱하게 웃었다.“헤헤, 역시 형수님은 날 너무 잘 알아. 사실 그것도 맞는데, 제일 싫은 건 엄마 얼굴 보는 거야.” “엄마는 하루라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와서 푸념을 하거든.”천하솜은 확실히 좋은 엄마라고 보기 어려웠다. 조우는 예전에 해인에게 몰래 말한 적이 있었다. 천하솜이 자기한테 해외여행 중 기회를 봐서 해인을 밀라고 시켰다고.그 말을 들었을 때 해인은 크게 놀랐다. 조우는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데 친엄마라는 사람이 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키다니. 그게 살인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세상 어느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그런 짓을 시킬까?다행히 조우는 원래 말을 고분고분 듣는 성격이 아니었다. 엄마의 말도 따르지 않았다.한때 비뚤어질 뻔했던 어린 아이를... 해인이 겨우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었다.해인이 말했다.“짐 다 챙겼으면 이제 출발하자.”고개를 끄덕인 조우가 자기 캐리어를 밀며 막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멈춰 섰다.“형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는데 왜 아직도 안 와?”20분 전, 유호는 전화를 한 통 받고 나갔다. 처리할 일이 조금 있다고 했다.해인은 유호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어쨌든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공항으로 가면 시간은 딱 맞을 터였다.유호는 늘 시간 약속에 철저했다. 늦을 사람은 아니었다.그런데 막상 유호가 보이지 않자 해인도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다.해인이 조용히 말했다.“형한테 전화해 봐.”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키즈워치를 꺼냈다.하지만 전화는 연결됐는데, 아무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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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5화

메시지가 도착한 시간은 5분 전이었다. 지금 유호가 택시를 타고 온다 해도 탑승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해인은 눈을 내리깔았다.지난 며칠 동안 유호가 보인 태도 때문에, 해인은 적어도 희정과는 더 이상 얽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결국 귀국을 앞두고 참지 못해 희정을 만나러 간 모양이었다.조우는 아직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랐다. 이상하다는 듯 해인을 보며 물었다.“형수님, 전화 안 해?”해인은 메시지 창을 닫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나지막한 해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안 할래. 네 형은 우리랑 같이 안 돌아가.”그 말을 듣자 조우의 미간이 바로 일그러져ㅆ다.“왜? 우리랑 같이 안 가면 누구랑 가는데? 형수님 아직 배도 이렇게 불렀는데, 형이 옆에서 챙겨야 하는 거 아니야?”말을 끝낸 조우는 뒤늦게 뭔가를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떴다.“설마 아니지? 형 또 그 아줌마랑 있어?”조우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지난 며칠 동안 유호는 내내 해인과 조우 곁에 있었다.조우는 권영자에게 틈틈이 소식을 전하기까지 했다. 유호와 해인 사이가 조금 풀린 것 같다고. 조우가 보기에도 유호가 해인을 대하는 태도는 전과 달랐고, 직접 주방에 들어가 밥까지 해 먹였으니까.그런데 지금 와서 또 왜 이렇게 된단 말인가?“아, 진짜 열 받아!”성격 급한 조우는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어쩐지 속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형수님, 형이 요 며칠 정신 차린 척한 거 다 연기였던 거 아니야? 사실 마음속으로는 계속 그 아줌마 생각하면서, 우리 안심시키려고 그런 거지.” “할머니가 화낼까 봐 형수님한테 잘하는 척한 거 아니냐고.”해인은 조용히 탑승구 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해인은 그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모르겠어.”사람 마음만큼 알기 어려운 것도 없었다. 해인은 이제 유호를 완전히 읽을 수 없었다.어쩌면 처음부터 남자에게 기대를 품지 말았어야 했다.조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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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6화

한편, 유호가 급히 공항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보인 건 이미 출발 처리가 끝난 탑승구였다.“대표님, 탑승 예정이셨던 항공편은 이미 이륙했습니다.”공항 직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유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그럼 제 아내는요?”“사모님께서는 해당 항공편에 탑승하셨습니다.”유호는 눈썹을 찌푸렸다.‘이게 무슨 상황이야?’‘내가 비행기를 놓쳤는데도, 기다리자는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두고 갈 수 있어?’‘심지어 짐까지 다 가져가 버렸어!’직원이 다시 물었다.“항공편 변경 도와드릴까요?”“먼저 이거 위탁 처리부터 해 주세요. 검역 서류입니다.”유호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지 하나를 건넸다. 안에는 배가 불룩한 작은 고양이가 들어 있었다. 며칠 전 해인이 밥을 챙겨 주던 바로 그 고양이였다.최근 유호는 호텔 직원들에게 부탁해 고양이의 행방을 계속 찾고 있었다. 다행히 출발 전에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길고양이를 위탁 수하물로 부쳐 한국까지 데려가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유호는 일정이 늦어질까 봐 미리 사람을 시켜 관련 절차를 밟게 해 두었다.공들인 보람은 있었다.다만 아쉬운 점은 해인이 먼저 비행기에 올라 떠나 버렸다는 것이었다. 유호는 고양이 문제에 정신이 팔린 탓에 해인이 건 전화를 미처 보지 못했다.그래도 괜찮았다.해인에게는 깜짝 선물이 될 테니까.그때 희정이 캐리어를 끌고 뒤쪽에서 뛰어왔다.희정은 숨을 헐떡이며 공항 직원에게 물었다.“저, 비행기 놓친 거 맞죠?”직원은 희정의 항공권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쪽 손님과 같은 항공편이셨는데, 두 분 모두 탑승하지 못하셨습니다.”그 말을 들은 희정은 고개를 돌렸다. 마치 이제야 유호를 알아본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유호야, 너도 오늘 이 비행기였어? 우연이네.”유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응.”희정이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거야?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차라리 호텔로 돌아갔다가 내일 같이 가는 게...”희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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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7화

상대 보호자는 연신 죄송한다 말을 반복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아이는 많아 봐야 다섯 살이나 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남자아이를 대하는 희정의 태도는 차가웠다. 아이가 자신을 다치게 만들었다고 탓하는 듯했고,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그런데 유호의 머릿속에는 문득 조우가 장난치며 사고를 치던 모습이 떠올랐다.조우는 제멋대로인 구석이 많았다. 이번 여행에서도 말도 안 되는 일을 여럿 벌였다. 하지만 해인은 인내심 있게 조우를 대했다. 하나하나 가르치면서, 잘못한 부분을 바로잡아 주었다.조우가 잘못했을 때도 해인은 조우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히 눈높이를 맞추며 왜 잘못인지 설명했다.일주일을 함께 지내는 동안 조우는 꽤 많이 달라졌다. 유호는 그 변화를 모두 보고 있었다. 해인이 잘 이끌어 준 덕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희정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희정은 아이를 싫어했다. 눈앞의 아이가 계속 죄송한다 말하는데도, 희정에게는 아이를 용서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아이의 보호자가 희정을 병원에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희정은 싫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필요 없다고 했다.희정의 시선은 유호에게만 향해 있었다. 유호가 자신에게 반응해 주길 바라는 눈이었다.유호는 한 걸음씩 희정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앉아 있는 희정을 내려다보았다.희정은 유호가 자신을 일으켜 세워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호는 핸드폰으로 공항 응급의료센터에 연락했다.희정의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곧이어 유호의 목소리가 들렸다.“공항 응급의료센터에 연락해 뒀어. 곧 올 거고, 필요하면 병원으로 데려다 줄 거야. 난 비행기 타러 가야 해.”희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유호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희정은 분해서 이를 악물었다.희정은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다친 사람처럼 굴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옆에 있던 아이와 보호자까지 깜짝 놀랐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꽤 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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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8화

그 말을 듣자 조우의 얼굴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잔뜩 떠올랐다. 하지만 방금 해인이 말한 것처럼 고자질해 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조우는 턱밑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켰다.해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호 씨는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비행기 내리자마자 KH그룹으로 갔어요.”“이 녀석은 참.”권영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해인이 그렇게 말하자 권영자는 의심 없이 믿는 듯했다.“일을 한시도 손에서 못 놓는다니까. 시차 적응도 안 하고 바로 회사로 가면 몸이 버티겠니?”“됐다, 유호가 아직 안 왔으면 우리끼리 먼저 밥 먹자. 너도 오래 이동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밥 먹고 얼른 쉬어야지.”해인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는 해인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천하솜은 조우를 붙잡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아들이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살피는 눈치였다.천하솜이 조우에게 몰래 물었다.“네 형 진짜 회사 갔어?”천하솜은 어쩐지 이상하다고 느꼈다. 같이 떠났는데 같이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그렇게 급해서 집에 들러 밥 한 끼 먹을 시간조차 없단 말인가!“진짜지!”조우는 방긋 웃으며 천하솜을 바라보았다.“엄마는 왜 그렇게 형한테 관심이 많아? 못 믿겠으면 회사에 직접 가 보든가.”천하솜은 그 말을 듣고 더 묻기 어려워졌다.식사는 큰 소란 없이 끝났다....식사 후 해인은 방으로 올라가 쉬었다. 핸드폰을 켜고 나서야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는 걸 확인했다.전부 유호가 건 전화였다. 시간을 보니 해인이 비행기에 오른 뒤였다. 읽지 않은 메시지도 하나 남아 있었다.[나 다음 항공편으로 변경했어. 너보다 5시간쯤 늦게 도착할 것 같아.]해인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렇다면 유호가 집에 도착하는 건 한밤중이 될 터였다.하지만 해인은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샤워를 마친 뒤, 해인은 침대에 앉아서 승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집은 구해 놨어?”[걱정 마. 집만 구한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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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9화

비행기에서 많이 잔 탓인지, 다음 날 해인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권영자는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있었다. 해인이 캐리어를 끌고 내려오자, 권영자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해인아, 이 아침에 어디 가려고?”“요즘 회사 일이 좀 바빠요. 본가에서는 거리가 멀어서 출퇴근도 불편하고, 이동 시간도 많이 걸려서요. 나가서 지내려고 해요.”권영자는 해인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 해인이 말한 ‘나가서 지낸다’는 뜻을, 유호와 살던 하늘빌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그래, 그럼 내가 이따 영지를 너한테 보내마.”지금 해인은 배가 많이 불러 있었다. 곁에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됐다. 누군가 가까이에서 챙기야 권영자도 마음이 놓였다.해인은 권영자를 향해 살짝 웃었을 뿐, 더 설명하지 않았다.그리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캐리어를 끌고 차에 올랐다.승아는 아파트 단지 아래에서 해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치자마자 승아가 곧장 달려왔다.“우리 해인이... 진짜 고생 많았어.”승아는 해인의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해인이 웃으며 물었다.“어느 동이야?”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승아의 시선이 해인의 배에 머물렀다.“의사가 아들인지 딸인지 말해 줬어?”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태어날 때까지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검진할 때 의사가 살짝 흘리더라.”며칠 전, 한씨 가문의 두 여자가 식탁에서 해인의 뱃속 아이 성별을 두고 떠들 때도 해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해인은 미소를 띤 채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굴에는 곧 엄마가 되는 사람의 기쁨이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아마 딸일 거야.”“공주님이네!”승아는 해인보다 더 신나 보였다.“딸 너무 좋지. 예쁘게 꾸며 놓고 같이 나가면 사람들이 모녀가 아니라 자매인 줄 알걸? 달콤하고 말랑말랑해서 너처럼 안아 주고 싶을 거야.”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은 임시로 지낼 집에 도착했다.방은 두 개였다. 하나는 해인이 지낼 방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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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0화

유호는 입술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권영자는 그 침묵에서 이상한 기색을 읽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별일 아닙니다.”유호가 조용히 대답했다.“조금 오해가 있었을 뿐이에요.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출근하겠습니다.”권영자는 미간을 찌푸렸다.“오해라면 빨리 풀어.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지 말고. 네 아내랑 아이 잘 챙기는 게 남자로서 네 책임이야.”“네.”유호가 나가자, 권영자의 시선은 곧장 조우에게 향했다.“조우야, 대체 어떻게 된 거니? 할미한테 숨기는 거 있지?”조우는 괜히 찔려 권영자의 눈을 피했다.“없는데요.”하지만 조우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권영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다. 조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다.곧 엄한 눈으로 조우를 바라보았다.“조우야, 거짓말은 나쁜 버릇이야. 할미한테 사실대로 말해.”권영자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조우는 바로 기가 죽었다. 결국 일의 앞뒤를 전부 털어놓았다.“그러니까 형이 문제예요. 형수님은 돌아오는 내내 저랑 주치의 건생님이 챙겼다고요.” “이건 누가 봐도 화가 날 일이잖아요. 형수님이 형한테 차갑게 굴지 않은 것만 해도 엄청 너그러운 거예요.”권영자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이번 B국 여행에 희정까지 따라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그 아이도 참 염치가 없네.’‘지난번 내가 직접 집으로 불러서 경고까지 했는데...’‘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긴 모양인 것 같구나.’‘남의 가정을 망가뜨리려고 뻔뻔하게 따라붙기까지 했어!’권영자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이번 B국 여행에 희정까지 따라갔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그 애도 참 염치가 없구나.’‘지난번에 내가 직접 집으로 불러 경고까지 했는데...’‘아직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네.’‘남의 가정을 흔들어 놓으려고 뻔뻔하게 따라붙기까지 하다니.’권영자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아무래도 시간을 내서 차 시장을 집으로 한번 모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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