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의 모든 챕터: 챕터 491 - 챕터 500

558 챕터

제491화

유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해인은 오래전부터 집을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유호의 머릿속에 문득 조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유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애 데리고 도망가려는 거야?”해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내가 당신과 그 사람한테 자리 비켜 주는 건데, 기분 좋지 않아?”해인은 소파에 앉아 따뜻한 유리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유호가 해인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네가 왜 자리를 비켜? 무슨 자리를 비킨다는 건데? 누가 너한테 비키래?”해인의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는 하루 이틀에 생긴 게 아니었다.한 달 넘게 꾹꾹 눌러 삼킨 감정이었다.해인 혼자 억울한 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까지 함께 서러운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었다.해인에게는 기댈 친정이 없었다.그러니 해인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해인은 피하지 않고 말했다.“내 아이가 조우처럼 그런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아.”한원랑 곁에는 여자가 많았다. 한씨 가문은 한집 안에 여러 여자가 함께 있는 상황조차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해인은 어쩌면 윗물이 맑지 않아서 아랫물도 흐려진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유호 역시 저렇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하지만 해인은 자기 아이를 그런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라게 둘 수 없었다. 해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한씨 가문을 떠나는 것이었다.해인은 방으로 들어가 침대 옆 탁자의 서랍에서 서류 한 부를 꺼냈다.다시 거실로 돌아온 해인은 서류를 유호에게 내밀었다.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우리 이혼하자.”이혼합의서였다. 심지어 서류에는 이미 해인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었다.서류를 받아 든 유호의 얼굴에는 믿기 어렵다는 감정이 떠올랐다.유호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해인이 배가 이렇게 부른 상태로 자신에게 이혼을 말할 줄은.해인의 글씨는 단정하고 고왔다. 두 부의 합의서 모두에 이미 서명이 끝나 있었다.하루 이틀 만에 준비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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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2화

해인은 잠시 멍해졌다.작은 고양이는 해인을 알아보는 듯했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다가 해인의 발치에 몸을 비비며 부드럽게 울었다.해인은 망설이다가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B국에 있을 때 해인은 이 고양이에게 몇 번 밥을 챙겨 준 적이 있었다.처음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던 작은 녀석도 조금씩 마음을 놓았고, 어느새 해인에게 꽤 익숙해져 있었다.“왜 네가 여기 있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해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야옹...”말을 할 수 없는 고양이는 그저 해인을 향해 계속 울기만 했다. 아무래도 배가 고파 먹을 것을 달라는 것 같았다.해인은 방금 떠난 유호를 떠올리면서 표정이 굳어졌다.‘원래 B국에서 떠돌고 있어야 할 고양이가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거야?’‘설마 유호 씨가... 데려온 건가?’‘하지만 검역이며 세관이며, 거쳐야 할 절차가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관련 규정도 복잡할 테고...’어쨌든, 해인이도 어떤 곳은 반려동물 위탁 운송 자체가 까다롭다고 알고 있었다. 더구나 이 고양이는 배까지 불러 있었다.‘그렇다면 그날 유호 씨가 비행기를 놓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해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양이를 집 안으로 데려왔다. 주방에서 닭가슴살을 조금 찾아서 잘게 찢어 먹였다.고양이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소파 위로 폴짝 올라가 그대로 잠들려고 했다.작은 녀석에게서는 떠돌이 시절의 지저분한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해인은 누군가 고양이를 씻겨 준 것 같다고 짐작했다.그리고 둥글게 부푼 고양이 배를 보며 난감해졌다.이 상태라면 언제 새끼를 낳아도 이상하지 않았다.해인은 혹시 몰라 배달대행 앱으로 고양이가 먹을 츄르와 사료를 주문했다. 부드러운 담요로 간단한 고양이 집도 만들어, 고양이를 그 안에 넣어 쉬게 했다.날이 밝으면 근처 동물병원에 데려가 상태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새벽이 깊어졌을 무렵, 고양이가 갑자기 출산을 시작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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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3화

동물병원에서 해인은 접수를 마친 뒤, 케이지를 들고 진료실로 들어갔다.그런데 진료실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흰 가운을 입은 태상이었다.해인이 놀라 물었다.“어떻게 여기 있어요?”태상도 해인을 보고 잠깐 뜻밖이라는 눈빛을 보였다. 태상의 시선이 해인이 들고 있는 케이지로 내려갔다.“여기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해인은 태상에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철진이 해인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사람이었고, 태상은 예철진의 친아들이었다.해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다른 병원으로 갈게요.”태상이 해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어느 병원에 가도 진료는 똑같아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동물병원도 5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어요. 왕복하면 한두 시간은 그냥 버릴 텐데...”해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예철진이 감옥에 들어간 뒤, 예씨 집안 남매는 막대한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은행의 독촉도 상당히 심하다고 들었다. 예씨 집안이 집을 팔아도 그 큰 구멍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태상도 꽤 궁지에 몰린 상황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구를 하던 사람이 동물병원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할 리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고 있는 셈이었다.잠시 망설이던 해인은 결국 케이지를 태상에게 건넸다.배가 많이 부른 몸으로 동물병원을 옮겨 다니는 건 확실히 무리였다. 시간까지 따져 보면 더더욱 그랬다.“길에서 데려온 고양이에요. 어젯밤에 새끼를 낳았고요. 건강검진을 받아 보려고 왔어요.”태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미 고양이를 받아 들었다. 손놀림은 익숙하고 빨랐다. 곧바로 채혈까지 마쳤다.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해인에게 주헌의 전화가 걸려 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열이 많이 나십니다. 그런데 제가 회사 쪽 일을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해서요. 혹시 괜찮으시면 하늘빌에 들러 대표님 상태를 한번 봐 주실 수 있을까요?] 해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프다고?’‘어젯밤 내 집에서 나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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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4화

그 말을 들은 해인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그제야 해인은 어미 고양이 배 쪽의 털이 일부 밀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이건...”“어젯밤에 새끼를 낳았다고 하셨죠? 며칠 전에 누군가 이 고양이 산전검사를 해 둔 것 같습니다.”전날 유호가 떠난 뒤, 어미 고양이가 갑자기 집 문 앞에 웅크리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해인은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다.유호였을 것이다.유호는 어미 고양이를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동물병원에 데려가 검사까지 받게 한 것이다.‘내가 길고양이와 접촉했다가 아이에게 해가 될까 봐 걱정했던 건가?’“감사합니다. 알겠어요.”해인은 어미 고양이를 다시 케이지 안에 넣었다.검사비를 결제한 뒤, 해인은 고양이를 들고 병원을 나서려 했다.태상이 해인을 불러 세웠다. 태상은 봉투 하나를 해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츄르랑 모래 조금 넣어 뒀습니다. 고양이 돌보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해서요.”해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음 한편으로는 태상의 호의를 받고 싶지 않았다.“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해인은 봉투를 다시 밀어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특히 태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해인은 본능적으로 태상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태상의 손이 어색하게 허공에 멈췄다. 그는 봉투를 든 채, 해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태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동물병원 밖까지 따라 나왔다.“댁이 이 근처는 아닐 텐데, 왜 여기까지 와서 진료를 본 거예요?”그 말을 듣고 해인은 걸음을 멈췄다.“한 대표와 다퉜어요?”물음이었지만 태상의 말투는 이미 확신에 가까웠다.해인은 참지 못하고 돌아섰다. 목소리는 썩 좋지 않았다.“그게 예태상 씨와 무슨 상관이죠?”마침 택시 한 대가 해인 앞에 멈춰 섰다. 해인은 차 문을 열고, 고양이가 든 케이지를 챙겨 택시에 올랐다.그리고 태상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두 사람이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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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5화

해인은 새끼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챙겨 준 뒤 집을 나섰다.원래는 YD그룹에 들러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늘빌 근처를 지나던 중 문득 떠오른 일이 있어 기사에게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해인은 하늘빌 앞 상가에서 야채죽 한 그릇을 샀다. 그다음 단지 안으로 들어가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화면에는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안내가 떴다.해인은 어쩔 수 없이 주헌에게 전화를 걸었다.“유호 씨가 현관 비밀번호 바꿨어요?”주헌은 놀란 듯했다.[네, 바꾸셨습니다. 사모님, 대표님 보러 가신 겁니까?]“생각해 보니 주 비서님 말이 맞는 것 같아서요. 유호 씨가 열 때문에 바보가 되는 건 상관없는데, 제 아이한테 바보 아빠가 생기는 건 곤란하잖아요.”해인은 주헌이 했던 말 중 하나는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유호 사이에는 분명 오해가 있었다.유호가 그토록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길고양이를 데려오고, 산전검사에 구충까지 해 둔 걸 보면 적어도 마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공항에서 늦었던 일도 이제는 설명이 되었다. 그 부분만큼은 해인도 유호를 탓할 수 없었다.게다가 전에 아이 물건을 사 둔 것들도 하늘빌 창고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해인은 그것도 가져가야 했다.한참을 헤맨 끝에 해인은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갔다.방문을 밀고 들어간 해인은 침대에 누워 있는 유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유호의 상태는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열로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입술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평소라면 경계심이 강해 누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바로 알아차릴 유호였다. 그런데 지금은 해인이 침대 곁까지 다가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깊이 잠들었다기보다는 의식을 놓은 사람처럼 보였다.해인은 유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가 바로 뗐다.열이 너무 높았다.이마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델 것 같았다.‘열이 이렇게 심한데, 해열제도 안 먹었어?’해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돌려 구급상자를 뒤졌다. 해열제를 찾아낸 뒤 따뜻한 물을 따라서 유호의 입에 넣어 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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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6화

유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유호는 해인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다시 끌어당겼다.해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배가 불러 중심도 제대로 잡기 어려운 탓에 몸이 휘청하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유호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해인을 받아 냈다. 해인은 어쩔 수 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게 되었고, 반쯤 유호의 품에 기대는 자세가 되었다.유호의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여기 온 게, 나랑 이혼 얘기하려고 온 거야?”두 사람의 시선이 맞붙었다. 해인은 유호에게 기대어 있었고, 열 때문에 거칠게 뛰는 유호의 심장 박동까지 느낄 수 있었다.이렇게 가까운 거리는 해인에게 불편했다.해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유호의 힘은 너무 셌다. 유호의 팔이 해인의 목 뒤를 지나 어깨를 단단히 감싸 눌러서, 해인은 꼼짝할 수도 없었다.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안 해인은 어쩔 수 없이 유호의 시선을 마주했다.“맞아. 그럼 뭐라고 생각했는데?”유호의 눈가가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말해 봐. 네가 끝까지 나랑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야?”해인은 이제 유호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이런 결혼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뿐이었다. 해인은 그런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대로 말하면 서로가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았다. 해인은 말을 조금 바꾸었다.“더 이어 가 봐야 의미가 없다고 느꼈어.”“그럼 아이는?”“나는 아무것도 안 가져갈 거야. 아이 양육권만 원해.”그 말을 듣자 유호가 조용히 웃었다. 유호의 숨결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참 뒤에야 유호가 입을 열었다.“좋아. 그럼 YD그룹은 나한테 넘겨.”해인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YD그룹은 강씨 가문의 자산이자 해인의 혼전 재산이었다. 해인은 유호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꺼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해인이 미간을 찌푸렸다.“그 요구는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지나쳐?”유호의 눈에 비웃음이 스쳤다. 해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더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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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7화

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서면서 침대 위의 유호와 거리를 벌렸다.유호를 바라보는 해인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해인은 유호가 마음이 변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매정할 줄은 몰랐다. 자기 아이마저 원하지 않을 줄은.하긴 임신한 건 유호가 아니었다. 몸이 힘든 것도 유호가 아니었다. 남자인 유호가 어떻게 해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 배가 커지는 걸 지켜보며 아이에게 쌓인 해인의 마음을 유호가 어떻게 알겠는가?“누구도 내 아이를 해치게 두지 않아. 아이 아빠라도 안 돼.”해인의 시선은 완전히 차가워졌다. 유호를 바라보는 눈은 낯선 사람을 보는 듯했다.해인의 목소리도 싸늘했다.“한유호! 이제 이 아이는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어. 낳을지 말지도 당신이 정하는 게 아니야.” “아이를 품고 있는 건 나야. 당신이 뭐라고 이 아이의 삶과 죽음을 좌우해?”임신이 이만큼 진행된 이상, 아이의 몸과 장기는 이미 대부분 자라 있었다.손과 발도 다 있었다.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었다. 아이를 포기한다는 건 결국 유도분만을 뜻했다. 뱃속에서 찢겨 나와야 할 수도 있고, 태어난 뒤에도 숨이 붙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이 아이는 뜻밖에 찾아온 생명이었지만, 해인은 이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다.아이야말로 해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을 해인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해인은 유호가 좋은 남편은 아니어도, 적어도 좋은 아빠는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호의 마음이 이렇게 잔인할 줄은 몰랐다.그래도 상관없었다. 앞으로 해인이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하면 되었다. 아이가 받지 못할 아빠의 사랑까지 해인이 전부 채워 주면 되었다.해인은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슬픔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단호했다.지난 몇 달 동안 해인은 많이 달라졌다. 더는 남자의 보호가 필요한 여자가 아니었다.혼자서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유호는 해인의 감정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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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8화

유호는 더 혼란스러워졌다.“무슨 칩 수술?”그 말을 들은 정수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장난치는 눈치가 아니었다. 유호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수술이 끝난 날, 정수는 일부러 태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했다.태상이 직접 말했다. 유호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야마모토 교수와 교수의 팀이 직접 집도했다고.정수는 태상을 믿었다. 그래서 유호를 그곳에 남겨 회복하도록 했다. 마침 정수는 출장이 잡혀 있었고, 이후 유호도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정수 역시 그 일을 더 이상 확인하지 않았다.정수는 그동안 유호가 조용히 지낸 이유가 회복이 순조로워서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유호가 수술받은 사실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렸을 줄은 몰랐다.“수술 말고 또 기억 안 나는 게 있어?”정수가 물었다.그 질문에는 유호도 할 말이 있었다.“사람들은 내가 예전에 해인이한테 잘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해인이랑 있었던 지난 일들이 하나도 기억 안 나.”“수술 끝난 날, 연구실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해?”유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기억 안 나.”정수는 질문을 바꾸었다.“그럼 정신이 들었을 때 어디였어?”“호텔.”정수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이상했다.원래라면 유호는 수술 후 회복을 위해 태상의 연구실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호텔에서 깨어났단 말인가?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태상이 뭔가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유호가 알아차리면 안 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유호가 깨어난 뒤, 태상은 유호를 연구실 밖으로 옮겼을 것이다. 자신과의 연관성을 지우기 위해서.유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왜 그래?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정수는 입술을 다문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이 일은 너무 충격적이라서, 정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더 큰 문제도 있었다. 태상과 야마모토 교수 팀에게 문제가 있다면, 대체 누가 유호의 머릿속 칩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그토록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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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9화

유호의 열은 서서히 내려갔다. 체온은 더 이상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흐릿하고 묵직하게 아팠다.정수는 마음속으로 더 권위 있는 사람을 찾아 칩 문제를 상담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호 곁에 잠시 머물던 정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유호의 집을 나온 뒤, 정수는 차 안에 오래 앉아 있었다.여러 가지를 따져 본 끝에, 정수는 태상을 만나서 떠보기로 했다.정수는 태상이 일하는 연구실로 찾아갔다. 하지만 남아 있던 직원은 태상이 연구실에 없다고 했다.정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럼 어디 갔어요?”“요즘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셔서요. 연구실은 당장 큰일이 없어서 자주 안 나오세요. 전화를 한번 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정수는 어쩔 수 없이 명함을 찾아 태상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끊어지기 직전에야 연결됐다. 태상 쪽은 주변 소리가 꽤 소란스러웠다.[정수야.]정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잠깐 만날 수 있어?”[무슨 일 있어? 지금 식당에서 일하는 중이라. 그냥 전화로 말하면 안 돼?]정수는 미간을 좁혔다.“괜찮아. 내가 선배 있는 데로 갈게.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전화 너머의 태상은 잠시 말이 없다가 결국 한발 물러섰다.[알았어. 주소 보내 줄게.]정수는 곧장 태상이 일하는 곳으로 향했다....예씨 집안이 무너진 뒤, 태상은 빚을 갚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돈을 벌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 온 모양이었다.하지만 정수는 태상이 식당 주방에서 보조로 일하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원래라면 메스를 쥐어야 할 손이, 지금은 식칼을 쥐고 있었다. 태상은 특급 호텔 주방 안에서 소고기를 한 점씩 얇게 썰고 있었다.해부를 배운 덕분인지, 따지고 보면 전공과 전혀 동떨어진 일도 아니었다. 태상이 썰어 낸 소고기는 결이 고르고 모양도 훌륭했다. 옆에 있던 주방장마저 태상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정수는 유리창 너머로 소고기를 썰고 있는 태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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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0화

정수가 말했다.“내가 방금 유호를 보고 왔어. 왜 유호가 많은 걸 잊어버린 거지?”태상이 물었다.“네가 말하는 많은 게 뭔데?”“유호는 자기 머리에 칩이 심어졌던 일 자체를 전혀 기억 못 해. 기억도 여기저기 끊겨 있는 것 같고, 자기 아내와 있었던 지난 일까지 깨끗하게 잊었어.”태상은 눈을 내리깔았다.“그래? 후유증일 수도 있지. 좀 지나면 괜찮아질 수도 있고.”정수는 믿지 않았다. 의료인으로서 그런 설명은 정수를 설득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정수는 진실을 알아내고 싶었다.“선배,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태상은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없어.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내가 너한테 뭘 숨기겠어? 이 일을 숨긴다고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말을 마친 태상은 주방 쪽을 돌아보았다.“됐어. 나 일하러 들어가야 해. 너도 돌아가.”태상이 몸을 돌리자 정수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태상의 반응은 분명히 뭔가 찔리는 사람의 태도였다.정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태상의 등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진실이 뭔지는 선배가 제일 잘 알잖아. 나는 늘 선배를 내 롤모델이라고 생각했어. 솔직히 말해 봐.”“그 칩, 애초에 선배 연구실에서 나온 거야? 아니면 선배 지도교수인 야마모토 교수 연구소에서 나온 거야?”태상이 이렇게까지 부인한다는 건 한 가지를 뜻했다. 그 칩은 반드시 태상과 관련이 있었다. 태상은 칩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이건 거대한 이권이 얽힌 문제였다. 한 군데만 건드려도 전부 흔들릴 수 있었다. 그래서 태상은 인정하지 않았고,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다. 연구실까지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는 것이다. 연구윤리와 도덕을 정면으로 거스른 문제였으니,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날에는 연구실은 사회 전체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태상이든, 야마모토 교수든 마찬가지였다.정수는 늘 태상을 존경했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태상이 보여 준 뛰어난 수술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수가 더 높이 봤던 건 태상의 사람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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