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쿠라의 성벽: Chapter 91 - Chapter 100

115 Chapters

제87화: 우리의 균열 (The Cracks in 'Us')

지하실의 공기는 이제 비릿한 쇠 냄새가 아닌, 지독하게 정갈한 **‘무향(無香)’**의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은신처 구석에서 넘어진 아이가 무릎을 깼을 때, 아이는 단 한 마디의 울음도 터뜨리지 않았다. 대신 그 공간에 있던 수십 명의 생존자가 동시에 자신의 무릎을 만지며 낮게 신음했을 뿐이다. 아이의 고통은 수십 개의 신경망으로 분산되어 희석되었고, 지하실 전체는 마치 거대한 하나의 폐처럼 일정한 박자로 숨을 쉬었다.​누군가 슬퍼하면 도시 전체가 비에 젖은 듯 침울해졌고, 누군가 희망을 품으면 골목마다 보이지 않는 온기가 돌았다. 대전은 이제 개별적인 인간들의 집합이 아닌, 거대한 하나의 정신적 유기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인류가 꿈꾸던 완벽한 구원이었다. 고통을 나누고 슬픔을 희석하는, 박막이 결코 뚫을 수 없는 철옹성 같은 유대. 하지만 그 완벽한 평화의 이면에서, 서윤은 아주 미세하고 기괴한 균열을 목격하기 시작했다.​강토가 자신의 배를 움켜쥐며 혼란스러운 눈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위장은 분명 가득 차 있었지만, 그의 뇌세포는 은신처 밖 어딘가에서 굶주리고 있는 누군가의 허기를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강토의 떨리는 손등 위로 남색 잉크가 번졌으나, 그것은 더 이상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작가님... 배가 고파요. 그런데 저는 분명 방금 밥을 먹었거든요. 머릿속에서는 제가 가본 적 없는 시장 통로가 보이고, 제가 모르는 여자의 얼굴이 어머니라며 울고 있어요. 제 기억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지금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거죠?”​강토의 정체성은 이제 댐에 생긴 실금처럼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수천 명의 감정이 공명이라는 이름으로 뒤섞이면서, ‘나’라는 개인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호는 미친 듯이 연산 장치를 두드렸다. 화면 가득 쏟아지는 주파수들은 더 이상 개별적인 파동이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뭉개지는 진흙탕처럼 보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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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경계의 간격

지하 은신처의 공기는 폭풍 같은 진동을 지나 묘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낡은 형광등이 깜빡일 때마다 벽면에 비치는 그림자들은 이제 서로 겹쳐지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거대한 하나의 폐처럼 일정한 박자로 숨을 쉬던 생존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들어선 것 같은 이질감이 감돌았다. 서윤은 자신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맺힌 잉크의 열기를 느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고, 좁은 공간에 몸을 맞대고 있었으나 그들 사이에는 이제 ‘간격’이 존재했다. 타인의 슬픔이 내 심장을 찢어발기지 않는 거리, 타인의 공포가 내 호흡을 뺏지 않는 최소한의 영토. 그것은 구원이면서 동시에 지독한 소외였다. ​강토가 천천히 손을 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까처럼 타인의 허기가 자신의 위장을 뒤틀지도, 누군가의 환각이 자신의 눈앞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는 멍하니 입술을 뗐다. ​“이상해요, 작가님. 이제 안 무너져요. 머릿속이 조용해졌어요. 그런데... 그런데 좀 외로워요. 방금 전까지는 온 세상이 제 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이 좁은 몸뚱이 안에 갇힌 기분이에요.” ​서윤은 강토의 말을 들으며 잉크 묻은 연필을 꽉 쥐었다. ‘우리는 서로를 구했지만, 동시에 서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이 경계를 세우기 위해 지불한 대가로, 어린 시절 삼촌과 함께 보던 만화책의 제목들이 하얗게 지워져 나갔다. 기억을 내어주고 얻은 이 평화는 지독하게도 차갑고 정직했다. ​서윤은 다시 한번 펜을 들었다. 이번에는 실험이었다. 은신처 한쪽에서 여전히 공명의 잔상에 시달리며 헛손질을 하던 한 노파가 대상이었다. 노파는 옆 사람의 짧은 한숨에도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서윤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잉크의 파동을 아주 정밀하게 조율해 ‘경계 서사’를 흘려보냈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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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간격의 대가

지하 은신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이들의 눈에 비친 대전 시내는 기묘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이전의 그 압도적이었던 감정의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한 공기가 감돌았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지만, 그 웃음의 끝은 예전처럼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길가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어도 주변 사람들은 그 슬픔의 '맥락'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그 고통에 전염되어 함께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이제 안 아파요... 근데 왜 이렇게 모든 게 텅 빈 것 같죠?”​강토의 옆을 걷던 한 필사자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보다 지독한 허무가 서려 있었다. 경계 서사가 세운 성벽은 확실히 안전했다. 하지만 그 성벽은 타인의 진심이 전해주는 온기까지도 차갑게 식혀버렸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서로를 '느끼지' 못했다. 공명이 뜨거운 폭풍이었다면, 지금 그들 사이를 흐르는 것은 지독하게 차가운 겨울의 공기였다.​서윤은 그들의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독의 질감을 읽어냈다. 이전의 그 뜨거웠던 합일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거칠고 메마른 갯벌 같았다. 사람들은 이제 타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누군가의 진심을 확인하는 순간, 다시 그 지독한 공명의 늪으로 끌려 들어갈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 때문이었다. 친절은 형식적이었고, 배려는 계산적이었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세운 벽이 거대한 감옥이 되어 인류를 개별적인 방 속에 가두고 있었다. 서윤은 펜을 쥔 손끝이 점점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기록해야 할 이야기는 많았으나, 그 이야기를 지탱할 감정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안정이라는 이름의 평화가 인류의 영혼을 얼마나 창백하게 만들고 있는지를.​“안 돼, 속도가 너무 느려! 서윤아, 이건 네트워크가 아니라 1대 1 회선이야!”​민호는 이동형 단말기를 흔들며 절규하듯 외쳤다. 이전의 공명 상태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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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선택의 군단 (The Legion of Choice)

대전을 가로지르는 갑천 변의 바람은 이제 차가운 금속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수호국의 기갑 부대가 도시의 숨통을 조여오는 가운데, 서윤은 잉크가 말라붙어 거칠어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이제 ‘선택적 연결’이라는 낯선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생존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예전처럼 맹목적으로 서로의 감정에 침식되지 않았다. 각자의 자아라는 단단한 성벽 안에서, 그들은 오직 필요할 때만 서로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었다.​하지만 그 ‘필요’를 결정하는 것은 기계적인 연산이 아니라 지독하게도 불안정한 인간의 의지였다.​“작가님... 이게 정말 맞는 길일까요?”​강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제 스스로 연결의 스위치를 쥐고 있었지만, 그 무게는 예전의 공명보다 훨씬 무거웠다.​“우리는 이제 서로를 온전히 느끼지 못해요. 누군가 죽어가도 내가 문을 열지 않으면 그건 타인의 비극일 뿐이죠.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너무 차갑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서윤은 강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선택적 연결’의 서사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치른 대가로, 진우와 처음으로 함께 보았던 영화의 줄거리가 통째로 삭제되어 있었다. 텅 빈 기억의 구멍이 시렸지만, 그녀는 창백한 입술을 뗐다.​“...이게 맞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강토 씨. 하지만 이 길 말고는...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남을 방법이 없어요. 우리는 기계처럼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도, 그렇다고 철저히 고립되어 죽어갈 수도 없으니까요. 이 불안정한 간격을 견디는 것, 그게 우리의 유일한 전쟁이에요.”​서윤의 목소리에는 확신보다 지독한 슬픔과 흔들림이 서려 있었다. 정답을 말하는 지도자가 아닌, 오답의 벼랑 끝에서 동료들을 붙잡고 있는 한 인간의 처절한 고백이었다.​전쟁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수호국은 대전 탄방동 일대에 대규모 **‘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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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화: 의지의 비용

서윤과 진우의 맞잡은 손 사이로 흐르는 잉크의 파동은 더 이상 이전처럼 요란하게 요동치지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깊은 심해의 정적과 닮아 있었다. 한시우가 쏘아 올린 ‘강제 동기화’의 해일이 대전을 덮쳐 수만 명의 자아를 난도질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경 3미터의 공간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곳은 비명도, 가짜 공포도, 타인의 침식도 닿지 않는 완벽한 진공 구역이었다.​“이건 차단이 아니야. 이건... 시스템 자체를 무시하고 있어.”​민호는 이동형 단말기 화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화면 가득 쏟아지던 수호국의 동기화 로그들이 두 사람의 근처에서는 아예 ‘인식 불가능’ 상태로 튕겨 나갔다. 민호는 화이트보드 대신 흙먼지가 쌓인 장갑차의 측면에 새로운 공식 하나를 휘갈겼다.“기존의 방패가 시스템의 공격을 막아내는 구조였다면, 지금 두 사람이 만들어낸 **의지 필드(Will Field)**는 시스템이 규정한 논리 자체를 상회하고 있어. 0과 1의 세계에서는 정의할 수 없는, 오직 주체적인 의지만이 만들어내는 독자적인 현실 영역이야. 하지만...”​민호의 목소리가 떨렸다.​“이 영역을 유지하기 위해 두 사람이 지불하고 있는 ‘비용’이 너무 커.”​서윤은 민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들리지만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이 필드를 확장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로, 고등학생 시절 문학 캠프에서 처음으로 칭찬받았던 그 찬란한 기억이 하얗게 증발했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는 차가운 ‘의지’만이 잉크처럼 고여 있었다.​“삼촌, 이걸 퍼뜨려야 해요. 우리만 안전해서는 안 돼요.”​서윤의 목소리는 유령처럼 건조했다. 그녀는 진우의 손을 더 꽉 쥐며, 필드 근처에서 고통받고 있던 세 명의 필사자에게 연결을 시도했다. 진우의 흔들림 없는 안광을 렌즈 삼아, 서윤의 의지를 빛처럼 굴절시켜 그들에게 쏘아 보냈다.​결과는 참혹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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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고통의 최소 단위

대전의 하늘은 이제 두 갈래의 지옥으로 찢겨 있었다. 한쪽은 한시우가 선사한 ‘무감감 프로토콜’이 지배하는 회색빛 침묵의 구역이었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강제 공명의 잔재가 남은 채 서로의 고통에 질식해가는 핏빛 비명의 구역이었다.​진우가 펼친 의지 필드 안에서 서윤은 숨을 헐떡이며 그 기괴한 대비를 목격했다. 필드 밖, 회색 구역의 사람들은 인형처럼 멈춰 서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팔이 꺾여도, 눈앞에서 동료가 쓰러져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고통이 사라진 그들의 눈동자는 마치 초점이 나간 카메라 렌즈처럼 허공을 유영했다. 반면, 공명 구역의 사람들은 타인의 작은 신음에도 자지러지며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고통이 없으면 선택이 없고... 너무 많으면 선택이 불가능해.”​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의지 필드가 유지해주는 ‘느낄 수 있는 상태’는 축복이자 저주였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기억 중 일부—고등학생 시절 단짝 친구와 나누었던 비밀 일기의 내용—가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상실의 고통이 역설적으로 그녀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아프기에 멈춰야 했고, 아프기에 바꿔야 했다. 고통은 자아를 현재에 붙들어 매는 유일한 닻이었다.​“서윤아, 인간은 일정 수준의 고통이 있어야만 판단을 내릴 수 있어. 뇌가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인지하는 최소한의 전기 신호, 그게 바로 고통이니까.”​민호는 부서진 장갑차의 내부 모니터를 응시하며 새로운 수치를 입력했다. 그의 손가락은 공포로 떨리고 있었지만, 과학자의 집요함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화면 가득 쏟아지는 생존자들의 신경 신호를 분석해 하나의 구간을 정의했다.“고통(mathcal{P})이 최소 임계값(P_{min})보다 낮으면 무감각(Null) 상태가 되어 주체성을 잃어버려. 반대로 최대 임계값(P_{max})을 넘어서면 공명 붕괴가 일어나 자아가 파괴되지. 인간이 인간으로서 ‘선택(mathcal{C})’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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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고통의 해석

대전 중심부를 향한 ‘선택의 군단’의 행진은 처절한 침묵 속에 이어졌다. 하늘에서는 한시우의 위성이 쏟아내는 ‘랜덤 고통 프로토콜’이 보이지 않는 낙뢰처럼 대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1초 전까지 멀쩡히 걷던 이가 갑자기 폐가 찢어지는 듯한 환상통에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고, 다른 이는 전신이 불타는 듯한 발작에 몸을 떨었다. 지옥 같은 행군이었다.​그때, 대오의 중간에서 한 중년 남성이 무너져 내렸다. 이전 같으면 비명과 함께 자아 붕괴로 이어질 강도의 타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이건... 내가 겪은 게 아니야. 내 몸에는 상처가 없어. 이건... 가짜야.”​그의 눈동자에는 고통의 잔상이 일렁였지만, 이전과 같은 공포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통증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타인의 상처를 내려다보는 의사처럼, 그는 자신을 덮친 지옥을 ‘정보’로 분리해내기 시작했다.​서윤은 그 광경을 목격하며 멈춰 섰다. 그녀의 가슴 속에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쳤다.​“우리는 지금까지 고통을 느끼고 있었어. 하지만 그게 ‘누구의 것인지’는 구분하지 못했어.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질식하거나, 시스템이 주입한 가짜 통증에 무너졌던 거야.”​서윤은 잉크가 말라붙어 거칠어진 손으로 원고지를 쥐었다. 이제 그녀가 써 내려가야 할 문장은 고통을 견디는 방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이라는 거대한 소음 속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해석기’였다.​“이제는 선택해야 해요.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이 나의 역사인지, 타인의 비명인지, 아니면 저 기계가 주입한 허상인지를.”​민호는 서윤의 말을 듣자마자 새로운 알고리즘을 단말기에 휘갈겼다. 그는 이제 고통을 단순한 압력 수치가 아닌, 출처와 맥락을 가진 신호로 재정의했다.고통 식별 (Pain Identification)“지금까지는 쏟아지는 모든 신경 신호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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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공동의 판단

​대전 도심의 중심부를 향해 진격하는 '선택의 군단'은 이전과는 다른 기묘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한시우의 위성이 쏟아내는 '고통 랜덤화 프로토콜'이 빗줄기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각자의 자아라는 성벽 안에서, 그들은 자신을 덮치는 통증을 차갑게 해석하고 분류해내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안정이 찾아온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안정의 이면에는 지독한 '지연'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건 너무 느려... 서윤아, 각자가 해석하고 선택하는 속도로는 수호국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없어.” ​민호는 단말기 화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화면 위에는 수천 개의 푸른 점들이 각기 다른 박자로 깜빡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통증을 해석하는 데 3초를 소요했고, 누군가는 공포를 억누르느라 발걸음을 멈췄다. 개별적인 선택은 위대했으나, 그 파편화된 결단들은 거대한 군단의 움직임을 톱니바퀴가 어긋난 기계처럼 삐걱거리게 만들었다. ​서윤은 대오의 선두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한 아이는 눈앞의 가짜 화염을 피하려 멈춰 섰고, 뒤따르던 노인은 그것이 가짜임을 알고 밀어붙였다. 각자의 판단은 옳았지만, 집단으로서의 보폭은 엉망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서윤은 잉크가 묻어 검게 변한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깨달았다. ​‘우리는 혼자 선택하면 안 돼. 고통은 개인의 것이지만, 판단은 함께 해야 해.’ ​서윤은 다시 펜을 들었다. 이제 그녀가 써 내려가야 할 문장은 개인의 방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개의 흩어진 결론을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묶어주는 '판단의 동기화'였다. ​“판단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감정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할 결론은 하나여야 합니다.” ​민호는 서윤의 의도를 파악하고 새로운 논리 구조를 시스템에 이식했다. ​🔥 공동 판단 (Collective Judgement) “이건 이전의 공명(Resonance)이 아니야. 감정을 섞어서 붕괴시키는 게 아니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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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책임의 귀속

지난 오판이 남긴 상처는 대전 도심의 아스팔트 위에 붉고 검은 얼룩으로 남았다. 전멸한 그룹의 시신들 위로 남색 잉크의 잔향이 안개처럼 깔렸다. '공동 판단'이라는 이름의 진화가 가져온 첫 번째 결과물은 승리가 아닌 정갈하게 놓인 죽음들이었다. 주변을 지키는 생존자들 사이에는 비명도, 통곡도 흐르지 않았다. 경계 서사가 유지해주는 차가운 안정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정적은 평화가 아니라, 거대한 댐에 생긴 보이지 않는 균열과도 같았다.​“이건... 우리가 죽인 거죠?”​강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을 때, 그 질문은 유리 파편처럼 날아와 은신처의 습한 공기를 찢고 모두의 심장에 박혔다.​[내부의 균열: 책임의 소재]​대오가 순식간에 두 갈래로 갈라졌다.​“우리가 같이 판단했잖아! 그 데이터에 우리 모두 동기화됐다고! 그러니까 이건 우리 전체의 책임이야. 누구 한 명의 잘못이 아니라고!”“아니, 그건 비겁한 소리지. 결국 그 골목으로 발을 내디딘 건 당신들이잖아. 왜 그 책임을 우리 모두에게 나눠서 희석시키려는 거야?”​격렬한 논쟁이 터져 나왔다. 서로를 밀치고, 급기야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민호는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를 조작하며 절규하듯 외쳤다.​“그만둬! 지금 책임이 정의되지 않으면, 이 공동 판단 시스템은 역류해서 우리 모두의 뇌를 태워버릴 거야! 책임의 주소지가 없는 판단은... 그저 살육의 정당화일 뿐이라고!”​공동의 판단이라는 방패 뒤로 숨으려는 본능과, 그 방패를 뚫고 나오는 개인의 죄책감이 충돌하며 대전의 공기는 비릿한 살의로 물들기 시작했다.​[서윤의 붕괴: 기록자의 마비]​서윤은 펜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94화에서 그녀는 "선택은 인간의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그 선택이 가져온 것은 승리가 아닌 전멸이었다. 그녀의 뇌리에는 방금 죽은 이들의 마지막 눈동자가 문신처럼 박혔다.​‘내가... 내가 그들을 죽인 거야. 내 문장이 그들을 사지로 밀어 넣었어.’​서윤의 내면에서 처음으로 거대한 자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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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책임의 심장

[1] 새벽의 행진: 책임의 발소리​대전의 새벽은 유난히 조용했다. 그러나 그 정적은 평화가 아니라, 거대한 충돌 직전의 숨 멎는 압력감이었다. '선택의 군단'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피로 물들었던 전멸의 현장을 지나며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변명하지도 않았다. 죽은 동료들의 이름은 각자의 가슴속에 조용히 새겨졌고, 그 무거운 이름들만큼 그들의 발걸음은 지면을 깊게 파고들었다. 아스팔트를 울리는 군화 소리는 이제 단순한 행진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가 짊어진 책임의 심장 박동이었다.​서윤은 선두에서 피 묻은 원고지를 가슴에 품고 걸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문장을 쓰지 않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식이나 새로운 정의가 아니었다. 이미 선택한 정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파괴적인 힘이었다.​마침내 수호국의 심장부인 대전 중앙 통제 타워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거대한 흑색 첨탑. 외벽을 따라 흐르는 보랏빛 전류가 새벽 안개를 찢으며 기분 나쁜 웅웅거림을 내뱉고 있었다.​“저게 메인 중계 코어야. 저걸 부수면 한시우가 대전을 통제하는 프로토콜 상당수가 정지돼.”​민호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들어 타워를 응시했다. 푸른 안광이 냉정하게 외벽의 구조를 훑었다.​“정면 돌파.”​짧고 단단한 한마디와 함께 군단은 흑색 타워를 향해 진격했다.​[2] 한시우의 역습: 달콤한 무책임​서울 본부. 한시우는 마침내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거대한 홀로그램 패널에 비친 서윤의 눈빛을 보며, 그의 눈에도 처음으로 명확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결국 여기까지 발을 들였군. 스스로 짊어진 짐에 무너질 줄 알았더니.”​한시우는 중앙 패널 위에 손을 올렸다.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가장 잔인하고도 자비로운 프로토콜, **‘책임 제거(Responsibility Nullification)’**가 활성화되었다. 대전 시내의 모든 홀로그램 패널과 스피커가 일제히 켜지며 거대한 문장이 허공을 수놓았다.​[당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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