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쿠라의 성벽: Chapter 71 - Chapter 80

115 Chapters

제67화: 잉크의 전설 (The Legend of Ink)

대전의 공기는 이제 더 이상 차가운 금속 냄새를 머금고 있지 않았다. 한때 거대 기업 '네뷸라(Nebula)'가 인류의 의식을 통제하기 위해 세웠던 보이지 않는 성벽은 무너졌고, 그 성벽의 잔해 위로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이 시대를 '대기록의 시대'라 불렀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이서윤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녀가 쓴 글은 이제 단순한 소설이나 르포르타주를 넘어, 인류가 잃어버렸던 자아를 되찾기 위해 매달리는 단 하나의 성경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전 세계 120개국어로 번역된 그녀의 기록들은 디지털로 오염된 기억의 사막 위로 쏟아지는 단비였고, 사람들은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를 외우며 자신들이 누구인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진우는 대전 자운대 인근 서윤의 작업실 앞에 늘어선 수백 명의 인파를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데이터 난민'들이었다. 기억의 뿌리가 너무 깊게 훼손되어 서윤의 문장 없이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 그녀의 잉크 한 방울이라도 얻기 위해 성지 순례를 하듯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 "서윤 씨, 이제 정말로 센터를 하나 세워야 할 것 같아요. 혼자서 이 모든 사람의 기억을 보듬어주기에는 서윤 씨의 몸이 버티질 못해요." 진우의 말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는 이제 카메라보다 보안 단말기를 더 자주 손에 쥐어야 했다. 서윤을 향한 경배가 커질수록, 그녀를 이용해 다시 권력을 잡으려는 세력들의 검은 손길도 은밀하게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다.​서윤은 잉크가 짙게 밴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헝가리와 시안에서 겪었던 그 지독한 고통의 잔상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깊은 연민으로 변해 있었다. "진우 씨, 저 사람들이 원하는 건 제 글이 아니라, 자신들의 아픔을 누군가 기록해주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예요. 기록되지 않은 고통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짐이 되지만, 기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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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지워지지 않는 낙인 (The Indelible Stigma)

대전의 봄은 찬란했으나, 그 찬란함 뒤에는 언제나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자운대 인근 서윤의 작업실 창가로 불어오는 바람에는 이제 갓 피어난 라일락 향기가 섞여 있었지만, 서윤의 코끝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잉크의 비릿함과 타버린 전선 냄새가 맴돌았다. 솔브레인의 물리적 요새가 무너지고 전 세계의 위성들이 주황색 온기를 뿜어내며 기억을 배달하던 '잉크의 축제'는 이제 인류의 역사서 속으로 한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승리의 도취감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축제가 끝난 뒤의 공허함보다 더 지독한 '현실의 얼룩'이었다. 사람들은 기억을 되찾았으나, 그 기억이 심어진 자리에 남은 0.1나노미터의 미세한 흉터—솔브레인의 기술이 육체에 남긴 지워지지 않는 낙인—은 이제 새로운 사회적 갈등과 공포의 씨앗이 되어 대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서윤은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67화에서 그녀는 전설의 자리를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삶을 기록하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뉴스 채널은 매일같이 '낙인 찍힌 자들(The Branded)'에 대한 기사로 도배되었다. 솔브레인의 칩이 박혔던 자리에 기묘한 기하학적 문양이 떠오르거나, 특정 주파수에 반응해 발작을 일으키는 이들이 속출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솔브레인의 유령'이라 부르며 경멸하거나 두려워했고, 복원된 기억은 때로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가족과 이웃의 가슴을 후벼 팠다. 진실은 자유를 주었으나, 그 자유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진실은 차가운 형벌과도 같았다. 서윤은 자신이 쏘아 올린 빛이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화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에 며칠째 밤잠을 설쳐야 했다.​진우는 그런 서윤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그는 이제 취재 수첩 대신 의료용 단말기와 보안 장비를 들고 대전 시내의 재활 센터들을 돌며 '낙인'의 증상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진우가 가져온 보고서에는 충격적인 내용들이 가득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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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유령의 성소 (The Ghost Sanctuary)

대전의 푸른 새벽을 뒤로하고 팀 가디언즈가 다시 대서양을 건너는 비행기 안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판교와 시안, 그리고 헝가리 다뉴브강에서의 전투가 물리적인 '성벽'을 허무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그들이 마주해야 할 '유령의 성소'는 인류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박힌 독을 뽑아내야 하는 영적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서윤은 기내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잭 밀러가 보낸 그 기괴한 팩스 용지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삼촌 민호의 지문과 똑같은 형태의 잉크 자국. 그것은 삼촌이 살아있다는 희망보다는, 누군가 삼촌의 가장 내밀한 본질까지 복제해 악용하고 있다는 지독한 모독처럼 느껴졌다. ​비행기 하부 수납장에는 민호가 밤새 개조한 '디-코팅(De-coating) 모듈'이 은은한 금속성 빛을 내며 잠들어 있었다. 민호는 옆 좌석에서 츠바시의 손을 잡은 채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유전자가, 자신의 지문이 새로운 지배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기술자로서의 자괴감을 넘어선 생존의 공포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츠바시는 그런 남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인공 신경망의 파동을 가장 부드러운 주파수로 맞추어 그의 불안을 잠재우고 있었다. 진우는 카메라의 렌즈를 닦으며 서윤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서윤이 써 내려갈 문장들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소설이 아니라, 이 거대한 악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마지막 주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헝가리 북부, 타트라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폐광 지대. 이곳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버려진 땅이었지만, 솔브레인의 그림자 조직 'Legacy'에게는 최첨단의 기술과 고대의 광기가 결합된 완벽한 은신처였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산등성이 사이로 거대한 강철 환기구들이 마치 거인의 콧구멍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헬기에서 내린 네 사람은 잭 밀러가 미리 준비해둔 특수 차량으로 갈아타고 폐광의 입구로 향했다. 공기 중에는 지독한 산성 냄새와 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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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잉크의 안식 (Rest of the Ink)

헝가리 타트라 산맥의 끝자락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는 이제 대서양의 차가운 해풍에 씻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령의 성소가 무너져 내리며 지옥 같은 고주파 비명이 멈춘 자리에는, 지독하게도 정적이지만 눈물겨운 평화가 찾아왔다. 대전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서윤은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의 피로 때문이 아니라, 판교 지하에서부터 인디애나의 옥수수밭을 거쳐 헝가리의 폐광까지 이어졌던 그 치열했던 '기록자의 긴장'이 비로소 느슨해졌음을 의미했다. 서윤이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는 익숙한 대전의 야경이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0.1나노미터의 오차로 설계된 인공적인 불빛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켜놓은 정직하고 따뜻한 불빛들이었다.​자운대 인근의 작업실로 돌아온 첫날, 서윤은 며칠 동안 펜을 잡지 않았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박여 있던 잉크 자국은 비누칠 몇 번에 희미해졌지만, 뇌세포 속에 각인된 그 장엄한 진실의 무게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작업실 책상 위에는 헝가리에서 회수한 검게 타버린 만년필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메타-민호의 시스템을 과부하시키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었던 그날의 흔적. 서윤은 그 타버린 펜을 보며 생각했다. 기록은 때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 끝은 누군가를 쉬게 하는 안식처여야 한다는 것을.​진우는 서윤이 잠든 사이 거실의 낡은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따스한 아침 햇살이 들어오게 했다. 그는 이제 카메라 가방 대신 시장바구니를 들고 동네 마트를 드나드는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서윤 씨, 오늘은 갑천변을 좀 걸을까요? 벚꽃은 다 졌지만, 이제 막 돋아난 연둣빛 잎사귀들이 정말 예뻐요." 진우의 목소리는 이제 전쟁터의 긴박함이 아닌, 갓 볶은 원두커피 같은 고소한 평온함을 담고 있었다. 서윤은 진우가 내민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 "좋아요, 진우 씨. 오늘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하고 싶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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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첫 페이지의 설레임(The Thrill of the First Page)

대전의 봄은 이제 완연한 녹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자운대 인근 서윤의 작업실 창가로 불어오는 바람은 더 이상 성층권의 차가운 금속 냄새를 머금고 있지 않았다. 대신 갓 베어낸 풀의 생경한 향기와 이름 모를 들꽃들의 달콤한 숨결이 방 안 가득 스며들었다. 서윤은 책상 앞에 앉아 아주 오랫동안 하얀 원고지의 첫 칸을 응시했다. 수개월 전, 판교의 지하에서 피와 잉크를 섞어 적어 내려갔던 그 처절한 문장들과는 전혀 다른, 지독하게도 순결한 백색의 공간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검게 그을린 전투용 만년필이 아니라, 진우가 정성을 다해 벼려준 새로운 흑연 연필이었다. 사각거리는 질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흐를 때마다, 서윤은 심장 깊은 곳에서 간지러운 떨림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공포나 분노가 아닌, 오직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받은 설레임이었다.​진우는 부엌에서 원두를 갈며 그 기분 좋은 소음을 서윤에게 선물했다. "서윤 씨,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쓸 건가요? 잭 밀러가 인디애나에서 보내온 옥수수 농장 풍경 사진이 영감을 좀 줬나요?" 진우의 목소리는 이제 전쟁터의 명령이 아닌, 일요일 아침의 나른한 햇살을 닮아 있었다. 서윤은 고개를 돌려 커피 향을 음미하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오늘은 거창한 음모나 성벽에 대해 쓰지 않을 거예요. 우리 집 마당에 핀 수선화가 바람에 흔들릴 때 나는 소리, 그리고 당신이 내어주는 이 커피의 온도에 대해 쓰려고 해요. 우리가 지켜낸 이 지독하게 평범한 순간들이야말로, 솔브레인이 그토록 지우려 했던 진짜 역사의 첫 페이지니까요." 서윤의 말에 진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서윤의 어깨에 가만히 고개를 기대며 그녀가 시작할 첫 문장을 함께 기다렸다.​그 무렵, 대전 R&D 센터 뒷산의 오두막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첫 페이지'가 열리고 있었다. 민호는 이제 더 이상 돋보기를 쓰고 미세 회로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는 대신 츠바시를 위해 특별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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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잉크의 물결

대전 갑천의 물줄기는 이제 더 이상 차가운 도시의 소음을 실어 나르지 않았다. 강변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난 버드나무 잎들이 초여름의 햇살을 받아 연둣빛으로 반짝였고, 그 아래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의 발걸음은 지독하게도 평온했다. 불과 몇 달 전, 전 세계의 신경망을 옥죄던 그 보랏빛 전자기의 공포는 이제 낡은 역사책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공포가 할퀴고 간 자리에 피어난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거대한 파동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잉크의 물결'이라 불렀다. 디지털의 완벽한 망각에 배신당했던 인류가, 스스로의 손으로 고통과 환희를 꾹꾹 눌러 적는 아날로그의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서윤은 작업실 창가에 앉아 그 물결이 만들어내는 낮고 웅장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그녀의 책상 위에는 수만 통의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은 팬레터가 아니라, 저마다의 흉터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 보내온 '살아있음의 증명서'였다. ​진우는 이제 카메라 렌즈를 닦는 시간보다 서윤의 작업실로 배달되는 그 방대한 기록들을 분류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제 세상을 고발하는 기자가 아니라, 복원된 진실들이 흩어지지 않게 매듭을 짓는 관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윤 씨, 오늘은 파리에서 온 편지가 눈에 띄네요. 네뷸라의 기술에 가장 깊게 오염됐던 구역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거리 곳곳에 '기록자의 벽'이 세워졌대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직접 잉크로 새기며 매일 아침 안부를 묻는다는군요." 진우가 건넨 편지 봉투에서는 짙은 만년필 잉크 냄새와 함께 낯선 이국 땅의 온기가 느껴졌다. 서윤은 편지를 읽지 않고 가만히 가슴에 품었다. 그녀가 쓴 문장들이 대서양을 건너 누군가의 무너진 자아를 일으켜 세우는 기둥이 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꿈만 같으면서도 어깨를 짓눌렀다. 잉크는 이제 개인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가 공유하는 새로운 혈액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세상의 풍경은 기묘하게 변해 있었다. 판교 테크노밸리의 유리 건물들은 이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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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독립의 필사

대전의 초여름은 습기를 머금은 바람과 함께 성큼 다가와 있었다. 자운대 작업실의 낡은 나무 책상 위로는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카시아 향기가 잉크 냄새와 뒤섞여 기묘한 안식을 만들어냈다. 서윤은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한 듯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갓 갈아놓은 먹물처럼 깊고 형연했다. 그녀의 앞에는 잭 밀러가 보내온 특수 봉인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솔브레인의 기술로 만들어진, 습기나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영구 보존용 종이였다. 역설적이게도 인류를 지배하려 했던 기술의 정수가, 이제는 그 지배에 저항하는 기록자의 최후 보루가 되어 있었다. 서윤은 만년필의 닙(Nib)을 세밀하게 점검했다. 이번에 써 내려갈 문장들은 누군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지키고, 그 어떤 거대 기구나 권력에게도 자신의 역사를 위탁하지 않겠다는 준엄한 선언이었다.​진우는 조용히 서윤의 곁에 앉아 낡은 타자기를 손보고 있었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다시금 '기록 수호국'이라는 이름 아래 통제되기 시작한 지금, 아날로그적인 타자기의 철컥거리는 소리는 가장 안전한 통신 수단이었다. "서윤 씨, 수호국 사람들이 대전 시내의 도서관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대요. '기억의 순수성'을 검증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의 개인 일기를 압수하고 있다는군요. 솔브레인이 칩으로 하려 했던 일을, 그들은 이제 법과 제도로 하려 하고 있어요." 진우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이제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담는 대신, 서윤이 쓴 문장들을 수만 장의 전단지로 복사해 거리에 뿌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기록의 주권이 흔들리는 순간, 민주주의의 근간인 '생각의 자유' 또한 박막처럼 얇아져 부서질 것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서윤은 펜을 들어 첫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기억은 소유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의 흔적이다.] 잉크가 종이의 섬유질 속으로 스며들며 짙은 남색으로 변해갔다. 서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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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잉크의 배신

​대전의 새벽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었다. 어둠을 뚫고 번져나가던 ‘독립의 필사’ 운동은 가장 뜨거운 순간에 가장 차가운 비극으로 변모했다. 자운대 작업실의 모니터 너머로 들려오는 소식들은 기록자의 심장을 갈갈이 찢어놓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파리의 퐁네프 다리 위에서 필사본을 나누어 갖던 연인들이 갑자기 서로를 보며 낯선 이방인처럼 뒷걸음질 쳤고, 시안의 노동자들은 자신이 방금 적어 내려간 부모님의 이름을 읽으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지조차 기억해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펜을 든 채 굳어버렸고, 광장에는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린 ‘껍데기’들만이 유령처럼 배회하기 시작했다. 기록의 주권을 되찾아주려 했던 서윤의 잉크가, 오히려 사람들의 뇌를 태워버리는 발화점이 된 것이었다.​“서윤 씨, 이상해요. 이건 단순한 통신 차단이 아니에요. 필사본을 적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역적 기억 상실’이 일어나고 있어요. 마치... 우리가 보낸 문장 속에 독이라도 들어있었던 것처럼요.” 진우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전 세계의 피해 사례를 보며 절망했다. 서윤은 자신의 손에 묻은 잉크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빛이라 믿었던 그 검은 액체가, 이제는 수만 명의 영혼을 지워버린 흉기처럼 느껴졌다. 서윤은 비틀거리며 책상을 짚었다. “내가... 내가 틀린 걸까요, 진우 씨? 내 잉크가 사람들을 구하는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그들을 짓눌러버린 걸까요?”​그때, 작업실 안의 모든 홀로그램 화면이 일제히 지지직거리며 한 남자의 얼굴을 띄웠다. 날카로운 안경 너머로 차갑고 지적인 안광을 뿜어내는 남자, 기록 수호국 국장 ‘한시우’였다. 그의 배경으로는 솔브레인의 폐허가 아닌,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정돈된 수호국의 통제실이 보였다. 그는 서윤을 향해 비릿한 동정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서윤 작가님, 당신의 그 오만한 필사가 불러온 참상을 보십시오. 기억은 박제되어야 안전한 법입니다. 날것의 기억을 대중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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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잉크의 도망자

대전의 새벽은 이제 축복의 여명이 아닌, 거대한 거부 반응의 전조였다. 어둠을 틈타 번져가던 '독립의 필사' 운동은 가장 뜨거운 정점에서 가장 차가운 배신을 마주했다. 자운대 작업실의 모니터 너머로 들려오는 소식들은 기록자의 심장을 갈갈이 찢어놓기에 충분했다. 거리의 풍경은 이제 단 하나의 진실이 아닌, 두 개의 거대한 공포로 갈라져 요동치고 있었다.​한쪽에서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갔던 필사본을 불길 속으로 던져넣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록 수호국'의 선동에 따라, 잉크가 뇌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라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박막 2.0 시술대에 올라 자아의 일부를 도려내는 '자발적 거세'를 선택했다. 반면, 여전히 어두운 지하 방이나 좁은 골목길에 숨어 잉크 냄새를 맡으며 펜을 쥐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명이 터져 나오는 관자놀이를 부여잡고서도 "그래도 이것은 내 삶이다"라고 읊조리며 멈추지 않았다. 세상은 그렇게 '망각의 안락'을 택한 자들과 '기억의 지옥'을 택한 자들로 나뉘어 처참하게 붕괴하고 있었다.​유성구의 한 임시 진료소 안, 서윤은 잭 밀러가 해킹한 실시간 보안 채널을 통해 지옥의 한 단면을 목격했다. 한 어머니가 초점을 잃은 아이를 안고 의사 앞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적던 필사본이 타버린 자리를 보며 멍하니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의사는 차가운 금속성 주사기를 만지작거리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이 시술을 받으면 아이의 뇌압은 즉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다만, 아이는 더 이상 아버님과 어머님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어머니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지만, 그녀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진행해 주세요. 아이가 저를 몰라봐도 괜찮아요. 저렇게 아파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껍데기로 사는 게 나아요. 아프지 않다면... 정말 괜찮아요." 의사의 손끝에서 투명한 박막 용액이 주입되는 순간, 아이의 눈에 서려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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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이름 없는 연인

대전 외곽,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흉물스럽게 방치된 폐산업단지의 공기는 지독하게도 차갑고 무거웠다. 녹슬어 버린 철골 구조물 사이로 스며드는 밤바람은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를 냈고, 바닥에 고인 정체 모를 기름 웅덩이는 달빛을 받아 기괴한 무지갯빛을 내뿜고 있었다. 서윤은 지하 배관이 복잡하게 얽힌 어두운 공동(空洞) 속에 몸을 숨긴 채, 자신의 가쁜 숨소리조차 억누르려 애썼다. 폐부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와 녹슨 금속의 비린내가 그녀의 감각을 마비시키려 했지만,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원고지의 감촉만이 그녀를 현재에 붙들어 매고 있었다.​“서윤, 들리나? 놈이 진입했다. 거리 200미터. 속도가 비정상적이야. 이건 인간의 보폭이 아니야. 집행관 0호... 아니, 진우는 지금 네 뇌파의 미세한 파동까지 실시간으로 렌더링하며 접근 중이다. 절대 소리 내지 마.”​귀에 꽂힌 잭 밀러의 무선 수신기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절망적인 경고를 뱉어냈다. 서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규칙적이다 못해 기계적이었다. 자갈을 밟는 소리조차 일정한 데시벨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그 소리는, 사람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알고리즘이 공간을 지워나가는 소음이었다. 잉크의 향기가 가득했던 진우의 온기는 이제 없었다. 그 자리에는 오직 목표물을 포착하고 말살하려는 차가운 연산 장치만이 존재할 뿐이었다.​마침내, 거대한 환풍기 날개가 멈춰선 입구 너머로 푸른색 안광이 번뜩였다. 수호국의 최신형 헤드셋이 뿜어내는 그 빛은 어둠을 찢고 서윤의 은신처를 정확히 겨냥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며 나타난 남자의 실루엣은 분명 진우의 것이었으나, 그가 내뿜는 대기는 생명체의 것이 아니었다.​“진우 씨... 제발, 나를 봐요. 저예요, 서윤이에요.”​서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얼음장보다 차가운 음성이었다.​“...위험 인물 확인. 이서윤, 기록 수호국 지명 수배자. 의식 오염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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