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타트라 산맥의 끝자락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는 이제 대서양의 차가운 해풍에 씻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령의 성소가 무너져 내리며 지옥 같은 고주파 비명이 멈춘 자리에는, 지독하게도 정적이지만 눈물겨운 평화가 찾아왔다. 대전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서윤은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의 피로 때문이 아니라, 판교 지하에서부터 인디애나의 옥수수밭을 거쳐 헝가리의 폐광까지 이어졌던 그 치열했던 '기록자의 긴장'이 비로소 느슨해졌음을 의미했다. 서윤이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는 익숙한 대전의 야경이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0.1나노미터의 오차로 설계된 인공적인 불빛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켜놓은 정직하고 따뜻한 불빛들이었다.자운대 인근의 작업실로 돌아온 첫날, 서윤은 며칠 동안 펜을 잡지 않았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박여 있던 잉크 자국은 비누칠 몇 번에 희미해졌지만, 뇌세포 속에 각인된 그 장엄한 진실의 무게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작업실 책상 위에는 헝가리에서 회수한 검게 타버린 만년필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메타-민호의 시스템을 과부하시키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쏟아부었던 그날의 흔적. 서윤은 그 타버린 펜을 보며 생각했다. 기록은 때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 끝은 누군가를 쉬게 하는 안식처여야 한다는 것을.진우는 서윤이 잠든 사이 거실의 낡은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따스한 아침 햇살이 들어오게 했다. 그는 이제 카메라 가방 대신 시장바구니를 들고 동네 마트를 드나드는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서윤 씨, 오늘은 갑천변을 좀 걸을까요? 벚꽃은 다 졌지만, 이제 막 돋아난 연둣빛 잎사귀들이 정말 예뻐요." 진우의 목소리는 이제 전쟁터의 긴박함이 아닌, 갓 볶은 원두커피 같은 고소한 평온함을 담고 있었다. 서윤은 진우가 내민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 "좋아요, 진우 씨. 오늘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하고 싶어
Last Updated : 2026-03-15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