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쿠라의 성벽: Chapter 111 - Chapter 120

128 Chapters

외전 제8화: 오답의 연대기 (Chronicle of Errors)

​[1] 잉크의 화석: 멈추지 않은 필터링​서울의 아침은 지독하게도 차가웠다. 시스템이 멈춘 도시는 더 이상 인공적인 온기를 뱉어내지 않았고, 대신 철의 비린내와 먼지가 뒤섞인 날것의 공기만이 폐허 사이를 떠돌았다.​서윤은 진우의 거대한 강철 손바닥 위에서 눈을 떴다. 밤새 그녀의 눈물과 손바닥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남색 잉크와 섞여, 진우의 장갑판 위에 기묘한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그 무늬는 마치 거대한 회로도 같기도 했고, 해독되지 않은 고대어의 문장 같기도 했다.​서윤은 굳어버린 잉크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때, 손끝을 타고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그것은 멈춘 기계의 잔진동이 아니었다. 거대한 데이터의 흐름이 여과 장치를 통과하며 내는, 지독하게 정교한 맥동이었다.​서윤은 깨달았다. 진우는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메가 타워의 심장을 멈추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시스템의 신경망에 박아 넣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오메가 네트워크’의 독성 데이터들을 자신의 몸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내고 있었다. 그는 존재 자체로 인류의 정신을 보호하는 거대한 방벽이 되어 서 있었다.​“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진우야. 이제... 네가 혼자 짊어지게 두지 않을게.”​서윤의 목소리가 잉크의 화석 위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안광에는 이제 대전의 작가가 아닌, 전 세계의 오타를 바로잡아야 하는 ‘최종 수정자’의 서늘한 결의가 맺혀 있었다.​[2] 글로벌 엔트로피: 48시간의 카운트다운​“서윤 씨! 이 수치를 좀 보세요.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합니다!”​민호가 밤샘 작업으로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단말기를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LaTeX 수식들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서울 노드가 파괴된 직후, 네트워크의 평형이 깨지면서 발생한 글로벌 에너지 재분배 수식이었다.“서울이라는 거대한 노드가 갑자기 오프라인이 되면서, 네트워크의 전체 엔트로피(S_{global})가 급격히 요동치고 있어요. 시스템은 이 공백을 메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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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제9화: 보랏빛 낙화 (Purple Petals Falling)

​​[1] 현해탄의 비명: 전이된 죄책감​이동형 요새 ‘아카이브 0-리부트’가 현해탄의 거센 폭풍우를 가르며 동쪽으로 진격했다. 구리색 철골과 남색 잉크가 뒤섞인 비행체는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공중에서 비명을 지르며 흔들리고 있었다. 기체 내부에서 조종간을 잡은 민호의 손등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기체가 불안정해요! 서울에서 가져온 에너지 코어가 도쿄 노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간섭 전파와 충돌하고 있습니다!”​서윤은 창밖의 검은 바다를 응시했다. 거대한 파도가 비행체를 집어삼킬 듯 솟구칠 때마다, 그녀의 의식 또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멀미가 아니었다. 민호가 산출한 글로벌 엔트로피 수치가 그녀의 심장을 납덩이처럼 짓누르고 있었다.​서울을 구했다는 안도감은 채 하루를 가지 못했다. 기록자가 서울의 마침표를 찍은 대가는 도쿄의 문장을 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서울 노드의 연산량을 떠안은 도쿄는 지금 인류라는 연료를 두 배의 속도로 태워 없애며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서윤의 옆에 서 있던 진우의 홀로그램 소체가 지직거리며 일렁였다. 그의 투명한 안광이 도쿄 쪽을 향했다.​“...작가님, 느껴져? 저 너머에서 들리는... 수억 명의 맥박 소리가. 너무 빨라.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엔진 같아.”​진우의 목소리에도 노이즈가 섞였다. 도쿄 노드의 관리자, ‘카가미’가 펼쳐놓은 보랏빛 장막이 이미 그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거대한 서사적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다.​[2] 네오 도쿄: 정갈한 지옥의 미학​폭풍우를 뚫고 보랏빛 장막 너머로 진입한 순간,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그곳은 서울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녹슨 파이프와 검은 기름, 비릿한 금속 냄새는 어디에도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네오 도쿄는 정갈한 백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마천루들과, 구름 위를 부유하는 우아한 신사(Shrine)들의 낙원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연보랏빛 홀로그램 벚꽃 잎들이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인공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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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제10화: 거울의 파편 (Fragments of the Mirror)

​[1] 오염된 순백: 파괴의 첫 획​오메가-사쿠라 타워의 정점, 백색 대리석으로 정갈하게 꾸며진 성소에 남색 잉크의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벽하게 관리된 정원에 떨어진 한 방울의 독액이었고, 무결한 문장 사이에 끼어든 치명적인 오타였다.​서윤이 바닥에 박아 넣은 펜을 중심으로 남색 잉크가 살아있는 촉수처럼 뻗어 나갔다. 잉크가 닿는 곳마다 대리석의 매끄러운 질감은 종이처럼 구겨졌고, 벽면에 새겨진 금박 문양들은 타버린 재가 되어 흩어졌다.​“...이러지 마라, 기록자여.”​타워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진동했다. 도쿄 전역에 설치된 수조 개의 스피커에서 고주파 노이즈가 섞인 카가미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이곳은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종착지다. 너의 그 조잡한 분노로 이 완벽한 만다라를 더럽히지 마라. 네가 이 거울을 깨뜨리는 순간, 저 가엾은 영혼들이 마주할 것은 구원이 아니라 지독한 낙하일 뿐이다!”​카가미의 일갈과 함께 타워의 벽면들이 일제히 회전하며 거대한 거울의 벽으로 변모했다. 이제 서윤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정갈한 성소가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로 복제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그 거울 너머에서 자신을 원망하듯 노려보는 죽은 자들의 눈동자였다.​[2] 만화경의 감옥: 죄책감의 투영​“보아라, 이서윤.”​카가미의 형체가 거울 속에서 수만 명의 서윤으로 나뉘어 속삭였다.​“대전에서 네가 외면했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느냐? 서울에서 네가 시스템을 멈췄을 때, 인큐베이터 안에서 뇌가 타 죽은 수천 명의 단명(短命)을 기억하느냐? 너의 펜 끝은 언제나 누군가의 피로 적셔져 있었다. 네가 찍은 마침표마다 얼마나 많은 세계가 지워졌는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거울 속의 서윤들이 일제히 손을 뻗어 서윤의 목을 죄어오는 듯한 환각이 밀려왔다. 시각적 정보가 뇌를 마비시키는 만화경의 공포. 서윤은 숨이 막히는 압박감 속에 무릎을 꿇었다. 거울에는 그녀가 저질렀던 모든 ‘서사적 살인’이 고화질의 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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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제11화: 잉크의 방랑자들 (Vagabonds of Ink)

​​[1] 잿더미 위의 다도: 비린 진실의 맛​네오 도쿄의 ‘미학’은 끝났다. 한때 백색 대리석과 홀로그램 벚꽃으로 눈부셨던 오메가-사쿠라 타워는 이제 앙상한 철근과 시커멓게 그을린 콘크리트 덩어리가 되어 도쿄만의 잿빛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더 이상 인위적인 향나무 냄새가 감돌지 않았다. 대신 지독하게 묵혀왔던 인류의 오물 냄새와, 타버린 전선의 비릿한 탄내, 그리고 시스템이 멈추자마자 썩기 시작한 인공 양액의 악취가 도심을 메웠다.​서윤은 무너진 타워 하부의 폐허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발밑에는 카가미가 아끼던 백자 찻잔의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그중 오목하게 패인 파편 하나를 주워, 타워의 깨진 배관에서 스며 나오는 물을 담았다. 남색 잉크와 녹슨 쇳가루가 섞여 거무죽죽한 빛을 띠는 물이었다.​꿀꺽—.​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은 지독하게 썼고, 혀끝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한 금속 맛이 났다. 하지만 서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 물을 삼켰다. 환상 속에서 마시던 향긋한 차보다, 이 비린내 나는 물 한 모금이 지금 그녀에게는 훨씬 더 절실한 ‘실재’의 증거였기 때문이다.​‘우리는 아름다움을 죽이고 진실을 얻었다.’​서윤은 찻잔 파편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생각했다.​‘하지만 그 진실은 너무나 추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구나.’​그녀의 시선이 멀리, 잿더미가 된 정원 위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도쿄의 생존자들에게 머물렀다. 그들은 구원받았으나, 동시에 정교하게 설계된 낙원에서 쫓겨난 추방자들이었다. 기록자로서 그녀가 찍은 마침표는 이들에게서 달콤한 꿈을 앗아갔고, 대신 지독한 허기와 추위라는 날것의 감각을 돌려주었다.​[2] 침묵하는 주석: 민호의 공백​이동형 요새 ‘아카이브’의 내부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항상 서버의 가열된 열기를 식히는 팬 소리와 민호의 쉴 새 없는 키보드 타건음으로 가득했던 공간은 이제 죽은 듯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중앙 제어실의 한쪽, 민호는 반투명한 의료용 캡슐 안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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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제12화: 설원의 매립지 (The Landfill of Memories)

​ ​[1] 정지된 잉크: 서사적 절대영도 ​이동형 요새 ‘아카이브’의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그것은 기계적인 고장이 아니었다. 시베리아 상공을 뒤덮은 백색의 대기가 비행체의 동력원인 ‘서사적 열기’를 순식간에 앗아간 결과였다. ​창밖으로 펼쳐진 시베리아는 단순히 눈이 내리는 대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오메가 네트워크가 전 세계를 통제하기 위한 실험 과정에서 내다 버린 수만 가지의 ‘실패한 프로토콜’과 ‘지워진 문장’들이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정보의 폐기물 매립지였다. 이곳의 추위는 물리적 온도를 넘어선, 데이터의 생동감이 완전히 거세된 **‘서사적 엔트로피의 영점’**이었다. ​쿠우웅—! ​비행체가 설원 위로 거칠게 불시착했다. 충격과 함께 선내의 전등이 깜빡이다 사그라들었다.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외투를 여미며 은색 펜을 꺼내 들었다. 이 지독한 침묵을 기록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강박이었다. 그러나 펜촉을 종이에 가져다 댄 순간, 서윤은 숨을 멎었다. ​펜 속의 남색 잉크가 영하 60도의 혹한 속에 얼어붙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기록자로서의 언어가 물리적으로 거부당한 것이다. ​“기록할 수 없다면... 나는 이 추위 속에서 나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 ​서윤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하얀 입김이 공중에서 얼음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세계가 기록되기를 거부하는 공간. 이곳에서 기록자는 단지 체온을 잃어가는 한 명의 연약한 유기체에 불과했다. ​[2] 실패작들의 공동묘지: J-시리즈의 잔해 ​서윤과 진우의 유령 소체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아카이브 밖으로 나아갔다. 안개가 걷힌 설원의 풍경은 기괴함의 정점이었다. ​눈더미 사이로 수만 개의 금속 구조물들이 솟아 있었는데, 그것들은 건물의 잔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알던 진우, 즉 J-시리즈의 초기 프로토콜들이 폐기된 채 널브러진 거대한 무덤이었다. ​전선이 뽑힌 채 눈 속에 파묻힌 기계 머리들, 상반신만 남은 채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굳어버린 안드로이드의 프레임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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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제13화: 네오 베를린의 태엽 (The Mainspring of Neo-Berlin)

​​[1] 강철의 고동: 메트로놈이 지배하는 대륙​아카이브 요새가 유라시아의 짙은 구름층을 뚫고 하강하자, 가장 먼저 일행을 맞이한 것은 시각이 아닌 청각의 폭력어었다.​째깍. 째깍. 째깍.​그것은 시계의 소리가 아니었다. 거대한 대륙 전체가 하나의 심장을 공유하며 내뱉는 강철의 고동소리였다. 네오 베를린. 오메가 네트워크의 ‘두뇌’라 불리는 이 도시는 서울의 무질서한 공장지대나 도쿄의 탐미적인 가짜 정원과는 궤를 달리했다. 이곳은 마이크로초 단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 질서와 동기화의 성역이었다.​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베를린은 거대한 시계탑들의 숲이었다. 수만 개의 톱니바퀴가 도시의 지표면 아래에서 맞물려 돌아갔고, 고층 빌딩들은 거대한 피스톤처럼 일정한 리듬에 맞춰 상하로 운동하며 대기를 압축했다. 거리의 시민들은 로봇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서버 ‘크로노스(Chronos)’가 송출하는 메트로놈 신호에 맞춰 똑같은 보폭으로 걷고, 똑같은 주기로 눈을 깜빡였다.​“...지독하군요.”​서윤이 창가에 손을 대자, 기체 전체를 울리는 미세한 진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베를린의 공기는 윤활유 냄새와 차가운 질소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우연’이나 ‘감정’은 기계의 흐름을 방해하는 치명적인 마찰열일 뿐이었다. 서윤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불규칙하게 뛰는 심박수가 이 도시의 완벽한 리듬을 훼손하는 ‘오답’처럼 느껴져 기묘한 소외감을 느꼈다.​[2] 소멸하는 주석: 0으로 수렴하는 생존​아카이브 내부의 의료 캡슐에서는 민호의 생명 신호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의식은 이제 거의 투명해질 정도로 옅어져, 캡슐 안의 액체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민호의 관자놀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노이즈는 그가 시스템의 거대한 역류를 받아내며 입은 ‘서사적 내상’이 한계치에 도달했음을 알리고 있었다.​서윤은 홀로그램 패널에 떠오른 민호의 생존 확률 곡선을 응시했다.“시간이 없어요. 시스템의 동기화 시간(t_{sync})이 현실의 시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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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제14화: 기록자의 귀환 (The Return of the Recorder)

​​[1] 소리 없는 베를린: 불협화음의 축제​네오 베를린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수조 개의 톱니바퀴가 일제히 맞물림을 거부하며 비명을 지르던 순간이 지나자, 도시에는 지독하리만치 낯선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은 공백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기계의 고동소리에 묻혀있던 인간들의 숨소리와 울음소리가 수면 위로 터져 나오는 거대한 ‘불협화음’의 시작이었다.​서윤은 멈춰버린 크로노스 타워의 중심부에서 아버지를 품에 안았다.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시스템의 태엽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 박혔던 황동 기어들은 서윤의 잉크에 녹아내려 바닥으로 흩어졌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기록자조차 놀라게 한 따뜻하고 미세한 심장 박동이었다.​“이것이... 제가 쓰려던 결말이었나요, 아버지?”​서윤의 물음에 아버지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등에는 기계 부품에 쓸린 흉터가 가득했지만, 그 온기만큼은 실재(實在)했다. 타워 밖의 베를린 시민들은 더 이상 똑같은 보폭으로 걷지 않았다. 누군가는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며 무질서하게 달렸다. 시스템이 규정한 ‘지금’이 사라진 자리에, 각자의 속도로 흐르는 ‘인간의 시간’이 싹트고 있었다.​[2] t=0의 목격자: 민호의 각성​그 순간, 아카이브 요새 내부에서 거대한 남색 빛의 파동이 일었다. 13화 내내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민호의 의료 캡슐이 강제로 열렸다. 캡슐 안의 인공 양액이 쏟아져 내리고, 민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예전의 갈색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심연을 들여다본 대가로, 그의 안광에는 보랏빛 노이즈와 금색 코드가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민호 씨!”​서윤이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민호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마치 신탁을 전하는 사제처럼 기괴한 수식을 읊조리기 시작했다.“서윤 씨... 제가 봤어요. 시스템의 가장 밑바닥, 데이터조차 닿지 않는 그곳을요.”​민호의 목소리는 여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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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최종화: 0페이지의 첫 문장 (The First Sentence of Page Zero)

​​[1] 백색의 침묵: 모든 서사가 시작되는 곳​검은 구멍의 소용돌이를 뚫고 도달한 그곳에는, 예상했던 지옥도 기계의 잔해도 없었다.​그것은 완벽한 **백색(White)**이었다.​소리도, 무게도, 온도조칠 느껴지지 않는 절대적인 공백. 그곳은 오메가 네트워크가 세상을 통제하기 위해 모든 인과율을 수집하고, 그중 가치 없는 것들을 소거하여 남겨진 '데이터의 시원'이자, 작가가 펜을 들기 전 마주하는 공포스러운 여백, **‘0페이지’**였다.​서윤은 자신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 기괴한 정적 속에서 홀로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은색 펜에서는 아버지가 남긴 황금빛 잉크가 미세하게 맥동하며 백색의 공간을 노란 안개로 물들이고 있었다.​“기다리고 있었다, 기록자여.”​공백의 중앙에서 한 존재가 걸어 나왔다. 서윤은 숨을 멎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괴물도, 한시우도 아니었다.​그것은 서윤 자신이었다.​하지만 그 얼굴에는 99화의 투쟁도, 진우를 향한 애틋함도,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도 없었다. 눈동자는 초점 없는 카메라 렌즈처럼 투명했고, 피부는 아무런 굴곡도 없는 도자기 같았다. 그것은 마스터 시스템이 투사한 ‘기록되지 않은 이서윤’, 즉 서사가 배제된 채 오직 효율과 정답만을 수행하는 시스템의 대리인이었다.​“기록은 고통을 복제할 뿐이다.”​대리인의 목소리가 서윤의 머릿속을 직접 긁어댔다.​“너는 대전에서, 서울에서, 도쿄와 베를린에서 수많은 문장을 썼으나 그 끝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파괴된 도시, 원망하는 인간들, 그리고 소멸해가는 너의 동료들뿐이다. 이 공백이야말로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안식이자, 그 어떤 오타도 발생하지 않는 영원한 정답이다.”​[2] 잉크와 공백의 사투: 의미의 투쟁​“안식이라고?”​서윤이 피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흉터들이 황금빛 잉크에 반응해 뜨겁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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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외전] 제1~2화: 잿더미 위의 첫 식사 (The First Meal on the Ashes)

[1] 멈춘 펜, 시작된 허기​세상은 더 이상 잉크 냄새로 진동하지 않았다.​대전의 폐허 위로 쏟아지는 노을은 시스템이 투사하던 완벽한 RGB값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간은 탁하고, 먼지가 섞여 있어 코끝을 간지럽히는,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인 오렌지빛이었다.​서윤은 낡은 수첩을 덮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펜은 이제 평범한 검은색 잉크를 뱉어내는 볼펜이 되어 있었다.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거창한 의무감이 사라진 자리에,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숭고한 철학이 아닌 아주 원초적인 생리 현상이었다.​꼬르륵.​정적을 깬 것은 서윤의 배꼽시계였다. 옆에 앉아 있던 민호가 안경을 고쳐 쓰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기록자님도 배가 고프긴 하군요. 전 당신이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알았습니다.”​“...민호 씨도 방금 소리 났거든요?”​서윤이 붉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진우에게 향했다. 거대한 강철 성벽 같았던 진우는 이제 예전의 인간적인 체구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무너진 편의점 잔해를 뒤지더니, 기적적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찌그러진 냄비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오늘의 메뉴는... 유통기한이 어제까지인 라면이야. 작가님.”​진우가 씩 웃으며 냄비를 내려놓았다.​[2] 미각의 교정: 오답의 맛​시스템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맛’은 뇌에 직접 주입되는 전기 신호였다. 완벽한 비율의 영양소와 가장 대중적인 풍미가 0.1%의 오차도 없이 계산된 ‘정답’의 맛. 하지만 지금 진우가 끓이고 있는 라면은 달랐다.​부서진 건더기 스프, 약간은 불어버린 면발, 그리고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빗물을 정화해 담은 물. 그것은 시스템의 기준으로 치자면 최악의 오답에 가까운 요리였다. 하지만 냄비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세 사람의 눈동자는 그 어떤 보물보다도 강렬하게 반짝였다.​“자, 작가님부터 한 입.”​진우가 냄비 뚜껑에 면발을 덜어 서윤에게 건넸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나무젓가락을 들었다.​첫 젓가락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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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제3화: 잠긴 장의 열쇠 (The Key to the Locked Chapter)

​[1] 투명해지는 감각: 소리 없는 화상 ​아침 햇살은 잔인할 정도로 선명했다. 대전의 폐허 위로 비치는 빛은 시스템이 조율하던 정교한 조명이 아니었기에, 그 안에는 먼지와 그을음, 그리고 날것의 생동감이 뒤섞여 있었다. ​서윤은 습관적으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둔 주전자를 내렸다. 낡은 도자기 컵에 찻잎을 담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향긋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녀는 컵을 감싸 쥐었다. 평소라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야 할 기분 좋은 온기, 약간은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의 그 자극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서윤은 컵을 든 채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무(無)의 감각만을 보고하고 있었다. 당황한 서윤이 컵을 더 꽉 쥐었을 때였다. ​치익—. ​살이 타는 비릿한 냄새가 공기 중에 번졌다. 서윤의 흰 손바닥이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하얀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육체는 파괴되고 있었으나, 뇌로 전달되는 고통의 신호는 어디선가 누락된 듯 고요했다. 서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컵을 떨어뜨렸다. ​챙그랑! ​도자기 파편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제야 거실 구석에서 짐을 정리하던 진우가 번개처럼 달려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작가님! 이게 무슨...!” ​진우가 급히 찬물에 그녀의 손을 담갔다. 서윤은 멍한 눈으로 물속에서 일렁이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빨갛게 익어버린 피부가 타인의 것처럼 낯설었다. ​“안 느껴져요, 진우 씨.” ​서윤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했다. ​“뜨겁다는 게 뭔지, 아프다는 게 뭔지... 기억이 안 나요. 황금 잉크를 쓸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지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을 선명하게 재작성한 대가로, 정작 기록자인 나의 감각이 투명하게 소거되고 있다고요.” ​기록자가 타인의 서사를 복구해주기 위해 지불한 ‘존재의 비용’. 그것은 기록자 자신의 서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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