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사쿠라의 성벽 / Chapter 11 - Chapter 20

All Chapters of 사쿠라의 성벽: Chapter 11 - Chapter 20

34 Chapters

제10화: 심연의 재회 (Reunion in the Abyss)

검은 바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차가웠다. 서윤과 진우는 62번 창고의 절벽 끝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요원들의 고함과 총성이 물속으로 잠기는 순간, 기분 나쁜 소음 대신 먹먹한 수압만이 두 사람의 고막을 눌렀다.​‘진우 씨, 놓치면 안 돼요.’​서윤은 폐가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진우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거센 조류는 무자비했다. 서서히 멀어지는 진우의 실루엣을 보며 서윤의 의식도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수면 위를 비추는 레이의 차가운 서치라이트 불빛이었다.​얼마나 지났을까.​서윤은 입안 가득 고인 소금물과 거친 기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몸 아래로 느껴지는 것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아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펫이었다.​“...여긴?”​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이 얻어맞은 듯 무거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호화로운 유람선 혹은 개인 요트의 내부처럼 보였다. 사방이 고급스러운 목재로 장식되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와 깨끗한 옷가지가 놓여 있었다.​“정신이 드나, 이서윤 작가.”​익숙한 목소리에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방 구석, 그림자 속에 앉아 있던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사토미 상?”​지난번 인사동에서 미끼를 자처하며 요원들을 유인했던 사토미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전보다 훨씬 깊은 흉터와 피로가 서려 있었다.​“진우 씨는요? 강진우 기자는 어디 있어요!”​“안심하게. 옆방에서 치료 중이다. 운이 좋았어. 우리 잠수팀이 놈들보다 30초 더 빨리 당신들을 발견했으니까.”​서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토미는 그녀에게 차 잔을 건네며 무거운 말을 이었다.​“야마구치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인 ‘큐브’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0
Read more

​제11화: 붉은 바다의 추격전 (Chase on the Crimson Sea)

요트의 엔진이 굉음을 내며 잠자던 바다를 깨웠다. 사토미는 능숙하게 키를 잡고 해안가의 복잡한 암초 지대를 향해 배를 몰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서치라이트들이 요트의 뒤편을 끈질기게 핥고 있었다.​“서윤 씨, 저쪽이에요!”​진우가 가리킨 곳에는 솔브레인의 사병들이 탄 고속 보트 세 척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좁혀오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방송을 준비하세요, 이 작가님!”​사토미가 조타실에서 소리쳤다.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열고 아키라의 두 번째 칩을 연결했다. 칩 안의 자장가 암호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레이가 사용하는 모든 보안 시스템의 ‘마스터 키’였다. 아키라는 생전에 여동생이 자신을 사냥하러 올 것을 예견하고, 마지막 자비이자 무기를 남겨둔 것이었다.​치익, 치지직—.​“신호 잡혔어요!”​서윤의 손가락이 자판 위를 날아다녔다.​같은 시각, 추격 중인 헬기 내부. 레이는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보고를 들으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마지막 자장가라니, 아키라 오빠다운 감성적인 쓰레기네. 그딴 걸로 내 시스템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아?”​레이는 태블릿 PC를 눌러 요트를 향해 미사일 조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 헬기 내의 모든 화면이 붉게 점멸하며 낯설고도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자거라... 자거라... 착한 아이야...]​어린 시절, 어머니가 레이와 아키라에게 불러주었던 그 자장가였다. 레이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경악으로 물들었다.​“이게 왜 여기서... 당장 꺼! 시스템 재부팅해!”​하지만 명령은 먹히지 않았다. 자장가 소리는 헬기를 넘어 추격 중인 보트, 그리고 실시간으로 작전을 모니터링하던 솔브레인 본사의 서버까지 장악하기 시작했다.​“지금이에요, 진우 씨!”​서윤이 신호를 보내자, 진우는 요트 뒷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1
Read more

제12화: 불타는 해후 (Burning Encounter)

​요동치던 바다가 가라앉고 새벽안개가 요트를 감쌌다. 사토미는 요트를 외딴 무인도 근처의 비밀 정박지에 세웠다. 레이의 헬기가 추락한 지 세 시간. 모두가 승리를 확신할 때, 서윤만은 차가운 바닷물보다 더 섬뜩한 소름을 느끼고 있었다.​“레이는 죽지 않았어요. 그 눈빛...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날 사람이 아니에요.”​서윤의 말에 진우는 조용히 총기를 손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레이가 살아남았을 경우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사토미 씨, 레이가 향할 곳은 어디입니까? 가디언즈의 잔당들이 모이는 거점 말입니다.”​사토미는 낡은 지도를 펼쳤다.​“도쿄 근해의 인공 섬, ‘네오 아크(Neo Ark)’입니다. 큐브의 데이터 센터이자 솔브레인의 기술력이 집약된 요새죠. 야마구치가 체포되기 전, 모든 권한을 레이에게 넘겼던 장소이기도 합니다.”​“그곳으로 가야겠군요.”​진우의 말에 서윤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진우 씨, 거긴 적의 심장부예요. 우리 둘만으로는...”​“둘이 아닙니다.”​사토미가 말을 가로챘다.​“아키라 각하를 지지했던 숨은 조력자들이 일본 내부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들은 각하가 남긴 ‘사쿠라의 유언’이 완성되길 기다리고 있어요. 그 유언의 마지막 페이지는 네오 아크의 메인 서버에 락(Lock)이 걸린 채 보관되어 있습니다.”​서윤은 아키라가 남긴 두 번째 칩을 만지작거렸다. 자장가 소리 뒤에 숨겨져 있던 좌표 하나가 네오 아크의 중앙 관제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키라는 죽기 전, 여동생 레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주는 척하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진실의 폭탄’을 그곳에 심어둔 것이었다.​같은 시각, 네오 아크 중앙 관제실.​불타는 헬기에서 생환한 레이는 젖은 옷조차 갈아입지 않은 채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 한쪽에는 헬기 추락 당시 입은 날카로운 흉터가 붉게 그어 있었다. 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1
Read more

제13화: 네오 아크 잠입 (Infiltration: Neo Ark)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강철 요새, 네오 아크(Neo Ark)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자 성벽이었다. 사토미의 요트는 레이더 사각지대를 이용해 해안 절벽 아래 숨겨진 폐수 처리구역에 바짝 붙었다.​“여기서부터는 도보로 이동해야 합니다. 진우 씨, 서윤 씨. 30분 뒤면 경비 시스템이 재가동될 겁니다. 그 안에 중앙 서버실로 가야 해요.”​사토미가 방수 가방에서 특수 통신기를 꺼내 두 사람에게 건넸다. 진우는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겨 장전 확인을 마쳤고, 서윤은 노트북과 삼촌의 두 번째 칩이 담긴 가방을 고쳐 맸다.​“가요. 우리가 멈추면 이 세상의 진실도 멈춰요.”​진우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세 사람은 미로 같은 환풍구를 타고 요새의 내부로 스며들었다.​네오 아크의 내부는 차가운 금속광택과 푸른 LED 조명으로 가득했다. 통로마다 솔브레인의 사병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사토미가 미리 심어둔 내부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그들은 경비가 가장 허술한 구역을 뚫고 지나갔다.​하지만 중앙 통로로 향하던 중, 서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이 냄새.”​“서윤 씨, 왜 그래요?”​진우가 긴장하며 주위를 살폈다.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인사동 지하실 냄새예요. 삼촌이 쓰던 향나무 기름 냄새... 그리고 비 내릴 때의 흙냄새요.”​그 순간, 통로의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레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작가님은 역시 코가 예민하시네. 내 오라버니가 가장 그리워하던 그 냄새를 그대로 재현해봤어. 환영해, 네오 아크에 온 걸.”​복도의 양 끝에서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천장의 환풍구가 열리더니 백색 가스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환각 가스예요! 코를 막아요!”​사토미가 소리쳤지만, 서윤은 이미 가스를 들이마신 듯 비틀거렸다. 그녀의 시야 속에서 차가운 철제 벽면이 21년 전 인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2
Read more

제14화: 성벽의 심장 (The Heart of the Wall)

서버실의 냉각 팬 소리가 거대한 짐승의 포효처럼 울려 퍼졌다. 중앙 서버 랙 사이, 푸른 빛을 받으며 서 있는 레이의 모습은 흡사 얼음으로 조각된 여신 같았다. 그녀는 손에 쥔 가주 검의 날을 천천히 세우며 서윤을 노려보았다.​“이곳이 내 오라버니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성벽의 심장이야. 그리고 너희의 무덤이 될 장소지.”​레이가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진우가 서윤의 앞을 막아서며 전술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히며 날카로운 불꽃이 튀었다. 레이의 검술은 아키라의 우아함과는 달랐다. 그것은 상대를 확실히 도려내기 위해 단련된, 살의 그 자체였다.​“진우 씨!”​서윤은 비명을 지르며 서버 콘솔로 달려갔다. 화면에는 아키라의 마지막 영상 파일이 99%에서 멈춰 있었다. 마지막 0.1%를 채우기 위해선 시스템이 요구하는 ‘최종 인증’이 필요했다.​[시스템 메시지: 사쿠라가 피는 계절을 입력하십시오.]​“계절...? 봄? 아니야, 그럴 리 없어.”​서윤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아키라에게 사쿠라(벚꽃)는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뼛속까지 시린 고통 끝에 피워낸 눈물이었다.​챙—!​진우가 레이의 일격에 밀려 서버 랙 너머로 나동그라졌다. 레이는 쓰러진 진우를 끝장내려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죽어, 가문의 수치를 들춰낸 벌레 같은 놈!”​“레이, 멈춰!”​서윤이 콘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아키라 씨가 기다린 계절은 봄이 아니야. 당신이 그를 죽였던 그날, **‘겨울’**이었어!”​서윤은 키보드에 **[W-I-N-T-E-R]**를 타이핑했다.​위이잉—!​서버실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며 멈춰있던 0.1%의 게이지가 순식간에 채워졌다. 레이의 검이 진우의 목전에서 멈췄다. 중앙의 대형 스크린에 아키라의 진짜 마지막 모습이 투사되기 시작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3
Read more

​[외전] 제1화: 인사동의 비 내리는 밤 (A Rainy Night in Insadong)

2005년 8월, 서울 인사동.​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길었다. 낮이면 지열에 달아오른 한옥 기와들이 밤이 되어도 식을 줄 몰랐고, 골목마다 눅눅한 습기가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복원가 민호는 자신의 지하 작업실에서 낡은 선풍기 소리에 의지해 조선 시대 백자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스윽, 스윽.​낡은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조심스러운 발소리. 민호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직감했다.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문이 열리며 들이친 서늘한 빗줄기와 함께, 한 청년이 작업실 안으로 스며들듯 들어왔다.​짙은 남색 코트, 빗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했던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마치 세상 모든 슬픔을 거울 속에 가두어둔 듯한, 투명하고도 시린 눈.​“계십니까.”​낮고 맑은 미성. 민호는 핀셋을 내려놓고 청년을 마주 보았다.​“복원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숨으러 오셨습니까?”​민호의 툭 던진 말에 청년—아키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품 안에서 비단보자기에 싸인 뭉치를 꺼내 작업대 위에 조심스레 놓았다. 보자기를 풀자 나타난 것은 산산조각 난 은 손거울이었다.​“...둘 다입니다.”​아키라는 민호의 맞은편 낡은 의자에 앉았다. 민호는 말없이 거울 조각들을 살폈다. 츠바시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귀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민호의 시선은 거울보다 아키라의 목에 머물렀다. 젖은 셔츠 깃 사이로 엿보이는 빳빳한 흰색 압박 붕대.​“가슴을 너무 조였군요. 그러다 숨이 막힐 텐데.”​아키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목깃을 여몄다.​“알아보시는군요.”​“복원가는 사물의 겉모양만 보는 게 아닙니다. 어긋난 뼈대와 억지로 끼워 맞춘 흔적을 보죠. 당신, 지금 당신이 아닌 누군가로 살 준비를 하고 있군요.”​아키라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내일이면 일본으로 돌아가야 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4
Read more

[외전] 제2화: 0.1그램의 진실 (0.1 Gram of Truth)

주전자의 김이 자욱하게 퍼지는 지하실, 민호는 아키라가 가져온 거울 조각들을 하나하나 대리석 판 위에 늘어놓았다. 아키라의 고백이 이어지는 동안 민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핀셋으로 집어 올린 작은 파편 하나에도 아키라의 떨리는 호흡이 묻어나는 듯했다.​“사람들은 말합니다. 복원은 완벽하게 새것처럼 되돌리는 거라고.”​민호가 돋보기를 통해 거울 조각의 단면을 살피며 입을 뗐다.​“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복원은 상처를 지우는 게 아니라, 그 상처가 왜 생겼는지 기억하는 작업입니다. 아키라 씨, 당신의 이 거울도 금이 간 자국을 다 없애지 않을 겁니다.”​아키라는 고개를 들어 민호를 보았다. 찻잔의 온기 덕분인지 창백했던 뺨에 아주 약간의 혈색이 돌고 있었다.​“금이 간 자국을... 남겨둔다고요?”​“그래야 당신이 이 거울을 볼 때마다 기억할 것 아닙니까. 내가 얼마나 부서졌었는지, 그리고 그걸 다시 맞추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그 금 사이사이에 당신의 진짜 이름인 ‘아키라’를 채워 넣을 겁니다.”​민호는 작업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작은 은색 가루가 든 병을 꺼냈다.​“이건 특수한 은 가루입니다. 당신이 일본으로 돌아가 ‘유키’라는 이름으로 성벽 속에 갇힐 때, 이 거울의 금 자국은 당신만이 아는 지도가 될 거예요. 남들이 보기엔 그저 낡고 깨진 거울이겠지만, 당신 눈엔 당신의 진실이 흐르는 길로 보이겠죠.”​아키라는 민호의 작업 과정을 홀린 듯 지켜보았다. 민호는 아키라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거울 뒷면의 나무 프레임에 정교하게 무언가를 새기고 있었다.​“민호 씨, 왜 저 같은 이방인에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가문의 어른들도 나를 도구로만 보는데.”​민호는 조각칼을 잠시 멈추고 아키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나도 한때는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세상을 속이는 게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지 잘 압니다. 그래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5
Read more

[외전] 제3화: 멈춰진 시간의 약속 (The Promise of Frozen Time)

창고의 좁은 창문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이어졌던 빗소리는 어느덧 잦아들었고, 지붕 끝에서 떨어지는 낙수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민호는 밤을 새워 복원한 은 거울을 정성스럽게 닦아 아키라에게 건넸다. 거울은 이제 더 이상 조각난 파편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미세하게 남은 금 자국들은 민호가 채워 넣은 은 가루와 어우러져, 마치 거울 속에 핀 눈꽃처럼 신비로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아키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제 가야 할 시간입니다.”​아키라의 목소리는 어젯밤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다시 빳빳한 셔츠 깃을 세우고, 남색 코트를 걸쳤다. 이제 이 문을 나가면 그는 ‘아키라’가 아닌, 일본의 차기 권력을 쥐게 될 ‘츠바시 유키’로 살아가야 했다.​“아키라 씨.”​계단을 오르던 아키라가 멈춰 서서 민호를 돌아보았다. 민호는 작업대 위에 놓인 조각칼을 쥔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기억하세요. 당신이 성벽 안에 갇혀 이름을 잃어버릴 때, 이곳 인사동의 이 작은 지하실만은 당신의 진짜 시간을 멈춰두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아키라는 잠시 입술을 굳게 깨물더니,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낡은 은 실반지 하나를 빼내어 민호의 작업대 위에 놓았다.​“이건 내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일한 유품입니다. 내 이름이 ‘아키라’였을 때의 증거죠. 민호 씨, 이 반지를 맡아주세요. 언젠가 내가 이 성벽을 허물고 진짜 내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수 있는 날... 그때 돌려받으러 오겠습니다.”​민호는 차가운 은반지를 손바닥에 올렸다. 그것은 0.1그램의 가벼운 금속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였다.​“약속하죠. 그때까지 이 반지도, 당신의 거울도... 내가 목숨 걸고 복원해두겠습니다.”​아키라는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낡은 계단을 밟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6
Read more

제15화: 붕대의 유서 (The Bandaged Testament)

네오 아크가 바다 밑으로 잠긴 지 일주일. 세상을 뒤흔들었던 화염은 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연기는 여전히 자욱했다. 공식적으로 츠바시 레이는 실종 처리되었고, 가디언즈의 자금줄이었던 '큐브'는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하지만 서윤과 진우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마지막 숙제가 남아 있었다.​인사동, 민호의 지하 작업실.​서윤은 삼촌의 작업대 위에 놓인 한 장의 **'압박 붕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오 아크에서 탈출하기 직전, 레이가 서윤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던 것이었다. 피와 바닷물에 젖어 딱딱하게 굳은 그 천 조각은 단순한 붕대가 아니었다.​"진우 씨, 이거 봐요. 붕대 안쪽에... 무언가 적혀 있어요."​진우가 특수 조명을 붕대 위로 비췄다. 평범한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자수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키라가 평생 가슴에 감고 살았던 붕대에, 매일 밤 한 땀 한 땀 바늘로 새겨 넣은 **'혈서(血書)'**였다.​"이건... 유언장이 아니에요. 이건 가디언즈가 지난 20년간 한국과 일본에서 자행한 **'인체 실험 명단'**입니다."​진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아키라 씨는 알고 있었던 거예요.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또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치욕의 상징을 가장 강력한 증거로 복원해둔 거죠."​붕대에는 아키라 외에도 '프로젝트 큐브'에 동원되었던 수많은 아이의 이름과 그들의 현재 소재지가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한국의 고위층 자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솔브레인이 왜 그토록 이 붕대를 회수하려 했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그때, 작업실의 낡은 팩스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인 제한으로 들어온 한 장의 종이. 거기에는 단 한 줄의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아직 '0.1그램'이 부족하다. 남겨진 아이들을 구하라.]​"사토미 상인가요? 아니면..."​서윤이 문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7
Read more

제16화: 보이지 않는 손, K (The Invisible Hand: K)

인사동 지하실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삼촌 민호가 세상을 떠나고, 네오 아크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음에도 진실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키라가 남긴 피 묻은 붕대는 더 거대하고 추악한 심연의 입구를 가리키고 있었다.​서윤은 작업대 위에 펼쳐진 붕대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굳어버린 핏자국 위로 새겨진 이름들. 그 맨 윗자리에서 오만하게 빛나는 이니셜 'K'. 레이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야마구치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가디언즈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자, 솔브레인의 배후에 숨은 거물이었다.​“K... 이 이니셜 하나로 어떻게 그를 찾죠? 레이 씨, 당신은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휠체어에 앉아 창밖의 눈을 응시하던 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은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증오를 머금고 있었다.​“그는 유령이야. 가문 내에서도 그와 직접 대면한 사람은 내 할아버지와 야마구치뿐이었지. 하지만 단 하나, 그가 남긴 흔적이 있어. 그는 완벽주의자거든. 자신이 ‘조각’한 모든 피실험자의 몸 어딘가에,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은밀한 표식을 새겨두지. 아키라 오빠의 몸에도, 그리고 내 몸에도.”​레이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진우가 조심스럽게 특수 확대경을 가져다 대자, 창백한 피부 아래로 아주 미세한, 마치 핏줄처럼 위장된 기하학적인 문양이 나타났다. 그것은 솔브레인의 로고와 닮았으면서도, 그보다 훨씬 복잡한 미로 같은 형상이었다.​“이 문양은 단순한 표식이 아니야. 특정 주파수에 반응하는 나노 칩이자, 우리를 평생 그의 감옥에 가둬두는 쇠사슬이지. K는 이 기술을 ‘인간 복원’이라 불렀어. 낡은 인간을 폐기하고, 완벽하게 통제된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자로서 수많은 권력형 비리를 파헤쳐 왔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는 방식은 본 적이 없었다.​“그렇다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7
Read more
PREV
123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