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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쿠라의 성벽: Chapter 21 - Chapter 30

34 Chapters

제17화: 심연의 연구소 (The Abyss Lab)

눈발이 거세진 대전의 밤은 차갑다 못해 날카로웠다. 솔브레인 R&D 센터는 거대한 은빛 요새처럼 대지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진우는 센터 외곽,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에 차를 세우고 검은 후드 아래로 숨을 몰아쉬었다. 삼촌 민호가 남긴 역추적기가 그의 손 안에서 규칙적인 진동을 내뿜고 있었다.​위잉, 위잉.​진동은 제3구역, 즉 센터에서도 가장 깊숙한 지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은 공식 도면에는 존재하지 않는, 솔브레인의 심장부이자 K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었다.​진우는 사토미가 미리 건네준 보안 카드를 리더기에 갖다 댔다.​띠릭—.​무거운 강철문이 열리며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기계음이 섞인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고, 천장의 푸른 조명은 흡사 수술실의 그것처럼 비인간적이었다. 진우는 벽에 몸을 밀착한 채 천천히 전진했다. 그의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기분 나쁜 메아리를 만들어냈다.​같은 시각, 인사동의 지하실. 서윤은 노트북 화면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진우가 떠난 지 세 시간, 그녀는 아키라의 붕대에 적힌 명단들을 하나하나 타이핑하며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다.​"명단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실종됐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어."​서윤의 손가락이 떨렸다. 명단의 마지막에 적힌 날짜는 2026년 2월 26일. 바로 어제였다. K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복원'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하고 있는 것이었다.​"작가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휠체어에 앉은 레이가 낮게 속삭였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그는 당신의 공포를 먹고 자라요. 당신이 두려워할수록, 그가 설계한 성벽은 더 단단해지죠. 오빠가 왜 당신에게 이 붕대를 맡겼는지 생각해보세요. 이건 슬픔의 기록이 아니라, 싸우기 위한 지도예요."​서윤은 레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레이의 목덜미에 새겨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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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무너지는 펜 (The Crumbling Pen)

노트북 화면 속에서 수천 개의 글자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서윤은 비명을 지르며 자판을 두드렸지만, 그녀가 밤을 새워 기록한 아키라의 진실과 K를 향한 선전포고문은 무자비한 코드의 파도 속에 잠겨버렸다.​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하나, 검은 배경 위로 선명하게 각인된 백색의 **‘K’**였다.​“안 돼... 안 돼! 이건 삼촌과 아키라 씨의 목숨값이야!”​서윤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텍스트가 삭제된 자리에는 실시간으로 새로운 문장들이 타이핑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윤의 의지가 아닌, K가 보내는 일방적인 조롱이었다.​[이서윤 작가. 문장은 힘이 없다. 그것을 기록할 종이가 불타고, 기억할 뇌가 조작된다면. 너의 기록은 이제부터 소설이 아니라 유서가 될 것이다.]​“서윤 씨, 당장 전원을 뽑아요!”​휠체어에 앉아 있던 레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하실의 모든 전등이 동시에 점멸하며 기분 나쁜 고주파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레이는 자신의 목덜미에 새겨진 문양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K가 원격으로 그녀의 신경망을 자극하고 있었다.​“으윽... 그가... 근처에 있어요. 아니,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대전, 솔브레인 R&D 센터 지하 제3연구실.​진우는 차가운 금속 의자에 결박된 채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풍경은 흐릿했지만,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약품 냄새와 일정한 박자로 들리는 기계의 비프음이 그가 처한 상황을 일깨워주었다.​“정신이 드나? 강 기자.”​K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아하고 침착했다. 그는 수술용 장갑을 끼며 진우의 머리 위에 매달린 거대한 기계 장치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 장치 끝에는 레이의 목덜미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나노 침들이 날카로운 빛을 내며 정렬되어 있었다.​“삼촌... 민호 삼촌이 당신을 친구라고 믿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 그냥 고장 난 기계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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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잉크의 역습 (The Counterattack of Ink)

​사각, 사각.​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인사동 지하실. 모든 전자기기가 침묵한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은 종이 위를 내달리는 만년필의 마찰음뿐이었다.​서윤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원고지의 칸을 채워 나갔다. 눈을 감아도 아키라가 남긴 붕대의 결박과 민호 삼촌의 거친 손마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디지털 데이터는 K의 손짓 한 번에 포맷되어 사라질 수 있지만, 종이의 섬유질 사이로 깊숙이 스며든 이 푸른 잉크의 얼룩은 그 어떤 해킹으로도 지울 수 없는 물리적인 '흉터'였다.​딸깍.​그때, 서윤의 곁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레이가 품속에서 낡은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밝힌 것이었다. 흔들리는 작은 오렌지색 불빛이 서윤의 원고지를 비추었다.​"이서윤 작가.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레이가 땀에 젖은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새겨진 K의 통제 문양이 EMP의 여파인지, 아니면 서윤의 필사적인 글쓰기에 공명한 것인지 조금씩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세상의 모든 성벽이 디지털로 세워지는 시대에, 종이 쪼가리와 잉크로 신(神)을 이기려 하다니. 하지만... 왠지 오빠가 왜 당신에게 모든 걸 걸었는지 알 것 같아."​서윤은 대답 대신 펜을 쥔 손에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녀가 써 내려가는 문장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우를 구하기 위한 기도이자, K의 완벽한 통제 시스템에 던지는 아날로그 바이러스였다.​[인간의 기억은 하드디스크가 아니다. 덮어쓰고 지우려 할수록, 그 밑바닥에 눌어붙은 진심은 더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K, 당신이 설계한 완벽한 뇌관은 오늘, 한 자루의 펜 앞에서 무너질 것이다.]​대전, 솔브레인 R&D 센터 지하 제3연구실.​붉은색 비상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역추적기에 내장되어 있던 고출력 EMP가 터지면서, K가 자랑하던 완벽한 신경 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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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새벽의 교차로 (The Crossroads of Dawn)

​새벽 4시,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진우가 모는 검은색 세단이 굉음을 내며 텅 빈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깨진 운전석 유리창으로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들이쳤지만, 그는 추위를 느낄 새조차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백미러와 조수석에 놓인 붉은색 가죽 장부, **[Project: CUBE]**를 번갈아 향할 뿐이었다. ​오른쪽 어깨에서는 K의 방어 포탑이 남긴 스침 상처로 인해 쉴 새 없이 피가 배어 나왔다. 진우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서윤 씨, 조금만 기다려요. 당신의 펜이 헛되지 않게 할 테니까.' ​하지만 K의 통제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톨게이트를 지나기도 전, 백미러 위로 섬뜩한 형태의 헤드라이트 불빛 세 개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붙기 시작했다. 솔브레인의 사병 조직이자 가디언즈의 잔당들, '검은 개'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차량으로 위장한 방탄 SUV를 몰고 진우의 퇴로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쾅—! ​선두에 있던 SUV가 진우의 세단 후미를 거칠게 들이받았다. 차체가 요동치며 가드레일을 긁고 지나갔다. 마찰음과 함께 시뻘건 불꽃이 어둠을 갈랐다. 진우는 기어를 낮추고 스티어링 휠을 급격히 꺾어 상대의 두 번째 충돌을 피했다. ​"이 장부만은... 절대 안 뺏긴다!" ​진우는 조수석의 장부를 자신의 재킷 안쪽에 밀어 넣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물리적인 증거. K가 구축한 완벽한 디지털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아킬레스건이 지금 그의 심장 위에서 뜨겁게 맥박 치고 있었다. ​대전, 솔브레인 R&D 센터 지하 제3연구실. ​얼어붙은 바닥 위로 K의 구두 발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박살 난 배양 탱크와 쏟아진 보존액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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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인사동의 혈투 (The Bloody Battle of Insadong)

비 내리는 인사동 골목은 흡사 지옥의 입구처럼 변해 있었다. 어스레한 새벽빛 사이로 쏟아지는 차가운 빗줄기가 보도블록 사이사이에 고인 핏물을 씻어내려 했지만, K가 몰고 온 살의는 그보다 훨씬 짙고 끈적거렸다. ​“이서윤 작가. 그리고 강 기자. 당신들이 쥔 그 종이 뭉치와 낡은 장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나?” ​K가 우아하게 우산을 기울이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뒤로 배치된 ‘검은 개’들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색 레이저 조준선이 서윤의 심장 부근을 어지럽게 훑고 지나갔다. 진우는 이를 악물며 서윤을 자신의 등 뒤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종이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야. 그 종이를 읽고 진실을 마주할 사람들이 바꾸는 거지.” ​진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결연했다. 어깨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 바닥을 적셨지만, 그는 전술 나이프를 쥔 손목의 힘을 풀지 않았다. ​K는 자비로운 신이 불쌍한 피조물을 보듯 혀를 찼다. ​“사람들은 진실보다 편안함을 원해. 내가 만든 성벽 안에서 통제된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종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진화다. 자, 이제 그 추잡한 ‘과거의 유물’을 넘겨. 그럼 최소한 고통 없이 ‘복원’시켜주지.” ​그때였다. 휠체어에 앉아 숨을 몰아쉬던 레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의 다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났다. ​“K... 당신이 설계한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당신이 계산하지 못한 게 뭔지 알아?” ​레이는 목덜미의 문양을 손으로 짓이기듯 움켜쥐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 위로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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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빗속의 군상 (The Crowd in the Rain)

인사동의 좁은 골목은 더 이상 고즈넉한 예술의 거리가 아니었다. 덤프트럭의 거대한 타이어가 빗물 섞인 웅덩이를 박차고 오를 때마다 사방으로 진흙탕이 튀었고, 그 뒤를 따르는 수십 대의 오토바이 엔진 소리는 잠든 도심의 새벽을 찢어발겼다. ​“사토미... 네 이놈이 감히!” ​K의 평정심이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는 빗물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를 갈았다. 사토미는 트럭 보닛 위로 가볍게 뛰어내려, 품 안에서 아키라가 생전에 즐겨 쓰던 짧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K, 당신의 설계도는 너무나 정교해서 오히려 취약하지. 변수 하나만 생겨도 전체 시스템이 붕괴되니까. 그리고 그 변수는 바로... 당신이 벌레처럼 여겼던 우리들의 ‘의지’다.” ​사토미의 신호와 함께 전직 가디언즈 요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은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들이었다. 솔브레인의 사병들이 당황하며 총구를 돌리기도 전에, 검은 비옷을 입은 요원들이 그림자처럼 그들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었다. 소음기 너머로 새어 나오는 짧은 비명과 금속의 마찰음이 빗소리에 묻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지하실 내부. ​두꺼운 철문 너머로 들려오는 둔탁한 타격음과 비명 소리에 서윤은 숨을 죽였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자물쇠가 잠긴 오동나무 궤짝 위에 머물러 있었다. ​“작가님, 이제 가야 해요. 이 지하실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레이가 서윤의 어깨를 짚었다. 그녀의 안색은 종이처럼 창백했지만, 눈동자에는 지독한 생존 본능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레이는 휠체어 옆에 숨겨두었던 비상용 가방을 꺼내 서윤에게 건넸다. ​“K는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아요. 불리하다 싶으면 아예 판 자체를 갈아엎어 버릴 거야. 이 지하실 전체를 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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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그림자의 은신처 (The Shadow's Hideout)

지하실의 화염을 뒤로하고, 서윤과 레이는 삼촌 민호가 평생을 들여 파놓은 지하 비밀 통로를 따라 달렸다. 좁고 습한 통로 끝에 도달하자, 낡은 한옥의 뒷마당과 연결된 작은 우물이 나타났다. 그곳은 사토미가 미리 준비해둔 '그림자의 은신처', 즉 가디언즈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세이프 하우스였다. ​"진우 씨... 무사해야 할 텐데." ​서윤은 어깨를 짓누르는 오동나무 궤짝의 무게보다, 홀로 지상에 남은 진우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레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은신처 벽면에 설치된 수십 개의 모니터를 켰다. ​"강 기자는 영리한 사람이에요. 사토미 상이 합류했으니 쉽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장부와 원고를 전 세계가 볼 수 있는 '빛'으로 끌어올리는 거예요." ​레이의 말대로였다. 서윤은 잉크가 번진 손으로 궤짝을 열어 [Project: CUBE] 장부와 자신의 원고지를 꺼냈다. ​"이 장부의 첫 페이지... 김한결, 아니 K가 직접 서명한 인체 실험 승인서예요. 레이 씨, 이 내용을 디지털화해서 방송국과 커뮤니티에 동시다발적으로 뿌릴 수 있나요?" ​레이는 자판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K의 해킹을 막기 위해 제가 직접 설계한 폐쇄형 네트워크를 사용할 거예요. 하지만 한 번 업로드를 시작하면 우리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커요. 딱 10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 은신처의 보안 경보가 울렸다. 화면 속에는 인사동 골목을 벗어나 이 먼 은신처 근처까지 추적해온 K의 최정예 요원들이 포착되고 있었다. K는 짐작하고 있었다. 민호가 숨겨둔 마지막 보루가 이 근처라는 것을. ​"10분... 제가 시간을 끌게요." ​서윤은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조각칼을 집어 들었다. 글을 쓰는 펜이 무기였다면, 이제는 삼촌이 유품으로 남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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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폐쇄회로의 균열 (Cracks in the Closed Circuit)

​쿠구궁—! ​세상이 뒤집히는 충격과 함께 고막을 마비시키는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진우의 SUV가 K의 검은 세단 측면을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엔진룸에서 솟구친 매캐한 연기가 앞 유리를 가렸고, 터져 나온 에어백 너머로 세상이 하얗게 점멸했다. ​"커흑...!" ​진우는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신음했다. 핸들에 머리를 부딪친 탓에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깨진 유리 파편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날뛰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자, 구겨진 차 문 사이로 서늘한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조금만 더... 서윤 씨, 제발...' ​진우는 흐릿한 시선으로 언덕 위 은신처를 바라보았다. 창가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모니터 빛. 그것은 이 어두운 성벽 안에서 유일하게 타오르는 진실의 불꽃이었다. 그는 덜컹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차 밖으로 기어 나왔다. 뒤틀린 보닛 아래에서 뚝뚝 떨어지는 냉각수 소리가 마치 운명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려왔다. ​"서윤 씨, 정신 차려요! 시간이 없어요!" ​레이의 날카로운 외침이 정적을 깨뜨렸다. 서윤은 경련하듯 떨리는 손가락을 자판 위에 올렸다. 책상 위에는 민호 삼촌이 목숨과 바꾼 데이터 칩이 꽂혀 있었다. 그 안에는 '큐브(K)'가 지난 10년간 자행해 온 인체 실험의 기록과, 정·재계를 주무르는 검은 돈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서윤이 밤을 지새우며 기록해 온, 아키라(츠바시)의 눈물 섞인 고백들이 원고가 되어 쌓여 있었다. ​[데이터 업로드 중... 54%... 59%...] ​"외부망 차단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놈들이 물리적으로 서버실을 장악하고 있어요. 레이,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에요!" ​서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옆에 선 레이는 츠바시 총리의 쌍둥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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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부서진 저울 (The Broken Scales)

“진우 씨! 내 말 들려요? 진우 씨!!”​서윤의 비명이 은신처의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되돌아왔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K의 웃음소리는 흡사 뱀의 살을 스치는 소리처럼 매끄럽고 불쾌했다.​“이서윤 작가, 목소리가 떨리는군.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한 영웅치고는 너무 나약한 거 아닌가?”​K는 전복된 리무진의 보닛 위에 걸터앉아, 피투성이가 된 진우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진우는 의식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그의 거친 숨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서윤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원하는 게 뭐예요? 이미 데이터는 다 퍼졌어! 당신의 그 잘난 솔브레인도, 가디언즈도 이제 끝났다고!”​“끝? 아니, 이제 시작이지.”​K가 권총의 공이치기를 당겼다. 찰칵—. 그 금속음 하나에 서윤의 호흡이 멈췄다.​“데이터는 숫자에 불과해. 사람들은 곧 새로운 자극에 열광하며 이 추문을 잊겠지. 하지만 생명은 다르다. 이 기자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 네가 쓴 그 모든 정의로운 문장들은 그저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마의 변명’이 될 거다. 어때, 저울질해 볼 텐가? 네가 쓴 진실과, 이 남자의 목숨 중 무엇이 더 무거운지.”​서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박힌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서 레이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작가님. K는 지금 판을 흔들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물러서면 진우 씨의 희생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하지만 서윤은 알고 있었다. K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완벽한 세계가 무너진 대가로, 서윤의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조각을 앗아가려 하고 있었다.​올림픽대로, 사고 현장.​진우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K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입안 가득 고인 핏물을 삼키며, 그는 간신히 눈을 떴다. 깨진 안경 너머로 보이는 새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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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붉은 가람의 긴 그림자 (Long Shadows of the Red Temple)

도쿄를 떠나 교토로 향하는 신칸센의 차창 밖으로 짙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진우는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K의 제국은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의 화면에 진실이 송출되던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진우 씨, 이것 좀 봐요."​서윤이 건넨 태블릿 PC 화면 속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 세계로 송출되던 인체 실험의 증거 영상들 사이사이에, 노이즈처럼 섞여 들어오는 메시지들이 있었다.​[슬픔은 복원될 수 있는 데이터입니까?][당신의 고통을 수치화하면 몇 바이트입니까?]​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마치 시스템이 인간의 감정을 탐구하기 시작한 듯한, 철학적이면서도 서늘한 문장들이었다.​"미러링 바이러스가 K의 메인 서버와 충돌하면서... 예상치 못한 피드백 루프가 생긴 것 같아요."​옆자리에 앉은 레이가 창백한 안색으로 덧붙였다.​"K의 시스템은 원래 인간의 뇌파를 수집하도록 설계되었죠. 그런데 서윤 씨가 주입한 '아키라의 고통'이 시스템 전체에 퍼지면서, 기계가 인간의 '슬픔'이라는 주파수를 학습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건 우리가 전혀 계산하지 못한 변수예요."​서윤은 무릎 위의 거울 파편을 꽉 쥐었다. 그 파편 속에서 삼촌의 필체가 다시 희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교토, 청수사(淸水寺)의 숲.​해 질 녘의 청수사는 붉은 단풍과 어우러져 피를 머금은 듯 장엄했다. 수많은 관광객의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서윤과 진우는 그 소음에서 소외된 채 숲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토미는 요원들을 숲의 경계에 배치하며 주위를 경계했다.​"이곳은 천년 동안 수천 번의 화재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복원되어 온 곳입니다."​사토미가 낡은 나무 기둥을 쓸어내리며 말했다.​"하지만 그 복원의 기록 뒤편에는, 단 한 번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어둠의 복원가'들의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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