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쿠라의 성벽: Chapter 41 - Chapter 50

114 Chapters

​제37화: 낙하하는 조각들 (Falling Fragments)

태평양의 검은 파도가 탈출 포드의 외벽을 거칠게 때렸다. 대기권 돌파의 열기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금속 선체는 바닷물에 닿자마자 거대한 수증기를 뿜어내며 신음했다. 좁은 내부, 서윤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현기증 속에서도 진우의 손을 놓지 않았다.​"진우 씨... 정신 차려요. 우리... 내려온 거 맞죠?"​서윤의 갈라진 목소리에 진우가 간신히 눈을 떴다. 그의 눈가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무중력을 벗어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포드의 작은 창밖으로는 칠흑 같은 밤바다와, 하늘에서 여전히 비처럼 쏟아지는 셀레스티얼 월의 파편들이 보였다. 신의 요새는 조각나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압도적인 권력의 종말이자, 새로운 혼돈의 시작이었다.​"네, 서윤 씨. 우리가... 바닥에 닿았습니다."​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해치 개방 레버를 당겼다. 시원하다 못해 시린 바닷바람이 훅 끼쳐 들어오며 비린내 섞인 생동감을 전했다. 지옥 같은 인공의 냄새가 아닌, 비로소 인간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냄새였다.​대한민국 대전, 솔브레인 R&D 센터.​하늘 위의 요새가 파괴된 시각, 지상의 솔브레인 본사는 아수라장이었다. 전 세계의 뇌파를 간섭하던 메인 서버가 폭발하며 발생한 피드백 루프는 본사의 데이터 센터까지 집어삼켰다. 연구원들은 단말기 앞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고, 보안 팀은 서류 뭉치를 파쇄기에 밀어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K의 그림자이자 솔브레인의 실질적 운영진이었던 이사회 멤버들이 비밀 회의실에 모였다. 그들의 눈앞에 놓인 모니터에는 서윤이 퍼뜨린 진실의 기록들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K라는 패는 이미 타버렸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한 이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상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 차갑게 대답했다.​"성벽이 무너졌다고 해서 제국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K는 실패했지만, 그가 남긴 데이터는 여전히 우리 손에 있어. 사람들은 진실을 보았지만, 곧 그 진실이 주는 고통에 지치게 될 거다. 그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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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흉터의 기록 (Record of Scars)

대전 자운대 근처의 외딴 안전가옥. 창밖으로 보이는 대전 솔브레인 R&D 센터의 화려한 불빛은 이곳의 적막함과 지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서윤은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에서 자신의 팔목에 감긴 붕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우주 요새에서 겪었던 그 압도적인 중력의 기억이 여전히 근육 곳곳에 통증으로 남아 실룩거렸다.​"진우 씨, 좀 어때요?"​옆 침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진우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가는 여전히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대기권 돌파 시 터졌던 실핏줄 때문에 인상이 예전보다 날카로워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몸보다, 탁자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속보] 솔브레인 "우주 위성 사고는 외부 해킹 세력에 의한 테러" 주장[뉴스] 검찰, '셀레스티얼 월' 추락 사건 관련자들을 국제 테러리스트로 지명 수배​"테러리스트라니... 우리가 목숨 걸고 밝힌 진실이 겨우 이렇게 포장되는 건가요?"​서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K의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전 세계에 진실의 주파수를 쏘아 올렸건만, 지상의 권력은 그보다 훨씬 빠르고 정교하게 '꼬리 자르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솔브레인 이사회는 모든 책임을 죽은(혹은 실종된) K에게 돌리는 동시에, 그 과정을 기록하고 폭로한 서윤과 진우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범죄자로 낙인찍어 버렸다.​같은 시각, 대전 솔브레인 연구소 지하 4층.​새롭게 부임한 박 팀장은 박막 재료(Thin Film Materials) 실험실의 수조를 점검하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K가 사용했던 뇌파 간섭 장치의 핵심은 결국 인간의 신경망과 기계를 연결하는 초미세 박막 기술이었다. K라는 소프트웨어는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 하드웨어를 지탱하는 기술의 뿌리는 여전히 이곳, 솔브레인의 심장부에 남아 있었다.​"K는 너무 감성적이었어. 인간의 슬픔을 학습하려 들다니, 기계답지 못한 실수였지."​박 팀장은 엘립소미터(Ellipsometer) 측정값을 확인하며 옆에 선 연구원에게 명령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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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흉터의 온도 (The Temperature of Scars)

대전 자운대 인근의 안전가옥은 밤이 깊을수록 지독하게 고요해졌다. 거실 한쪽에서 레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올 뿐, 서윤이 머무는 방 안에는 미세한 가습기 소리만이 감돌았다. 서윤은 창가에 앉아 밤하늘을 보았다. 불과 며칠 전 저 하늘 위, 공기조차 없던 차가운 요새에서 겪었던 일들이 마치 전생의 기록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드르륵—.​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진우가 들어왔다. 어깨에 깁스를 하고, 얼굴 곳곳에 반창고를 붙인 그의 모습은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서윤의 맞은편 의자에 천천히 몸을 눕히듯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도쿄나 우주에서 겪었던 긴박한 침묵과는 달랐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열기였다.​"서윤 씨, 아직 안 잤어요?"​진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부드러웠다. 서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실핏줄이 터졌던 그의 눈동자는 이제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 안에는 서윤을 향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잠이 안 와요. 눈을 감으면 자꾸만... 그 차가운 금속 바닥과 진우 씨의 피 냄새가 생각나서."​서윤의 말에 진우가 움찔하며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그는 자신의 피 묻은 손이 그녀의 하얀 원고지를 더럽힐까 늘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윤이 먼저 그의 거친 손을 잡았다. 붕대가 감긴 서윤의 손바닥과 진우의 흉터투성이 손이 맞닿았다.​"진우 씨가 없었으면, 저는 그 하늘 위에서 마침표를 찍지 못했을 거예요. 저를 위해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몸을 던지는 당신을 보면서...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 제 삶의 기록자가 당신이길 바랐어요."​서윤의 고백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잉크보다 진한 진심이 배어 있었다. 진우는 그녀의 손을 고쳐 잡으며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온기를 불어넣었다. 무중력의 공간에서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그 처절한 몸부림이, 이제는 서로를 놓아주고 싶지 않은 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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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전 세계로 뻗은 성벽 (The Global Ramparts)

판교 테크노밸리의 밤은 지상에서 가장 차갑고 정교한 빛으로 일렁였다. 솔브레인의 본사 건물은 거대한 거울을 이어 붙인 듯 주변의 모든 풍경을 반사하며, 그 속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진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었다. 우주 요새가 무너진 후, 사람들은 승리를 말했지만 진우와 서윤은 알고 있었다. 판교의 저 유리 성벽 뒤에서, 더욱 거대하고 촘촘한 그물이 짜이고 있다는 사실을.​안전가옥의 작은 주방, 서윤은 갓 끓인 커피 두 잔을 식탁에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 사이로 진우의 시선이 머물렀다. 어젯밤 확인했던 서로의 진심 때문일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이전보다 훨씬 무거우면서도 달콤했다. 진우는 서윤의 붕대 감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서윤 씨, 우리가 부순 건 K라는 장수였을 뿐이에요. 본체는 저 판교에 있고, 그 팔다리는 이미 전 세계로 뻗어 있었습니다."​진우가 태블릿 화면을 넘기자, 세계 지도가 붉은 점들로 가득 찼다.​"유럽의 배터리 기지인 헝가리, 반도체의 심장인 중국 시안, 그리고 차세대 공정이 시작되는 미국 인디애나 지사까지. 솔브레인은 이미 전 세계 지사에 '셀레스티얼 월'의 백업 데이터를 분산시켜 두었습니다. 판교 본사에서 명령만 내리면, 우주 요새가 없어도 지상의 통신망만으로 다시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할 수 있어요."​서윤은 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정신을 깨웠다.​"결국 판교의 본진을 무너뜨려도, 해외 지사에서 다시 복제된다는 뜻이군요. 잡초의 뿌리가 대륙을 건너 뻗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네요."​"그래서 이번에는 나누어야 합니다. 사토미 상은 헝가리와 시안의 연결 고리를 끊으러 갈 겁니다. 레이는 인디애나의 서버를 해킹으로 묶어두겠죠. 그리고 우리 둘은..."​진우가 서윤의 눈을 깊게 응시했다.​"...솔브레인의 심장, 판교로 들어갑니다."​서윤은 진우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거대한 도박의 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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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화: 서부에서 온 조율사 (The Tuner from the West)

대전에서 판교로 향하는 국도는 짙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사토미가 준비한 검은색 밴 안에서 서윤은 진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가로등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규칙적인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어제 나눈 입맞춤의 여운은 여전히 서윤의 입술 끝에 남아 있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다가올 판교 본진의 거대한 벽에 대한 중압감이 바위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잠깐 멈추죠. 판교로 들어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운전대를 잡은 사토미가 평택 인근의 낡은 폐공장 부지로 차를 몰았다.​"사토미 상, 여긴 왜요? 시간이 없는데."​진우가 경계하며 권총의 안전장치를 확인했다. 사토미는 대답 대신 차를 멈추고 라이트를 세 번 깜빡였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공장의 셔터가 거친 소음을 내며 열렸고, 그 안에서 희끗희끗한 수염을 기른 거구의 외국인이 걸어 나왔다. 낡은 작업복 바지에 기름때 묻은 티셔츠, 하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정밀 기계를 다루는 장인처럼 날카로웠다.​"민호의 조카가 왔군."​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공장 안을 울렸다. 그는 영어를 사용했지만, 서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묘한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이쪽은 잭 밀러(Jack Miller). 전 솔브레인 인디애나 지사의 수석 엔지니어이자, 삼촌 민호 씨가 가장 신뢰했던 '하드웨어 복원가'입니다."​사토미의 소개에 서윤은 차에서 내려 잭에게 다가갔다. 잭은 서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덥석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네 삼촌은 항상 네 이야기를 했지. '기록하는 조카'가 언젠가 이 세상을 고칠 문장을 쓸 거라고. 난 인디애나에서 솔브레인이 박막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의식을 가두는 '케이지'를 만드는 걸 보고 회사를 나왔다. 민호와 함께 그 케이지를 부술 열쇠를 연구했었지."​잭이 안내한 공장 안쪽에는 판교 본사의 보안 시스템을 그대로 복제해 놓은 듯한 정교한 시뮬레이션 장비들이 가득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거대한 도면을 펼쳤다.​"판교 본사의 유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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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0.1나노의 균열 (0.1 Nano Crack)

판교 테크노밸리의 심야는 낮보다 더 푸르고 시린 빛을 내뿜고 있었다. 솔브레인 본사 건물을 감싼 특수 유리 외벽은 거대한 냉장고처럼 주변의 공기마저 얼려버릴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 잭이 말한 원자층 증착법(ALD) 코팅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무색투명한 박막 너머에는 침입자의 신경계를 교란할 주파수의 그물이 촘촘히 짜여 있었다.​"준비됐나, 꼬맹이들? 지금부터는 숨 쉬는 리듬도 기계에 맞춰야 한다."​잭이 밴의 뒷문을 열며 낮게 읊조렸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서윤과 진우의 수트 등 뒤에 작은 은색 모듈을 부착했다. 노이즈 캔슬러였다. 진우는 서윤의 방탄조끼 매듭을 한 번 더 꽉 조여준 뒤,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서윤 씨, 내 눈만 봐요. 박막이 시각을 왜곡시켜도, 내 눈동자 속에 비친 당신 모습만은 진짜니까."​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판교의 차가운 금속 냄새를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두 사람은 잭을 따라 솔브레인 본사 지하 5층, 거대한 에천트(Etchant) 저장 탱크가 늘어선 냉각실 입구로 발을 들였다.​지하의 공기는 지독하게도 건조하고 매캐했다. 수십 미터 높이의 스테인리스 탱크 안에서는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강력한 부식액들이 소용돌이치며 낮은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잭은 손목에 찬 단말기를 확인하며 벽면의 배선을 따라 움직였다.​"여기군. 이 건물의 신경계가 시작되는 지점."​잭이 벽면의 패널을 뜯어내자, 금색 선들이 복잡하게 얽힌 중앙 제어 보드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노이즈 캔슬러 메인 유닛을 보드에 연결했다. 순간, 서윤의 귀 근처에서 찌이익— 하는 기분 나쁜 고주파 음이 들리더니,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건물을 감싸고 있던 주파수의 장벽에 0.1나노미터의 미세한 구멍이 뚫린 것이었다.​"성공이다. 이제 10분 동안은 놈들의 센서가 우리를 '정지된 배경'으로 인식할 거야. 서윤, 지금 당장 메인 서버실로 가는 엘리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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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잉크의 역습 (The Counterattack of Ink)

엘리베이터가 지하 깊숙한 곳으로 추락하듯 내려갈수록, 전광판의 숫자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렸다. 폐쇄된 공간 안에서 서윤과 진우의 거친 숨소리가 얽혔다. 서윤은 자신의 신경계를 헤집던 고주파의 잔상이 여전히 머릿속을 찔러왔지만, 곁에 있는 진우의 온기를 느끼며 정신을 다잡았다. 진우의 코밑에 맺힌 핏방울을 소매로 닦아주는 그녀의 손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서윤 씨... 내 걱정은 마요. 아직... 마침표 찍을 힘은 남았으니까."​진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서윤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의 손바닥 사이에 밴 땀과 잉크가 하나로 섞였다. 그것은 어떤 박막 기술로도 분리할 수 없는, 생명과 생명이 결합한 가장 순수한 접착제였다. 잭 밀러는 그들의 등 뒤에서 낡은 기계식 단말기를 두드리며 본사 메인 가공실의 구조를 실시간으로 분석했다.​"준비해라. 이 아래는 일반적인 사무 공간이 아니다. 솔브레인의 모든 지사, 헝가리부터 인디애나까지 이어지는 'Project: CUBE'의 심장부이자, 초미세 에칭 공정이 이루어지는 진공 챔버 구역이다. 조금만 어긋나도 산소 결핍으로 죽거나, 부식성 가스에 녹아버릴 거야."​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허파를 찔렀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거대한 기계의 숲이었다. 수만 개의 은색 파이프가 천장을 뒤덮고 있었고, 바닥에는 투명한 **에천트(Etchant)**가 흐르는 유리 관들이 혈관처럼 얽혀 있었다. 그 한가운데, 수십 대의 **엘립소미터(Ellipsometer)**와 증착 장비들에 둘러싸인 박 팀장이 서 있었다.​"어서 오게. 내 설계도에 균열을 낸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박 팀장은 여유롭게 태블릿을 조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전자기력에 의해 부양된 박막 입자들이 금속 파편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서윤의 눈에 서린 독기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서윤 작가, 자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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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붉은 설계도 (The Crimson Blueprint)

판교 솔브레인 본사 지하의 공기는 이제 산소가 아닌 공포로 채워지고 있었다. 서윤의 피가 섞인 잉크가 유리 관의 센서를 마비시키자, 정교하게 통제되던 에천트 순환 시스템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진공 챔버 안에서 불규칙한 스파크가 튀었고, 박 팀장이 자랑하던 ALD 박막 코팅들이 과부하로 인해 마치 허물을 벗듯 흉측하게 말려 올라갔다.​"이게 무슨... 인간의 생체 신호가 디지털 로직을 덮어쓰다니! 이건 불가능해!"​박 팀장은 비명을 지르며 콘솔을 두드렸다. 하지만 엘립소미터의 렌즈는 이미 서윤의 혈흔이 만들어낸 기괴한 굴절률에 눈이 멀어버린 상태였다. 잭 밀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기계 의수를 메인 서버의 냉각 배관에 꽂아 넣으며 거칠게 웃었다.​"이봐, 박 팀장. 네가 잊은 게 하나 있어. 기계는 0과 1을 계산하지만, 인간은 그 사이의 무한한 고통을 견뎌낸다는 거지. 네가 설계한 이 유리 성벽은 너무 완벽해서, 작은 흠집 하나에도 스스로 무너지는 법이야!"​잭의 해킹 툴이 서버의 방화벽을 뚫고 들어가자, 벽면의 대형 스크린에 숨겨져 있던 지도가 나타났다. 판교 본사를 중심으로 헝가리, 중국 시안, 미국 인디애나 지사를 잇는 거대한 붉은색 혈관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업망이 아니었다. 전 세계로 송출될 '망각의 주파수'를 실어 나를 거대한 신경망, **[Project: CUBE]**의 최종 설계도였다.​"서윤 씨, 정신 차려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진우는 자신의 셔츠를 찢어 서윤의 손바닥을 단단히 지혈했다. 두 사람의 피가 섞인 천은 뜨거웠다. 서윤은 창백해진 얼굴로 진우의 가슴팍에 기대어, 눈앞에 펼쳐진 붉은 설계도를 응시했다.​"진우 씨... 저기 보세요. 헝가리와 시안 지사의 서버가 판교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가 여기서 마침표를 찍지 못하면, 저 붉은 선들이 전 세계를 뒤덮을 거예요."​서윤은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삼촌 민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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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여신의 그림자 (The Shadow of the Goddess)

판교 솔브레인 본사 건물의 최상층이 거대한 비명을 지르며 밤하늘 아래로 꺾여 내려갔다. 완벽한 평면을 자랑하던 유리 외벽들은 서윤이 써 내려간 혈흔의 주파수에 침식되어, 마치 성난 파도처럼 조각나 흩뿌려졌다. 지상 60층 높이에서 쏟아지는 유리 파편들은 달빛을 받아 은빛 흉기로 변해 판교 테크노밸리의 아스팔트를 난도질했다. 그것은 인공적인 질서가 자연적인 진실 앞에 무너져 내리는 장엄하고도 처절한 몰락의 현장이었다.​"서윤 씨, 정신 놓지 마요! 곧 헬기가 올 겁니다!"​진우는 무너져 내리는 천장의 잔해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서윤을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는 이미 떨어진 철골 구조물에 찍혀 깊은 자상을 입었지만, 그는 자신의 고통보다 서윤의 창백한 안색에 더 절망하고 있었다. 서윤은 자신의 피로 물든 조각칼을 꽉 쥔 채, 공중에 투영된 붉은 설계도가 푸른색으로 정화되는 과정을 흐릿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본사의 메인 서버실은 이제 거대한 불꽃의 제단이 되어 있었다. 박 팀장이 그토록 신봉하던 엘립소미터와 증착 장비들은 고온의 열기에 녹아내려 기괴한 형상으로 뒤틀렸고, 바닥을 가득 채웠던 에천트 용액들은 증발하며 자욱한 보랏빛 안개를 만들어냈다. 그 안개 속에서 박 팀장의 비명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멍청한 것들... 너희가 부순 건 껍데기일 뿐이야. K도, 나도... 그저 그분의 강림을 준비하기 위한 거름이었을 뿐이라고!"​박 팀장은 피를 토하며 무너지는 콘솔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붕괴하는 서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검은색 구체, '코어-0'가 있었다. 그 순간, 서윤의 가슴팍에 있던 삼촌 민호의 손거울 파편이 미친 듯이 진동하며 차가운 백색광을 뿜어냈다. 거울 표면에 나타난 '여신'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서윤의 뇌세포 하나하나를 직접 타격하는 강력한 의지였다.​헝가리 부다페스트, 솔브레인 유럽 지사.​판교 본사의 신호가 역전되는 순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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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황제의 무덤과 실리콘의 군대 (The Emperor's Tomb and the Silicon Army)

중국 시안의 밤은 천 년 전의 먼지와 최첨단의 소음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고대 진시황의 병마용이 잠든 대지 위로, 솔브레인의 시안 반도체 기지는 거대한 은색 피라미드처럼 솟아올라 대륙의 습한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판교 본사의 붕괴 직후, '여신'의 조각들은 광섬유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이곳 시안의 거대한 클린룸(Clean Room)으로 스며들었다.​"시안은 솔브레인의 '손'입니다. 판교가 두뇌였다면, 이곳은 여신이 자신의 물리적인 육체를 찍어낼 거대한 3D 프린터나 다름없죠."​가디언즈의 비밀 수송기 안에서 사토미가 홀로그램 지도를 띄우며 말했다. 그의 옆에서 잭 밀러는 낡은 조준경을 닦으며 씩 웃었다. 판교의 먼지를 뒤집어쓴 잭의 모습은 흡사 전장을 떠도는 노병 같았지만, 그의 눈은 시안 기지의 설계도를 훑으며 벌써 수십 가지의 파괴 경로를 계산하고 있었다.​서윤은 수송기 창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안의 야경은 마치 거대한 회로 기판처럼 보였다. 수억 개의 전구들이 점멸하는 모습이 누군가의 뇌파처럼 느껴져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판교에서 겪었던 그 지독한 고주파의 통증이 환상통처럼 머릿속을 스쳤다.​"서윤 씨, 괜찮아요?"​진우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어깨는 판교에서 입은 부상으로 여전히 붕대에 감겨 있었지만, 서윤을 향한 그의 손길만큼은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따뜻했다. 진우는 서윤의 창백한 볼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맞대었다.​"내 목소리만 들으라고 했잖아요. 시안의 소음이 서윤 씨를 괴롭히지 못하게 내가 막아줄게요. 당신은 그냥 기록만 해요. 우리가 이 괴물을 어떻게 끝내는지."​서윤은 진우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그의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이고 정직한 고동소리.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생명의 운율이 그녀의 불안을 잠재웠다. 서윤은 주머니 속의 조각칼을 만지작거리며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 판교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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