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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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의사가 안경을 벗고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요즘 사람들은 정말 이해가 안 가. 아프지도 않으면서 왜 병원을 드나들어? 그렇게 할 일이 없나?”...한편 심해린은 일부러 회사에서 좀 떨어진 카페를 골랐다. 이곳에 사람이 많긴 했지만 고상윤과 마주칠 가능성은 절대 없었다.자리에 앉은 지 2분도 지나지 않아 캐주얼한 정장을 입은 고혜연이 성큼성큼 걸어와 심해린의 맞은편에 앉았다.“심해린.”고혜연이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왜 이렇게 말랐어? 고상윤이 밥도 제대로 안 줘?”“혜연아.”심해린이 씁쓸하게 웃으며 달리 방법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얼마 전에 건우가 최태식 때문에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됐어. 명서아가 건우의 변호를 맡았는데 법정에서 변론을 한마디도 안 하더라고. 그 일 때문에 할머니가 충격으로 쓰러져서 아직 의식이 없으셔. 그래서 내가 요즘 밥을 통 못 먹고 있어.”심건우가 감옥에 갔다는 소식에 고혜연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명서아가 첫 사건부터 패소했다는 얘기를 고혜연도 들은 바가 있었다.그녀가 법정에서 보여준 태도가 변호사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고혜연은 쓸데없는 얘기는 생략하고 가방에서 가죽 봉투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다 준비했어.”심해린이 봉투 속의 서류를 꺼냈다. 이혼 합의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적절한 기회를 봐서 고상윤의 서명을 받고 법원에 신청하면 된다는 생각에 심해린의 마음속에 작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마침내 가벼워져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3년간의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고마워, 혜연아.”심해린은 울컥한 감정을 억누르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고혜연을 올려다보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네가 없었더라면 내가 얼마나 더 갇혀 있었을지 몰라.”고혜연이 심해린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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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사무실로 돌아온 후 더는 아무도 심해린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전에 임서준이 했던 경고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심해린은 책상에 엎드려 어떻게 고상윤의 서명을 받아낼지 고민했다.고상윤이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라 고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어떤 기회를 만들어 그가 서명하게 해야 했다.쾅.대표 사무실 안에서 굉음이 들려왔는데 뭔가 바닥에 떨어진 듯한 소리였다.사무실 직원들이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또 누가 대표의 심리를 건드린 걸까?심해린이 고개를 들어 굳게 닫힌 유리문을 올려다보았다. 고상윤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모습이 눈에 훤했다.‘또 무슨 발작을 일으키는 거야? 보나 마나 명서아 때문이겠지.’조금 전 들었던 임서준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명서아가 병원에 있는데 상태도 불안정하고 입맛도 없다고 했다. 고작 이런 사소한 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고상윤은 부장을 셋이나 욕하면서 내쫓았다.고상윤은 자신의 인내심과 다정함을 오직 명서아에게만 쏟아부었다.심해린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입술을 깨문 채 어떻게 이혼 합의서에 사인을 받을지 계속 생각했다.바로 그때 하이힐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더니 심해린의 책상 옆에 멈춰 섰다.“해린 씨.”나긋한 목소리에 심해린이 고개를 들었다. 오전에 그녀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던 웨이브 머리 여직원이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니 이름이 안유희였다.“무슨 일이죠?”심해린의 말투가 한없이 차분했다.안유희가 파란색 파일철을 그녀의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붉게 칠한 손톱으로 표지를 톡톡 두드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이거 서부 프로젝트 분기 결산 보고서인데 지금 당장 대표님의 결재가 필요하거든요. 해린 씨가 갔다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사무실 안, 사람들의 시선이 심해린에게 향했다. 하나같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금 대표 사무실로 누가 들어가든 된통 혼날 게 분명했다.문서를 내려다보던 심해린은 머릿속이 갑자기 번뜩였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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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심해린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목소리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고상윤이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펜을 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심해린의 얼굴에 닿자마자 문득 뭔가 떠올랐다.‘이 여자 성가시긴 하지만 죽을 끓이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혔어. 의사가 서아더러 자극 없는 담백한 음식을 먹으라 했지? 배달 음식은 자극적인데...’“이따가 퇴근하면 바로 별장으로 들어가.”고상윤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덤덤하게 말했다.“서아가 먹을 해물죽 좀 끓여 놔.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담백한 걸 먹어야 해.”그 말에 심해린은 순간 멍해졌다. 지금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혼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마음속의 불쾌감이 아주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알았어요.”짧은 한마디가 심해린의 입술 사이에서 가볍게 흘러나왔다.생각지 못한 반응에 고상윤이 살짝 놀랐다. 최근 계속 가시 돋친 것처럼 굴어 적어도 한번은 거절할 줄 알았다. 이렇게나 순순히 대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지난번에 혼낸 효과가 있나 보네. 드디어 좀 얌전해졌어.’고상윤의 마음속에 차올랐던 짜증도 조금 잦아들었다. 그가 책상 위의 펜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더니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그러고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며 서명했다. 이혼 합의서가 끼워져 있는 페이지를 넘길 때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펜촉이 종이에 닿자마자 ‘고상윤’이라는 이름 석 자를 을의 사인란에 거침없는 써 내려갔다.마지막 페이지까지 서명을 마친 고상윤은 펜을 툭 던지고 파일철을 건넨 다음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가져가.”“네.”심해린이 손을 뻗었는데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고상윤이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그래.”그가 손을 휘저으며 당장 나가라고 했다.심해린은 조용히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문이 닫힌 순간 이미 결정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이 저렸다. 그녀는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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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이제 만족해?”명서아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에 최태식이 혀로 볼살을 밀어내며 웃으면서 말했다.“네 덕분에 심건우 걔 앞으로 십 년은 꼼짝없이 감옥에서 썩을 거야. 안 그러면...”최태식이 말을 마치기 전에 명서아가 말을 잘랐다.“나한테 빚졌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그가 흠칫하더니 이내 멋쩍게 웃었다.“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휴대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지금 잠시는 없어.”명서아의 목소리에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생각나면 그때 연락할게.”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퇴근 시간이라 지하철이 사람들로 붐볐다.명서아가 먹을 해물죽을 끓여주겠다고 고상윤과 약속했기에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근처 해산물 시장으로 향했다.시장 안에 축축한 바닷물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가 한 노점 앞에 서자 주인이 반갑게 말을 건넸다.“아가씨, 뭐 사려고요? 새우 좀 봐요. 엄청 싱싱해요.”심해린이 수조 속에서 꿈틀거리는 새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새우랑 조개 좀 주세요.”그녀가 돈을 내던 그때 고혜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해린아, 퇴근했어?”“응. 지금 시장이야.”심해린이 봉투에 담은 해산물을 손에 들고 비교적 조용한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시장? 고신 그룹 사모님이 직접 시장에 갈 일이 뭐가 있어?”고혜연의 목소리가 심해린의 귀에 때려 박혔다.“소문이라도 퍼지면 고상윤이 까무러치겠는데?”“그 사람 사인했어.”심해린의 가벼운 한마디에 휴대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가 몇 초 후 고혜연이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진짜? 그럼 언제 가서 서류 정리할 거야?”“합의서에 날짜가 쓰여 있으니까 그때 가면 돼.”오가는 사람들을 보던 심해린의 두 눈이 왠지 모르게 공허해졌다.고혜연이 욕설을 몇 마디 내뱉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다음은 어떻게 할 거야? 일은? 지금은 어디서 지내?”“아직은 고상윤네 집에 있어. 고상윤의 비서로 일하고 있거든.”심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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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하지만 고상윤은 심해린이 차려준 밥상을 제대로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퇴근 시간에 맞춰 정성껏 죽을 끓여놓아도 돌아오는 건 고상윤의 차가운 문자뿐이었다.[야근.][술자리 있어.][오늘 못 들어가.]그렇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몇 번이나 버렸는지 모른다. 나중에는 그녀도 포기하고 끓이지 않았다.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명서아를 위해 다시 죽을 끓이게 될 줄은 몰랐다.심해린이 국자를 들고 죽을 젓다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때 현관문에서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고상윤이 명서아와 함께 들어온 것이었다.두 사람의 발소리가 거실을 지나 식당 쪽으로 다가왔다. 잠시 후 명서아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와, 냄새 정말 좋다. 언니, 냄새 너무 좋아요.”심해린과 아주 친한 사이인 척했다.심해린이 두 사람을 돌아봤다. 고상윤의 시선이 명서아의 웃는 얼굴에 머물렀는데 그의 입가에도 덩달아 미소가 새어 나왔다.“서아한테 한 그릇 떠줘.”고상윤이 심해린에게 덤덤하게 말했다.심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늘어뜨린 채 깨끗한 흰 사기그릇에 뜨거운 죽을 조심스레 떴다. 그러고는 죽을 들고 식탁으로 걸어갔다.명서아가 식탁 의자에 앉아 기대에 찬 얼굴로 심해린을 쳐다보고 있었다.“고마워요, 언니.”그녀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두 사람의 손이 맞닿으려던 찰나 명서아가 갑자기 손목이 비틀었다. 그 바람에 뜨거운 해물죽이 정확하게 심해린의 팔과 아랫배 쪽으로 쏟아졌다.“으악.”명서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걸쭉하고 뜨거운 죽이 순식간에 피부에 닿았다. 밀려오는 통증에 심해린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몸을 움츠렸고 팔이 저절로 안으로 오므라들었다.“어머, 미안해요. 미안해요, 언니.”명서아가 황급히 일어서서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잘 잡지 못했어요. 괜찮아요?”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심해린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노골적인 도발과 의기양양함이 섞여 있었다.“얼음 좀 가져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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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바닥이 점점 깨끗해졌다.심해린이 고무장갑을 벗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오랫동안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식당을 나왔다.거실의 불빛이 환했다. 고상윤과 명서아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참으로 눈에 거슬렸다.심해린이 시선을 거두었다. 식탁 가운데 놓인 냄비가 텅 비어 있었고 야채 볶음도 하나도 남지 않았다.냄비 바닥에 붉은 새우 껍질 몇 조각과 생강 조각만 남아 있었다.심해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재료 손질부터 요리하기까지 두 시간이나 걸렸다. 마지막에는 배가 고픈 채로 냄비와 그릇을 닦았다.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어 그녀가 먹을 야채 볶음을 따로 만들었는데 그마저도 하나도 남김없이 싹 다 먹어치웠다.식당 입구에 서 있는 심해린을 발견한 명서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심해린에게 뭔가 자랑하는 것 같았다.“언니, 다 치웠어요? 정말 미안해요. 우리 너무 배고파서 정신없이 먹다 보니... 다 먹어버렸어요.”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나긋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귀에 거슬렸다.심해린은 명서아를 쳐다보지 않고 시선을 고상윤에게 고정했다.태연한 표정으로 손목 부분이 살짝 구겨진 와이셔츠 자락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동작이 매우 우아했다. 심해린의 노력 따위는 보이지 않는 듯했고 심지어 도우미가 하는 일을 해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심해린의 시선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고상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식탁 위의 다른 접시를 가리켰다.“해산물이 좀 남았잖아.”그가 가리킨 접시에 데코용으로 죽 위에 올려놓았던 새우살과 조갯살이 담겨 있었다.고상윤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심해린의 얼굴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 말투가 일상적인 얘기를 하는 것처럼 태연했다.“평소에 많이 먹지도 못하잖아.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그 한 마디에 심해린은 차가운 물을 맞은 듯 온몸이 차갑게 굳어버렸다.‘많이 못 먹는다고? 충분하다고?’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이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쓰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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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입맛이 없어서 안 먹을래요. 그릇은 내일 아주머니더러 치우라고 해요.”말을 마친 심해린은 두 사람을 더는 쳐다보지 않고 창고 방으로 향하려 몸을 돌렸다.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그 창고 방이 지금 그녀에게는 유일한 피난처였다.그런데 두 걸음 채 떼기도 전에 뒤에서 명서아의 나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내일... 닭백숙 먹고 싶어. 오늘 죽 정말 맛있었는데. 언니한테 부탁해도 괜찮을까?”명서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고 약간의 애원이 섞여 있었다.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고상윤을 쳐다보자 바로 먹혔다.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명서아의 모습에 고상윤은 마음이 약해졌다. 다시 심해린의 뒷모습을 봤을 땐 남아 있던 마지막 인내심마저 완전히 사라졌다.“해린아, 잠깐만. 서아 말 들었어? 네가 한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하는데 왜 반응이 없어?”협박의 뉘앙스가 조금 담긴 덤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심해린은 걸음만 멈추고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내일은 몸보신하게 닭 한 마리 푹 고아 닭백숙 만들어.”고상윤의 목소리에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심해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이 느껴져서야 손을 풀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고상윤의 차가운 눈을 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난 몸보신 필요 없어요. 몸보신이 필요한 사람더러 직접 해서 먹으라고 해요. 내가 해주겠다고 약속한 건 딱 오늘 한 끼예요.”심해린이 요리를 하겠다고 한 건 오늘 고상윤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기 때문이지, 두 사람의 전속 요리사가 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고상윤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반항이 꽤 불쾌한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긴 손가락으로 나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소리가 심해린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고상윤이 덤덤하게 말했다.“할머니가 금방 깨어날 것 같지도 않고 지금 비서로 일하긴 하지만 딱히 하는 일도 없잖아. 시간 날 때 밥 좀 하라는데 그게 어려워?”심해린은 순간 움찔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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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생각해보니 며칠 동안 할머니를 보러 가지 못했다.벌써 사흘째라 할머니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일 시간을 내서 병원에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웅크리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그녀는 또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심해린이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이불 한 장으로 이 계절의 추위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위가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아팠다. 저녁을 먹지 않아 속이 텅 비어 있었다.꼬르륵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허기를 없애려 자세를 바꿨다가 머릿속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오늘 고상윤이 명서아를 챙겨주던 모습이 떠올랐다.심해린은 눈을 감고 자신을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우는 모습보다 더 보기 흉했다.할머니가 의식을 찾기 전까지 고상윤에게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패를 준 셈이었다.심해린은 오늘 고혜연이 언급했던 진씨 가문 디자인 공모전이 떠올라 내일에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고는 눈을 감고 잠들 준비를 했다. 잠들어야만 배고픔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다음 날 심해린은 굶주림에 눈을 떴다.날이 밝을 무렵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새까매졌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회복되었다.별장이 한없이 고요했다. 고상윤이 아마 아직 2층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심해린은 소리를 죽여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능숙하게 국수와 계란을 꺼냈다.물을 올리고 면을 넣자 수증기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감쌌다.면이 금세 익었다. 그녀는 국수 위에 조심스럽게 반숙 계란을 올렸다. 노른자를 콕 찌르면 바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심해린이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들려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벌써 일어났어요? 뭘 먹어요? 냄새 너무 좋은데요?”명서아의 목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에 방금 막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함이 묻어 있었다.실크 잠옷 차림으로 사뿐사뿐 걸어 내려온 명서아의 시선이 심해린의 앞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에 꽂혔다. 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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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무슨 일이야?”고상윤의 차가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그가 이미 성큼 다가와 있었고 커다란 그림자가 심해린을 완전히 덮쳤다. 바닥의 파편들을 훑어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바닥에 엎드린 명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오빠...”명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말할 때도 울먹거렸다.“난... 그냥 언니한테 국수 한 그릇만 만들어달라고 했거든. 그런데 언니가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설명하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날 밀치는 느낌이...”말을 채 하진 않았지만 뜻은 너무나 명확했다. 뒤에 심해린밖에 없었으니 심해린이 그녀를 밀쳤다는 뜻이었다.고상윤의 시선이 심해린의 얼굴로 향한 순간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서아 말이 사실이야?”그의 질문에 심해린은 설명하기조차 귀찮았다.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해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었다.심해린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고상윤은 그 침묵을 인정으로 받아들였다.마음속에서부터 불길이 솟구쳐 올라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심해린이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악독하기까지 하다고 느꼈다.“사과해.”고상윤이 이를 악물고 세 글자를 뱉어냈다. 하지만 심해린은 움직이지도,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았다.“서아한테 사과하라는 말 안 들려?”분노를 표출하다 보니 목소리도 높아졌다. 인내심이 바닥난 고상윤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짝.날카로운 따귀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심해린의 얼굴이 옆으로 젖혀졌고 하얀 볼 위로 다섯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귀에서 윙 하는 이명이 울렸고 너무나 아팠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상윤을 쳐다봤다.“저 여자 말이면 곧이곧대로 믿는 거예요? 그럴 거면 눈은 대체 왜 달고 다녀요?”고상윤도 정말로 그녀에게 손을 댈 줄은 몰랐다. 마음속에 약간의 죄책감이 피어올랐으나 심해린의 한마디에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사람을 밀어놓고 뭐가 이렇게 당당해? 빨리 사과해.”그는 마음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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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심해린이 출근하려고 집을 나섰다. 그 소위 ‘일’이라는 것이 고상윤이 죄책감 때문에 마련해준 한가한 자리라는 생각이 들자 가기 싫어졌다.택시를 잡을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가 차를 타고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 주소를 얘기했다. 오늘은 할머니 옆에 있다가 진씨 가문의 디자이너 공모전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뽑히면 참 좋을 텐데.그러다가 디자인 일을 몇 년이나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본가에서 온 전화였다.심해린은 크게 심호흡하고 전화를 받았다.“오늘 오랜만에 상윤이랑 같이 본가 좀 들러.”전화 너머로 최명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습니다.”심해린이 대답한 후 최명희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녀가 휴대폰을 꽉 쥐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심해린은 알고 있었다. 해명 영상이 나간 후 고신 그룹의 주가가 불안정해졌다. 며칠 전에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 오늘은 혼내려고 전화한 게 분명했다.바로 고상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는 항상 고상윤과 같이 가지 않고 혼자 가서 최명희에게 한 소리를 듣곤 했다.연결음이 오랫동안 울리고서야 고상윤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왜? 오늘 회사에도 안 나왔더라? 서아가 여기 친척이 없어서 우리가 많이 챙겨줘야 한다고 했잖아.”“할머니께서 오늘 본가에 들르래요.”심해린은 그와 쓸데없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간단하게 말했다.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이내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알았어. 아마 주가 폭락 때문에 부르셨겠지.”고상윤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먼저 가 있어. 회사 일 처리하고 점심때쯤에 갈게.”‘회사 일?’심해린이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명서아 일이나 처리하겠지.’하지만 굳이 까발리거나 따져 물을 마음은 없었다.“네.”그녀는 짧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택시 기사에게 병원이 아닌 고씨 가문 본가로 가 달라고 했다.유리창에 기대 빠르게 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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