บททั้งหมดของ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บทที่ 1 - บทที่ 10

30

제1화

“피고인 심건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판사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심해린은 순간 머리가 윙 해져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무기징역이라니... 말도 안 돼. 건우는 내가 어릴 때부터 봐온 애야. 그런 애가 사람을 죽일 리가 없어.’재판이 시작되기 전 고상윤이 했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심해린,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고상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서아 외국에서 법을 전공하고 돌아왔어. 이번 건이 귀국 후의 첫 사건이라 승소하면 서아의 커리어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네 동생 사건을 서아한테 맡겨. 아무 문제 없을 거야.”동생의 목숨이 달린 일을 명서아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던 심해린은 바로 반대했다.“상윤 씨, 이건 내 동생의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명서아 씨의 출세를 위한 발판이 아니라고요.”하지만 고상윤은 심해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의 눈빛에 노골적인 협박까지 담겨 있었다.“네 동생이니까 서아한테 부탁한 거야. 넌 그냥 나만 믿으면 돼.”결국 바보처럼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명서아는 재판이 시작됐을 때 형식적인 변론을 몇 마디 한 것 외에 나중에는 제대로 된 변론을 거의 하지 않았다.최태식 측 변호인이 증거를 들이밀 때도 조목조목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의 증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기색까지 보였다.심지어 최태식의 고발에도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은 채 심건우가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하긴. 명서아의 동생이 아니니까 저렇게 무심한 거겠지.심해린이 비틀거리면서 법정을 나왔다.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그녀의 시선이 앞에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닿았다. 명서아가 고상윤에게 기댄 채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오빠, 미안해. 난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상대측의 증거가 너무 완벽해서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었어. 건우 씨 어쩌면 정말로...”“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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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심해린이 휴대폰을 꺼낸 그때 화면이 켜지면서 고상윤의 메시지가 떴다.[서아 귀국 후 첫 사건인데 너희 남매 때문에 다 망쳤어. 지금 서아의 실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으니까 사과 영상 하나 찍어서 올려. 그럼 이 일에 대해선 더는 따지지 않을게.]눈앞에 없는데도 고상윤의 얼음 같은 눈빛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메시지를 빤히 쳐다보던 심해린은 온몸이 다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망쳤다고? 하나뿐인 내 동생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 상윤 씨의 눈에는 명서아의 커리어에 흠집을 낸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는 거야? 게다가 명서아한테 사과까지 하라고?’가슴이 꽉 막힌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답장을 보낼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아 망설임 없이 삭제 버튼을 눌렀다.문득 할머니가 떠올랐다.심건우에게 일이 터진 후 할머니에게는 줄곧 비밀로 해왔다. 심건우가 멀리 지방으로 연수를 가서 몇 달 뒤에나 돌아올 거라고 했다.할머니의 연세가 많아 심장이 좋지 않았기에 작은 충격도 버티기 힘들어했다.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겨선 절대 안 되었다.할머니 생각에 심해린은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기사님, 청하구로 가주세요.”청하구가 오래된 동네라 가로등도 별로 밝지 않았다. 심해린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낡은 아파트 단지로 뛰어갔다.계단을 두 칸씩 뛰면서 3층까지 올라갔다. 현관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내 꽂아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잠근 것이었다.할머니가 집에 있다는 생각에 심해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쇠를 다시 집어넣고 문을 두드렸다.“할머니, 저 왔어요.”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계속 문을 두드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할머니? 저예요, 해린이.”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할머니의 귀가 조금 어둡긴 했지만 이렇게 세게 두드리는데도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심해린이 휴대폰을 꺼내 할머니의 번호를 눌렀다.“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아...”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번호를 눌렀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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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심해린은 다시 청하구로 돌아가 거리를 찾아 헤맸다.한참이 지난 후 이성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거리 CCTV가 전부 고장 나서 할머님의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이성록도 고상윤처럼 말투가 냉랭했다. 밤중에 할머니를 찾아달라고 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심해린은 다시 한번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귓가에 맴도는 안내음에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어느덧 동이 트기 시작했다.경찰에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에 심해린은 택시를 잡고 경찰서로 향했다. 할머니의 인상착의를 설명하자마자 경찰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법원 앞에 노인 한 분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혹시 찾으시는 할머니가 아닐까요?”심해린은 심장이 철렁했다. 할머니가 심건우의 일을 알게 된 후 집을 나갔다고 했다. 심건우의 판결이 어제 내려졌으니 그 사람이 바로 할머니일 가능성이 컸다.경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법원 앞에 도착했다.할머니가 차가운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사이로 상처가 선명하게 파여 있었고 흘러내린 피가 검붉게 굳어버렸다.심해린은 비틀거리며 할머니에게 다가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할머니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과 흙먼지를 본 순간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구급차! 빨리 구급차 불러주세요!”그녀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누르려 하자 상황을 파악한 경찰이 병원으로 이송하겠다고 했다. 심해린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경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해경 병원 응급실 앞.심해린의 옷에 할머니의 피가 묻어 있었다. 쉴 새도 없이 바로 병원비를 내러 갔다.그 시각 복도 끝의 VIP 병실, 명서아가 거울을 보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툴툴거렸다.“선생님,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가슴이 답답해요.”그녀는 회진 중인 의사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며칠 더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보고 싶어요. 상윤 오빠도 후유증이 남을까 봐 걱정하고 있거든요.”의사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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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고상윤은 심해린이 그러겠다고 하자마자 이성록더러 자료를 가져오라고 했다.심해린이 할머니의 병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성록이 프린트한 ‘해명 원고’를 들고 급히 다가왔다.“심해린 씨, 이제 시작해도 됩니다. 대표님께서 이 원고 그대로 읽으면 된다고 하셨어요.”심해린이 원고를 내려다봤다. 심건우가 범인이고 명서아는 그저 속아서 변호를 맡았을 뿐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이건...”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망설이는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지금은 할머니의 행방이 더 중요했기에 그대로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심해린은 속으로 할머니만 무사히 하다면 반드시 증거를 찾아 심건우의 누명을 벗기겠다고 마음먹었다.“심해린 씨 할머니가 입원하실 병실은 이미 다 준비했어요. 해경시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료진이 대기 중입니다.”이성록이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이건 거래였다. 할머니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거래 말이다.심해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상윤은 더 이상 가면조차 쓰지 않았다. 명서아가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라면 그때 왜 심해린과 결혼했을까?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저의 동생 심건우의 사건에 관해 많은 오해가 있어서 이렇게 해명을 드립니다. 명서아 변호사는 법정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제가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동생을 충분히 알지 못해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이성록이 찍은 영상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께 전달할게요. 할머니 곧 이쪽으로 이송될 겁니다.”할 말을 마친 이성록은 심해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렸다.비서가 나간 뒤 병실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갑자기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전해졌고 심건우에 대한 죄책감이 그녀를 덮쳤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은행에서 온 메시지였다.해경 병원의 십 년 치 병원비를 너끈히 지불할 수 있는 거액이 그녀의 계좌로 입금되었다.이게 바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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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심해린은 병원으로 돌아와 밤새 할머니를 돌봤다. 이튿날 아침 휴대폰 알림음에 잠에서 깼다.휴대폰을 들여다보자마자 실시간 검색어가 눈에 들어왔다.[고신 그룹 사모님, 명서아 위해 해명.]클릭해 보니 영상이 최상단에 고정되어 있었고 댓글 창이 온갖 비난으로 도배되어 있었다.[연기 진짜 잘하네. 이런 사람한테 오스카상 안 주면 누구한테 주겠어? 동생이 감옥 들어가자마자 원수 대신 해명하다니. 대체 돈을 얼마나 받은 거야?][윗분 생각이 짧으시네요. 돈은 무슨. 저 여자는 고씨 가문 사모님이에요. 원하는 건 지위라고요. 밥줄 지키려면 뭐든지 팔아먹을 수 있죠.][보기만 해도 역겨워. 부모라도 죽은 것처럼 슬픈 척하면 사람들이 동정할 줄 아나? 내가 보기에 동생이 감옥 간 것도 다 인과응보야. 저런 누나를 둔 놈이 제대로 된 놈일 리가 있겠어?][우리 서아가 너무 안쓰러워. 저런 독한 여자한테 물어뜯기고도 용서까지 하다니. 고 대표님 눈이 삐어도 정말 단단히 삐었어.]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심해린은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할머니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동생의 누명도 벗겨주지 못했기에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뉴스 창을 닫자 이번엔 경제 앱의 푸시 알림이 떴다. 제목이 조금 전의 것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고신 그룹 안주인의 부정적 이슈 여파로 주가 7% 폭락. 시가총액 2조 원 증발.]‘내 몸값이 이렇게 비쌌어?’심해린은 더는 휴대폰을 보지 않으려고 화면을 꺼버렸다.바로 그때 급박한 벨 소리가 울렸다. 고상윤의 할머니 최명희인 걸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안부를 묻기도 전에 욕설이 쏟아졌다.“이 재수 없는 년아!”휴대폰 너머 최명희의 날카로운 말들이 끝없이 이어졌다.“무슨 염치로 아직도 우리 집안에 발을 붙이고 있어?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몰라서 그래? 너 때문에 우리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주가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심해린은 아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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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2층 옆에 있는 창고 방에서 자. 서아 몸이 안 좋아서 의사 선생님이 채광 좋은 방을 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 안방을 쓰라고 했어.”뒤에서 고상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단을 오르던 심해린이 발걸음을 멈췄다. 명서아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또 잘 챙겨주면서 심해린에게는 한 번도 이렇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3년 내내 말이다.따지고 싶지도 않았던 심해린은 그저 알겠다고 짧게 대답한 뒤 창고 방으로 향했다.먼지투성이인 방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장롱 속에서 낡은 이불을 꺼내 자리에 누웠다.창밖으로 비쳐드는 희미한 달빛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결혼 후 고상윤을 위해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디자인 일을 그만두고 기꺼이 앞치마를 두른 채 고씨 가문의 며느리가 해야 하는 일을 배웠다.이혼이라는 단어가 한번 자리 잡자 덩굴처럼 빠르게 자라나 심장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이제 고상윤이 심해린과 결혼한 이유가 그저 명서아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걸, 그녀는 그저 대체품에 불과하다는 걸 모두가 알아버렸다.하지만 이혼할 방법이 있을까?고씨 가문이 용군시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고상윤은 통제 욕구가 무척이나 강한 남자였다.그는 심해린을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만 ‘고씨 가문 안주인’이 먼저 이혼하겠다고 하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변호사를 찾아가 봐도 로펌 사무실 문턱을 넘자마자 고상윤에게서 바로 연락이 올 게 뻔했다.심해린은 몸을 뒤척이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러다 기억 저편에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고혜연이었다.고씨 가문 방계의 혼외자이자 심해린의 절친이었다. 고혜연이 대학교에서 법을 전공했고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심씨 가문이 몰락했을 때 고혜연은 해외 유학 중이었다. 귀국 후 몇 번이나 연락을 취해왔지만 그땐 이미 고상윤과 결혼한 뒤였다.고혜연이 고씨 가문에서 편히 지내지 못한다는 걸 심해린은 알고 있었기에 유일한 친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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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전화기 너머의 고혜연이 단호하고 깔끔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작성해 둘게. 내일 점심 12시에 고신 그룹 옆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서류 전해줄게.”“다른 데서 만나면 안 될까?”심해린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회사 근처라 고상윤의 눈에 띌 수 있었다.“그럼 어디서 만날까?”고혜연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시내 중심가에 있는 만남 카페 어때?”심해린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고혜연은 할 말이 더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녀가 심해린이 걱정돼서 그러는 걸 알았지만 이미 친구를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심해린은 너무나 미안했다. 나중에 그녀가 떠난 뒤 고혜연이 곤란해질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잘 준비를 하겠다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창고 방의 침대가 딱딱해서 등이 배겼다. 이리저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고 등뼈가 닿는 곳마다 통증이 느껴졌다.문득 신혼 때가 떠올랐다. 고상윤이 집의 인테리어를 심해린에게 맡겼다. 그가 퇴근 후 편히 쉴 수 있도록 애교까지 부려 직접 외국으로 가서 척추 구조에 맞게 고가의 매트리스를 주문 제작했었다.이젠 명서아가 돌아왔기에 안방조차 양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심해린은 자신을 비웃으면서 씁쓸함을 삼켰다. 사실 결혼 후 고상윤은 그 침대에서 잔 적이 몇 번 없었다.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동틀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다.요란한 알람 소리에 심해린이 눈을 번쩍 떴다. 순간 여기가 어딘지 멍해졌다가 벽 구석에 쌓인 잡동사니들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오늘은 고신 그룹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어제 고상윤과 약속한 일이었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를 자극해선 안 되었다.심해린은 서둘러 일어났다. 씻다가 거울 속에 비친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간단히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바르니 그나마 생기가 좀 도는 듯했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갓 구운 빵과 커피 향이 감돌았다.고상윤과 명서아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맞춤 셔츠 소매를 걷어붙여 튼튼한 팔뚝을 드러낸 채 공용 젓가락으로 계란 후라이를 집어 명서아의 접시에 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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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모든 절차를 마친 심해린은 대표 사무실 옆에 있는 작은 사무실로 안내받았다.책상 하나, 의자 하나, 그리고 컴퓨터 한 대가 전부인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한 공간이었다.심해린의 명목상 직함은 대표 비서였다. 하지만 그녀가 낙하산으로 입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심해린이 컴퓨터를 켜자 고신 그룹의 통일된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이것저것 확인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컴퓨터에 깔린 지뢰 찾기 게임을 벌써 세 번이나 끝낸 그녀는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밖으로 나가려 했다.바로 그때 사무실 밖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상윤이 돌아왔음을 알아챈 심해린은 업무를 배정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임원들에게 둘러싸인 고상윤의 훤칠한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대로 가장 안쪽에 있는 대표 사무실로 직행했다.고상윤의 사무실 문이 닫힌 순간 심해린도 발걸음을 멈췄다.심씨 가문이 망하긴 했지만 심해린은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고상윤과 결혼하기 전 그녀 역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명문대를 졸업하고 디자인 학과에서 가장 촉망받던 인재였다.하지만 고상윤은 단 한 번도 인정해준 적이 없었다.심해린은 심호흡한 뒤 굳게 닫힌 문을 향해 걸어가 노크했다.“들어와.”안에서 고상윤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고상윤이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심해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이런 정적인 상황에서도 그의 압도적인 기세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대표님.”심해린이 덤덤한 목소리로 부르자 고상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인 걸 본 순간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무슨 일이야?”“저한테 맡길 만한 업무가 있는지 여쭤보려고요.”심해린이 고상윤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계속 앉아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고상윤의 시선이 2초간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눈빛에 물건을 검수하는 듯한 무미건조함밖에 없었다.‘네가 나랑 어울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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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가는 김에 내 것도 한 잔 부탁해요.”웨이브 머리 여직원이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아이스 아메리카노, 시럽 빼고. 고마워요.”“나도 한 잔 부탁해요. 라떼, 우유 많이.”“난 카푸치노요.”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심해린을 심부름꾼 취급하면서 제각각 주문을 쏟아냈다. 낙하산으로 들어온 신입이 그들 같은 고참들을 거역하지 못할 거라 확신한 모양이었다.심해린은 블랙카드를 꽉 움켜쥐고는 눈앞에서 비아냥거리는 얼굴들을 차갑게 훑었다.“한 잔 사나 여러 잔 사나 다 똑같은데 좀 사 오지 그래요?”웨이브 머리 여직원의 말에 심해린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마시고 싶으면 직접 가서 사세요. 다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요?”그녀의 얼굴에 웃음기가 확 사라졌다.“뭐라고요? 심해린 씨, 좋게좋게 말할 때 좀 듣지 그래요? 우리가 심부름시키는 것도 고맙게 생각해야죠.”심해린이 맞받아치려던 찰나 복도 끝에서 낯익은 사람이 걸어왔다. 바로 임서준이었다.그가 서류를 보면서 그들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심해린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죄송해요. 대표님의 커피를 사러 가야 하는데 늦어질까 봐 그랬던 거예요.”심해린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고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여직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때 옆에 서 있던 배짱 좋은 남자직원 한 명이 심해린의 가녀린 모습에 흑심이 동했는지 웃으며 다가왔다.“아이고, 우리 신입 비서님을 괴롭히면 어떡해요? 해린 씨, 커피 심부름 같은 작은 일 정도는 내가 도와줄까요?”그러고는 손을 슬그머니 뻗더니 심해린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콜록.”불쾌해진 심해린이 얼굴을 찌푸린 채 피하려던 찰나 적당한 높낮이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임서준이 어느새 그들 뒤에 서서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근무 시간에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한가한가 봐요?”직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임서준을 본 그들은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기세가 눈에 띄게 꺾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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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점심 12시, 고혜연과 약속을 잡은 심해린이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갔다.고상윤이 사무실의 불투명 유리문을 열고 나온 그때 누군가가 바람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곧게 뻗은 그녀의 뒷모습뿐이었다.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지는 심해린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마음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저렇게 급하게 어딜 가는 거지?’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지워버렸다.‘심해린이 어딜 가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할머니 보러 병원에 가는 거겠지.’고상윤이 미간을 찌푸리려던 찰나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서아’라는 두 글자를 보자마자 밀려왔던 짜증이 눈 녹듯 사라졌다.통화 버튼을 누르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전화기 너머로 명서아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나... 저혈당이 온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고상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어디야? 가만히 있어. 금방 갈게.”“회사 아래층 카페에 있어. 여기서 기다릴게...”“기다려.”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조금 전 심해린이 급하게 뛰어나가던 모습은 이미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상윤이 쏜살같이 카페에 도착했다. 문을 열었을 때 명서아가 창가에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티라미수를 조금씩 떠먹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 보이긴 했지만 눈빛은 말똥말똥했고 컨디션도 괜찮아 보였다.그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저혈당은 좀 괜찮아졌어?”고상윤을 보자마자 명서아의 눈이 반짝이더니 포크를 내려놓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말투만 들어도 그를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 수 있었다.“왔어? 동료가 준 디저트를 좀 먹었더니 괜찮아졌어.”고상윤이 얼굴을 찌푸린 채 명서아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체온이 정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안 되겠어. 병원 가자.”“괜찮아. 이제 다 나았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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