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By:  김빠진 콜라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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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변호사 명서아는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고상윤에게 심해린 남동생의 변호를 맡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결과는 패소였고 심건우는 결국 옥살이를 하게 된다. 명서아는 여론의 거센 비난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보고 심해린더러 명서아에게 사과하라는 남편 고상윤. 설상가상으로 심해린의 할머니마저 심건우의 수감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명서아를 향한 고상윤의 노골적인 편애를 보며 심해린은 마침내 깨닫는다. 그녀는 그저 대체품에 불과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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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피고인 심건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판사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심해린은 순간 머리가 윙 해져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무기징역이라니... 말도 안 돼. 건우는 내가 어릴 때부터 봐온 애야. 그런 애가 사람을 죽일 리가 없어.’

재판이 시작되기 전 고상윤이 했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

“심해린,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고상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아 외국에서 법을 전공하고 돌아왔어. 이번 건이 귀국 후의 첫 사건이라 승소하면 서아의 커리어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네 동생 사건을 서아한테 맡겨.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동생의 목숨이 달린 일을 명서아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던 심해린은 바로 반대했다.

“상윤 씨, 이건 내 동생의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명서아 씨의 출세를 위한 발판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고상윤은 심해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의 눈빛에 노골적인 협박까지 담겨 있었다.

“네 동생이니까 서아한테 부탁한 거야. 넌 그냥 나만 믿으면 돼.”

결국 바보처럼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명서아는 재판이 시작됐을 때 형식적인 변론을 몇 마디 한 것 외에 나중에는 제대로 된 변론을 거의 하지 않았다.

최태식 측 변호인이 증거를 들이밀 때도 조목조목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의 증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심지어 최태식의 고발에도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은 채 심건우가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긴. 명서아의 동생이 아니니까 저렇게 무심한 거겠지.

심해린이 비틀거리면서 법정을 나왔다.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앞에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닿았다. 명서아가 고상윤에게 기댄 채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오빠, 미안해. 난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상대측의 증거가 너무 완벽해서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었어. 건우 씨 어쩌면 정말로...”

“됐어. 네 잘못이 아니야.”

고상윤의 목소리에 심해린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재킷을 벗어 명서아의 어깨에 정성스레 걸쳐주었다.

“네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명서아는 흐느끼다 말고 심해린을 곁눈질하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해린 씨, 날 너무 원망하지 말아요. 난 정말...”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심해린이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심해린이 다가간 찰나 고상윤은 본능적으로 명서아를 뒤로 감쌌다. 아주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동작이었다.

고상윤이 명서아를 감싸는 모습을 본 순간 심해린의 두 눈에 실망감이 가득해졌다.

그가 잡은 명서아의 손을 보면서 문득 고상윤이 이젠 그녀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동생을 생각하면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심해린이 명서아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왜 그랬어요?”

심해린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최태식의 진술에 의문점이 그렇게 많았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대체 누구의 변호사예요?”

명서아는 고상윤의 뒤에서 붉게 충혈된 눈만 빼꼼히 내민 채 세상에서 가장 순진하고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심해린의 질문에 대답한 건 그녀가 아니라 고상윤이었다.

“그만해, 심해린. 사실이 눈앞에 놓여있는데 대체 언제까지 억지를 부릴 셈이야?”

“사실?”

심해린이 실소를 터뜨렸다.

“무슨 사실? 내 동생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아르바이트하러 간 애가 사람을 죽였다는 게 말이 돼요?”

그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최태식이 어떤 놈인지 몰라서 그래요? 사람 목숨 우습게 아는 놈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예전에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놈 말만 믿을 수 있어요?”

“이봐요. 말조심해요.”

그때 옆에서 경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태식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와 심해린의 앞에 멈춰 서더니 악의적인 웃음을 흘렸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요? 그건 다 근거 없는 루머예요. 증거도 없이 함부로 지껄이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수가 있어요.”

심해린을 내려다보는 최태식의 두 눈에 경멸과 도발이 가득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고상윤의 뒤에서 고개를 내민 명서아에게 향했다. 그 눈빛에 서로만 아는 의기양양함이 서려 있었다.

최태식은 재미있는 구경을 마치고 여유롭게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고상윤 대표님 저기 있어요!”

“명서아 변호사님도 있어요.”

갑자기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그들을 에워쌌다.

“변호사님, 이번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외파 출신 변호사로서 첫 사건부터 패소했는데 심경이 어떠신가요?”

“재판 내내 제대로 변론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대표님, 왜 명서아 변호사님에게 이 사건을 맡기신 건가요?”

날 선 질문들이 쏟아지자 명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고상윤의 표정도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명서아를 품에 안고 몸으로 카메라를 막은 다음 인파를 헤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의 차로 걸어갔다.

옆에 있는 심해린에게는 시종일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기자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옴짝달싹 못 하는 심해린을 내팽개치고 가버렸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심해린은 마음속에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고상윤을 놓친 기자들은 즉시 총구를 심해린에게로 돌렸다. 순식간에 그녀를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혹시 피고인 심건우의 가족이십니까?”

“이번 판결 어떻게 보십니까?”

“명서아 변호사님이 변호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눈썰미 좋은 한 기자가 심해린을 알아보고는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요. 혹시... 고신 그룹의 사모님 심해린 씨인가요?”

그 한마디에 현장이 발칵 뒤집혔고 카메라가 일제히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대박. 진짜 사모님이시네요.”

“범인이 친동생이었어요? 재벌가의 숨겨진 가정사군요.”

심해린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도 가끔 들려왔다.

“방금 고 대표님이 감싸고 돌던 그 여자가 바로 말로만 듣던 명서아 씨죠? 명서아 씨가 고 대표님이 3년을 기다린 첫사랑이래요...”

“어쩐지. 아까 보니까 사모님이랑 명서아 씨 눈매가 꽤 비슷하더라고요.”

“그런 거였군요. 몇 년 전에 심씨 가문이 망했을 때 고 대표님이 왜 갑자기 들어보지도 못한 심씨 가문의 양녀랑 결혼했나 했더니 이제 보니까 대체품이었네요.”

대체품이라는 세 글자가 심해린의 복잡해진 머리에 박혔다.

망한 심씨 가문에 얹혀살던 양녀를, 하루에 일을 세 개나 하며 힘들게 살아가던 심해린을 높은 자리에 있는 고신 그룹의 대표가 왜 ‘마음에 들어 해서’ 결혼까지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때는 그게 구원인 줄 알았다. 시궁창 같던 심해린의 인생에 찾아온 한 줄기 빛이라 믿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처음부터 진심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그저 다른 여자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심해린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눈부신 플래시가 터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상윤이 매정하게 떠나간 쪽을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3년 동안 심해린이 조심 또 조심하던 시간들이, 마음을 쏟아부었던 시간들이 결국에는 혼자만의 착각 속에 빠진 1인극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명서아는 그녀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걸 보고는 휴대폰을 꺼내 낯선 번호로 메시지를 보낸 뒤 삭제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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