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의 루체빌. 햇살은 이미 지고 있었고,창밖의 공기에는 봄의 냄새와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긴장감이 함께 묻어 있었다.유리는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이현은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그들이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건 맞았지만, 서로의 존재가 그날만큼은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말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으로 서로를 가늠하는 시간.이현은 찻잔에 물을 붓고 유리 앞으로 내밀었다.“따뜻한 차, 마셔요. 비 오기 직전엔 머리가 무겁다 했잖아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받았다.그 동작엔 습관이 묻어 있었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은 채 잔을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이현 씨. 요즘 나한테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요?”그 질문은 마치 안개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던 모든 무언가를 조용히 꿰뚫는 말이었다.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그게요.”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리 씨가… 언제부턴가 나한테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그래서 더 다가가기가, 조금 무서웠던 것 같아요.”유리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맞아요. 저… 사실 요즘 혼자 생각이 많았어요.”“왜 말 안 했어요?”“그걸 말로 꺼내는 순간, 지금 우리가 힘들어질까 봐.”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순간, 유리는 오히려 웃었다.작고, 슬프고, 어딘가 후련한 웃음.“우리 참…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말 안 하고 넘기는 게 더 많았네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서로를 아낀다는 이유로 피한 것도 많았고요.”그 말에 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둘 사이에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거리도 있었지만,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사실을 서로 인정하고 있었다.침묵이 다시 내려앉은 거실.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온도의 침묵이었다.회피가 아닌 인정, 피로가 아닌 이해의 조용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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