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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제 그 이름은 잊어요

서울. 밤의 도시가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다.건물 사이를 흐르는 불빛, 도심의 소음, 차창에 비친 얼굴들.그 속에, 수진이 있었다.아니 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를 아는 사람은 모두 그녀를 ‘린자오밍’이라 불렀다.검은 재킷, 은색 이어폰, 낯선 얼굴. 지금의 그녀는 완벽한 타인처럼 보였다.버스 창가에 기대 앉은 그녀의 눈동자가 창 너머의 네온사인을 스쳤다.‘NIS 본청 남산 지점’.하얀 빛이 번쩍이며 지나갔다.그녀의 시선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거기서 모든 게 시작됐지.”그녀의 속삭임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고백 같았다.그녀는 도심 끝자락의 오래된 고시원을 찾았다.한때 흑거미 조직의 연락망으로 쓰이던 곳.복도엔 형광등이 깜빡였고, 곰팡이 냄새가 배어 있었다.방 안에는 낡은 컴퓨터 한 대와 휴대용 송신기가 놓여 있었다.그녀는 의자에 앉아 단말기를 켰다.화면에 암호문이 떴다.[SPIDR CODE 45-A]대상 추적 : 배신구위치 신호 : NIS / 남산 본청 3층 서버실접근 제한 : 내부 인증 필요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국정원 서버실이라….”그곳은 언니가 마지막으로 보고서를 전송했던 장소였다.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폭우가 쏟아지던 밤. 수민은 마지막 통화를 걸었었다.‘린, 나… 지금부터 그 사람을 믿기로 했어.’‘그 사람? 강혁 씨요?’‘응. 이번 작전이 끝나면 우리, 진짜 한국으로 가자.’그리고, 그 통화가 끝난 지 5분 후 그녀의 신호는 끊겼다.수진의 눈가가 젖었다.“언니, 그 사람도… 나처럼 믿었구나.”“그런데 왜,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어.”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이제, 내가 대신 끝내줄게.”그 시각, 국정원 남산 본청. 지하 작전실 안. 강혁이 서 있었다.수많은 모니터 속, 얼굴 인식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었다.“대상: 린자오밍.중국계 보이스피싱 조직 ‘SPIDR’ 전 총책. 현재 한국 내 잠입 추정.”요원이 보고했다.강혁은 화면을 바라봤다.“잠입 목적은?”“확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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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린자오밍의 그림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서울의 밤은 유리조각처럼 빛나면서도 차가웠다.건물의 창문마다 다른 인생의 불빛이 깜빡였고,그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거짓을 안고 살아갔다.그녀는 그 사이를 걸었다.수진 아니, 린자오밍.이제 그 이름은 더 이상 가면이 아니었다.그녀의 과거, 현재, 그리고 복수가 모두 그 이름에 묶여 있었다.“내 이름은, 나를 죽인 사람들의 입에서 불려야 해.”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낡은 창고 지하,조명이 꺼진 공간에 단 하나의 노트북 불빛이 켜져 있었다.화면 위로 수많은 암호와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코드를 입력했다.[파일 복구 중 – PROJECT SPIDR / LEVEL 7]데이터의 일부가 열리자 수많은 문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수민 작전 보고서’,‘캄보디아 내부침투 파일’,‘이중첩자 제거명령’.그녀의 눈이 번쩍였다.그녀는 하나씩 문서를 열었다.모니터 속엔 익숙한 이름들이 떠올랐다.배신구. 흑거미. 그리고, 강혁.그녀의 손끝이 멈췄다.‘강혁: 현장 요원 / SPIDR 진입 조력자.’‘작전 실패 원인 – 내부 누설 추정.’‘김수민 제거 승인: 배신구.’그녀는 숨을 삼켰다.“역시… 그랬어.”눈가가 흔들렸다.“혁 씨는… 몰랐던 거야.”“그 사람도, 나처럼 이용당했어.”그녀는 손끝으로 문서를 복제했다.그 안의 진실은 이제 그녀의 무기가 되었다.[복제 완료 – 비밀 파일: REDEMPTION]그녀는 USB를 뽑았다.“이제 판은 내가 쥐었어.”한편, 남산 국정원 본청.작전 회의실 안은 어둡고 냉랭했다.배신구는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화면에는‘린자오밍 / 국가위협등급 A / 실시간 추적 개시’라는 문장이 붉게 떠 있었다.“이름을 등록하지.”그의 목소리는 낮았다.“이제 이 여자는 국가의 적이다.”그의 옆에 선 부하가 물었다.“국장님, 그 여자는 결국 당신을 노리는 겁니다.”“그래서 더 필요하지.”“필요하다니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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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랑이 총구를 만날 때

남산 도심. 비가 내렸다.붉은 경광등이 깜빡이며 골목을 물들였다.사이렌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린자오밍, 손을 들어!”요원들의 외침이 어둠 속에서 퍼졌다.그녀는 숨을 고르며 달리고 있었다.비에 젖은 아스팔트가 미끄러웠다.신호등의 붉은 불빛이 번쩍일 때마다,그녀의 얼굴에도 피 같은 빛이 스쳤다.“…잡히면 끝이야.”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숨소리가 거칠었고,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쫓기던 중 유리 파편에 베인 자국이었다.그녀는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비닐 천막이 쳐진 노점 사이, 붉은 조명이 번졌다.그녀는 한 손으로 피를 닦으며 가슴 속 USB를 꺼냈다.“이 안에 모든 게 있어. 언니의 죽음, 배신구, 그리고 나.”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비가 천천히 얼굴을 타고 흘렀다.“린자오밍, 너는 언제부터 이런 괴물이 됐을까.”그때, 무전기 소리가 골목 끝에서 들려왔다.“대상, 7시 방향! 이동 중!”그녀의 눈빛이 번쩍였다.몸을 돌리자, 골목 입구에 서 있는 그림자 하나. 총구가 번쩍였다.“멈춰요.”그 목소리. 낯설지 않았다.그녀의 심장이 순간 멎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비 속에서, 강혁이 서 있었다.“…혁 씨.”“이제 그 이름 부르지 마요.”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은 단단했다.“김수진, 아니 린자오밍. 당신을 체포합니다.”그녀는 짧게 웃었다.“체포라니, 참 우습네요.”“내 임무예요.”“그래요. 당신은 늘 명령에 충실했죠.”“그때도 그랬어요. 수민이 죽던 날에도.”그의 눈빛이 흔들렸다.“그건 내 탓이 아니야.”“그래요. 하지만 내 언니는 그렇게 죽었죠.”“그날의 진실, 당신도 모르잖아요.”“그래서 지금 가는 거예요.”“어디로?”“진실로.”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그의 총구가 그녀를 겨눴다.“멈춰요!”“쏠 거예요?”“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아요.”“하지만, 난 이미 다쳤어요.”그녀는 가슴을 가리켰다.“여기요.”비가 점점 세졌다.그녀의 눈동자 속에 붉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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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흑거미의 상처

비가 그친 새벽.도시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도로 위의 빗물은 붉은 신호등을 반사하며 마치 피처럼 번져 있었다.남산 골목 한켠, 흑거미가 쓰러져 있었다.손목에서 피가 흘렀다.수진의 총알이 정확히 관통한 자리.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고르며 웃었다.“린자오밍… 결국 그 이름이 나를 쏘는구나.”그녀는 가방에서 낡은 폴라로이드를 꺼냈다.사진 속에는 어린 두 자매가 있었다.눈 내리는 거리에서, 서툴게 미소 짓던 두 아이.“照明…”그녀가 중얼거렸다.“빛을 비춘다는 이름이었지. 내가 붙여준, 마지막 이름.”그녀의 시선이 멀어졌다.15년 전, 연변의 겨울로 기억이 흘러갔다.눈보라가 몰아치던 그날,흑거미는 폐허가 된 골목을 걷고 있었다.그녀의 옷은 피에 젖어 있었다.방금 전, 거래가 실패했다.동료들이 하나둘 쓰러져갔다.그녀는 살아남았지만, 그 생존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그때였다.어린 두 자매가 버려진 인형 가게 앞에 앉아 있었다.작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너희, 이름이 뭐야.”“…수민이에요.”“저는… 수진.”그녀는 두 아이를 바라봤다.눈빛이 비슷했다.겁이 나면서도,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은 눈.그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코트를 벗어 두 아이에게 덮어주었다.“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름 하나론 부족해.”그녀는 두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새 이름을 줄게.”“너, 김수민. 너는 ‘빛’이야. 언젠가 누군가를 비출 거야.”“그리고 너, 김수진. 너는 ‘照明(자오밍)’이야.누군가의 어둠을 밝히거나, 스스로 어둠이 되겠지.”그녀는 웃었다.“둘 다, 내가 잃어버린 이름들이야.”흑거미는 두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아지트로 갔다.그곳은 오래된 공장 한가운데 있었다.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고, 그녀는 아이들에게 말했다.“이제부터 여기가 너희 집이야.”그날 밤, 그녀는 아이들을 재워두고 혼자 담배를 피웠다.불빛이 깜빡이며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이제 다시는 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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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낡은 영상 속의 안부

바람이 잦아든 땅끝의 바다. 그날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파도는 잔잔했고, 안개는 바다 위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그 안에서 강혁은 혼자였다.그의 손에는 USB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수진이 던져준, 진실의 조각.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그는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도망칠 수 없었다.“이걸 여는 순간, 난 다시 돌아갈 수 없겠지.”그는 중얼거리며 노트북을 켰다.USB를 꽂자, 짧은 ‘삑’ 소리와 함께 화면에 파일 하나가 나타났다.[RECORD_2008_CAMBODIA_FINAL.mp4]그는 마우스를 올렸다. 손끝이 떨렸다.재생 버튼을 눌렀다.낡은 영상이 켜졌다.화면은 흔들리고, 노이즈가 섞여 있었다.캄보디아의 밤이었다.비슷한 습도, 똑같은 공기.그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혁 씨, 이걸 보고 있다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죠.”강혁은 숨을 멈췄다.그 목소리, 잊을 수 없던 그 음색. 수민이었다.“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지키려 했다는 걸.”“하지만, 우리가 속한 세상은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죠.”영상 속 수민은 작은 불빛 아래서 앉아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국정원 신분증이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내려놓으며 웃었다.“이거, 내 마지막 신분이에요.”“이제 나를 기억해줄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겠죠.”“수진이… 내 동생이에요.”“그 애가 너무 강해서 오히려 더 아플 거예요.”“부디, 그 애를 미워하지 말아요.”강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만약 내가 죽으면, 그건 내 선택이에요.”“누굴 탓하지 말아요.”“난 당신 덕분에 잠깐이나마 사람답게 살았어요.”“그리고…”“내가 죽더라도, 수진이를 지켜줘요.”그 순간, 화면이 꺼졌다.영상이 끝나 있었다.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렸다.강혁은 노트북을 덮지 못했다.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바닷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수민아…”그의 목소리가 떨렸다.“너는 끝까지 그렇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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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여진의 결심

창문 밖의 새벽이 희미했다.서울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비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서여진은 혼자였다.국정원 지하 관제실 한켠,불이 꺼진 모니터 앞에서 그녀는 손끝으로 키보드를 천천히 눌렀다.화면에 ‘LIN ZHAOMING – LIVE TRACK’ 이라는 문장이 깜빡였다.붉은 점 하나가 남산 부근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녀는 숨을 삼켰다.“또, 그 사람을 쫓는 거네.”그녀의 목소리는 떨려 있었다.“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책상 위에는 오래된 커피컵 하나. 식은 커피는 쓴 냄새를 냈다.문이 열렸다. 배신구가 들어왔다.회색 정장을 입은 그의 얼굴에는 피로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아직도 깨어 있나.”그녀가 일어섰다.“명령 때문에요.”“명령이라…”그는 비웃듯 웃었다.“넌 아직도 그런 말에 매여 있나?”“국장님.”“강혁은 네가 감시하고 있지?”“네.”“그가 수민의 영상을 봤어.”“그건 알고 있습니다.”“그럼 이제 그 남자는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야.”그녀의 눈이 흔들렸다.“…직접 제거하실 겁니까?”“누군가는 해야지.”그녀는 잠시 침묵했다.“제가 하겠습니다.”배신구는 눈썹을 올렸다.“이유는?”“제가 감시 중이었으니까요.”“아니.”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건 이유가 아니야. 넌 그 남자를 사랑했잖아.”그녀의 얼굴이 굳었다.“그건… 임무였습니다.”“그럼 지금도 임무로 그를 죽일 수 있나?”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웃으며 말했다.“넌 좋은 병기야.사랑도, 증오도 도구로 쓰는 법을 배웠으니까.”그가 떠난 뒤,여진은 혼자 남았다.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사랑도 도구…라니.”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럼 내 모든 감정은 뭐였던 거야.”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모니터에 강혁의 위치가 찍혀 있었다.붉은 점 하나가 해남, 바다 근처에서 깜빡이고 있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주머니에 권총 한 자루를 넣었다.“확인하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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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마지막 빛을 끄는 손

이른 새벽, 안개가 해남 앞바다를 덮었다.빛 한 줄기 없는 회색의 바다 위, 강혁은 낡은 어선을 몰고 있었다.GPS 화면에는 하나의 점이 찍혀 있었다.‘LIN ZHAOMING – SIGNAL ACTIVE.’그 점은 바다의 경계선, 어느 폐어장 근처에서 멈춰 있었다.“여진 씨가 왜 그걸 남겼을까.”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며칠 전, 그녀가 떠나기 전 남긴 쪽지 한 장이 있었다.[그 여자는 바다를 떠나지 못할 거예요.거기, 빛이 닿지 않는 곳. 당신만이 갈 수 있는 자리.]그녀의 글씨는 흔들려 있었고, 종이에는 눈물 자국처럼 얼룩이 번져 있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바람이 거칠게 불었다.바다의 냄새, 소금기, 그리고 어딘가에 남은 불안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그 시각, 바다 아래 깊은 수심 30미터.수진은 폐어장 안에 설치된 잠수용 베이스에 있었다.낡은 철문, 녹슨 계기판, 한때 불법 통신기지로 쓰이던 곳이었다.그녀는 흰 셔츠 소매를 걷으며 노트북을 켰다.화면에는 수많은 코드들이 흐르고 있었다.[ACCESS: NIS INTERNAL / TARGET: BAE SHIN GOO]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언니, 이제 거의 다 왔어요.”모니터 한쪽에 ‘수민의 작전 영상’ 일부가 재생됐다.언니의 웃음이 들렸다.“照明, 사람은 빛을 비추는 존재가 되어야 해.”그녀는 화면을 멈추며 속삭였다.“하지만 언니, 빛이 너무 강하면, 그 빛 아래에 그림자가 생기잖아요.”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그림자가 바로 나야.”그 순간, 베이스의 경보등이 깜빡였다.‘ALERT – 외부 침입 감지.’그녀는 급히 모니터를 닫고 총을 꺼냈다.바다 위에서 무언가 접근하고 있었다.엔진음이 점점 가까워졌다.그녀는 장비를 껐다. 숨을 죽였다.위쪽의 수면, 강혁의 배가 폐어장 구조물에 닿았다.그는 밧줄을 내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물속은 흐릿했고, 시야는 좋지 않았다.손전등 불빛이 철 구조물에 부딪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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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흑거미의 귀환

폐어장이 폭발한 그 다음 날,해남 앞바다는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다.그 아름다움은 잔혹할 만큼 고요했다.새벽의 빛이 수면 위를 미끄러질 때, 어선 한 척이 천천히 지나갔다.그 배 위에는 강혁이 있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바다의 소금기와 피로 갈라져 있었다.“수진…”그는 낮게 이름을 불렀다.목소리가 바람에 묻혀 사라졌다.그는 손에 쥔 펜던트를 바라봤다.부서진 유리 조각 사이로 두 자매의 미소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끝낼 수 있겠어.”그의 손끝이 떨렸다.“이건 끝이 아니야.”그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엔진이 천천히 울리며 바다를 갈랐다.그의 눈빛은 결의로 굳어 있었다.“린자오밍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 없지.”같은 시각, 서울 한강 남쪽, 버려진 창고. 그곳엔 다른 어둠이 있었다.낡은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고, 그 아래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흑거미.붕대로 감은 손을 들어 피 묻은 천을 떼어냈다.상처는 여전히 깊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생생했다.“린자오밍.”그녀는 그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그 아이가 결국 여기까지 왔네.”그녀는 오래된 라이터를 켰다.불빛이 반짝이며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그 얼굴엔 상처와 주름, 그리고 이상한 평온이 섞여 있었다.“照明.”그녀가 중얼거렸다.“빛은 어둠이 있어야 피어나는 법이지.”그녀는 천천히 서류뭉치를 꺼냈다.[PROJECT SPIDR – CORE MEMBER FILES]그 안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배신구, 김수민, 린자오밍, 그리고, 자신의 본명.‘윤혜란.’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오래된 기억이 밀려왔다.20년 전. 북한 국경지대, 그녀는 국정원 비선으로 일하고 있었다.이중첩자, 코드명 ‘흑거미’.정보망을 운영하며 한때 국가의 그림자를 통제했던 여인.그녀는 어린 딸을 하나 잃었다.작전 실패로. 그 아이는 불타는 트럭 속에서 사라졌고,그녀는 그날 이후로 ‘어머니’라는 이름을 버렸다.그녀는 울지 않았다.대신,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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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잘려 나간 과거의 흔적

밤과 새벽의 경계.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 어둠 속. 그녀의 눈이 떠졌다.숨이 막힐 듯한 정적 속,바닷물의 차가운 감촉이 피부를 덮었다.귀를 울리는 심장 소리. 그리고 희미한 산소음.“…살아 있네.”수진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눈을 뜬 곳은 낡은 잠수캡슐 내부였다.차가운 금속벽, 머리 위엔 산소 게이지가 깜빡거렸다.그녀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왼팔에는 자욱한 붕대, 손등에는 피와 기름이 뒤섞여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가느다란 체온이 느껴졌다.“강혁 씨는…”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했다.“…살아남았겠지.”그녀는 고개를 젖히며 기억을 더듬었다.폭발 직전, 그가 자신을 끌어안았다.그리고 파도 아래로, 모든 게 하얗게 번졌다.“그는… 날 버리지 않았어.”“그래서, 나도 끝낼 수가 없었어.”캡슐 안쪽 스크린에 잔상처럼 좌표가 떠 있었다.[0.032N / 126.554E][SIGNAL SOURCE – UNKNOWN]그녀는 화면을 응시했다.“누군가가 날 꺼냈군.”통신 장치의 불빛이 깜빡였다.[RECEIVED MESSAGE – NO ID]‘빛은 죽지 않았다. 지금부터 넌 유령이 되어라.’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흑거미.”하지만 곧 미묘한 이질감이 스쳤다.문장의 어투, 단어의 배열, 그건 흑거미가 쓰던 문체가 아니었다.“그럼, 누가…”그녀는 화면에 손을 얹었다.“누가 날 살린 거야.”이틀 뒤, 서울 남부 변두리의 폐병원 지하.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거울 앞에서 상처를 살폈다.붕대를 풀자, 피가 굳어 있었다.그러나 눈빛은 이미 다시 살아 있었다.테이블 위엔 노트북 한 대와 작은 송신기가 있었다.그녀는 USB를 꽂았다.배신구의 서버에서 빼낸 데이터였다.[ACCESS – GRANTED][PROJECT SPIDR: FINAL STAGE / TARGET FILES]화면 속에 떠오른 문서 목록.‘LIN ZHAOMING : STATUS – DECEASED’‘BAE SHIN G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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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남산의 망령

서울. 밤은 깊었다. 남산 꼭대기 안개 속,국정원 남부 분소 건물이 검은 실루엣으로 솟아 있었다.그 건물 안, 붉은 비상등이 깜빡이고 있었다.‘LEVEL 3 LOCKDOWN’문자 표시가 복도 벽마다 번쩍였다.강혁은 그 복도 안을 달리고 있었다.권총을 움켜쥔 손이 떨렸다.귀에는 경보음이 울려 퍼지고, 뒤에서는 요원들의 발소리가 쫓아왔다.“강혁 요원, 즉시 정지하라!”무전이 울렸다.“반복한다, 무단 침입 및 자료 탈취 혐의로 구속한다!”그는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내려갔다.붉은 경광등의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이게 뭐야, 갑자기…”그는 벽 쪽 모니터를 확인했다.[INTERNAL ALERT – HACK DETECTED / SOURCE: LEVEL UNKNOWN][TRACE RESULT – AGENT: KANG HYEOK]“누군가… 내 이름으로 해킹을 했어?”그 순간, 모니터 화면이 번쩍였다.그리고 낯익은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USER ID: LIN ZHAOMING]그의 눈이 커졌다.“설마…”무전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타깃 확인. 남산 분소 내 서버실.‘남산의 망령’ 신호와 동시에 움직임 포착.”‘남산의 망령’ 그건 한때 국정원 내부에서 돌던 도시전설 같은 코드였다.삭제된 요원, 사라진 작전,기록에 존재하지 않는 자가 다시 나타났을 때 붙는 이름.그는 잠시 멈춰 섰다.“남산의 망령… 그게 혹시…”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펜던트를 움켜쥐었다.“수진.”국정원 내부 지하 서버실. 차가운 공기와 전자음이 가득했다.모니터 수십 대가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그 중앙에, 검은 후드를 쓴 한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빠르게 흐르는 코드 사이로 프로그램이 침투하고 있었다.[SERVER OVERRIDE / ROOT ACCESS GRANTED][IDENTITY MASKING – ACTIVE]“시간이 얼마 없어.”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배신구가 완전히 시스템을 장악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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