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바람이 강하게 불었다.밤바다의 공기는 차가웠고, 공중엔 소금 냄새가 무겁게 깔려 있었다.달빛이 얇은 물결 위를 비추며 길게 흘렀다.수진은 '린꽃방’의 불을 끄고, 가게 문을 잠갔다.손끝이 식은 쇠자물쇠를 쥘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금속성의 기억이 울렸다.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오늘까지만… 이 거짓말.”하지만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강혁이었다.그의 얼굴엔 피로가 묻어 있었다.낚시용 모자엔 물방울이 떨어졌고, 눈빛은 전보다 훨씬 깊어져 있었다.“수진 씨, 할 말이 있어요.”“이 시간에요?”“지금 아니면… 늦을 것 같아서요.”그녀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바람이 뒤에서 밀어닥쳤고, 꽃잎 몇 장이 문틈으로 흘러들어왔다.강혁은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당신… 진짜 이름이 뭐예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며칠 전부터 계속 생각했어요. ‘린수진’이라는 이름이 이상하다고.”그는 목소리를 낮췄다.“누가 이름을 그렇게 지어요? 빛날 린(燐)이라니. 그건 사람 이름이 아니라…코드명이잖아요.”수진의 손끝이 서서히 굳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그걸 어디서 들었어요?”“국정원 내부 기록. 폐기된 파일 중 하나에서. 거기엔 린자오밍이라는 이름이 있었어요.연변 출신, 조직 소속. 사진은 흐릿했지만… 당신이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멈췄다.마치 온몸이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창밖의 파도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그럼… 그게 사실이면 어쩔 건데요?”“확인하려고 왔어요. 당신이 누군지.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맞는지.”“사랑한다고요?”그녀가 피식 웃었다.“당신은 날 믿지 않잖아요.”“믿어요.”그의 목소리가 떨렸다.“믿고 싶은 거죠.”“그래요. 믿고 싶어요. 하지만…”그녀의 눈이 젖었다.“내가 그 사람이 맞아요.”그 순간, 공기가 무너졌다. 강혁의 얼굴이 굳었다.그녀는 피할 수
아침 햇살이 얇은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수진은 물병을 내려놓고 화분을 돌보았다.밤새 피어난 장미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레 줄기를 만지며 속삭였다.“조금만 더 버텨. 햇살이 따뜻해지면, 다시 피겠지.”그 말은 꽃에게 한 말이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이기도 했다.테이블 위엔 하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누군가 새벽에 두고 간 듯, 표면엔 ‘린수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녀는 잠시 손을 멈췄다.봉투를 열자, 안에는 단 한 장의 사진.강혁이 낚시터에서 웃고 있는 사진,그리고 그 뒤쪽 - 멀리 서 있는 자신.그 사진의 구도는 누가 봐도 의도적이었다.누군가 그녀를 오래 지켜봤다는 뜻이었다.“서여진…”그녀의 입에서 이름이 흘러나왔다.바닷가로 나가자 바람이 강했다.모래가 흩날렸고, 파도가 거칠게 일었다.강혁은 낚싯대를 내려놓고 수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오늘은 일찍 나왔네요.”“잠이 안 와서요.”“그럴 줄 알았어요. 어젯밤에도 불빛이 늦게까지 켜져 있던데.”그녀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하지만 그의 시선이 자신을 오래 붙잡는 것을 느꼈다.그 눈빛엔 무언가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요.”“그럼 왜 그 눈이에요?”“요즘, 이상한 꿈을 꿔요.”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꿈?”“당신이… 다른 이름으로 날 부르더라고요.”“어떤 이름으로요?”“린자오밍.”그녀의 손끝이 굳었다.파도 소리가 멈춘 듯, 순간 공기가 정지했다.그녀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꿈이라잖아요.”“그런데,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바다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그 짠내 속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아득히 떠올랐다.‘거짓말을 오래 하면, 진심이 상해.’그날 오후, 여진은 국정원 내부망에서 오랜 기록을 검색하고 있었다.퇴직 처리된 계정으로는 접근이 어려웠지만,그녀는 여전히 비공식 경로를 알고 있었다.‘린자오밍 - 연변, 1994년생. 보
낮이 다 지나가고, 해가 바다 끝으로 내려앉았다.‘린꽃방’ 안엔 따뜻한 오렌지색 조명이 켜져 있었다.작은 라디오에서 피아노 소리가 잔잔히 흘렀다.수진은 꽃다발을 묶던 손을 잠시 멈추고,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창밖엔 강혁이 서 있었다.그의 옷자락은 젖어 있었고, 손엔 고등어 상자가 들려 있었다.“낚시는 오늘도 실패?”그녀가 미소 지었다.“아니요. 성공이에요. 잡은 게 없다는 건, 오늘은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니까.”그 말에 수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녀는 무심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런 철학적 어부가 다 있네요.”“누군가 말했죠. 사람은 죽이지 않아야 사랑할 수 있다고.”짧은 침묵이 흘렀다.그 침묵 속에서 서로의 호흡이 들렸다.그냥 평범한 대화처럼 들렸지만, 서로는 그 말의 밑바닥을 알고 있었다.그때, 문이 열렸다.문종이 가볍게 흔들렸다. 서여진이었다.짙은 베이지 코트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묶은 채 들어왔다.“아, 여기 계셨네요. 둘 다.”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어딘가 칼끝 같은 단단함이 숨어 있었다.강혁이 일어섰다.“이 근처 숙소 잡았어요?”“네. 바다가 잘 보여서요.”그녀는 자연스럽게 꽃집 안을 둘러봤다.라벤더, 백합, 장미. 그 향이 섞여 공기 속을 떠돌았다.“향이 좋네요. 특히 이건…”그녀가 라벤더를 향해 손을 뻗었다.“이건 좀 과하네요. 너무 진해요.”수진은 짧게 답했다.“원래 사랑의 향은 오래 남아요.”“그럼 증오도 남을까요?”“남죠. 다만 향이 아니라 상처로.”공기가 순간 얼었다.세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라디오의 피아노 소리만 작게 울렸다.여진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예전에 강혁 씨가 제게 말했어요. 꽃이란 건 다 거짓이라고.”그녀의 시선이 수진에게로 향했다.“보기엔 예쁘지만, 결국 시들죠.”“그럼 사랑도 거짓이에요?”수진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아니요. 사랑은 착각이에요. 착각이 사라질 때, 그게 진심이 되죠.”그녀의 눈빛이 강혁을 향했다.“강혁
밤은 차가웠다.비가 멎었지만, 공기엔 아직 젖은 냄새가 남아 있었다.서여진은 해남의 좁은 숙소 창문을 열었다.창밖엔 파도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심장박동처럼 느껴졌다.규칙적이고, 잔잔하고,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그 파도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쓰디쓴 맛이 입안에 번졌다.그 맛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책상 위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사진 속엔 웃고 있는 강혁의 얼굴,그리고 그 옆에서 그를 바라보던 자신.그때는 그의 눈이 자신만을 향하던 시절이었다.“강혁 씨, 당신은 아직도 그 여자를 꿈에 보나요?”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대답은 없었다. 있을 리도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일어났다.책상 서랍에서 작은 총기 케이스를 꺼냈다.안엔 오래된 권총이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닦았다.“이제 다시 쓰지 않으려 했는데.”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그 여자가 당신 곁에 다시 서 있다면…어쩌면 써야 할지도 모르겠네요.”총구를 바라보는 눈빛은 차가웠다.하지만 그 안엔 눈물 한 방울만큼의 연민이 있었다.다음 날 아침, ‘린꽃방’의 문이 열렸다.꽃 향기와 함께 밝은 빛이 쏟아졌다.여진은 그 문 앞에 서 있었다.오늘은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이전보다 깊고, 어딘가 절박했다.“또 오셨네요.”수진이 말했다.“이 가게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서요.”“향 때문이겠죠.”“향일까요, 아니면 사람일까요.”수진은 짧게 웃었다.“전 그냥 꽃을 파는 사람이에요.”“그렇지 않아요.”여진이 천천히 다가왔다.“당신은 향을 팔지만, 그 향은 사람을 흔들죠.”그녀는 라벤더 한 다발을 손에 들었다.“이건 마음을 안정시킨다던데요.”“그건 향이 아니라 기억이에요.”수진의 대답은 단호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한쪽은 진심으로, 다른 한쪽은 두려움으로.그때, 가게 문이 다시 열렸다.바람과 함께 강혁이 들어왔다.그
해남의 밤은 유난히 깊었다.낮 동안 내렸던 비가 그치고, 공기 속엔 바닷소금 냄새와 젖은 흙 향이 섞여 있었다.수진은 불 꺼진 꽃집 안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작은 전등 불빛 하나만 켜져 있었다.그 빛은 노랗게 흔들리며 책상 위 꽃잎들을 비췄다.꽃은 잠들지 않는다.그녀는 언젠가 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꽃은 잠들지 않아. 단지, 숨을 고를 뿐이야.’그녀는 라벤더 잎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손끝에 묻은 향이 오래 남았다.그 향 속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그때, 창문 밖에서 조용한 발자국 소리가 났다.누군가가 가게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그 발소리가 이상하게 익숙했다.그녀는 커튼을 살짝 젖혔다.가로등 불빛 아래,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얼굴은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 자세, 어깨의 각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아봤다.“서여진…”입안에서 그 이름이 굴러나왔다. 그녀는 숨을 죽였다.그 이름은 오랜 시간 금기처럼 묻혀 있던 단어였다.여진은 잠시 꽃집 간판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그 발소리가 바다 쪽으로 멀어졌다.수진은 커튼을 닫지 못했다.그녀의 손끝이 떨렸다.다음 날 아침.바다는 유난히 고요했다.파도는 잔잔했고,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강혁은 부두 근처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낡은 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었다.불은 붙이지 않았다.그는 그냥 그것을 입에 물고 있었다.“다시 피우는 거예요?”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수진이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렸다.햇빛이 머리카락 끝에서 반짝였다.“아니요. 그냥… 무게를 느껴보는 중이에요.”“무게요?”“이 냄새, 이 습관, 이 죄책감. 한때는 다 나한테 익숙했거든요.”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았다.“어제… 누가 왔어요.”“누구요?”“서여진.”그는 고개를 돌렸다.“확실해요?”“그녀 얼굴은 못 봤어요. 하지만, 그 느낌… 맞아요.”그의 얼굴이 굳어졌다.한동
봄비가 내렸다.이른 아침의 해남은 흐린 하늘 아래 잠들어 있었다.비는 굵지도, 약하지도 않았다.그저 오래된 기억처럼,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수진은 가게 앞 처마 밑에 서 있었다.꽃잎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라벤더, 장미, 수국, 튤립.그녀가 키워온 꽃들이 비를 맞으며 몸을 숙였다.그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우산을 접었다.손끝이 젖었다.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차갑지 않았다.‘라벤더의 계절이네.’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언니가 가장 좋아하던 향이었다.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고무장화를 신은 발소리. 낮고 느린 걸음. 수진은 고개를 돌렸다.“오늘 바다 나가요.”강혁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그는 커다란 우산을 들고 있었다.그 우산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녀의 신발 위에 닿았다.“비 오는데요.”“이런 날이 고기 잡기엔 좋아요.”“정말이에요?”“거짓말일 수도 있죠.”그녀는 피식 웃었다.그 웃음이 너무 짧아서, 사람이 아닌 바람이 웃은 것처럼 들렸다.두 사람은 함께 부두로 향했다.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엔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다.수진은 조심스레 그 위를 건넜다.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넘어질 뻔했어요.”“괜찮아요.”“습관이죠. 사람 구해주는.”“이젠 그냥 반사예요.”그녀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언니한테도… 그랬겠죠?”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빗속에서 고개를 숙였다.비가 머리카락 끝에서 흘렀다.그 물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눈물과 섞였다.배가 떠났다.바다는 잿빛이었다.파도는 잔잔했지만, 그 잔잔함 속에 묘한 긴장이 숨어 있었다.수진은 갑판에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손끝에 빗방울이 닿았다.그 물방울이 이내 피부에 스며들었다.“여긴 늘 비가 오네요.”그녀가 말했다.“이 바다는 비가 와야 예뻐요.”“왜요?”“맑은 날은 너무 솔직하거든요.”“사람도 그렇죠.”“솔직한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니까.”그녀는 그 말을 천천히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