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새벽 4시 15분. 비가 그쳤다.안개가 낮게 깔린 남산 기슭에,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걸었다.흑거미였다.그녀의 발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한 걸음마다 오래된 기억이 밟혔다.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길,밤새 켜져 있던 네온 간판들,그리고 폐허가 된 건물 하나.그녀는 그곳에 멈춰 섰다.낡은 철문 위에는 희미하게 벗겨진 글자가 있었다.[국가정보원 제3 비공식 관제실]그녀는 그 문을 손끝으로 쓸었다.“이곳이… 시작이었지.”20년 전. 그녀는 이 건물의 지하에서 ‘프로젝트 SPIDR’의 원형을 처음 봤다.그땐 아직 윤혜란이라는 이름을 쓰던 시절이었다.국정원 비선 요원, 그리고 누군가의 어머니.그러나 그녀는 그날, 불길 속에서 아이를 잃었다.그날의 냄새는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휘발유, 피, 그리고 종이 타는 냄새.그녀는 스스로를 탓했다.“국가가 내 아이를 삼켰다면, 나는 국가를 삼키겠다.”그렇게 그녀는 ‘흑거미’가 되었다.그리고 5년 후, 연변의 거리에서 떠는 두 자매를 발견했다.김수민, 김수진.그녀는 그 아이들을 품었다.“이 아이들이 나의 죄의 대가야.”그녀는 그 말만 되뇌며 두 아이를 거짓 속에서 길러냈다.현재. 흑거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내부는 이미 오래전에 폐쇄되어 있었다.벽에는 금이 가 있었고, 바닥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그러나 한쪽 벽에는 아직 전력이 살아 있는 모니터가 깜빡이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좁혔다.“이 빛은…”모니터 화면에 자동으로 글자가 떠올랐다.[ACCESS: L.Z.M][MESSAGE FOR: 윤혜란]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照明…”그녀는 숨을 죽였다.손끝으로 화면을 터치하자,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선생님.”그녀는 눈을 감았다.그 목소리는 분명 수진의 것이었다.“이 메시지를 듣고 있다면, 제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은 거예요.”“하지만… 제 복수는 선생님과 언니를 위한 게 아니었어요.”“그건 제 존재를 위한, 제 사랑을 위한 선택이었어요.”
최신 업데이트 : 2026-03-16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