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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꽃보다 진한 붉은색

밤하늘은 붉게 물들었다.해가 완전히 지기 전의 시간, 수진화방의 불빛이 유리창에 길게 번졌다.꽃잎 위로 비친 붉은 조명이 마치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수진은 장미를 손질하고 있었다.가위질 소리가 일정했다.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집중되어 있지 않았다.손끝에 미세한 상처가 났고, 피가 장미 잎사귀에 떨어졌다.그녀는 피가 묻은 꽃잎을 바라봤다.그 붉은색이 장미의 색과 구분되지 않았다.“언니…”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왜 사람은 피를 흘리면서도 아름다움을 말하려 할까.”그때, 문이 열렸다.문틈으로 비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강혁이었다.젖은 코트를 벗으며, 그는 낮게 말했다.“비가 미친 듯이 오네요.”“이런 날엔… 장미가 더 빨리 시들어요.”“왜요?”“습기 속에서 숨을 못 쉬거든요.”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칼날로 장미 줄기를 한 번 더 잘랐다.그 순간, 손끝에서 또 피가 났다.강혁이 급히 다가왔다.“괜찮아요?”그녀는 손을 감쌌다.“별거 아니에요.”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피가 그의 손가락에 묻었다.그녀의 심장이 미세하게 떨렸다.“피가…”“꽃보다 진하죠.”“…”그의 시선이 깊었다.“수진 씨.”“네?”“혹시, 2015년 11월… 기억나세요?”그녀의 손이 얼어붙었다.그는 조용히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그때, 캄보디아에 있었던 사람을 찾고 있어요.”“캄보디아요?”“네. 그 작전에서 죽은 사람의 동생이…아직 살아있을지도 몰라요.”그녀는 숨을 삼켰다.“그런 얘긴 왜 저한테 해요?”“그냥, 느낌이 있어서요.”“느낌이라…”그녀는 미소를 지었지만,그 미소 속엔 금이 가 있었다.“그 동생이… 만약 당신이라면?”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한 음절마다 무게가 있었다.“그럼… 당신은 절 어떻게 하시겠어요?”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잡겠어요?”“아니요.”“죽이겠어요?”“그럴 이유가 없어요.”“그럼… 사랑하겠어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둘 사이의 공기가 멈췄다.장미 향이 짙게 피어올랐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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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흔들리는 그림자

비는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하늘은 낮부터 검게 내려앉았고, 바다는 마치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강혁은 부두 위를 천천히 걸었다.전날 밤의 총성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물 위에는 탄피 하나가 떠 있었다.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탄피는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근처에 누가 있었던 거야.’그는 시선을 돌렸다.부두 끝, 철제 기둥 뒤에 검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누군가 거기서 잠시 머물렀던 듯. 그 자리에 떨어진 담배꽁초 하나.필터에는 진한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서여진.’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왜 여진이 여기 있었지…”바람이 불어와 코트를 흔들었다.그 순간, 파도 위에서 금속음이 또 한 번 울렸다.멀리서 철제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그는 천천히 총을 꺼냈다.“누구야?”대답이 없었다.파도만 일정하게 밀려왔다.하지만 그 속에는, 마치 ‘숨’ 같은 미묘한 리듬이 섞여 있었다.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흑거미.꽃집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칠었다.수진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불은 꺼져 있었고, 하얀 국화 몇 송이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그녀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총소리….’그녀의 머릿속에서 지난날의 기억이 터져 나왔다.캄보디아, 언니가 쓰러지던 그 밤.하얀 빛 속에서 언니의 몸이 흔들렸고, 그 피가 모래 위로 흩어졌다.“언니!”그녀는 소리쳤다.현실의 숨이 거칠어졌다.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아니야… 여긴 해남이야. 여긴… 안전해.”하지만 심장은 믿지 않았다.몸은 여전히 그날의 공포 속에 있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서랍을 열고 작은 권총을 꺼냈다.그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진정시켰다.“다시 시작이야.”그녀는 속삭였다.“흑거미가 돌아왔어.”서여진은 국도 근처 모텔에 있었다.거울 앞에 앉은 그녀의 얼굴은 초췌했다.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눈 밑엔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앉았다.세면대 위엔 총과 무전기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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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조명아, 넌 밝아야 한다.

바다는 낮부터 잔잔했다.유난히 고요한 날이었다.어촌 사람들은 “이상하게 파도가 눌린다”고 했고, 강혁은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파도가 잠잠할 때일수록, 사람 마음이 흔들린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날 저녁, 그는 평소보다 일찍 그곳으로 향했다.꽃집.‘수진화방’의 불빛은 여전히 따뜻하게 깜박였다.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고요했다.머리를 묶은 채, 꽃잎을 정리하고 있었다.길게 떨어지는 리본이 바람에 흔들렸다.그는 문을 열며 말했다.“오늘은 좀 한가하네요.”“날씨가 이래서 그래요. 비가 올 것 같거든요.”그녀는 리본을 정리하며 미소 지었다.“이상하죠? 이 마을은 비 오기 전에 꼭 꽃 향기가 더 진해져요.”“그건 당신 때문 아닐까요.”“제가요?”“꽃이 아니라, 그걸 만지는 손.”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그 말은 너무 쉽게 심장을 두드렸다.“그런 말, 아무한테나 하세요?”“아무한테나 못 하죠. 이 마을엔 당신 같은 사람이 없으니까.”둘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꽃 냄새, 바람, 그리고 침묵. 그녀는 꽃잎을 다듬던 손을 잠시 멈췄다.“선생님, 어제 바다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왜요?”“오늘 표정이… 조금 다르네요.”그는 잠시 웃었다.“그냥, 누군가 생각나서요.”“그분… 중요한 분이었어요?”“그랬던 것 같아요. 이젠 잘 모르겠지만.”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은 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냥 덮어두는 거죠.”“당신도 그런 기억이 있어요?”“누구나 있죠. 저도요….”그녀는 말끝을 흐렸다.순간, 목소리에 아주 미세한 억양이 묻었다.연변식 발음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지금… 방금 말투가 좀 달랐어요.”“제가요?”“네. 잠깐 들었는데… 어디서 배운 말투예요?”그녀는 웃었다.“그냥… 어릴 때 알던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그 사람, 지금도 연락돼요?”“이제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그 순간, 강혁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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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거짓 위의 미소

바람이 바뀌었다.며칠째 이어지던 남풍이 북서로 틀리면서, 바다는 색을 달리했다.이른 아침, 해남항의 안개가 물 위를 덮었다.하얗게 번지는 그 속에서 사람의 얼굴조차 흐릿했다.강혁은 바닷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불빛이 안개 속에서 조용히 깜빡였다.머릿속은 복잡했다.그녀의 말, 웃음, 그 묘한 억양까지.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조명아….’오래전에 잃어버린 이름이 꿈속처럼 귓가에서 흘렀다.그는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누군가 그의 옆에 앉았다.꽃향기가 먼저 닿았다.“아침부터 담배예요?”그녀였다. 수진.모자 아래로 내려앉은 머리카락이 이슬에 젖어 있었다.“일찍 일어났네요.”“꽃들은 늦잠 안 자요.”그녀가 웃었다.그 미소는 아침빛처럼 부드러웠다.“안개가 심하네요.”“네, 오늘은 바다도 숨고 싶대요.”“숨고 싶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가끔은 사람도, 세상도 다 가려져야 하잖아요.”그녀의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그는 잠시 담배를 껐다.“당신은 그런 게 필요해요?”“숨는 거요?”“네.”“사람마다 이유가 다르죠. 저는… 너무 오래 보인 적이 있어서요.”그녀는 그 말을 하고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봤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 속에는 어딘가 멀리서 떠도는 빛이 있었다.잡히지 않고, 닿지 않는 그 무언가. 그건 그가 과거에 봤던 한 사람의 눈과 닮아 있었다.그는 눈을 돌렸다.“꽃집은 잘 돼요?”“네, 마을 아주머니들이 매일 들르세요. 특히 ‘평화꽃’ 주문이 많아요.”“평화꽃?”“이상하죠? 그냥 하얀 국화인데, 다들 그 이름으로 불러요. 평화가 그리워서 그런가 봐요.”그녀의 웃음은 조용했다.그러나 그 안에는 묘한 슬픔이 스며 있었다.오전이 지나고, 바람이 잦아들었다.수진은 꽃집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작은 라디오에서 잔잔한 클래식이 흘렀다.그녀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노트를 펼쳤다.그 안에는 짧은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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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신원 미상의 미소

비가 내리던 오후였다.해남의 하늘은 납빛으로 흐려 있었고,바다는 잔잔했지만 어딘가 불안한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서여진은 오래된 버스를 타고 해남 터미널에 내렸다.낡은 트렌치코트의 끝이 젖어 있었다.도착 직후, 그녀는 서류가방 속에서 파일을 꺼냈다.‘강혁 / 전 국정원 요원 / 해남 거주.’그리고 그 아래에 붙은 작은 메모.‘접촉 여성: 김수진 (린꽃방). 신원 미상.’그녀는 종이를 한 번 더 접었다.‘신원 미상.’그 한 줄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요원으로서의 본능이 경고했다.‘이 여자는 평범하지 않다.’터미널을 벗어나 마을로 들어서자,습한 공기 속에서 꽃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길모퉁이에 보이는 하얀 간판, ‘수진화방’ 그녀는 잠시 발을 멈췄다.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수진의 모습은 예상과 달리 평온했다.앞치마를 두르고, 꽃을 다듬으며 미소를 짓는 여인.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미소는 너무 조용했다.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했다.“저 여자가….”여진은 중얼거렸다.“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까.”그 시각, 수진은 창문에 기대 앉아 분무기로 꽃잎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여자의 실루엣이 유리창에 비쳤다. 그녀는 잠시 손을 멈췄다.‘…감시.’그녀의 본능이 즉시 반응했다.국정원 특유의 시선. 움직이지 않지만, 숨을 쉬는 기척.그녀는 모른 척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마음은 이미 계산을 시작했다.‘배신구가 보낸 사람? 아니면… 여진?’그녀는 잠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입가엔 미소를 띠웠지만, 눈빛은 차가웠다.‘그렇다면 더 완벽하게 연기해야 해.’저녁에 강혁은 부두 근처 포장마차에 앉아 있었다.잔잔한 빗방울이 천막 위를 두드렸다.그는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오늘 하루 내내 마음이 이상하게 불편했다.“혼자 마시면, 더 쓰죠.”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그는 고개를 돌렸다. 여자였다.단정한 정장 차림, 낯선 얼굴.“혹시… 강혁 씨?”“누구시죠?”“서울에서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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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파도 속의 비밀

파도가 잦아든 이른 새벽, 바다는 잿빛이었다.물결의 경계가 하늘과 맞닿아 흐려지고, 바람이 잠든 듯 고요했다.수진은 해변가를 천천히 걸었다.모래에 남는 발자국이 이내 파도에 지워졌다.그녀는 작은 통신기를 꺼내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스파이더, 린 보고한다. 대상 감정 이입 성공률 80%. 의심 없음.국정원 요원 출현. 감시 중 가능성 높음.”잠시 정적.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좋아, 계속 감시해. 그 남자는 네 복수의 열쇠니까.”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목소리의 주인은 흑거미였다.낮게 깔린 톤, 그리고 숨겨진 냉기.그녀는 오랜 시간 이 목소리 아래서 자라왔다.“린, 감정에 끌리지 마라. 그건 네가 가장 먼저 배운 원칙이잖아.”그녀는 대답 대신 통신기를 꺼버렸다.파도 소리가 더 크게 밀려왔다.“감정에 끌리지 말라….”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심장은 그 경고를 거부하고 있었다.그날 오후, 강혁은 배를 정비하다가 문득 수진의 가게 쪽을 바라봤다.유리창 안에서 그녀가 꽃잎을 자르고 있었다.그 장면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낯익었다.그는 도구를 내려놓고, 조용히 가게로 향했다.문이 열리자 종소리가 울렸다.“또 오셨네요.”“이젠 오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요.”“그건 좋은 습관일까요?”“나쁜 습관이라도, 끊고 싶진 않네요.”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어떤 꽃을 원하세요?”“직접 고르고 싶어요.”그는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한 송이 하얀 꽃 앞에서 멈췄다.“이건 뭐예요?”“라넌큘러스. 꽃말은 ‘매혹’이에요.”“매혹이라… 위험한 단어네요.”“그런 말은 위험하게 쓰는 게 멋있죠.”둘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그 짧은 순간, 공기 속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했다.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꽃은 오래 못 가요. 금방 시들죠.”“사람도 그래요. 하지만 시드는 게 끝은 아니잖아요.”“그럼요. 다시 피어나면 되죠.”그녀가 웃었다.“언제든 피어날 수 있어요. 누군가 지켜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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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캄보디아에서 온 목소리

밤이 깊었다.해남의 바다는 검은 비단처럼 눌려 있었다.바람이 잠들고, 파도만이 희미한 숨을 토해냈다.수진은 불을 끄지 못한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창문 밖의 달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얼굴 한쪽을 희미하게 비췄다.책상 위에는 오래된 휴대용 녹음기가 있었다.테이프 위에는 희미하게 번진 글씨.‘수민 / 캄보디아 작전.’그녀는 손끝으로 녹음기를 쓸었다.플레이 버튼을 누르려다 멈췄다.숨을 들이켰다.“이걸… 정말 들어야 해?”스스로에게 묻는 말이었다.하지만,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찰칵. 기계음이 흐르고, 지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다.“자오밍… 듣고 있니?”“이걸 네가 듣는다는 건, 내가 더 이상 거기 없다는 뜻이겠지.”그녀는 손을 떨었다.언니의 목소리였다.연변식 억양이 남아 있었지만, 어딘가 피곤하고, 다정했다.“난 지금 캄보디아 프놈펜 외곽에 있어. 여기 공기가 이상하게 뜨거워.마치 무언가 끝을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노이즈가 섞이며 숨소리가 이어졌다.“네가 그랬잖아. 언니, 우리 그냥 떠나자고. 하지만 난 떠날 수 없었어.누군가는 이 지옥의 끝을 봐야 하니까.”수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언니… 그만, 그만 말해….”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그 사람 있지, 강혁 씨. 처음엔 믿을 수 없었어.국정원 요원이라니, 우리 같은 사람을 믿는다는 게 말이 돼?”“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나를 사람으로 봐줬어.”수진은 고개를 들었다.언니의 목소리가 너무 가까웠다.“자오밍, 그가 너를 만나면… 아마 나를 떠올릴 거야.”“그러니까, 부탁이야. 그를 미워하지 마.”“그도 나처럼, 누군가를 지키려다 무너진 사람이야.”테이프는 거기서 멈췄다.띠~소리와 함께 기계가 멈췄다.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손끝이 차가웠다.눈물이 떨어져 테이프 위를 적셨다.그녀는 고개를 숙였다.“언니, 난 아직 그를 미워해야 해.”“그게… 내가 살아 있는 이유니까.”하지만 그 말은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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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세 사람의 거짓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해남의 초가을은 이상할 만큼 비가 잦았다.길 위엔 고인 물이 반짝였고, 전봇대 불빛이 거기에 번져 흔들렸다.강혁은 부두 근처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물비린내, 그리고 젖은 바람의 냄새.그는 이 도시의 냄새가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 익숙함 속에, 요즘은 이상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혼자면, 더 외로워요.”그가 돌아보았다. 여진이었다.우산 아래, 단정한 정장 차림.도시 냄새를 흠뻑 머금은 그녀는 이 마을의 풍경 속에서 이질적으로 빛났다.“또 왔네요.”“보고해야 하니까요.”“아직도 나를 감시해요?”“그게 제 일이에요.”“내가 뭐가 그리 궁금하다고.”“당신이 아직도 사람을 믿는 이유요.”그녀의 대답은 짧았고, 어딘가 피곤했다.그는 미묘하게 웃었다.“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요?”“그걸 알면… 내가 덜 아플지도 모르니까.”그녀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그래서, 오늘은 무슨 이유로 찾아온 거예요?”“그 여인 때문이에요.”“김수진?”“네. 그 사람, 조심하세요.”“무슨 뜻이죠?”“그녀는 평범하지 않아요.”그는 잠시 담배를 껐다.“그 말을 들으니까, 오히려 더 궁금하네요.”“강혁 씨, 당신은 항상 그래요. 진실이 아니라 위험에 끌리죠.”그녀의 말투에는 단념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그게 당신이 여전히 외로운 이유예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우산을 살짝 접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그 여자는… 당신의 과거를 알아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그건 아직 몰라도 돼요. 그냥, 조심하세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그가 그 뒷모습을 바라볼 때,그녀의 어깨 너머로 빗줄기 사이에서 또 다른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그 시선의 주인공은 수진이었다.수진은 골목 어귀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우산도 없이, 그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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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지워진 이름, 린자오밍

바다는 새벽부터 짙었다.구름이 낮게 깔리고, 파도는 바위를 긁으며 소리를 냈다.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마치 바다가 그 안으로 삼켜지는 듯했다.수진은 해안 끝에서 눈을 감았다.짠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그녀는 호흡을 고르며 속삭였다.“숨을 참아. 천천히. 눈을 감고, 목소리를 낮춰.”그녀의 손끝이 떨렸다.몸은 기억하고 있었다.오래전 흑거미 밑에서 배웠던 훈련법.‘감정을 지우는 법.’‘거짓을 진실처럼 말하는 법.’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나는 린자오밍이다.”그 말이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꽃집 여자는 없어. 그건 껍데기일 뿐이야.”그녀는 눈을 떴다.파도가 더 세게 밀려왔다.‘이 감정은 사치야. 복수만이 진짜야.’그러나 그 결심은 바람처럼 흔들렸다.언니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자오밍, 사랑을 알았는데 버릴 때 죽는 거야.”그녀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그만… 그만 말해.”한편, 여진은 국정원 임시본부의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화면엔 ‘김수진’의 주민기록이 떠 있었다. 그러나 이상했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해남 김수진, 출신 불명. 이름 등록 3년 전. 기록 복제 흔적 있음.”그녀는 화면을 확대했다.사진 속 얼굴이 선명해졌다.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당신… 누구야.”그녀는 모니터를 응시했다.그녀의 눈동자에 불빛이 번졌다.“혹시, 그날 죽은 그 여자의 동생…?”그녀는 서류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프놈펜 작전 기록 / 이중첩자 김수민 / 사망 처리’그 아래, 지워진 한 줄이 있었다.‘동생 존재 추정: 린자오밍’펜이 손에서 떨어졌다.여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그녀가… 그 여자 동생이었어?”“그럼… 강혁은….”그녀는 몸을 떨며 의자에서 일어섰다.창문 밖으로 회색 파도가 밀려왔다.“이건 단순한 감시가 아니야.”그녀는 중얼거렸다.“이건, 복수야.”그 시각, 강혁은 바다에 나가 있었다.잔잔한 파도 위에서 낚싯줄을 드리웠다.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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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그녀의 그림자를 안은 밤

저녁이 내려앉은 바다엔 검은 물결만이 남아 있었다.햇빛이 남기고 간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별이 뜨기엔 너무 이른 어둠이 밀려왔다.수진은 가게의 불을 하나씩 끄고 있었다.꽃잎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하루 종일 손님이 많았던 날,하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고요했다.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집처럼.그녀는 유리문을 닫으려다 멈췄다.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검은 외투, 젖은 머리카락. 강혁이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꽃 냄새가 나서요.”“이 밤에도요?”“밤이니까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아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들어오세요. 오늘은 특별한 향이 있어요.”“오늘도 커피 있나요?”“늘 있죠.”그녀는 커피를 내리며 조용히 물었다.“요즘 무슨 일 있어요?”“왜요?”“얼굴이 좀 피곤해 보여요.”“그냥… 기억이 조금 돌아와서요.”“기억이요?”“이상하게, 이 마을에 오면 잊었던 얼굴들이 생각나요.”그녀의 손이 멈췄다.“좋은 기억이에요?”“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프죠.”“그게… 사랑이었나 봐요.”“그럴지도요.”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수진 씨.”“네.”“당신은 거짓말을 잘할 것 같아요.”그녀는 웃었다.“그게 칭찬이에요?”“아니요. 그냥… 느낌이에요.”“느낌으로 사람을 믿지 마요.”“그럼 뭘로 믿어야 하죠?”“행동이요.”“그럼 내일도 이 자리에서 만나면, 그건 진심으로 믿어도 되나요?”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내일도 비가 오면요.”“비가 오면?”“그땐, 믿어요.”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대화는 짧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그가 떠난 뒤, 수진은 가게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손끝에 남은 커피 향, 그 위로 언니의 목소리가 겹쳤다.“사람은, 사랑을 모를 때가 아니라 사랑을 알았는데 버릴 때 죽는 거야.”그녀는 눈을 감았다.“언니, 나 지금… 어디까지 와버린 걸까.”그녀는 문득 창밖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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