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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신승우 씨, 아웃: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제21화

검은 코트를 팔에 걸친 신승우는 VIP 통로를 여유롭게 걸어갔다. 그의 뒤에는 신주 그룹의 최고급 업무팀이 정장 차림으로 흐트러짐 없이 따르고 있었다.반짝이는 바닥 위로, 맞춰진 발걸음은 흔들림 없는 강한 기세를 드러냈다.유리 너머로 이를 본 승객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전용기 기내에서, 신승우는 서류를 펼쳐 들었다. 윤진혁은 그의 왼쪽에 커피를 내려놓았다.“병원 쪽은 계속 주시하게 해. 특히 한서윤, 강하준한테 접근 못 하게.”신승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택시는 아크로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한서윤은 몇 년 전 아크로에 집을 하나 사두었는데 방송국과 가까웠다.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처음 방송국에서 인턴을 할 때 생활 편의를 위해 산 집이었다. 그때는 장차 해외 특파원이 될 생각이었기 때문에 집은 대충 방 두 개짜리로 골랐다.한 방은 그녀의 방, 다른 한 방은 주선율의 방이었다.지문 인식으로 문을 열고 불을 켜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이 드러났다. 오늘 가사도우미가 다녀간 듯했다.주선율은 청결에 민감해 몇 채의 집을 모두 사흘에 한 번씩 청소하도록 해두었고, 촬영이 끝나고 쉴 때 언제든 들어와 지낼 수 있게 했다.덕분에 그녀의 집도 항상 깨끗하게 관리되어 언제든 바로 생활할 수 있었다.한서윤은 캐리어를 대충 한쪽에 두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그렇게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이게 이혼이구나. 서명하고, 떠나는 것...’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은 훨씬 덜했다.너무 비현실적이었다.억지로 이어붙인 결혼이 마침내 끝났다.샤워를 마친 뒤, 한서윤은 캐리어 안쪽 칸을 열어 수면제를 꺼냈다.싱글로 돌아온 첫날 밤인데 어떻게든 잘 자야 하지 않겠는가.하지만 결국 그녀는 새벽이 되어서야 약의 힘에 의지해 잠들 수 있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순간 잠깐 멍해졌다.낯설면서도 익숙한 주변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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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3년이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는 시간이야.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거야. 어쩌면 신승우와 강율희도...’한서윤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네. 이제는 신승우를 떠올릴 필요가 없는데.’그때 갑자기 누군가 머리를 들이밀었다.“뭐야, 설마 지원하려는 거 아니지?”정신을 차린 한서윤은 감상에 잠길 틈도 없이 소아름의 머리를 밀어냈다.“눈치 빠르네. 맞췄어.”“왜 밀어! 아침부터 드라이한 머리 다 망가지잖아!”소아름은 머리를 정리하며 의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봤다.“머리 어디 다쳤어?”한서윤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원 링크를 눌렀다.하지만 소아름이 갑자기 손을 눌렀다.한서윤이 시선을 올리며 소아름을 바라보자, 소아름은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원 조건 제대로 봤어? 나가면 3년이야.”“마침표 하나까지 다 봤거든.”정말 결심한 눈치였다.소아름은 마우스를 놓고 팔짱을 낀 채 내려다봤다.“남들은 스펙 쌓으려고 가는 건데... 넌 이미 여기서 에이스야. 뭘 더 쌓겠다고 그래? 미리 말해두는데,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내가 편집장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어. 그럼 너 지금까지 한 거 다 물거품 되는 거야. 알겠어?”무언가 떠오른 듯, 소아름은 책상에 손을 짚고 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너 설마 전에 맞았던 거 때문에 진짜 머리 이상해진 거 아니지?”“푸흡...”한서윤은 웃음을 터뜨리며 턱을 괴고 앉아 한 손으로 소아름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번엔 좀 쿨하게 굴어볼게. 미리 축하해.”소아름의 표정이 굳었다.“진짜야?”한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소아름은 눈빛이 순간 복잡해졌지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흥, 네가 가는 거 아쉬워할 것 같아? 빨리 가. 앞으로 우리 부서 연말 평가 1등은 다 내 거니까!”그녀는 한 번 더 콧방귀를 뀌고 돌아서서 가버렸다.5분 후, 한서윤은 편집장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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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그래서 도와주실 수 있나요?”한서윤이 그를 바라봤다.서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자리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사실 지원 접수 전부터 정보를 들었지만 한서윤이 관심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지금은 이미 정원이 찬 상태라 처리하기가 쉽지 않았다.“편집장님,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정말 가고 싶어요.”한서윤이 부탁했다.한서윤의 부탁을 들은 서준영을 미간을 더 찌푸렸다.“아니, 서윤아...”하지만 한서윤의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눈빛을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이건 내가 도와주기 어려울 것 같아. 박 교수님께 한번 여쭤봐. 그분 인맥 넓잖아. 한 자리 더 끼워 넣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한서윤은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었다.대학원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했는데 박 교수는 그녀의 지도교수였다.하지만 그는 강율희의 외삼촌이라는 또 다른 신분이 있었다.그가 나서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다. 통신사 쪽에도 그의 제자들이 여러 요직에 있었다.한때 그녀 역시 그의 총애받던 제자였다.그 시절 해외 기회를 포기했을 때, 박 교수는 크게 화를 내며 감정에 휘둘렸다고 질책했다. 그 이후로 한서윤은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지금 생각하면 그의 말이 맞았다.한서윤은 사무실을 나와 휴대폰에서 박 교수의 번호를 찾아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세 번의 신호음 끝에 연결되었다.“한서윤?”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건 뜻밖에도 강율희의 목소리였다.한서윤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박 교수님 좀 바꿔줘.”강율희가 말했다.“외삼촌 아프셔.”박경수는 그녀의 은사였다. 연락이 뜸했어도 그가 아프다는 말을 듣자, 한서윤은 일을 잠시 미루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간병인이 강율희가 탄 휠체어를 밀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율희는 고개를 살짝 들며 차분하게 말했다.“타이밍이 안 좋네. 서윤아, 외삼촌 방금 주무셨어. 고열이 막 내려서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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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부드러운 말 속에 가시가 숨어 있어 정말 듣기 거슬렸다.“꼭 그렇게까지 말하게 만들어야 해?”한서윤은 더는 참지 않았다.“그냥 네가 썼던 건 안 쓰고 싶어서 그래.”즉, 더럽다는 뜻이었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고, 나이 차가 있었지만 한서윤이 월반을 하며 같은 대학까지 다녔다.한서윤의 말뜻을 강율희도 충분히 알아들었다.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온화하게 말했다.“서윤아, 난 진심으로 주고 싶은 거야.”이렇게까지 억지로 주려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정상이 아니라면, 그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한서윤의 눈빛에 짜증이 스쳤다.“그렇게 필요 없으면 그냥 버려. 신승우도 신경 안 쓸 거라며.”그래도 강율희는 전혀 화난 기색 없이 여유롭게 말했다.“당연히 신경 안 쓰지. 내가 뭘 해도 상관 안 하니까.”말을 하며 그녀는 감각을 잃어 더는 걸을 수 없는 자신의 두 다리 위에 손을 올렸다.순간, 한서윤의 가슴이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그랬다.그 다리는 그날 사고 때 신승우를 감싸며 대신 다친 것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신승우는 단순히 실명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이 은혜는 평생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팔찌 하나를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신승우의 목숨을 요구해도 그는 기꺼이 내줄 것이다.신승우는 그녀에게 한없이 냉정했지만, 이 부분에서의 인간성만큼은 한서윤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좋아하지 않는다면 강요하지 않을게.”강율희는 다시 팔찌를 손목에 차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하지만 서윤아, 우리 예전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걱정하지 마. 나 청운시에 온 건 승우 오빠를 빼앗으려는 것도 아니고, 너희 결혼을 망치려는 것도 아니야.”“말 길게 할 필요 있어?”한서윤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강율희, 하나만 묻자. 내가 신승우랑 결혼한 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복도는 조용했다.강율희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이 미세하게 굳었다.기자였던 한서윤은 이런 미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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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하지만 나 거짓말 안 했어. 청운시에 온 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승우 오빠가 원해서야.”한서윤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녀는 문이 닫히지 않게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이내 문이 다시 열렸다.한서윤은 손가락을 세게 움켜쥐며 겨우 돌아보지 않고 참아냈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한서윤은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얼굴이 너무 창백했다. 주먹을 풀자 손바닥에는 어젯밤 넘어지며 긁힌 자국 위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한서윤은 자신이 매우 담담하게 강율희를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무리 계산해도, 신승우가 강율희를 귀국시키라고 했다는 사실만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신승우는 이렇게까지 서두르고 있었다.이혼도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강율희를 데려오려 할 정도로.그는 이 결혼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하서윤이라는 아내도 전혀 안중에 없었다.이 결혼은 단순히 남보다 못한 관계가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었다.신승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관계였다.그렇게 생각하자, 한서윤의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병원을 나온 뒤, 한서윤은 방송국으로 돌아가 일에 몰두했다.하지만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점심에 강율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퇴근할 때까지 그렇게 버티다가, 그녀는 다시 박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박경수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한서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박경수는 약을 먹고 있었다.그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서윤이 왔구나, 들어와.”한서윤은 병상 곁으로 다가갔다.“교수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에이, 감기일 뿐이야. 많이 나아졌어. 앉아.”한서윤은 소파에 앉아 그가 약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박경수는 몇 번 기침하고 나서 말했다.“너, 강하준을 병원에 실려 오게 했다면서?”한서윤의 숨이 잠깐 멈췄다.강하준은 강율희의 동생이자, 동시에 박경수의 외조카였다.그가 먼저 사람을 시켜 자신을 때렸지만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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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박경수는 국내 언론계의 거물이었다. 누구나 그의 체면을 봐야 했다.통신사 쪽에도 그의 제자들이 요직에 있었기에 그가 한마디만 하면 한서윤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그녀는 희끗희끗해진 그의 관자놀이를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선생님, 저 정말 반성하고 있어요.”제자들은 모두 그를 ‘박 교수님’이라고 불렀지만, 한서윤만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선배들조차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가 한서윤이라고 말했었다.오랜만에 듣는 그 호칭에 박경수의 표정이 흔들렸다.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쉬었다.“한 번 나가면 3년이야. 신승우랑 3년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어? 율희가 돌아온 게 너희 관계에 영향 준 거 아니야?”‘관계?’한서윤은 그 단어가 비웃음처럼 느껴졌다.그녀와 신승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형제 같은 감정조차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선생님, 오늘은 일 얘기만 하고 싶어요.”선은 분명히 지켰다.아무리 박경수가 자신을 아낀다더라도 강율희는 그의 친조카이니 중간에서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배려를 느끼며, 박경수의 마음도 복잡해졌다.결국 그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지금 E 국은 전쟁 중이야. 위험투성이지. 지원자들이 다 경력 쌓으려고 가는 줄 알아? 다들 각오하고 가는 거야. 넌 내 제자야. 그런 데로 보내고 싶지 않아.”그제야 처음에 거절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한서윤은 자신이 괜히 예전 일로 아직 화가 나 있다고 오해했던 것을 부끄러워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선생님, 처음 수업 때 하신 말씀 기억하세요? 우리는 세상이 알아야 할 진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가는 거라고 하셨잖아요.”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저, 죽는 거 안 무서워요.”박경수의 표정이 굳었다.“기억력이 좋긴 해. 그 말만 기억하는 거야? 그때 내가 그렇게 말렸던 건 하나도 안 들었잖아.”한서윤은 고개를 숙인 채 꾸중을 들었지만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그는 그녀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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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한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는 순간, 가정부가 강율희가 탄 휠체어를 밀고 복도 모퉁이에 나타났다.그녀는 숫자가 바뀌는 엘리베이터 표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병원을 나온 뒤, 한서윤은 목적 없이 차를 몰았다.사실 해외 파견 건은 꼭 박경수에게 부탁할 필요는 없었다.신씨 가문이나 주씨 가문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청운시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많은 분야에서 이 두 가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김혜정이 나서면 이 일은 금방 해결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김혜정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알게 되면 분명히 말릴 것이기 때문이다.이혼 이야기도 아직 어떻게 꺼낼지 모르고 있었다.주선율도 안 될 것 같았다.그녀 역시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것이고, 심하면 또 절교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주선율은 툭하면 그런 식이었다.이제는 그런 자극을 감당할 나이도 아니었다.그들에게만 숨기고,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자신을 붙잡지 못할 것이다.두 달, 그 사이 신승우가 언제 답을 줄지도 모른다.이혼 절차를 위해 가정 법원에 가야 하고, 이혼 숙려기간도 필요할 것이다.하지만 신승우는 그녀보다 더 빨리 이혼을 원할 것이니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한서윤은 계속해서 목적 없이 도시를 달렸다.익숙한 거리와 건물들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청운시에서 태어나 청운시에서 자란 그녀였다.20년 넘게 살아온 이곳을 떠나 3년, 어쩌면 그 이상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어느새 한서윤은 차를 몰아 서원으로 들어왔다.예전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이지만 그해 한씨 가문 회사가 파산하면서 아버지는 집을 팔아버렸다.몇 년 전 그녀가 이곳에 와봤을 때는 집이 빈 채 아무도 살지 않았다.그 집에는 부모님과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벽에는 그녀가 어릴 적 그린 낙서와 작은 손자국, 그리고 스티커들이 남아 있었다.아버지는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직접 마당에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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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휠체어에 앉은 사람은 강율희였다.강율희는 목에 두른 머플러를 여미며 말했다.“내일 아침에 국 좀 끓여줘요. 외삼촌께 가져다드리게.”“네, 아가씨.”가정부가 휠체어를 밀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강율희!”그때 공기를 찢는 듯한, 다급하고 분노 섞인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운전하던 남자는 경호원이었는데, 발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돌려 경계하며 휠체어 뒤를 막아섰다.그래서 강율희는 돌아보는 순간 바로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하지만 이 목소리는...“비켜요. 제 친구예요.”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경호원이 물러섰다.강율희는 바람맞으며 서 있는, 눈이 붉어진 한서윤을 단번에 알아봤다.그녀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한때는 한서윤을 안쓰러워했다.그녀가 울면 마음이 아팠고, 힘들어하면 견디지 못했다.누가 한서윤을 건드리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하지만...한서윤이 신승우를 좋아하게 된 순간부터,모든 것이 달라졌다.신승우를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싫었다.특히 한서윤은 더더욱 그랬다.“서윤아, 여기 어떻게 왔어?”강율희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그녀는 손짓으로 휠체어 방향을 돌리라고 했다.찬 바람이 한서윤의 긴 머리를 휘감았다.그녀는 차갑게 굳은 손을 움켜쥔 채, 믿기지 않는 눈으로 강율희를 바라봤다.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워 움직일 수 없었다.“왜... 여기 살아?”이 집에 사는 사람이 강율희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그래서 신남훈이 그녀를 보고 ‘대단하다’고 했던 거였다.신승우가 강율희를 ‘그곳’ 에 들여보내도 참고 넘긴다고.지금 보니 자신이야말로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들 눈에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그의 의도를 알고 있는 그녀는 원래 신남훈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일부러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고, 틈을 타 들어오려 했다.그녀는 남편의 사생활을 캐고 집착하는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신승우가 좋아하는 건 강율희였으니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하든 이상하지 않았고, 굳이 따질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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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그런데 왜 하필 여기냐고!”한서윤이 한 걸음 다가섰다.발아래에는 그녀가 돌 때 남긴 작은 발자국이 있었다.부모님이 안고 찍어준 흔적이었다.집에 돌아왔는데...그녀는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여긴 내 집이야.”강율희가 여기 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신승우가 이 집을 사줘서 살게 하는 식이어선 안 된다.그건 신승우가 직접 칼로 그녀의 가슴을 찌르는 것보다 더 아프니까.강율희는 잘 접은 손수건을 꺼내 한서윤에게 건넸다.“눈물 닦아. 추워.”한서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서윤아, 집착하지 마. 여긴 이미 네 집이 아니야. 네 아버지가 팔던 순간부터 다른 사람 거였어.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는데 나는 왜 안 돼?”익숙한 그 말은 날카롭게 그녀의 심장에 꽂혔다.강율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랬잖아. 나는 장애가 있어서 결혼 못 하는 거니 넌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그 논리는 이해하면서 왜 지금은 따져?”“이제 본색을 드러내네?”한서윤이 손수건을 치워서 떨어뜨렸다.경호원은 한서윤이 손을 쓰는 순간 즉시 그녀를 제지했다.“지금 바로 나가십시오.”“비켜.”한서윤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경호원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대표님의 지시입니다. 서원에 무단 침입하는 사람은 모두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가씨의 친구라서 예의 지킨 겁니다. 계속 이러시면 강제 조치할 겁니다.”말이 끝나자 주변에 숨어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나타나 한서윤을 둘러쌌다.그녀는 몇몇 얼굴을 알아봤다.신승우의 사람들이었다.“다들 물러나요.”강율희가 조용히 말했다. 사람을 훈계하는 어조는 부드럽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그들은 강율희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강율희는 부드럽게 말했다.“서윤아, 난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늦었어. 오늘은 돌아가.”가정부가 휠체어를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한서윤이 한 발짝 움직이자 경호원들도 동시에 다가왔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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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한서윤은 이미 사람을 시켜 확인해봤다.그 집은 그녀와 신승우가 결혼하기 전에 신승우가 사들인 것이었다.즉, 부부 공동 재산이 아니었다.이혼 시 재산 분할 대상도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반드시 이혼을 ‘협상 카드’로 삼아 신승우와 맞바꿔야 했다.묵원을 나온 한서윤은 차에 올라탔다.신승우가 어디로 출장을 갔는지, 그곳과 한국의 시차가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다.하지만 단 1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강율희가 그 집에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은 그녀에게 하루하루 살을 도려내는 고통과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신승우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자동으로 끊기며 아무도 받지 않았다.이번에는 윤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찬가지로 연결되지 않았다.차 밖에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어둠에 잠긴 차 안에서 한서윤은 이를 악물고 차갑게 웃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신승우가 다시 전화한 줄 알았지만 화면에 뜬 것은 낯선 번호였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로 낮게 깔린 비웃음이 먼저 흘러나왔다.“한서윤.”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듯 뼛속이 시려오며 귀가 울렸다.강하준이었다.“내 목소리 알아들었네. 내가 요 며칠 병원에 있으면서 매일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그날 밤 왜 그렇게 실수했는지 생각했어. 왜 너를 안 죽였을까. 네가 그렇게 질긴 목숨일 줄 알았으면, 그때 돌려가며 건드리게 할 게 아니라 그냥 칼로 찔러 죽였어야 했는데. 안 그래?”“너희 집안 다 망했는데 너 혼자 살아서 뭐 해? 아, 들으니까 우리 누나가 네 옛날 집에 산다며? 그것도 신승우가 사줬다던데. 너 진짜 한심하다. 나라면 그냥 죽었을 거야. 한서윤, 기다려. 나 퇴원하면 제일 먼저 너부터 죽일 거야.”한서윤의 손끝이 멈추지 않고 떨렸고, 충혈된 눈에 눈물이 맺혔다.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고 그 번호를 차단했다.아크로 집으로 돌아온 뒤 씻고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자마자 신승우가 그녀의 집을 사서 강율희를 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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