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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을 거슬러의 모든 챕터: 챕터 141 - 챕터 150

324 챕터

제141화

유지영이 한창 의서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동금이 소식을 들고 안으로 들었다.“군주님, 지금 밖에서는 군주님께서 경세자와 민 소저를 갈라놓아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들 소문이 파다합니다.”“소… 소인도 들었습니다. 지금 국공부 안에서도 그 얘기로 시끄러워요.”홍주도 조심스레 고했다.유지영은 탁 하고 의서를 덮었다.“군주님, 노부인께서 송죽당으로 오라 하십니다.”문밖에서 연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지영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니 연월이 황급히 고했다.“경왕비께서 저택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노부인 처소에 계세요.”“민 소저의 일 때문에 오신 것이냐?”유지영의 질문에 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송죽당에 이르자, 역시나 초조한 안색의 경왕비의 모습이 보였다.경왕비는 민경주 일로 따지러 온 것이 아니라, 유지영에게 해명을 하러 온 것이었다.“군주, 부디 오해하지 말거라. 경주의 성정이 워낙 고집스럽다 보니,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모양이야. 밖에서 흉흉한 소문이 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리 급하게 찾아온 거란다.”역시 경왕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정왕비였다면 당장에서 유지영을 압박하여 민경주를 받아들이라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경왕비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택했다.뻔히 통보하러 온 자리이면서도 겉으로는 유지영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척, 번지르르하게 포장했다.상대의 화를 돋우지 않으면서 은근슬쩍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경주는 어릴 때부터 경왕부에서 자라, 온 집안사람들이 그 아이를 미래의 세자비로 알고 있었단다. 수년간 그래 왔으니 갑자기 혼담이 깨졌다는 소식에 수치심을 못 이기고 미련한 짓을 저지른 것 같구나.”경왕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그 동안 경왕 전하께서도 경주를 무척 아끼셨던지라 어제 밤새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셨단다….”유지영은 민경주에게 눈곱만큼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았다.진짜로 목을 맬 생각이었다면 한밤중에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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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화

경왕비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는 다시 제자리로 털썩 주저앉았다.그러고는 초조함을 감추고 무력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경왕부의 과실이 맞다. 죄 없는 아이들을 탓할 수는 없지.”그 기세를 보아하니 당장 입궁해 경왕을 살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유지영은 경왕비의 치밀함에 다시금 감탄했다.“유국공, 그리 서둘러 입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혼사는 태후께서 내린 교지이거늘, 이미 폐하께서 경왕부에 벌을 내리신 마당에 유국공까지 입궁하시면 어찌 되겠습니까. 향후 군주가 왕부에 시집을 와도 양가에 앙금이 생겨 외려 군주의 처지만 난처해질까 염려스럽습니다.”경왕비의 간곡한 권유에 유정남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어찌 되었든 양가는 사돈을 맺게 될 사이였다. 일을 크게 키웠다가 괜히 딸이 경왕부의 눈밖에 나면 좋을 게 없었다.“군주, 궁에서 내린 혼사이니 네가 억울한 일 없이 궁에서 합당한 처분을 내려줄 게다.”경왕비는 마치 진심인 양, 유지영을 가련하고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 모습은 영락없는 다정하고 며느리를 끔찍이 아끼는 시어머니 같은 모습이었다.이 상황에서 유지영이 끝까지 추궁하려 든다면 오히려 유국공부를 진흙탕 싸움에 밀어 넣는 꼴이 될 것이다.하지만 경왕비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녀가 국공부의 문턱을 넘어선 순간부터 유국공부는 이미 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었다.사실 경왕비 역시 도박수를 두고 있었다.유지영이 입궁해 서 태후에게 민경주를 포용하겠노라 청하기만 한다면 서 태후도 체면이 서고 경왕부의 실추된 명예도 복구할 수 있었다.경왕비는 원하는 바를 입밖으로 내지 않으면서도 온갖 말재주로 유지영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판을 짜고 있었다.백성들의 여론을 방패 삼아 태후를 압박하려는 속셈이기도 했다.점잖게 자리를 잡고 앉은 경왕비의 눈에는 유지영이 결국 제 뜻대로 머리를 숙일 거라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그때, 유지영은 유정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얼굴에는 단호한 결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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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화

경왕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입궁하여 태후께 사정할 생각도, 민경주를 포용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이는 경왕비가 이곳에 온 목적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행보였다.“군주, 우리 현준이에게 마음이 없다는 말이냐?”경왕비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유지영은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저와 경세자는 고작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입니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지요. 그러니 마음에 두고 말고 할 것 없이, 그저 순리에 따를 뿐이지요.”차분하고 담담한 어투에 경왕비는 도무지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결국 깊은 한숨을 내쉰 경왕비는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경왕비가 떠나자, 유씨 노부인은 대견하다는 듯 유지영을 바라보았다.방금 주고받은 대화는 노부인 자신이었어도 이만큼 완벽하게 받아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말끝마다 함정이 숨어 있고 한끗 차이로 경왕비가 벌여놓은 난장판에 유국공부가 끼어들어 독박을 쓸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우리 지영이가 언제 이렇게 잘 컸을까.”유지영은 얌전히 시선을 내리며 공손히 답했다.“모두 할머니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지요.”유씨 노부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다가 이내 안색을 굳히며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런데 정말로 경왕부와의 혼사를 물릴 생각인 게냐?”“그럴 리가 있겠습니까.”“그럼 방금 한 말은….”“할머니, 서 태후마마께서 친히 내리신 교지입니다. 지금은 세 세력이 팽팽히 맞서는 형국이지요. 태후께서는 절대 자존심을 굽힐 분이 아닙니다. 경왕부가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면 그 대가는 오롯이 경왕 전하가 치르게 될 테죠.”유지영은 경왕비가 결코 그 파국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유씨 노부인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웃했다.“허나 경왕 전하께서 벌을 받으시는 게, 경세자에게 무슨 득이 된다는 말이냐?”유지영은 굳이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명백히 판세를 짚고 있었다. 배현준은 서 태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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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화

반 시진 뒤, 상 내관이 밖으로 나왔다.“경왕 전하, 태후마마께서 이번 일로 크게 마음이 상하시어 병상에 누우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두 분께 이 자리에서 경전을 필사하며 태후마마의 쾌차를 빌라 명하셨습니다.”상 내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린 내관들이 탁자와 지필묵을 내왔다.“태후께서 어찌 갑자기 쓰러지셨단 말인가?”어리둥절한 경왕에 반해 배현준은 군말 없이 먹을 갈아 경전을 필사하기 시작했다.상 내관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답했다.“유국공께서는 민 소저가 죽음까지 불사하며 이 혼인을 주장한다면 기꺼이 파혼하겠노라 말씀하셨고, 이 일을 아신 태후마마께서는 크게 노하셨습니다.”경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유국공이 파혼을 청했단 말인가?”상 내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경왕은 즉시 배현준을 돌아보았다.배현준은 어느새 종이 반 장을 채워가고 있었다.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왜 저를 보십니까? 저는 계속 궁에만 있었습니다.”경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너와 장녕군주 사이에 아무런 정이 없단 말이냐? 혼사를 이리 쉽게 물리다니!”배현준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리더니 저 멀리서 허둥지둥 다가오는 경왕비를 힐끗 보았다.“말도 몇 마디 못해본 사이인데 무슨 정이 있겠습니까? 제게 물으실 게 아니라 저기 오시는 분에게 물으시지요.”이윽고 도착한 경왕비는 의복 위로 피가 배어 나오는 경왕의 잔등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전하, 어쩌다가 이리 되셨습니까.”경왕은 통증도 잊은 채 다급히 물었다.“유국공이 대체 왜 파혼을 청하러 온 것이오?”경왕비는 부득불 유국공부에 다녀왔던 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저는 그저 장녕군주가 딴마음을 먹지 않도록 달래주려 했을 뿐입니다.”“민경주가 자살 소동을 벌여 온 경성이 시끄러운 마당에 용케 시간을 내어 장녕군주를 만나러 가셨군요.”비아냥거리는 배현준의 말에 경왕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현준아, 바깥에 소문이 하도 흉흉하게 돌아서 그저 군주더러 마음에 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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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황궁에서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으니, 가장 애가 타는 사람은 단연 경왕비였다.회랑에 서 있으려니 휘몰아치는 밤바람에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마마, 이대로 가다가는 전하께서 더는 버티지 못하실 것입니다.”시녀가 눈치를 살피며 만류했다.경왕비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이번 판을 이대로 허망하게 내주어야 한단 말인가.서 태후도, 유국공부도, 배현준도 하나같이 통제를 벗어났다.경왕비는 처음으로 낭패를 맛보았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배현준보다 경왕이 받게 될 처벌이 훨씬 무거워질 것이다.“마마, 지금 경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경주 아가씨가 수치도 모르고 목숨으로 세자를 협박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저희 경왕부가 신의를 저버렸다며 욕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반대로 장녕군주는 귀족의 품격을 잃지 않고 강단이 있다며 칭송하는 분위기입니다.”시녀가 조심스레 아뢰는 말에 경왕비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조금만 더 기다려보자.”이렇게 허망하게 타협할 수는 없었다.이번 싸움은 먼저 지치는 쪽이 패하는 판이었다.하룻밤이 지나자, 결국 경왕은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상 내관이 사람을 시켜 경왕에게 인삼탕을 우려 먹이고 약간의 음식을 내어주자, 경왕은 건양제가 마침내 자신의 죄를 사해주려는 줄 알았다.하지만 상 내관은 이내 잔인하게 선을 그었다.“전하, 태후마마께서 여전히 병상에 누워계십니다. 효심이 깊으신 폐하께선 전하를 그리 쉽게 용서치 않으실 터이니, 이번 일에서 누군가는 필히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그 한마디에 경왕의 마음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서 태후가 뒤에 버티고 있으니 건양제 역시 독단적으로 면죄부를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옆에서 여전히 쌩쌩한 배현준을 힐끗 보았다. 배현준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가 시선이 느껴지자 덤덤하게 말했다.“아버지, 만약 조정의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효를 내세워 저에게 군주를 기만한 죄를 덮어씌우려 하신다면, 송구하오나 저는.... 거절하겠습니다.”한 대 쥐어박고 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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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화

경왕비는 걸음을 멈추고 경악한 눈으로 시녀를 바라보았다.“저 사람들이 얘기 중인 사람이 혹시 나야?”그간 경왕비는 흠잡을 데 없는 명성을 쌓아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어찌 하룻밤 사이에 이토록 폄하당한단 말인가.시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몇 마디 더 주워들었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이 그러했기에 결국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경왕비는 굳어진 안색으로 침묵한 채, 회랑 아래에 꿇어앉은 부자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 명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구부정한 자세로 바늘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마마, 전하께서 더는 버티지 못하실 듯합니다.”시녀가 나직이 권했다.경왕비 역시 지금의 판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더 끌어봤자 다치는 것은 경왕의 몸과 자신의 명성뿐이었다. 건양제의 뒤에는 서 태후가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었다. 서 태후는 꾀병을 부리며 경왕부의 항복을 압박하고 있으니, 결국 돌고 돌아 모든 과실은 경왕부가 짊어질 판이었다. 결국엔 지는 판이었다.경왕비는 눈시울을 붉히며 경왕의 곁으로 다가갔다.“전하, 경주는 제가 잘 달랬으니 이 혼사는 없던 일로 하시지요.”경왕은 약 기운 탓에 정신이 몽롱하면서도, 겨우 정신을 가다듬으며 경왕비를 달랬다."아니.... 나는 괜찮다니까...."“전하, 억지로 맺은 인연은 불행만 가져올 뿐입니다. 현준이가 경주에게 마음이 없다고 하니, 차라리 깔끔하게 찢어지는 것이 원수지간이 되는 것보다 낫습니다.”경왕비가 훌쩍이며 목 메인 소리를 하니, 경왕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배현준을 매섭게 쏘아보았다.“관두자, 네 뜻대로 해주마!”그러나 배현준은 전혀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콧방귀를 뀌었다. 곁에서 경왕비가 타이르듯 거들었다.“현준아, 네 아버지께서 이리 양보하셨거늘 어찌 또 노여움을 돋우느냐. 불만이 있으면 좋게 대화로 풀 생각을 해야지.”배현준이 눈썹을 쓱 올리며 경왕비를 향해 냉소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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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화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리러 왔습니다.”건양제는 그 말을 듣고 손을 휘저었다.“자녕궁에나 가보거라. 네 혼사 때문에 태후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다.”“예.”배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녕궁으로 걸음을 옮겼다.서 태후는 소식을 전해들은 뒤였다. 다가오는 배현준의 안색이 제법 좋아 보이자, 서 태후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유국공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리지 않았을 게다. 자식이라곤 지영이 한명뿐이니, 매질을 하든 욕을 하든 네가 좀 참거라.”배현준은 서 태후가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것에 조금 놀랐다.“지영이는 참하고 좋은 아이니, 꼭 아껴주고 소중히 대해야 한다.”서 태후가 거듭 당부했다.“할마마마, 염려 마십시오. 꼭 그리하겠습니다.”서 태후는 배현준의 영리한 대처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는 일이 터졌을 때도 성급하게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가 만약 유지영을 신경 쓰는 기색을 아주 조금이라도 내비쳤다면 틀림없이 경왕비에게 약점을 잡혔을 터였다. 그랬다면 민경주와의 혼사는 더욱 까다롭고 골치 아파졌을 게 분명했다.“소 상궁.”서 태후가 나직이 부르자, 소 상궁이 미리 준비해 둔 연고를 건넸다. 배현준은 싱긋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감사합니다, 할마마마.”무릎이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자신보다 훨씬 처참했던 경왕의 모습을 떠올리니 차라리 하루 이틀은 더 꿇어앉아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배현준은 약을 바른 뒤 곧장 출궁하여 유국공부로 향했다.한편, 경왕부.부축을 받으며 돌아온 경왕은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의원이 달려와 다친 등에 약을 바른 후에야 침상에 엎드려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는 여전히 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욕설을 내뱉었다.“그 망할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호위가 다가와 아뢰었다.“전하, 세자께서는 유국공부로 향하셨습니다.”유국공부라는 말에 경왕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경왕비가 일찍이 알아본 결과, 배현준과 유지영은 사석에서 만난 적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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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8화

유국공부 대청.분위기가 다소 엄숙한 가운데, 유씨 노부인이 상석에 앉아 있고 그 왼쪽 하단에는 유정남이 자리했다. 배현준은 대청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는 푸짐한 예물을 들고 와서 유정남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국공 어르신, 오해는 이미 풀렸습니다. 이번 사단은 전적으로 경왕부의 과실이니, 부디 화를 거두어 주십시오.”유정남은 이 혼사가 내심 탐탁지 않았다. 경왕비라는 계모가 얼마나 까다롭고 영악한지는 차치하더라도, 경왕 역시 차남만 편애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적장자인 배현준에게는 통 관심도 없으면서 툭하면 매질에 욕설을 일삼았으니, 황제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세자 자리는 진작에 사람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 숨 막히는 집안에 딸이 시집을 가서 과연 마음 편히 살 수는 있을지 의심스러웠다.“큰애야, 이 혼인은 태후께서 하사하셨고 경성 모두가 다 알고 있지. 하물며 오해가 있었고 경왕부에서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섰으니 이쯤에서 덮자꾸나.”유씨 노부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문의 명성이었다. 만약 이번 혼사마저 깨진다면 유지영은 무려 두 번이나 파혼을 당하게 되는 셈이었다.유정남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소맷자락에서 빼곡한 글씨가 적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이걸 세자가 썼는가?”배현준은 슬쩍 눈길을 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이어 유정남이 몇 가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자, 배현준은 거침없이 답변하며 물샐틈없는 논리를 펼쳤다. 그 대답에 유정남의 분노도 다소 가라앉았다.“폐하께서 세자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칭찬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네. 나와 한 판 겨루어 볼 텐가?”유정남의 물음에 배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마당으로 나가 맨손으로 초식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몇 차례 합을 겨루며 기량을 시험해 본 유정남은 손을 거두고 배현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유흥과 도박을 일삼는 방탕한 한량이라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오늘 겪어본 바에 따르면, 눈앞의 사내는 결코 소문처럼 게으르고 방탕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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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밖에서 경왕비가 당도했다는 전갈이 왔다.유정남은 미간을 찌푸리며 배현준을 슬쩍 바라보았다. 문득 지난 세월 동안 그에 관한 일은 소문으로만 들었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자연스레 후계 싸움이 연상되었다. 유정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세자, 이 혼사는 지영이가 직접 선택한 길이라네. 나 역시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니, 자네도 몰랐던 정혼자 일로 자네를 탓하진 않겠소. 이 일은 이쯤에서 덮어두도록 하지.”“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공 어르신.”대청으로 돌아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경왕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따르는 시종들이 한가득 예물을 들고 있었다. 경왕비는 미안한 기색을 가득 담아 유정남에게 말했다.“모든 게 오해였을 뿐입니다. 이제 경왕부에서도 정혼자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으니, 유국공께서도 부디 화를 거두어 주십시오. 현준이에 대한 노여움 푸시고, 귀한 인연을 그르치지 않게 도와주셨으면 합니다.”유정남은 여인들을 상대하는 데 서툴렀고, 어찌 되었든 경왕비가 딸의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니 너무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인 데다 태후 마마의 하사혼이니, 국공부 역시 혼사를 반대할 명분은 없습니다.”경왕비는 잔뜩 저자세로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유국공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날 제가 다소 성급하게 찾아뵀던 것이 사실입니다. 현준아, 난 군주가 몹시 마음에 든단다. 너같이 무뚝뚝한 아이가 사리에 밝고 온화한 처자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복 받았구나.”배현준은 가식적인 경왕비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현준아, 우리 경왕부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으니, 오늘 네가 국공부에 확실하게 사죄를 드려야지.”경왕비가 바닥을 가리켰다.“무릎을 꿇고 노부인과 유국공께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하거라. 그리고 앞으로 군주를 절대로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거라.”그 말에 유정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옆에 있던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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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화

분위기가 팽팽하게 대치하며 경왕비가 진퇴양난에 빠지자, 결국 유씨 노부인이 나섰다.“앞으로 한 가족이 될 처지인데, 경왕부의 성의는 우리 국공부에서도 충분히 헤아렸네. 무릎을 꿇는 것까지는 하지 말게나.”배현준은 눈을 내리깔며 유씨 노부인의 말에 수긍했다. 경왕비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왕부의 과실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부인. 양가의 혼사가 이대로 유지된다니 저도 안심이군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배현준에게 당부했다.“현준아, 네 아버지 곁에 돌볼 사람이 마땅치 않아 나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구나.”배현준 역시 오래 머물지 않고 유씨 노부인과 유정남에게 공손히 작별을 고했다.해야 할 말은 전부 마쳤고 국공부의 용서도 받았다.유지영을 만나고 싶다면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기에 굳이 이 민감한 시기에 그녀의 명성에 흠이 갈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두 사람이 함께 물러가자, 유씨 노부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후비로 들어온 경왕비가 겉보기엔 유순해 보여도 그 속은 참 음험하고 까탈스럽구나. 지영이가 시집을 가면 마음고생 꽤나 하겠어.”사실 유씨 노부인은 처음부터 이 혼사가 탐탁지 않았다.다만 당시 상황이 급박하고 국공부의 체면을 위해 하는 수 없이 허락한 거였다. 유정남은 노부인을 위로했다.“국공부가 건재하니 지영이가 구박을 받는다면 제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이후 유정남은 친히 유수각으로 걸음을 옮겼다.“이제 세자의 정혼자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게다가 향후 십 년 동안은 첩을 들이지 않겠다는 약조까지 받아냈지. 그래도 혹시 다른 생각이 있거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이 아비에게 말하거라.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뜻을 이루어 줄 테니.”만약 딸이 파혼을 원한다면 유정남은 모든 것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딸아이가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만이었다.유지영은 그 말끝에 담긴 진의를 알아차리고 감격한 눈빛으로 유정남을 바라보았다.“아버지, 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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