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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hat ng Kabanata ng 피안을 거슬러: Kabanata 581 - Kabanata 590

772 Kabanata

제581화

서소현이 보낸 서신은 애초에 자녕궁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서 태후는 매일같이 유지영과 함께 뜰을 거닐며 당부했다."자주 걸어 다녀야 출산에 도움이 된단다."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 시진씩 산책이 이어졌다.그러다 깊은 밤, 마침내 편전에서 산통이 시작되었다는 기척이 들려왔다.밤새 뒤척이던 서 태후가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소 상궁, 어서 편전으로 가보거라. 영 마음이 놓이질 않네."소 상궁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밖에서 운청이 문을 두드렸다."왕비 마마께서 출산이 임박하셨습니다!"그 한마디에 소 상궁은 쏟아지던 잠이 싹 달아났다.자녕궁에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서 태후는 직접 자리를 지키며 유지영의 출산을 살폈다.병풍 너머로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서 태후의 손에 쥔 염주가 돌아가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염불을 외웠다.안절부절못하던 서 태후는 끝내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섰다.소 상궁이 다급히 만류했다."태후 마마, 마마께서 여기 계시면 산파와 의녀들이 긴장하여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태의가 태아의 위치도 알맞고 무사히 해산할 것이라 하였습니다."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온 서 태후는 방 안을 쉴 새 없이 서성였다.어느덧 두 시진이 흘렀다.먼동이 트고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서 태후는 속이 타들어 가면서도 차마 재촉은 하지 못한 채, 뚫어져라 병풍만 바라보며 초조하게 안을 살폈다.아침 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전각 안을 가득 채웠다."무사히 출산하셨습니다!""왕비 마마와 아기씨 모두 무사하십니다."산파가 밖으로 나와 기쁜 소식을 알렸다.서 태후는 밤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그제야 스르르 풀렸다.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녀는 치맛자락을 쥐고 다급히 내전으로 향했다."태후 마마, 산실은 아직 피냄새가 깨끗이 가시지 않아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산파가 만류했다.서 태후는 그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는 곧장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땀범벅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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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2화

진(宸) 자로 이름이 정해지자 유지영도 깜짝 놀랐다."이 글자는 너무 귀합니다."진(宸)은 제왕의 별을 뜻했다. 황자가 쓴다 해도 신중해야 할 글자를 일개 친왕의 아들에게 내리다니 파격적인 일이었다.하지만 서 태후는 기분 좋게 웃었다."폐하께서 친히 아이에게 내리신 이름이니 거절하지 말거라. 우리 꼬마 세자는 장차 복을 듬뿍 받을 게야.""세자라니요?"곁에 있던 소 상궁이 거들며 웃었다."방금 폐하께서 이름을 내리시며 작위도 함께 하사하셨습니다. 현왕 전하의 적장자이시니 당연히 세자이시지요."유지영은 분에 넘치는 은총에 황송할 따름이었다.전생에 건양제와 마주칠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는 늘 어른이 아랫사람을 대하듯 그녀에게 온화하게 대했다. 손에 꼽을 정도의 만남에서도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건양제는 재위 기간 내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정사에 매진했다. 윗사람을 속이고 백성을 가혹하게 대하는 짓을 가장 혐오하는 성군이었다.애석하게도 황자 시절 정적의 흉계에 당해 몸이 상한 탓에, 좋은 황제임에도 수명이 길지 못했다."폐하의 옥체가 상하셨다 들었는데, 요 근래 요양은 잘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유지영이 조심스레 물었다.서 태후는 세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아이를 요람에 눕혔다. 그녀가 눈짓을 보내자, 소 상궁이 궁인들을 데리고 밖으로 물러났다.사람들의 기척이 멀어지자 서 태후의 얼굴에 비로소 근심이 서렸다."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 북명 대사가 줄곧 곁에서 조리를 돕고는 있지만, 완치하기는 어려울 듯싶다.""그래도 십 년 안팎은 거뜬할 게다."유지영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자녕궁에서 몸을 추스른 지 한 달이 지났다.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자 황궁에서 작은 축하 연회가 열렸다.서 태후는 몹시 아쉬워했지만, 명색이 현왕비인 유지영이 자녕궁에 마냥 머물 수는 없었다. 자칫 현왕부에 불필요한 구설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결국 유지영은 연회가 끝난 다음 날 바로 현왕부로 돌아갔다.현왕부는 여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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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3화

서씨 노부인의 체면조차 묵살한 유지영이었다.하물며 뻔뻔하게 찾아온 이모 따위를 신경 쓸 리 만무했다.현왕부 정문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선물을 든 시녀 두 명이 공손한 태도로 문가에 서서 기다리며, 이따금씩 고개를 빼고 저택 안의 동태를 살폈다.마침내 현왕부의 책임 상궁 한 명이 다가와 통보했다."왕비 마마께서는 산후조리 중이시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다."상궁은 문을 지키는 호위들을 향해 매섭게 호통을 쳤다."현왕비 마마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함부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할까!""명심하겠습니다!"호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말에 두 시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얼굴이 붉어졌다. 그중 한 명이 억지로 용기를 내어 나섰다."상궁, 우리는 영씨 가문에서 왔습니다. 갓 태어나신 세자 저하께 축하를 올리고자 찾아온 것이지요. 저희 마님은 영씨 가문의 큰부인이십니다."시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덧붙였다."저희 마님은 다름 아닌 태후 마마의 친언니이십니다."책임 상궁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경멸 어린 눈으로 시녀를 한 번 훑어보고는, 그들 뒤에 세워진 마차를 향해 보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친언니는 고사하고 친어머니가 와도 태후 마마 앞에서는 좋은 소리 한마디 듣지 못했다. 태후 마마께서 서씨 가문과 엮이는 것을 가장 혐오하신다는 건 온 경성이 다 아는 사실이거늘. 에잇, 재수 없는 것들! 썩 꺼지지 못할까!"노골적인 모욕에 두 시녀는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반박 한마디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쫓겨나고 말았다.마차 안에서 모든 걸 듣고 있던 서소현은 손수건을 찢어질 듯 꽉 틀어쥐었다. 평소의 온화하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고, 두 눈에는 독기가 번뜩였다."서완!"서소현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지난 한 달간 서소현은 하루도 빠짐없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했다.정일품 승상의 저택부터 칠품 말단 관리의 부인까지, 온 경성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건만 그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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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4화

서소현이 정군왕비의 마차를 타고 군왕부로 들어갔을 때부터 소식은 이미 서 태후의 귀에 들어갔다.서 태후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평소처럼 책을 읽고 바둑을 두었다. 이따금 화초를 손질하거나 세자에게 입힐 옷을 손수 짓기도 했다.아침까지 푹 자고 일어난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맑은 죽 한 그릇과 새우 만두 몇 개를 맛있게 먹었다."태후 마마."소 상궁이 곁으로 다가와 차를 올렸다.찻잔을 내려놓은 서 태후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있다니, 참으로 고생이 많구나.""영 부인이 너무 고집을 부립니다. 이러면 마마께서만 난처해지시지 않습니까."소 상궁의 만류에 서 태후가 마지못한 척 입을 열었다."됐으니, 안으로 들이거라."반 시진 후.소 상궁이 직접 서소현을 이끌고 입궁했다. 굽이진 회랑과 겹겹의 궁문을 지나 마침내 자녕궁에 다다랐다.웅장하고 엄숙한 자녕궁의 현판이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문지방을 넘으며 서소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자녕궁의 풍경을 애써 외면했다.회랑 아래에는 수십 명의 궁녀와 내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닥을 쓰는 자도, 화초를 나르는 자도 있었으나 다들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계단을 오르려던 찰나, 소 상궁이 서소현의 앞을 막아섰다."태후 마마께서 수왕 전하와 담소를 나누고 계시니, 영 부인께서는 잠시 기다리십시오."'수왕?'서소현은 흠칫 놀랐으나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손끝을 꽉 말아 쥐었다. 이 중요한 시점에 수왕을 부른 것은 분명 고의일 것이다.회랑에 선 그녀와 내전 사이에는 얇은 휘장 하나만 쳐져 있었다. 휘장 너머로 안에서 움직이는 인영이 어렴풋이 비쳤다."영씨 가문의 여식이 뭇사람이 보는 앞에서 순결을 잃고 덕비의 친정 조카와 정혼하게 되었다지. 네가 정 그 아이를 곁에 두고 싶다면, 내가 덕비에게 말을 잘해 주마."문밖으로 서 태후의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서소현의 안색이 차갑게 식었다. 장장 십오 년 만에 듣는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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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5화

서소현은 도저히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막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소 상궁이 어깨를 꽉 억누르며 낮게 호통을 쳤다."영 부인, 이곳은 자녕궁입니다. 함부로 예법을 어겼다가는 곤장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싸늘한 경고에 서소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그때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서 태후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배이수에게 당부했다."넌 친왕의 신분이니 처첩을 여럿 두는 것이야 흠잡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 근본도 없는 헤픈 여식들을 함부로 곁에 두어서는 안 된다. 명심해야 한다.""할마마마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이윽고 대화가 멎었다.궁녀 한 명이 휘장을 걷고 나오더니 소 상궁을 향해 말했다."태후 마마께서 들이라 하셨습니다."소 상궁은 그제야 서소현을 이끌고 내전으로 들어섰다.내전 안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단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상석에는 봉황이 수놓아진 화려한 예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관리를 잘 받은 얼굴에는 주름 한 점 없었고, 머리에 꽂은 금빛 봉황 비녀가 서 태후의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얼굴을 마주한 서소현은 경악과 질투에 휩싸였다.십오 년이나 지났건만 서완은 예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큰언니?"서 태후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손에 염주를 쥔 채, 비웃음이 섞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오랜만에 뵙는데 어찌 이리 노인네가 다 되셨습니까?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서소현은 이가 덜덜 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간 영씨 가문의 안살림을 도맡고 연달아 네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기력을 크게 쇠한 데다, 지난 한 달간 마음고생까지 겹친 탓이었다. 거칠어진 피부와 푹 꺼진 눈두덩이 때문에 동년배들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소인, 태후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서소현이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서 태후는 곁에 있던 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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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6화

서 태후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이따금 손에 쥔 염주를 굴렸다. 희고 가느다란 손톱에는 요염하게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게다가 온몸에서 풍기는 나른하고 여유로운 기품은, 오랜 세월 떠받들려 살아온 최고 권력자에게서 나오는 위압감이었다.서소현은 그 모습에 속이 뒤틀렸다.같은 서씨 가문의 딸이건만, 어째서 서완은 저리 높은 곳에 앉아 호사를 누리고 그녀는 온갖 냉대를 받으며 이리저리 치여야 한단 말인가.생각할수록 벅차오르는 질투심에 서소현은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만 끝내 화를 억눌렀다."어머니께서 경성에 서신을 보내지 않으셨다면, 까맣게 잊고 살 뻔했습니다. 큰언니, 그간 평안하셨습니까?"서 태후는 짐짓 다정한 척 물었다.서소현은 심호흡을 한 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태후 마마의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영씨 가문에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아 기르며 안주인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혼인한 지 십육 년이 지났으나 부군께서는 여전히 제게 다정하십니다."가슴속에 맺힌 응어리 때문인지, 서소현은 서 태후 앞에서 절대 초라하거나 겁먹은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서소현의 그 알량한 허세는 서 태후의 눈에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태후 마마께서는 일찍 입궁하시어 부귀영화를 누리셨지요. 허나 부부간의 정이나 자식들을 품에 안은 기쁨은 누려보지 못하셨을 겝니다. 자식을 기르는 일이 고되긴 하나, 아이들이 커가며 제게 어머니라고 부를 때면 그깟 고생은 다 잊힌답니다."서소현의 세치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그녀는 슬쩍 손을 들어 귀밑머리를 매만졌다. 은연중에 손목에 찬 영롱한 가보 옥팔찌가 드러났다.과거 영씨 가문이 서완에게 보냈던 예물 중 하나였다.그것이 지금 서소현의 손목에 버젓이 걸려 있었다.그러나 서 태후는 조금도 질투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는 서소현이 한심하고 가련해 보일 뿐이었다.서 태후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찻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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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7화

"그게 무슨!"서소현은 두 눈을 부릅뜨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그 아이들의 몸에는 태후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태후마마, 우리 자매가 만나자마자 이리 서로의 상처를 헤집어야겠습니까? 태후께서 내게 원망을 품고 있는 건 알지만,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그만 앙금을 털어낼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평정심을 잃고 발끈하는 서소현을 보며, 서 태후는 마치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흥미롭게 감상할 뿐이었다.그때, 밖에서 폐하께서 납셨다는 내관의 통보가 들려왔다.휘장이 걷히고 명황색 곤룡포를 입은 인영이 안으로 들어섰다.건양제의 시선이 상석에 앉은 여인에게 닿았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고귀한 자태. 평소와는 다른 화려한 치장이었다. 그는 순간 흠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갈무리했다."어마마마.""황상, 오셨습니까."서 태후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가볍게 손짓을 했다."정무로 바쁘실 터인데, 오늘은 어찌 발걸음을 하셨습니까?""오늘 어마마마께서 태의를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옥체가 불편한 곳이 있는지 염려되어 찾아왔습니다."건양제는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주먹만 한 야명주를 꺼내 보였다."당나라에서 진상한 물건입니다. 이것을 곱게 빻아 얼굴에 바르시면 피부를 맑고 윤택하게 하는 데 탁월하다 하더군요."서 태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저도 모르게 자신의 주먹을 쥐어보았다. 주먹보다도 큰 귀한 보물을 빻아 가루로 만들라니, 그야말로 엄청난 사치였다.서 태후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엎드려 있던 서소현이 건양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죄인, 폐하께 문안 올립니다.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죄인이라?"건양제는 의아한 눈빛으로 서소현을 굽어보았다. 당장 이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서소현이 다급히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폐하, 이 죄인은 영씨 가문의 큰부인이자 태후 마마의 친언니인 서소현이옵니다. 규수 시절 태후 마마와 약간의 오해가 있었기에, 오늘 이리 사죄를 올리고자 찾아왔습니다.""그대가 바로 그 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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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8화

건양제는 자녕궁에서 저녁을 마친 후에야 자리를 떴다. 상 내관이 조심스레 아뢰었다."폐하, 정군왕과 영 대감, 영정, 그리고 영 부인이 아직도 전각 밖에 꿇어앉아 있습니다."그 말을 들은 건양제는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명했다."그 백씨라는 첩실이 어디 출신인지 알아보거라. 그리고 그 첩실 슬하의 자식들 중 발탁할 만한 인재가 있는지도 알아보고."상 내관은 제 귀를 의심했다. 황제께서 일개 첩실의 아이를 챙기려 하시다니?그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건양제의 뒷모습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의정전 밖에는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제법 한기가 돌았다.정군왕은 의정전 현판만 뚫어져라 응시할 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이따금 순찰 도는 발소리만 주변을 맴돌았다.정군왕 곁에 꿇어앉은 영 대감은 연로한 탓에, 장장 네 시진이나 엎드려 있자니 진작에 다리가 풀린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버티는 중이었다.영정은 겁에 질린 얼굴로 이따금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서소현을 흘겨보았다. 눈가에 서린 분노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황궁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욕설을 퍼부었을 기세였다.네 사람 중 자세가 가장 꼿꼿한 것은 서소현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주먹을 꽉 쥔 그녀는, 눈가에 핑 도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독기를 품고 있었다.둥둥!야경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관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군왕 전하, 곧 궁문이 닫힐 시간이니 이만 돌아가십시오."내관은 손짓으로 영씨 일가에게도 물러가라는 뜻을 전했다.정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두 무릎이 시큰거리고 욱신거렸다. 그는 내관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관, 폐하께서 따로 하신 말씀은 없는가?"전갈을 가져온 내관은 입을 다문 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소현을 힐끗 쳐다보고는,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그 눈빛에 정군왕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와 서소현은 오늘이 초면이었고, 이전에는 일말의 왕래조차 없었다. 헌데 어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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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9화

영 대감이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소현에게 쏠렸다.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이미 변명거리를 생각해 둔 서소현은 짐짓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렇게 무릎을 꿇고 빈 덕분에 태후 마마의 노여움도 어느 정도는 가라앉았습니다. 다만 오늘 제 방식이 너무 요란하여 마마의 심기를 거스른 탓에, 폐하께서 의정전 밖에서 마저 벌을 받아 마마의 체면을 세워주라 명하신 겝니다."서소현은 흘끗 영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마마와 저는 한 배에서 태어나 어릴 적엔 누구보다 각별했습니다. 허나 그놈의 혼사 때문에……."그 말에 영정은 멋쩍은 듯 시선을 피했다."태후 마마께선 친정이 혼처를 바꾼 것도 원망하시지만, 영씨 가문이 그 혼사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에도 앙심을 품고 계십니다."서소현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당시 영씨 가문 역시 서씨 가문의 적장녀인 그녀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했기에 혼사가 바뀌었을 때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들은 사주단자에 적힌 혼약의 대상이 서씨 가문의 적녀라는 점만 내세워 어물쩍 넘어갔다.그 말을 듣자 영씨 노부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경성으로 올라온 날부터, 그녀는 밤마다 영씨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악몽에 시달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당시 혼처를 바꾸는 데 동조했던 것이 이제야 뼈저리게 후회되었다.그 일만 아니었다면 영씨 가문이 황실에 미운털이 박혀 대대손손 벼슬길이 막히는 억울한 수모를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이것이 영씨 가문의 남모를 한이었다."태후 마마께서 아직도 마음의 앙금을 풀지 못하셨다면, 내가 직접 입궁하여 마마를 뵙겠소."그때 영정이 불쑥 나섰다.서소현은 흠칫 놀라 지아비를 쳐다보았다. 서른여섯의 영정은 여전히 하얀 피부에 탄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풋풋함은 사라졌으나 세월이 내려앉은 얼굴에는 온화하고 고귀한 기품이 흘러, 또래 사내들에 비하면 단연 돋보이는 미남이었다."네가 태후 마마를 뵙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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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0화

한편, 정군왕은 잔뜩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리며 정군왕비를 다그쳤다."당신은 우리 정군왕부가 당한 게 아직 부족하다 여겨 이러는 게요? 어찌하여 쓸데없이 영 부인에게 훈수를 두었단 말이오!"오늘 아침, 조회에 참석한 정군왕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정군왕비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아본 뒤에야 군왕이 황궁에 억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터였다.정군왕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 그저 우연의 일치일 겁니다."꼬박 하루를 마음 졸이며 기다리다 정군왕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치자, 정군왕비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그녀는 조마조마한 목소리로 변명했다."전하, 저는 그저 군왕부를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한 일입니다. 영 부인은 어찌 되었든 태후 마마의 친언니가 아니십니까……."황제가 고작 그깟 일로 정군왕을 붙잡아 두고 장장 여섯 시진이나 무릎을 꿇리실 줄 그녀가 어찌 알았겠는가.정군왕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준형이가 지금 변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궁에 계신 두 분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그 아이가 어찌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소? 게다가 청하 최씨 가문이 요 근래 수왕과 부쩍 가까이 지내고 있는 판국이오. 당신이 정군왕비의 자리마저 지키지 못하고 버려진 패가 된다 해도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서슬 퍼런 경고에 정군왕비도 겁에 질렸다."영 부인과 태후 마마 사이의 앙금을 당신이 모를 리 없을 터. 위로는 정일품 승상부터 아래로는 말단 칠품 관리들까지 하나같이 몸을 사리며 피하건만, 당신 혼자 나서서 알량한 수작을 부렸소."정군왕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부인의 그 지독한 어리석음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위태로운 시국에 쥐죽은 듯 엎드려 있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궁에 계신 그 두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다니!"제,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정군왕비는 겁에 질려 횡설수설 변명했다."저, 저는 그저 그들이 가장 힘들 때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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