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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os os capítulos de 개였던 당신에게: Capítulo 61 - Capítulo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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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2 화

"…….""대답 안 해줄 거야?"은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눈동자는 야경을 담은 채 아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노도, 슬픔도, 갈망도 아닌, 스스로의 마음조차 정하지 못해 어떤 색으로도 읽히지 않는 눈빛이었다.석호는 그 눈빛을 마주하고 멈추었다. 분노였다면 익숙했을 것이다. 공포였다면 오히려 편했을 것이다. 석호가 10년 동안 봐온 채은성의 눈빛은 언제나 석호를 향한 반응이었으니까. 경멸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굴복하거나.그런데 지금 눈앞의 눈빛은 달랐다. 은성은 석호를 보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석호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흔들리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의 눈빛.그 순간 석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채은성이 스스로 선택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은성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석호를 향해 무릎을 꿇는 것도. 모든 장면 속에서 은성은 언제나 석호의 세계 안에 존재했다. 석호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반응하는 존재였다.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채은성은, 석호의 머릿속에 단 한 번도 살아있지 않았다.그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석호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두려워졌다."……나가지 않을 거예요."은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의 차가운 반말 대신, 석호에게 익숙한 그 나긋나긋하고 유순한 존댓말이 덧입혀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맹수에게 기꺼이 목줄을 내어주겠다는 듯, 어찌 보면 잔혹한 다정함이었다."나도 알아요. 밖에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은성의 시선이 다시 창문으로 향했다. 아래로 아득하게 펼쳐진 서울의 불빛들. 저 밑에서 여전히 자신을 향한 수배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그러니까 아직은."'아직은'이라는 한 단어가 석호의 가슴을 예리하게 베고 지나갔다.석호는 아무 말 없이 은성의 곁에 앉았다. 둘은 한동안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호의 다친 손이 은성의 손 가까이에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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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3 화

통화가 끊겼다. 은성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통화 기록을 지웠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자, 서울의 낮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재호의 마지막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 남자를 파멸시키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그 남자 곁에 있고 싶으십니까?'은성은 아직 그 대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 은성에게 결정하기 가장 무섭고 어려운 일이었다. 서재 문이 열리고 석호가 나왔을 때, 은성은 여전히 창가에 앉아 있었고 손에는 태블릿이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었다. 석호는 은성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피를 두 잔 내리고, 한 잔을 은성의 손 가까이 조용히 내려놓았다.은성은 그 잔을 바라보기만 했고, 석호는 맞은편에 앉아 자신의 잔을 들고 창밖을 함께 바라보았다. 은성은 식어가는 커피잔의 테두리를 아주 천천히, 느리게 매만지기만 할 뿐, 둘 사이에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 침묵 안에는 이전과 같은 무력함이 아닌, 자신이 쥐어야 할 선택의 방향을 가늠질 하는 저울질이 조용히 고여 있었다.재호가 말한 일주일의 유예가 끝나는 마지막 날 아침.동이 트기 전부터 굳게 닫힌 서재에 틀어박힌 석호의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대리석 책상 위, 세 번이나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잔 옆으로 거대한 모니터가 창백한 빛을 뿜어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해외 페이퍼 컴퍼니로 향하는 최종 자산 이전 내역. 조금의 오차도 없는 숫자들의 나열이었다.하지만 마우스를 쥔 석호의 커다란 손은 확인 버튼 위에서 딱딱하게 굳은 채 허공을 맴돌았다.불과 얼마 전이었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눌렀을 버튼이었다. 이 버튼 하나면 태성그룹의 모든 자산이 완벽하게 세탁된다. 채은성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10년의 세월을 갈아 넣어 빚어낸 장대한 계획의 완성이었다.그런데 좀처럼 손끝이 움직이지 않았다.블라인드 틈새로 서울의 아침 해가 붉게 스며들고 있었다. 석호는 충혈된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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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4 화

오후 세 시.띠리릭, 묵직한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고요한 펜트하우스를 울렸다. 창가에 웅크리고 있던 은성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며칠 내내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던 석호가 직접 현관까지 나가 문을 열어준 모양이었다.대리석 바닥을 밟고 거실로 들어서는 구두 발소리는 분명 두 개였다.앞장서 걷는 사람은 빈틈없이 재단된 수트 차림의 이재호였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석호의 굳은 턱관절은 당장이라도 눈앞의 목을 물어뜯을 맹수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두 남자가 동시에 이 거실에 들어선 것은 처음이었다.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그들을 응시했다. 재호가 거실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대리석 테이블 위로 봉투를 가볍게 던져놓았다."약속한 날짜가 됐군요."재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차분하고 건조했다. 지난번처럼 은성을 들먹이며 노골적으로 신경을 긁는 억양도, 비릿한 조소도 없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사무적인 태도. 그것이 오히려 석호의 숨통을 더 답답하게 조여오고 있었다.석호는 재킷도 챙겨 입지 않은 흐트러진 차림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눈동자가 재호와 은성을 번갈아 집요하게 훑었다.재호가 봉투 안에서 구김 없는 서류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채은성 씨의 무죄 입증 자료입니다."순간, 거실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원본은 이게 전부입니다. 사본 따위는 남겨두지 않았다는 건 제가 직접 보증하죠."은성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 서류를 향했다. 고작 A4 용지 몇 장. 자신을 범죄자로 전락시키고 끝내 뒷골목으로 내몰았던 그 억울한 사슬을 단숨에 끊어낼 수 있는 증거들. 저 종잇장만 손에 넣으면 이 감옥 같은 펜트하우스를 벗어나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하지만 어째서인지, 그토록 갈망했던 동아줄을 눈앞에 두고도 심장은 기형적일 만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석호는 쿠션에 팔을 기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조건이 있겠지."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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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5 화

은성이 먼저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대리석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은성의 시선이 고스란히 남겨진 서류 봉투에 머물렀다. 하얀 손을 뻗어 봉투 겉면을 매만지던 은성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왜…."은성의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은 듯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석호를 향한 말이었다."왜...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차라리 억눌린 울음에 가까운 메마른 중얼거림. 그것은 석호를 향해 묻는 것인지, 아니면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린 자기 자신을 향해 묻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소파에 파묻힌 석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그 무거운 침묵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은성은 그 침묵 안에서 오래도록 서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처음부터 이 서류를 밀어내며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지 않았더라면, 내게 그저 평범하게 손을 내밀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대답했을까.그 가정에 대한 답을 은성 스스로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가장 끝없는 혼란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은성은 끝내 봉투 안의 서류를 꺼내지 못한 채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창가로 돌아가 무릎을 모으고 웅크려 앉았다. 은성의 가녀린 손가락이 목을 조르고 있는 백금 초커를 불안하게 매만지기 시작했다.석호의 시선이 은성의 가녀린 뒷모습에 처절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봉투에 손을 얹었다가 떼는 것을 보았다. 창가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목의 링을 쓰다듬는 손가락을 보았다.저 손길이 멈추지 않는 한, 은성은 여전히 자신의 곁에 머물 것이다. 석호는 그렇게 맹신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미친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속여가며 매달렸다.석호가 비틀거리듯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한참 동안 은성의 마른 등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서재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문을 닫기 직전,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은성의 은발이 마지막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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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6 화

석호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은성도 마찬가지였다.두 사람은 커다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완벽하게 온도를 맞췄을 수프와 빵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싸늘하게 식어갔다. 석호는 검은 커피만 삼켰고, 은성은 의미 없이 빵의 가장자리를 조금 뜯어내다 내려놓았다.창밖으로 서늘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져 내렸다."이재호한테 연락했어요?"적막을 깬 것은 은성이었다."……아직."석호의 목소리는 바싹 메말라 있었다. 밤새 모래를 삼킨 것처럼 까끌거리고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었다."오전까지라고 했잖아.""알아."짧은 대답. 석호는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쥔 채, 수면 위로 흔들리는 검은 액체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끝내 은성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은성은 그 초라한 옆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10년. 이 남자가 오직 채은성 하나를 옭아매기 위해 제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은 시간이었다. 그 방식이 얼마나 끔찍하고 폭력적이었든 간에, 그 맹목적인 시간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은성의 머릿속에, 언젠가 석호의 스마트폰에서 보았던 유언장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천문학적인 해외 신탁 기금의 유일한 수혜자 란에 적혀 있던 자신의 이름."윤석호."은성이 나직하게 불렀다.'주인님'이라는 가증스러운 칭호도, 다른 어떤 껍데기도 아니었다. 은성이 처음으로 이 펜트하우스에서 윤석호의 온전한 세 글자를 불렀을 때.커피잔을 쥐고 있던 석호의 굵은 손마디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물어봐도 돼?""……뭘.""당신이 원했던 게 뭐야. 진짜로."석호는 대답하지 않았고, 은성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유리창 너머로 날아오른 새 한 마리의 그림자가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식탁 위를 가로질렀다."처음에는."석호가 힘겹게 억눌린 입술을 뗐다."태성을 무너뜨리고 싶었어. 나한테 한 짓들에 대한 값을 받아내고 싶었지."지독하게 낮고 평평한 목소리. 감정을 철저하게 도려낸 자리에 뼈대만 남은 진실이 흘러나왔다."그런데."석호의 목울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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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7 화

석호는 그 서늘한 기시감을 뼈저리게 알아챘다."……그래."석호가 대답했다. 처음으로 은성을 통제하려 들지 않은 채.거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은성은 목을 옥죄고 있는 백금 초커를 하얀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졌다. 자물쇠의 열쇠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가 억지로 끊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은성의 숨통을 조이는 것은, 그깟 금속의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었다."한 가지만 물어볼게."은성이 창을 등지고 서서 석호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처박혀 있던 석호의 고개가 느릿하게 들렸다."후회해?"석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어떤 부분을 말하는 건데.""전부 다."또다시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석호의 붉어진 눈시울이 미세하게 떨렸다."……후회 안 해."석호가 짓씹듯 내뱉었다."너를 내 곁에 두기 위해 썼던 그 짐승 같은 방법들은 뼈저리게 후회해. 하지만… 너를 원했던 것 자체는."문장이 다시 한번 무참히 끊어졌다. 석호는 끝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마지막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은성 역시 그 끊어진 끝을 대신 이어주지 않았다.은성은 창가에서 걸음을 뗐다. 넋이 나간 석호의 곁을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차가운 물을 한 잔 따라 천천히 마셨다. 서늘한 물길이 타들어 가던 식도를 씻어 내리는 것을 느끼며, 은성이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이삼일.""응.""그동안은 여기 있을게."석호의 흔들리는 시선이 은성의 얼굴에 꽂혔다."그게 전부야. 무슨 조건도 아니고, 나가지 않겠다는 약속도 아니야. 그냥, 이삼일."은성은 소파에 앉는 대신 다시 창가로 돌아가 섰다. 야속할 만큼 꼿꼿하고 서늘한 뒷모습이었다.석호는 한참 동안 그 닿을 수 없는 뒷모습을 눈에 새기듯 응시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대리석 테이블 위에 뒤집혀 있던 스마트폰의 액정이 짧게 번쩍였다. 방금 전 재호에게 전송한 텍스트가 화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조건 수락한다.]윤석호가 채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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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8 화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그리고 그 평온함이, 은성에게는 목을 조르던 억압보다 더 아득하고 불편하게 다가왔다.식사가 끝난 뒤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석호는 텅 빈 뚝배기의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고, 은성은 국그릇의 테두리를 쥔 채 창밖으로 짙게 깔린 어둠을 바라보았다.설거지는 석호의 몫이었다. 싱크대 앞에 선 넓고 단단한 등판이 묵묵히 물소리를 내며 그릇을 닦아내는 것을, 은성은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은성은 그저 소리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둘째 날 오후.창밖으로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은성은 창가에 몸을 기댄 채, 투명한 유리를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빗물 자국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재에서 나온 석호가 거실 소파 한구석에 거리를 두고 앉았다.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었지만 핏발 선 눈동자는 화면에 머물지 못했다. 의미 없는 마우스 휠만 몇 번 굴리던 그는 결국 모니터를 덮어버렸다."그날도 비가 왔었죠."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는 창밖을 응시하며 은성이 불쑥 입을 열었다. 석호의 굳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내가 다 젖은 채로 길바닥에 서 있었을 때.""……알아.""그때 당신이 차에 태우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누구의 대답을 바라고 던지는 질문인지, 그저 허공에 흩어지는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메마른 어조였다. 석호는 굳이 그것을 가려내려 애쓰지 않았다."몰라."석호가 바싹 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도 몰라."그날 빗속에서 채은성을 데려 오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지독한 짓이 시작조차 되지 않았더라면...잠깐의 빗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무거운 공간을 채우고 난 뒤, 은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차에서 수건 던져줬을 때요.""…….""더러워진다고 했더니, 어차피 다 내 거라고 했잖아요. 이 차도, 당신 차를 적시고 있는 내 몸도."석호의 커다란 손끝이 소파 가죽을 파고들 듯 미세하게 오그라들었다."기억해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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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9 화

은성은 그 비참한 고백을 듣고 오래도록 침묵했다. 창밖의 작은 불빛들이 두 사람의 창백한 얼굴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됐어요."은성이 남은 물을 삼키며 말했다. 과거의 폭력을 용서한다는 뜻도, 이 상처들을 잊겠다는 뜻도 아니었다. 단지, 오늘 밤은 더 이상 헤집지 않겠다는 선이었다. 석호 역시 그 의미를 알아듣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두 사람은 빈 물 잔을 손에 쥔 채 조금 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다가, 각자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은성은 제 침실로 들어가며 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 틈새로 거실의 옅은 공기가 스며들 수 있게끔, 아주 조금 열어두었다. 그것이 의식적인 허락인지 본능적인 아쉬움인지, 은성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셋째 날 아침.은성이 석호보다 먼저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향한 은성은 커피 머신을 작동시켰다. 능숙하게 원두를 내리고 머그잔 두 개를 꺼냈다. 석호가 씻고 거실로 나왔을 때, 식탁 위에는 하얗게 김이 오르는 커피 두 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석호는 그 두 개의 잔을 믿을 수 없는 듯 오래도록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고 앉았다."오늘."은성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이재호한테서 연락 올 것 같아요."커피잔의 손잡이를 쥐려던 석호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그래""준비됐어요?""…….""내가 묻는 게 아니에요."은성이 고개를 들어 핏발 선 석호의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당신 스스로한테 물어보라는 뜻이에요."석호는 그 말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은성은 재촉하지 않았다.식탁 위의 커피가 차갑게 식어갔다. 석호가 결국 식은 커피를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커피의 온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테이블 위에 엎어두었던 석호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적막한 거실에 울려 퍼진 그 작은 마찰음을 두 사람 모두 똑똑히 들었다. 석호는 액정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고도 한참 동안 숨을 죽인 채 움직이지 못했다.이재호였다.석호가 무거운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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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0 화

석호가 빈 그릇을 치우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다 잠깐 멈칫했다. 맞은편 은성의 숟가락이 완전히 멈춘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조용히 그릇을 겹쳐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은성은 식탁에 웅크리고 앉아, 그 커다란 뒷모습을 아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저녁이 내려앉았다.석호가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은성은 불 꺼진 옷장 앞에 멈춰 선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옷장 안에는 석호가 채워둔 최고급 옷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구석진 한편에, 은성이 처음 이 펜트하우스로 끌려오던 날 입고 있었던 얇은 실크 셔츠가 걸려 있었다. 석호가 버리지 않고 세탁해서 걸어둔 것이었다. 거칠게 뜯겨나갔던 단추 자리는 누군가 투박하게 꿰매어 놓은 흔적이 역력했다.은성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그 셔츠를 조용히 응시했다. 바느질이 서툰 사람이 억지로 흉터를 기워낸 것처럼 고르지 못한 땀. 은성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 애썼다.대신 그 옆에 나란히 걸려 있던 짙은 회색 울 코트를 꺼내 들었다. 그냥 단정하고 지극히 평범한 코트였다.코트를 손에 쥔 채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징-.침대 한쪽에 놓인 태블릿이 짧게 울렸다. 재호가 보낸 텍스트 메시지였다.[자유로워지셨습니다. 다음은 도련님이 선택하시면 됩니다.]그리고 한 줄이 더 이어졌다.[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은성은 액정 위로 떠오른 두 문장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이재호 다운 문장. 하지만 그 절제된 문자들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은성은 알고 있었다. 은성은 화면이 다시 까맣게 꺼질 때까지 답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나 곁에 둔 코트를 다시 손에 쥐었다.어스름한 빛이 통유리창을 물들이며 거실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저 아득한 아래 어딘가에 자신이 두 발로 디뎌야 할 세상이 있었다. 저 안에서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세상.주방에서 달그락거리며 냄비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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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1 화

"한 가지만"석호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은성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초커"석호의 시선이 은성의 하얀 목덜미를 감싼 백금 링으로 향했다."잘라 줄게"은성의 손이 반사적으로 제 목으로 향했다. 체온이 스며들어 미지근해진 단단한 금속의 감촉. 열쇠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끊어내는 수밖에 없는 족쇄. 은성에게 말을 걸 때마다 제 밑바닥을 보이며 스스로를 낮추지 못하던 남자가, 먼저 그 목줄을 부수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은성은 목을 감싸 쥔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 볼게요."그것이 흔들리는 은성이 쥐어짤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석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은성이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가고,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석호는 거실의 조명을 하나씩 껐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석호의 등 뒤로 수많은 서울의 불빛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밤이 깊었다.은성은 뜬눈으로 어둠을 마주하고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수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재호의 문자, 목줄을 끊어주겠다는 석호의 갈라진 음성, 그리고 다가온 자유.무엇보다 은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이 펜트하우스에서 견뎌온 시간들이었다.명백하게 끔찍한 나날이 있었다. 온몸에 흉터처럼 남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폭력과 강압의 밤들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조건 없이 나란히 앉아 빗소리를 듣던 고요한 오후가 있었다. 말없이 각자의 공간에서 숨을 쉬던 평온한 시간이 있었고, 서툰 솜씨로 끓여낸 계란찜이 놓여 있던 식탁이 있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말없이 건네받은 물 한 잔이 있었다.그 사소한 며칠의 기억들이 앞선 끔찍한 상흔들을 지워주거나 용서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고요했던 순간들 역시, 거짓이 아닌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떤 이름의 감정으로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채로, 그것들은 모두 은성의 안에 새겨져 있었다.은성은 하얀 손가락으로 목의 백금 초커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안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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