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음’의 사랑》全部章節:第 1 章 - 第 10 章

20 章節

제1화

“호인아, 미쳤어? 진짜 연서 몰래 골수를 빼서 채림이한테 줬다고?”B시, 은산병원. 급히 병실로 들어온 부희은이 소파에 앉아 있던 부호인에게 손가락질하며 몰아붙였다.부호인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면서 목소리에는 곤란함이 묻어났다.“누나, 연서랑 채림이만 골수가 맞았어. 나도 방법이 없었어.”부희은은 테이블 위에 놓인, 감염으로 반년 넘게 입원한 임연서의 검사지를 집어 들었다. 분노가 그대로 터져 나왔다.“방법이 없었다고? 연서 몸도 약한 거 뻔히 알면서, 위장병 때문에 입원한 거라고 속여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했어?”“도대체 기채림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예전에 기채림 웃는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레이싱 하다가 5년이나 하반신을 못 쓰게 됐잖아. 그 5년 동안 네 곁을 지킨 건 연서였어.”“이제 네 몸이 나아지니까, 병에 걸려 남자에게 차인 기채림이 귀국하자마자 연서 몰래 골수를 넘겨?” “반년이 지나서 기채림 병이 낫자마자, 이번에는 기채림 장단에 맞춰 시험관 시술까지 하러 다녀?”병실 문 앞. 퇴원 수속을 마치고 돌아오던 임연서는 부희은의 격앙된 말을 그대로 들었다.벽을 짚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굳어지면서, 온몸이 얼음물 속에 잠긴 듯 싸늘해졌다.30분 전, 의사는 위장병 수술 후 감염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퇴원해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부호인은 그 자리에서 청혼했다. 임연서는 너무 기뻐 눈물을 쏟았고, 오늘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SNS에 올리기까지 했다.병실 안에서 부호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짙은 눈동자를 가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누나, 이 일은 그냥 덮어줘. 연서가 알면 절대 안 돼.” “채림이 할머니가 오래 못 버티셔. 살아 계실 때 채림이 아이를 한번 안아 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래. 채림이한테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부희은은 눈을 부릅떴다. 오목조목 예쁜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럼 연서는? 이 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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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전화기 너머에서 윤영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래. 내일 네 아빠랑 유씨 집안 본가에 가서 혼인 이야기를 해 볼게.]임연서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부호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 하나만 보냈다.[연서야, 회사에 문제가 생겼어. 사흘 동안 출장 다녀올게.]임연서는 답하지 않았다. 일주일 뒤 A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그리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부호인과 함께 살았으니 물건이 적지 않았다.이제 임씨 집안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 팔 수 있는 물건은 모두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렸다.저녁 무렵, SNS에 낯선 사람의 메시지 알림이 떴다.[Hi! 임연서!]임연서가 눌러 보니, 프로필 사진은 임신 사실을 확인한 산전 검사표였다. 닉네임은 ‘채림이 행복 중’.기채림의 계정은 새로 만든 비공개 계정이었다.임신 사실을 대놓고 알릴 수는 없어서 팔로우한 사람도 임연서 한 명뿐이었다.1분 뒤, 기채림은 방금 올린 숏폼 영상을 공유했다. 부호인이 산전 검사를 함께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이었다.거기에는 이런 글도 붙어 있었다.[히히, 다정하고 세심한 재벌 예비 아빠!]임연서는 기채림의 속셈을 읽었다. 빨간 하트를 누른 뒤 댓글을 달았다.[내 골수로 살아나더니 이제 와서 도발이야? 기채림, 남의 피로 만든 떡은 맛있니?]...다음 날, 임연서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하나씩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가는 길에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린 명품 물건들을 원하던 구매자에게 넘겼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채림이 공유한 두 번째 숏폼 영상을 받았다.이번에도 사진 몇 장이었다. 부호인이 기채림과 함께 임부복을 고르는 모습이었다.핑크색, 흰색, 임부복마다 모양이 예뻤다.임연서는 이전 영상을 다시 열었다. 기채림은 임연서의 댓글에 이미 답을 달았다. 말투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내가 너한테 골수 달라고 빈 것도 아닌데? 호인 오빠가 내가 걱정돼서 억지로 받으라고 한 거야.]임연서는 차갑게 웃고는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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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임연서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고개를 든 그녀는, 통증을 참으며 차 문을 열었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병원 입구를 향해 걸었다.저녁 무렵 비가 쏟아졌다. 임연서는 손으로 비를 가리지도 않고 빗물이 상처를 적시도록 내버려 두었다.분류대의 간호사는 임연서를 보자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곧바로 상처를 응급 처치한 뒤, 검사를 받도록 데리고 갔다.한 시간이 지나서야 임연서는 축 처진 몸으로 검사를 마쳤다. 그제서야 비로소 핸드폰을 들 수 있었다.화면에는 부재중 전화가 열 통 넘게 떠 있었다.전부 부호인이었다.임연서는 망설이지 않고 전원을 꺼 버렸다.밤늦게까지 수액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임연서는 간호사에게 병실을 하나 잡아 달라고 했다.정신이 흐릿해지자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부호인이 장애를 입은 뒤부터, 업무상 필요한 술자리는 대부분 임연서가 대신 나갔다.한 번은 술자리에서 두 회사 대표가 의견 충돌 끝에 현장에서 테이블을 엎었다. 접시들이 바닥에 산산이 깨졌고, 튄 도자기 조각이 임연서의 손목에 박혔다.부호인은 그 사실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 그 자리에서 바로 비서에게 두 회사와의 거래를 끊으라고 지시했고, 서둘러 임연서를 병원으로 데려가 상처를 소독했다.임연서는 지나치게 크게 일을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부호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연서야, 너는 내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야.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 것만 빼고, 네 몸에 어떤 상처도 남는 게 싫어.”“여자는 온몸이 하얗고 보드라워야 옷을 입어도, 장신구를 해도 예쁘잖아.”이제 임연서의 얼굴이 피로 젖었는데도, 부호인은 다른 여자 때문에 모른 척했다.상처 하나 내지 않겠다고 했던 말은 어디로 갔을까? 부호인은 임연서의 위험을 감수하고 남에게 골수를 주도록 만들었다.결혼과 아이까지도, 부호인은 다른 사람과 몰래 해 버렸다.잠들기 전, 임연서는 ‘채림이 행복 중’ 계정이 공유한 새 숏폼 영상을 보았다.부호인이 기채림을 재우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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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널 못 믿는 게 아니야. 하지만 나와 채림이는 거의 17년을 알고 지냈고, 채림이는 한 번도 남을 속인 적이 없어.”잠깐 말을 멈춘 부호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이 일을 끝내겠다는 듯 말했다.“네가 채림이를 울렸으니 네가 달래.”그때 계속 울먹이던 기채림이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수영장에 던지더니 놀란 척 소리쳤다.“호인 오빠! 오빠가 준 반지가 실수로 수영장에 떨어졌어.”말을 마친 기채림은 임연서를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이 높이 올라가며 도발적인 웃음을 만들었다.“이렇게 하자. 나 달랠 필요 없어. 저 반지 주워 오면, 언니가 나한테 한 모든 일 용서해 줄게.”막 초겨울에 접어든 때였다. 수영장 물은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가웠다.임연서는 머리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앉아 있는 부호인을 보았다.부호인은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 두 눈이 보이지 않았다.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릴 뿐이었다. 싸늘한 표정으로 머리를 계속 숙인 채, 임연서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그때 임연서는 심장에 뭔가 박히는 것 같았다. 촘촘하게 번지는 통증이 숨을 막았다.문득 부호인이 장애 판정을 받은 지 반년 정도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병원으로 찾아온 부 회장은 회복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걸 듣고 다른 후계자를 고르기 시작했다.그날 밤 부호인은 병실에서 사라졌다. 임연서가 찾아냈을 때, 부호인은 휠체어를 밀며 거친 바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것도 그대로 두고 있었다.임연서는 놀라 서둘러 말렸지만, 부호인은 임연서를 밀쳐냈다.“위선 떨며 나를 챙기지 마. 넌 내 여자친구일 뿐이지, 아내가 아니야.” “정말 내 일에 끼어들고 싶으면 지금 바람도 파도도 센데 한 바퀴 헤엄치고 와. 그러면 앞으로 네 말 들을게.”임연서는 멍하니 부호인을 바라보았다. 사실 말하고 싶었다. 위선이 아니라 정말로 부호인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그래서 임연서는 수영을 못하는데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바다로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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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임연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걱정이 가득 담긴 눈동자와 마주했다.부호인은 임연서가 깨어난 걸 보고 급히 의사를 불렀다. 이상이 없다는 확인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임연서는 왼손에 염주가 하나 끼워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부호인이 늘 손목에 차고 다니던 그 염주 같았다.옆에 있던 비서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이 계속 깨어나지 않으셔서 대표님이 걱정 끝에 10 몇 년 동안 차고 다니신 염주를 드렸습니다.” “어젯밤에는 부처님 앞에서 사모님이 무사히 깨어나기만 하면 평생 고기를 끊고 채식만 하겠다고, 앞으로 담배와 술도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하셨고요.”임연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싫다는 듯 손목에서 염주를 빼 부호인에게 내밀었다.“나 때문에 굳이 습관까지 바꿀 필요 없어.”부호인은 염주를 받지 않았다. 다시 임연서의 손목에 끼워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예전에 내가 장애였을 때 너도 비슷한 맹세를 했잖아.”임연서의 심장이 살짝 떨렸다.부호인이 장애를 입은 둘째 해, 임연서는 B시에 있는 청현사가 영험하다는 말을 듣고 밤새 부호인을 데리고 그곳에 갔다.그날 임연서는 부처님 앞에서 ‘내 모든 것을 드릴 테니 부호인을 건강해지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부호인도 부처님 앞에서 소원을 빌었다. 5년 뒤 임연서를 신부로 맞겠다는 소원이었다.당시 임연서는 부호인이 직접 쓴 소원지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부호인은 임연서를 끌어안고 한참을 달랬다.그때는 드물게도... 부호인의 눈에 임연서만 담겨 있던 날들이었다.결국 기채림이 없을 때만 부호인의 눈에 임연서가 있었던 것이다.이제 기채림이 돌아왔으니, 부호인의 시선은 다시 임연서 위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임연서는 칭찬을 기다리는 듯한 부호인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좀 졸려.”다시 깨어났을 때는 오후였다.임연서는 몸을 일으켜 의사에게 언제 퇴원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다.문을 열기도 전에, 복도에서 부호인과 부희은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연서랑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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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임연서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주변 사람들은 분위기를 파악한 듯 술잔을 들고 기채림 앞으로 몰려가 칭찬을 쏟아 냈다.“채림아, 호인 오빠가 너한테 진짜 잘한다. 이렇게 비싼 슈퍼카를 바로 선물하다니.”“이 흰 원피스 너무 예뻐. 진짜 공주님 같아 보여.”“네가 레이싱도 엄청 잘한다며? 사랑스럽고 멋있기까지 하니 호인 오빠랑 너무 잘 어울려!”“...”기채림에게 아부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오늘의 주인공이 임연서라는 사실은 모두 잊은 듯했다.한 시간이 지나자 분위기는 더 떠들썩해졌다.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게임을 했다.부호인은 줄곧 기채림 옆에 붙어 있었고 시선도 계속 기채림을 따라다녔다.기채림이 욕심을 내 꽃게찜을 먹고 싶다고 하자, 부호인은 참을성 있게 목소리를 낮춰 달랬다.“말 잘 들어. 임신했으니 지금은 먹으면 안 돼. 아이 낳고 나면 내가 사 줄게.”기채림이 눈시울을 붉히며 떼를 쓰려고 하자, 부호인은 한숨을 쉬고 지갑에서 한도 없는 블랙카드를 꺼내 건넸다.그 블랙카드는 곧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설마 호인 오빠... 아직도 기채림을 못 잊은 거 아니야?”“다들 지금 여자도 첫사랑을 못 이긴다고 하더니, 진짜였네.”수군거림 속에서 임연서는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만졌다. 주변의 시끌벅적함은 임연서와 아무 상관이 없는 듯했다.기채림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있는 임연서에게 시선을 멈췄다.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가온 얼굴에는 우쭐함이 가득했다.“오늘은 언니랑 호인 오빠의 결혼 전 파티인데, 주목은 내가 다 받았네. 모두 나만 달래고 맞춰 주잖아. 속상하지?”“속상해도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지. 언니가 호인 오빠의 가장 힘든 5년을 함께 보냈다 해도 뭐가 달라져?” “내가 호인 오빠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호인 오빠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나야.”임연서는 기채림이 자신을 화나게 하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눈물은 퇴원하던 날 이미 다 흘려 버렸다.임연서가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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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다음 날 아침, 임연서는 막 깨어나자마자 2층에서 달콤한 웃음소리를 들었다.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멀리 2층 홀에서 부호인이 기채림에게 꽃꽂이를 가르치고 있었다.두 사람은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부호인은 다정하게 꽃마다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지 설명했다.그 따뜻한 장면을 보고 임연서는 잠시 멍해졌다.부호인이 장애를 겪던 시절, 임연서는 부호인이 무료할까 봐 한동안 직접 꽃꽂이를 가르쳐 주었다.부호인은 기억력이 좋아 한 번만 배워도 금세 익혔다.나중에는 비서에게 꽃을 주문하게 했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꽃 한 다발을 꽂아 임연서의 침대 옆에 놓았다.하지만 기채림이 귀국한 뒤부터, 부호인은 다시 그렇게 한 적이 없는 듯했다.임연서는 속눈썹을 내리깔면서 쓸쓸함을 감췄다.아침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무거운 꽃병이 머리 위로 떨어져 임연서를 바닥에 쓰러뜨렸다.쾅!갑자기 소리가 났다.머리뼈가 깨진 듯 아프면서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통증에 몸이 저절로 웅그러졌다.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 기채림이 2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어머, 언니. 내가 방금 꽂은 꽃을 보여 주려고 했는데, 손이 미끄러져서 언니 머리에 떨어뜨렸네.”“어떡해? 머리가 피투성이라 너무 무섭다. 구급차 불러 줄까? 그런데 내가 너무 겁나서 핸드폰을 못 들겠어. 언니 날 원망하지 않을 거지? 조금만 더 참아 봐...”임연서는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통증으로 정신을 잃었다.뒤늦게 발견한 가사도우미가 놀라 급히 임연서를 병원으로 옮겼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임연서는 무려 서른 바늘이나 머리를 꿰매야 했다. 보기에도 섬뜩했다.의사는 가벼운 뇌진탕이 있으며 오른쪽 눈에 일시적 시력 상실이 동반됐다고 했다.부호인은 병상 옆에 서서 몸을 굽히면서 아프냐고 물었다. 안쓰러운 얼굴로 임연서를 일으켜 물을 마시게 했다.임연서를 돌보는 몸짓이었지만,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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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다음 날 하루 종일, 부호인은 기채림의 병실에 있었다.검사를 받으라고 달래고, 약을 먹으라고 달랬다.임연서의 병실이 바로 아래층에 있었는데도 부호인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저녁이 되자 기채림은 퇴원하겠다고 떼를 썼다.부호인은 기채림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뒤, 또 한참 동안 달래서 겨우 재웠다.부호인이 마침내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것을 본 김 집사가 회색 상자를 들고 다가갔다. 말끝이 조심스러웠다.“사모님께서 어제 돌아오셨는데 이걸 대표님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부호인은 회색 상자를 받으며 표정이 좋지 않았다.“퇴원했다고? 병원에서 쉬라고 했는데 왜 집에 와?”“또 무슨 소란을 피운 건 아니겠지. 내가 말했잖아. 나와 채림이는 깨끗하다고. 난 채림이를 여동생으로만 본다고...”회색 상자가 열렸다. 청혼 반지가 부호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부호인은 흠칫 굳어졌다.김 집사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사모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2층 서재에 대표님께 남긴 편지가 있다고요.”부호인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가슴속에 번지면서 성큼성큼 위층 서재로 올라갔다.책상 위에는 정말 편지 한 통이 있었다.‘이별 편지’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부호인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머릿속이 쿵 하고 무너지는 듯했고, 처음 느끼는 공포가 가슴을 덮쳤다.‘끝났어.’그날 부희은과 병원에서 나눈 대화를 임연서가 전부 들은 것이었다.치밀하게 꾸며 둔 거짓말도 들통이 났다.부호인은 어쩔 줄 몰라 임연서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때 시야에 책상 위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사진 속 여자애는 붉은 레이싱복을 입고 레이싱카 안에 대담하게 앉아 있었다.마스크를 벗은 채 오른손으로 브이 포즈를 한 채,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잠깐. 무음의 이 얼굴...’‘그렇다면... 레이스장에서 내 목숨을 구했고...’‘내가 줄곧 보답하고 싶어 했던 ‘무음’은 연서었다는 말인가?’‘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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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기채림! 넌 나를 아주 처참하게 속였어!”그해 레이스장에서 ‘무음’은 부호인과 같은 조로 달렸다.그날 부호인의 원수가 꾸민 농간으로 레이싱카에 불이 붙었다.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던 ‘무음’은 2억 원대 상금을 포기하고 차를 돌려 위험을 무릅쓴 채 부호인을 구했다.당시 ‘무음’은 부호인을 끌어낸 뒤, 건방지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야, 구해 줬으니까 은혜 갚는 거 잊지 마!”그 ‘은혜 갚기’라는 말을 부호인은 12년 동안 기억했다.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거기까지 생각한 부호인은 차가운 얼굴로 울먹이는 기채림을 밀쳐 냈다. 목소리도 얼음 같았다.“기채림, 지금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부호인은 기채림의 애원도 듣지 않고 김 집사에게 내보내라고 했다.곧이어 굳은 얼굴로 비서에게 전화했다.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기채림 납치 사건, 그날 모임에서 벌어진 일까지 전부 조사해.”...A국의 국제공항.비행기가 착륙하자 임연서는 모자를 꺼내 썼다. 머리 위 의료용 붕대를 가리기 위해서였다.출구에는 임원민과 윤영주가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 곁에는 회색 정장을 입은, 또렷하고 수려한 외모의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오랜만에 딸을 보는 윤영주의 자상한 얼굴에는 기쁨이 숨겨지지 않았다.“와, 연서야. 소개할게. 이쪽은 유우신이야.”임연서는 자신의 약혼자를 찬찬히 살폈다.따뜻한 조명이 유우신의 몸 위로 내려앉으면서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를 드러냈다.입술은 가볍게 다물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쩐지 가까이하기 어려운 느낌도 났다.“안녕하세요. 임연서예요.”임연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우신이 검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임연서를 한 바퀴 훑어본 뒤, 날카로운 시선이 머리 위 모자에 멈췄다가 한참 뒤에야 말했다.“유우신입니다. 연서 씨의 약혼자입니다.”...한 시간 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구청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유우신의 아버지 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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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때 임연서는 핸드폰을 열었다.유우신이 정말로 집 주소와 현관 비밀번호를 보내 둔 상태였다.생각보다 세심한 남자였다.친정집에서 먼저 지내라고 한 부분까지 배려가 느껴졌다.임연서는 눈앞의 준수한 남자를 바라보았다.충동적으로 한 결혼이 어쩌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두 집안 사람들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분위기도 유난히 화목했고, 오후가 되어서야 각자 헤어졌다.저녁에는 임원민과 윤영주가 함께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렸다.오랜만에 세 식구가 다시 모였다.임원민은 그날 밤 몹시 기뻐하며 술도 꽤 마셨고 말도 많아졌다.“생각해 보면 우리와 유씨 집안은 인연이 있더라. 처음에는 유씨 집안과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는데...”“지난 몇 년 동안 유씨 집안에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우리를 많이 도와줬어. 유씨 집안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임씨 집안은 벌써 버티지 못했을 거다.”임연서는 뜻밖이라는 듯 놀랐다.‘유씨 집안이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우리를 도와줬어?’...사흘은 짧았다. 나흘째 오후, 유우신이 임연서를 데리러 왔다.임연서는 아쉬운 마음으로 부모와 작별했다.윤영주는 멀리 서 있는 유우신을 보며 임연서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엄마 눈에는 보여. 우신이 저 아이는 너를 꽤 좋아해. 한번 마음을 열고 잘 지내 보렴.”눈을 내리깐 임연서는 차 옆에 선 유우신을 보면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차 안에서는 내내 조용했다. 두 사람 모두 말을 하지 않았다.차가 병원 앞에 멈추고 나서야 임연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어디 아프세요?”유우신의 시선은 임연서 쓴 큰 모자에 머물렀다.“연서 씨가 다쳤잖아요. 병원에서 검사 받고 집에 갑시다.”임연서는 잠시 굳어졌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했다.“제가 머리를 다친 건 어떻게 알았어요?”사흘 동안 아주 잘 숨겼기에 부모도 머리의 상처를 발견하지 못했다.유우신은 고개를 돌렸다.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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