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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남사친의 유효기간: Chapter 11 - Chapter 20

47 Chapters

11화. 다음 약속

횡단보도 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인도 가까이 붙어 지나갔다. 민석이 주아의 팔꿈치 위를 가볍게 짚어 안쪽으로 안내했다가 곧 손을 뗐다.놀랄 만한 접촉도 아니었다. 그런데 주아는 손이 닿은 자리보다 어젯밤 지혁에게 잡혔던 손바닥을 먼저 떠올렸다.“괜찮으세요?”“네. 잠깐 딴생각했어요.”신호가 바뀌었다. 민석은 주아와 보폭을 맞추면서도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오늘 제가 질문을 너무 많이 했나 걱정했는데, 괜찮으셨어요?”주아는 웃었다.“그건 제가 할 걱정인데요. 소개팅에서 자꾸 면접관처럼 군다고 혼났거든요.”“누구한테요? 15년 된 그 친구?”“네. 오늘도 질문 목록 가져오지 말라고 압수당했어요.”“코칭을 제대로 받으셨네요.”“성과가 있었나요?”“아주요.”민석이 웃음을 거두고 조금 더 진지하게 말했다.“괜찮으시면 다음 주에 전시 보러 가실래요? 아까 말씀하신 원작 일러스트 전시, 저도 궁금해졌습니다.”그는 결정을 재촉하지 않았다. 주아는 오늘 나눈 대화를 빠르게 검토했다. 억지로 맞춘 부분이 없었고, 다시 보고 싶은 이유도 충분했다.“좋아요. 토요일은 오후부터 시간 돼요.”약속을 잡고 나자 첫 소개팅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와 작은 기대가 함께 생겼다. 지혁의 코칭은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민석은 택시가 잡힐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주아가 차에 탄 뒤에는 오늘 즐거웠다는 메시지도 보내 왔다.주아는 같은 말을 답장한 뒤 지혁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끝났어. 집 가는 중.]곧바로 답이 왔다.[택시?][응. 20분쯤 걸려.][차 번호 보내.][앱에 다 남아. 잔소리하지 마.]답장은 없었다. 대신 택시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설 때 현관 공동문이 원격으로 열렸다.***집 안에는 거실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지혁은 소파에 앉아 회원 기록을 보고 있었다. 재킷은 등받이에 걸었고 넥타이도 풀려 있었다. 탁자에는 얼음이 거의 녹은 잔이 놓여 있었다.“아직 안 잤어?”“몇 신데 자.”평소라면 방에서 일했을 사람이 굳이 거실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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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손만 잡고 있을 거야?

“그게 아쉬워?”“아니. 첫날부터 덥석 잡았으면 오히려 별로였겠지.”“다음엔?”“다음엔 뭐.”“잡아도 돼?”주아는 밴드를 발뒤꿈치에 붙이며 생각했다.“모르지. 분위기 괜찮으면 손 정도는 잡을 수도 있지 않나?”말을 마치자 냉장고가 작동하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지혁은 주아가 아니라 탁자 한쪽을 보고 있었다.“왜. 코치가 가르쳐 놓고 성과 나오니까 아까워?”“내가 뭘 가르쳤는데.”“질문지 보지 말고 눈 마주치기. 긴장하지 않기. 손잡기.”“제대로 한 것도 없잖아.”“손도 잡았는데 뭘.”지혁이 고개를 돌렸다.“그게 제대로 잡은 것 같아?”“손잡기에 제대로가 어디 있어.”“있어.”그는 태블릿을 옆으로 치우고 빈 소파 자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와 봐.”“또 연습하게?”“다음 주에 걔랑 할 수도 있다며.”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끝이 평소보다 짧았다. 주아는 그게 못 미더운 학생을 다시 불러 앉히는 코치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 지혁 옆에 앉는 동안 아까 민석과 마주했을 때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손 줘.”주아가 오른손을 내밀자 지혁은 바로 잡지 않았다.“네가 싫으면 여기서 끝내.”“갑자기 뭘 그렇게 진지하게 말해.”“대답해.”그의 손은 소파 위에 펼쳐진 채 기다렸다. 주아는 잠시 내려다보다 스스로 그 위에 손을 올렸다.“싫었으면 앉지도 않았어.”그제야 지혁의 손가락이 움직였다.이번에는 손바닥만 겹치지 않았다. 긴 손가락이 주아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완전히 맞물렸다.손을 잡았을 뿐인데 팔 안쪽까지 따뜻해졌다. 주아는 접힌 손가락을 내려다봤다.“연인들은 보통 이렇게 잡아.”“너 손이 커서 그런가. 잡힌 느낌이 너무 나.”“그게 싫어?”“아니, 그냥…….”주아는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혁의 엄지가 손등 위에서 한 번 움직였다. 다독이는 것처럼 느린 동작이었다.“상대가 이러면 쳐다봐야지.”“지금도 봐?”“응.”주아가 고개를 들었다.지혁은 이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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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연습은 핑계였다

“남자가 여기까지 오면?”지혁의 목소리가 가까운 거리에서 떨어졌다.주아는 대답 대신 맞잡힌 손에 힘을 줬다. 소파 등받이에 닿은 어깨는 더 물러날 데가 없었다. 지혁은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몸을 기울인 채 기다릴 뿐이었다.늘 무심하게 마주치던 눈이 오늘은 끈질겼다. 주아가 고개를 돌리면 따라올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한 치도 더 다가오지 않았다.“왜 대답 안 해.”“생각 중이잖아.”“소개팅 자리에서도 그렇게 오래 생각하게?”“야, 그때는 네가 아니니까…….”말이 끊겼다.그때는 네가 아니니까 무엇이 다르다는 건지, 주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민석이라면 덜 긴장할 거라는 뜻인지, 지금 이 거리가 이상한 건 지혁이라서인지.지혁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가 다시 올라왔다.“피하고 싶으면 피해.”농담기가 전혀 없는 말이었다.“지금 네가 고개 돌리면 여기서 끝낼게.”주아는 그제야 지혁이 기다리는 것이 대답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친구끼리 하는 연습이라는 말로 덮기에는 둘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입술이 닿으면 아무 일 없던 때로 돌아가기 어려울지도 몰랐다.그런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지혁이 재촉하지 않는 동안 주아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긴 손가락이 제 손을 감싸고 있었다. 경기 전이면 차갑게 식고, 수영을 끝낸 뒤에는 늘 뜨거웠던 손. 15년 동안 수없이 붙잡았던 손인데 오늘은 손가락 사이가 맞닿은 자리까지 선명했다.주아가 고개를 들었다.“안 피할게.”지혁의 턱이 아주 조금 굳었다.“무슨 뜻인지 알고 말해.”“알아.”이번에는 주아가 먼저 거리를 줄였다. 크지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충분한 대답이었다.지혁의 입술이 닿았다.처음은 확인에 가까웠다. 짧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다시 내려오기 전까지, 지혁은 주아의 표정을 살폈다. 주아는 눈을 뜬 채 그를 봤다. 당황해서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빨리 끝났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스스로도 놀랐다.그녀가 잡힌 손을 빼는 대신 지혁의 손가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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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입술이 닿은 뒤

변명이라는 건 말하는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연습이 맞는지 따지는 순간, 왜 피하지 않았는지도 설명해야 했다.지혁이 천천히 그녀를 돌아봤다.“진짜 그렇게 생각해?”“그럼 뭐라고 생각해.”주아는 괜히 쿠션을 끌어와 배 위에 올렸다.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아도 더는 연습이라는 말을 반복하지 못했다.“합격이야, 아니야?”“오늘은 그만해.”지혁은 소파에서 일어났다.주아는 닫히는 방문을 보면서 쿠션 모서리만 구겼다. 키스는 끝났는데 입술에 닿았던 압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주아는 한참 뒤 욕실로 가 거울을 봤다. 달라진 건 없었다. 입술이 조금 붉은 것 말고는 늘 보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거울 뒤로 지혁이 칫솔을 꽂아 둔 컵이 보이자 다시 눈을 피했다.고등학교 때는 경기에서 메달을 딴 지혁의 뺨에 입을 맞히고 도망친 적도 있었다. 대학 입학식 날에는 사람들 틈에서 놓칠까 봐 허리를 붙잡고 걸었다. 부상 수술을 마친 날에는 병원 침대 옆에서 손을 잡은 채 잠들었다. 어느 접촉도 둘 사이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오늘은 달랐다. 지혁의 입술이 닿은 뒤에는 15년치 기억까지 전부 조심해서 만져야 할 것 같았다.***그로부터 일주일 뒤 토요일 아침, 지혁은 평소처럼 달걀을 구웠고 주아는 평소처럼 식탁에 앉았다.평소와 다른 건 둘 다 휴대전화만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소금.”주아가 손을 내밀자 지혁이 통을 건넸다. 손가락이 스칠 것 같아 주아가 너무 빨리 당기는 바람에 소금통이 식탁 위로 쓰러졌다.“뭘 그렇게 놀라.”“안 놀랐거든.”“그럼 손에 문제 있어?”“출근하는 사람한테 아침부터 시비 걸지 마.”입은 예전처럼 움직였지만, 주아는 지혁의 입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지난주 전까지는 저 입으로 잔소리를 하든 음식을 씹든 아무 상관 없었다. 이제는 그가 물을 마실 때마다 컵 가장자리에 닿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을 때도 문제였다.주아가 휘청이자 지혁이 습관처럼 팔을 잡았다. 전에도 자주 그랬다. 그런데 주아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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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뭐가 생각났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석이었다.[오늘 7시에 뵙는 거 괜찮으시죠? 지난번 말씀하신 전시 근처로 예약해 뒀습니다.]정중한 메시지를 보자 미뤄 둔 현실이 돌아왔다. 주아는 지혁과의 일을 당장 정의하는 대신, 오늘 민석을 제대로 보기로 했다. 적어도 한 사람을 만나면서 다른 사람의 입술을 떠올리는 무례는 하고 싶지 않았다.주아는 평소보다 길게 답장을 썼다.***두 번째 만남도 순조로웠다.민석은 지난번 주아가 관심을 보인 사진 전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작품 앞에서 억지로 아는 척하지 않았고, 주아가 설명할 때는 질문을 덧붙였다. 식당 직원에게도 예의가 발랐다.담당 작품의 남주라면 작가에게 그대로 진행해도 좋다고 말했을 설정이었다.“이주아 씨는 사람 볼 때 평가표가 따로 있는 것 같네요.”민석이 웃으며 말했다.“티 났어요?”“조금요. 방금까지 제가 면접 보는 기분이었습니다.”“죄송해요. 직업병이에요.”“괜찮습니다. 대신 저도 하나 물어봐도 돼요?”“네.”“오늘은 지난번보다 편해 보이는데, 맞습니까?”주아는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저 나름대로 연습을 좀 했거든요.”“소개팅도 연습을 해요?”“대화 같은 거요.”차마 키스까지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하지 못하는 사실이 생겼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지혁과 있었던 일은 늘 서영이나 다른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게 떠들 수 있었는데.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천천히 역 쪽으로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 사람이 몰렸다. 신호가 바뀌자 민석이 주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잡아도 될까요?”허락을 묻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올렸다.민석의 손은 따뜻하고 조심스러웠다. 손가락을 세게 얽지도 않았고, 주아의 걸음에 맞춰 힘을 조절했다. 불편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그런데 신호가 다 지나도록 주아는 지혁의 손만 생각했다.손바닥을 가득 채우던 크기와 놓아주지 않던 온도. 피하고 싶으면 피하라던 목소리. 민석이 옆에서 무슨 말을 했는데 한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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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그 여자 회원은 누구야

주아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키스.두 글자만 말하면 됐다. 그런데 식탁을 사이에 두고 지혁과 눈을 맞추자 그 단어가 목에 걸렸다. 업무 회의에서는 수위 높은 원고도 아무렇지 않게 논의하는데, 자신이 한 키스는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다.“네가 가르쳐 준 거.”“내가 뭘 가르쳤는데.”“손 잡는 법. 눈 피하지 말라는 거. 그런 거 다.”“그게 다였어?”지혁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주아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사람이 피곤하다는데 취조하냐? 씻을 거야.”“이주아.”“내일 얘기해.”도망치듯 방문을 닫고 나서야 주아는 제 행동이 우스워졌다. 평소라면 지혁이 말을 피할 때 끝까지 따라다니며 대답을 받아 냈다. 지금은 역할이 반대였다.문밖에서 발소리가 잠깐 멈췄다가 멀어졌다.주아는 침대 끝에 앉아 민석과 잡았던 손을 내려다봤다. 손에는 아무 흔적도 없는데 지혁에게 들킨 기분이었다.더 곤란한 건, 지혁이 질투하는 것처럼 보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다음 날부터 지혁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아침마다 주아 몫의 샌드위치를 싸 놓고, 밤에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부터 먹으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주아가 야근한 날에는 거실 불을 켜 둔 채 먼저 잤고, 구부정하게 노트북을 보는 모습을 발견하면 뒤에서 어깨를 펴게 했다.달라진 건 접촉 직전마다 지혁의 손이 잠깐씩 망설인다는 점이었다.목에 붙은 먼지를 발견하고도 손가락으로 먼저 가리켰고, 후드 끈이 가방에 걸리면 주아가 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손부터 뻗던 사람이었다.주아는 그 망설임이 불편했다. 자신이 괜히 경계를 의식하게 만든 것 같으면서도, 막상 손이 닿지 않으면 아쉬웠다.친구 사이가 이렇게 번거로웠던 적은 없었다.***“허리 꺾지 말고 배에 힘.”지혁이 한 말은 아니었다.주아는 러닝머신 위에서 걷다가 고개를 돌렸다. 센터 안쪽 매트에서 지혁이 여성 회원의 자세를 잡아 주고 있었다. 낯이 익다 했더니 최근 주말 드라마에 나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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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친구 사이에는 안 하는 것

아무리 살펴도 일하는 모습이었다.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상대가 지혁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지혁이 선을 넘은 것도 아닌데 자신만 혼자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이주아, 내려와.”회원 수업을 끝낸 지혁이 어느새 러닝머신 앞에 서 있었다.“나 아직 덜 했어.”“발 끌고 걷잖아. 내려와서 스트레칭해.”“대표라고 회원 운동을 마음대로 줄여?”“회원님, 지난주에 목 결린다고 새벽 2시에 연락하셨죠.”지혁이 수건을 내밀었다. 존댓말은 썼지만 표정은 잔소리할 때 그대로였다.주아는 마지못해 매트로 내려왔다. 거울 앞에서 어깨를 펴자 지혁이 뒤에 섰다.“골반부터 틀어졌어.”“오늘 컨디션이 별로라니까.”“손 댄다.”허락을 구하는 세 글자에 배에 준 힘이 풀렸다.지혁의 손이 허리 양옆을 잡았다. 손바닥으로 위치를 고정한 뒤 몸을 곧게 세웠다. 거울 속 두 사람은 가까웠다. 주아의 머리 위로 지혁의 턱이 보이고, 검은 티셔츠에 감싸인 가슴이 등 뒤에 있었다.“복부 힘 풀지 마.”“주고 있어.”“안 주고 있는데.”“네가 갑자기 잡으니까 그렇지.”지혁이 거울로 주아와 눈을 맞췄다.“잡는다고 말했어.”“그 말이 더 이상해.”“그럼 예전처럼 말 없이 해?”주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혁의 손이 먼저 떨어졌다. 닿았던 곳이 비어 버리자 허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주아는 물병 뚜껑을 세게 돌렸다.“아까 그분 유명한 배우지?”“응.”“오래 가르쳤어?”“반년쯤.”“허리 안 좋나 봐.”“왜.”“네가 계속 잡아 주길래.”지혁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아는 생수를 두 모금이나 급하게 마셨다.“회원 상태가 궁금하면 차트 보여 줘?”“됐어. 개인정보를 왜 봐.”“그럼 왜 물어.”“친구 일에 관심 좀 가질 수도 있지.”주아가 라커룸 쪽으로 돌아섰다. 뒤에서 지혁이 이름을 불렀지만 못 들은 척했다.친구의 일에 관심을 가진 것뿐이다.속으로 반복할수록 변명처럼 들렸다.다음 날 점심, 주아는 전날 센터에서 있었던 일까지 결국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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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안 괜찮았다는 말

“제 마음은 멀쩡해요.”“센터에서 여자 회원 가르치는 것만 봐도 운동을 못 할 만큼?”“그건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고요.”“네. 그 설정으로 일단 가 보세요.”주아는 결국 커피를 들고 먼저 일어났다.자리로 돌아오자 수정 원고가 도착해 있었다. 작품 속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이 다른 여자에게 우산을 씌워 줬다는 이유로 밤새 뒤척이고 있었다.주아는 원래 적으려던 메모를 지웠다.‘질투 자각이 너무 늦음.’남의 자각 속도에 참견할 처지가 아니었다.***그날 밤, 지혁은 거실에서 회원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다.주아는 방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두 번 반복했다. 세 번째에는 지혁이 노트북을 덮었다.“할 말 있으면 해.”“다 봤어?”“네가 방문 뒤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주아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너 다른 여자한테도 그래?”“뭘.”“자세 잡아 줄 때 꼭 허락 묻고, 손잡는 연습 해 주고.”“회원 몸에 손댈 때는 설명해.”“그거 말고. 소개팅 코칭.”지혁의 표정에서 일하던 사람의 냉정함이 사라졌다.주아는 도망치지 않고 질문을 끝냈다.“다른 여자한테도 키스해 가면서 가르쳐 줘?”“안 해.”대답이 너무 빨랐다.“그럼 왜 나한테만 했어?”지혁은 입을 다물었다. 주아는 그 침묵 안에서 서영이 했던 말을 다시 들었다. 보통 남사친은 그러지 않는다는 말.“권지혁.”“너니까.”짧은 대답이 거실 한가운데 놓였다.주아는 맥박이 드러날 것 같아 손목을 반대편 손으로 감쌌다.“왜 나니까.”지혁의 얼굴에 허탈함이 스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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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그건 질투였다

지혁이 질투했다.그 가능성을 인정하자 지난 며칠이 다르게 보였다.소개팅에 입을 원피스를 고르던 손, 목걸이를 채워 주다 멈춘 호흡, 민석이 괜찮다는 말에 굳었던 얼굴. 친구가 걱정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간단했던 행동들이 더는 한쪽으로 정리되지 않았다.주아는 다음 날 아침 지혁과 마주치기 전에 집을 나섰다.도망치는 건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어젯밤 지혁의 얼굴을 떠올리면 준비한 질문이 전부 엉켰다.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원고처럼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었다.질문 하나로 15년을 망가뜨릴 수도 있었다.그날 저녁, 주아는 민석과 세 번째로 만났다.민석은 조용한 한식당을 예약했다. 주아가 양식보다 한식을 좋아한다고 한 말을 기억한 선택이었다. 그는 지난번처럼 편안했고, 대화가 끊겨도 억지로 채우지 않았다.“요즘 일은 좀 어떠세요?”“바빠요. 다음 분기 공개작 편성이 한꺼번에 겹쳤거든요. 로맨스만 계속 보다 보니까 이제 사람 얼굴을 봐도 기승전결부터 찾게 돼요.”“저도 전략 보고서를 오래 보다 보면 식당 메뉴에서도 성장률을 찾습니다.”“그 정도면 저랑 비슷한 중증이네요.”둘은 동시에 웃었다.민석에게 호감이 없지는 않았다. 일 이야기의 속도를 알아듣고, 주아의 판단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결혼을 염두에 둔 소개팅 상대라는 조건을 빼고 봐도 괜찮은 사람이었다.그래서 더 미안했다. 민석이 말을 할 때마다 머릿속 한쪽에는 지혁이 앉아 있었다.“수영을 오래 하셨나 봐요.”“제가요?”“아까 턴 동작이 어떻다고 하셔서.”주아는 방금 자신이 무슨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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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가방 앞주머니의 비밀

“다만 제가 이주아 씨를 더 만나려면, 그분이 오래된 친구인지 마음에 있는 사람인지는 알고 싶습니다.”주아는 식탁 아래로 손을 모았다.“시간을 조금만 주실래요?”“네. 다만 오래 기다리지는 못합니다. 저도 마음이 있으니까요.”부드럽지만 선이 분명한 말이었다. 주아는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식당을 나선 뒤 민석은 손을 잡지 않았다. 지난번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역까지 함께 걸었다. 주아는 그 간격이 서운하지 않은 자신을 확인했다.***“이 사진 몇 년도인지 알아?”현우가 낡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다음 날 퇴근 후, 주아는 운동센터 사무실 바닥에 쌓인 상자 사이에 앉아 있었다. 센터 개업 4주년을 맞아 홈페이지를 개편한다며 현우가 옛날 자료 정리를 도와 달라고 붙잡은 것이다. 지혁은 외부 출장 수업을 나가 자리에 없었다.사진 속 지혁은 수영모를 반쯤 벗은 채 메달을 들고 있었다. 고등학생 특유의 마른 얼굴과 젖은 앞머리가 낯설지 않았다. 관중석 맨 앞줄에는 교복 차림의 주아가 두 팔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고2 여름. 전국체전 선발전 전이니까.”“역시 권지혁 전담 기록관.”“내 사진도 다 저 경기장에 있으니까 아는 거거든.”주아는 사진을 연도별 봉투에 넣었다.상자 안에는 기사 스크랩과 메달, 오래된 수영용품이 차례로 나왔다. 지혁이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쓰던 검은 수영 가방도 있었다. 지퍼 주변이 하얗게 닳고 손잡이는 한 번 꿰맨 흔적이 있었다.“이것도 전시해?”“지혁이가 보면 당장 버리라고 할걸. 상태만 확인해 봐.”주아가 가방 앞주머니를 열었다. 낡은 테이프와 동전 몇 개 사이에서 파란 실뭉치가 딸려 나왔다.처음에는 엉킨 끈인 줄 알았다. 손바닥 위에 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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