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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연등 아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6 16:57:00

그날 밤 영수는 꿈을 꾸었다.

자신이 냇가를 건너려 하는 데 불어난 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미끄러져 물살에 떠내려 갈 것 같았다. 산나물을 가득 뜯은 광주리를 양손에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 물을 건너 보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갈 길도 없었고 거기서 밤을 지샐 수도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한 사내가 뒤에서 오더니 말을 건넸다.

‘업히시오. 얼른 업히시오. 내가 저쪽으로 낭자를 데려다 주겠소.’

익숙한 목소리와 풍채, 그리고 체취, 그 사내는 한이었다. 영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른 업히시오. 꾸물거리면 물이 더 불어나겠소. 얼른’

영수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난처했지만 한의 제안에 따라 그의 등에 업혔다.

한의 등은 넓었고 정말 따뜻했다. 영수가 한의 온기를 느끼며 안도를 하던 찰나, 그가 그만 오른발을 헛디뎠다.

‘으악’

둘 다 첨벙 물에 빠지고 말았다.

영수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꿈이었다. 옆에 누워 있던 최나인이 눈을 비비며 영수에게 말했다.

“아씨 악몽을 꾸신 게지요? 우리 아씨 요즘 몸이 허하신가 보네.. 제가 다음 번 장날에 토종닭 한마리 사서 고아야겠어요.”

영수는 꿈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무언가 아쉬움이 있었다. 한의 등에 업혔던 그 순간이 물에 빠졌던 순간보다 오히려 생생했다. 영수의 마음에 연모라는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영수도 이제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초목이 제법 파랗게 물들고, 따뜻한 햇살이 쌀쌀한 바람을 밀어내는 춘사월이 되었다.. 영수는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초조하기도 하였다.

아는 것이라곤 이름 뿐이었다. 어느 집 자제인지 과거를 준비하는 서생인지 그저 시나 읊조리는 한량인지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영수는 한의 그 따뜻하고 묵직한 목소리, 선한 눈빛, 그 모든 것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혼자만의 연모이기에 누구에게 혹 마음이 들킬까 혼자 조마조마했다. 유모가 부르기만 해도 괜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씨 지난 번 베인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죠? 괜찮죠?”

“응 유모,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자 봐.”

영수가 팔을 걷어 유모에게 보이며 말했다.

“다행히 흉도 거의 지지 않았네요. 아씨 우리 초파일에는 뭐 할까요? 동네에 한 번 나가 볼까요?”

“아 그게… 음…”

영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도령과의 약속에만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최나인이 함께 나서자고 할 가능성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음. 그게 말이지. 너무 시끄럽고 사람들이 많아 정신이 없을 거 같지 않아?”

“그런가요?”

영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최나인을 쉽게 따돌리고, 혼자 나설 수 있다고만 생각한 자신이 한심했다. 그러나 한도령을 헛걸음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영수는 궁리를 해내야 했다. 최나인을 혼자 집에 있게 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초파일이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유모, 내가 있잖아 지난 번 장에 가서 갖바치에게 맞춘 가죽신이 발을 자꾸 할퀴어서 뒤축이 상채기가 나는데 아무래도 다시 찾아가 발에 맞게 고쳐 와야겠어.”

“그래요? 그럼 같이 가면 되죠.”

“유모 아니야 나 혼자 갔다 올께. 괜히 유모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아니에요 아씨. 괜히 혼자 갔다가 지난 번 처럼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요? 같이 가요.”

“아니야 유모 정말 괜찮아 지난 번 뜯어진 치마 있지? 그거 좀 꿰어 놔줘. 유모 내가 아끼는 건데 빨리 다시 입고 싶어서 그래. 알았지?”

손사레를 치면서 까지 극구 혼자 가겠다는 영수가, 최나인은 못내 서운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닌 영수를 마냥 이기려 드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최나인도 이제 영수가 혼자서 뭔가를 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가슴팍이 조여와 숨을 못 쉬겠다가 조금 지나면 괜찮아졌다 하는 증상이 생겼지만 영수가 걱정할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아씨, 그럼 신만 고쳐서 바로 오셔야 돼요 다른 곳에 들르지 마시고요 아셨죠?”

“그래야지 그럼. 걱정마 유모.”

영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영수는 유모 없이 혼자 집을 나서게 되어 너무 기쁘고 흥분되었다.

느티나무 옆에 갓을 쓴 한 사내가 보였다. 영수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방법이 떠 오르지 않았다.

-소리를 내서 불러야 할까? 아님 인기척을 해야 할까?-

영수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한의 발치에서 서너걸음 떨어져 말없이 서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한이 몸을 돌이키더니 영수를 이내 발견했다.

“낭자 지금 온 것이오?”

“아니옵니다. 반각 전쯤 도착하였사옵니다.”

“그러셨구려. 그럼 기척을 하시지 왜 그리 그냥 서 계셨소?”

“그게 저…”

영수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한은 이내 표정이 밝아지며 말했다.

“영수 낭자 우리 그럼 마을로 내려가 볼까요? 분명 좋은 구경거리가 있을 것이오.”

마을은 형형색색의 연등이 집마다 걸려 있었고 사람들은 이미 들떠 있었다. 아이들은 종이깃발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호기놀이를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수부놀이(커다란 물항아리에 바가지를 올려놓고 치는 놀이)에 흥겨운 사람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지루하고 고된 농사일과 부역에 지친 백성들이 이 날만큼은 모든 족쇄에서 벗어나 마치 자유로운 새처럼 저마다 한 껏 휘젓고 있었다.

영수는 놀이 하나하나가 신기했지만 그보다도 옆에 있는 한도령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슴이 벅찼다. 그의 미소와 걸음걸이, 손짓과 영수에게 속삭이는 음성. 그 사소한 조각들이 한올한올 엮여 영수의 가슴을 빈틈없이 덮어갔다.

초파일의 연등은 환히 타올랐으나, 영수는 알지 못했다.

오늘 이 만남이 두 사람의 운명을 얼마나 멀리 밀어놓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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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10화 잠시 내려 앉은 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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