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악역인데, 남주가 이상하다: Chapter 11 - Chapt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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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화 - 봉인의 색

차가 두 번 새것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장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책상 위에는 양피지와 명세서가 층층이 펼쳐져 있었고, 서기관 둘은 벽가에 선 채 펜을 들고 대기했다.도착 첫날 저녁에 할 일치고는 지나치게 성실했다.아니, 성실한 건 좋은데 왜 내가 포위당한 기분이지."우선 특산물은 셋이군요.""예, 공작 각하. 양모, 꿀, 그리고 겨울 밀랍입니다."힐데브란트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저 속도면 내가 장부를 넘기기도 전에 다음 장을 펼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유능함이란 때로 사람을 든든하게 만들고, 때로는 등 뒤에 칼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양모는 북령 귀족가와 수도 상단으로 나가고, 꿀은 약재상과 수도 찻집 쪽으로 흘러가는군요. 겨울 밀랍은?""성당과 귀족가 촛대 수요가 큽니다. 벨포르산은 그을음이 적어 가격이 안정적입니다."좋다. 원물은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쁜 정도가 아니라 꽤 괜찮다.양모는 겨울용 망토와 담요, 꿀은 차와 약재, 밀랍은 예배와 연회. 생활재와 체면재가 같이 있다.시장이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았고, 계절성도 어느 정도 분산돼 있다.포트폴리오는 괜찮은데, 문제는 수익 구조다.나는 양모 장부의 가운데 줄에 손가락을 얹었다."이 항목이 이상합니다. 세금을 떼기 전 판매가는 올랐는데, 영지로 돌아온 금액은 거의 그대로군요."힐데브란트는 아주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다."중간 상단의 선별비와 운송 보증비가 늘었습니다.""얼마나요?""전년 대비 거의 두 배입니다."아 미쳤네. 마진을 반이나 떼였다는 소리잖아.겉으로는 고개만 끄덕였다.공작이 장부 앞에서 '마진'이라고 외치면 안 된다. 특히 이 세계에서 아직 그 단어가 공식 장부 용어인지도 모르는 상태라면 더더욱."양 키우고 털 깎고 말리는 거 다 우리가 하는데, 선별이니 운송이니 하면서 중간 상단이 절반을 가져가고 있다는 거잖아요.""맞습니다."대답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씁쓸했다.힐데브란트는 이걸 몰라서 방치한 사람이 아니다. 알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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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화 - 시장 초입

시장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힐데브란트는 찻잔을 내려놓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눈썹만 조금 내려갔다."공작 각하께서 직접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예. 장부에 적힌 값이 실제 장에서도 맞는지 보겠습니다."말하고 나서 속으로 혀를 찼다. 가격 조사 같은 소리.하지만 영지에 와서 본 것은 양피지와 봉랍과 서기관의 펜뿐이었고, 크렌트 남작 영지의 움직임도 아직은 종이 위의 짧은 줄이었다.밖의 위협을 읽으려면 안쪽부터 알아야 했다. 사람들이 어떤 길로 오고, 어디서 말을 삼키는지.레온은 문가에서 이미 허리를 펴고 섰다."공작님!""호위는 동행한다. 시장 초입까지만 걸어. 소란 만들지 말고.""예! 공작님께서 직접 백성의 삶을 살피시는 이 장면은—""레온.""예!""소란 만들지 말라고 했어."관저에서 시장 초입까지는 마차를 댈 거리도 아니었다.돌길 사이 바퀴 자국마다 전날 빗물이 흐리게 고여 있었다.천막 줄이 바람에 흔들렸고, 기름에 구운 빵 냄새와 훈제 생선 냄새, 막 자른 나무 냄새가 좁은 길 위에서 섞였다.장사꾼들의 목소리는 가까워질수록 여러 갈래로 갈라져 들렸다.문제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마다 그 목소리들이 조금씩 낮아진다는 점이었다.'아니, 이거 행사 입장 같잖아.'사람들은 길을 완전히 비키지는 않았지만, 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시선은 바닥에 두면서도 광주리 옆, 천막 틈, 저울 뒤에서 내 쪽으로 계속 올라왔다.원래 카이렌이 시장을 어떻게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걸어 내려오진 않았던 모양이다.나는 사과 광주리 앞에서 멈췄다.중년 여자가 광주리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있다가, 내 그림자가 닿자마자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사과를 파십니까?""예? 예, 공작 각하. 사과입니다요. 오늘 아침에 닦아 온 겁니다요.""별고 없으셨습니까?"여자가 눈을 깜빡였다.아.방금 질문이 너무 현대식 안부였나. 아니, 여기서도 안부는 물을거 아냐."올해 장사에 큰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여쭌 겁니다.""아, 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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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화 - 남부의 셋

시장에 다녀온 이튿날, 별관 회의실 문이 닫히자 복도의 말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긴 탁자 위 촛불은 낮인데도 켜져 있었고, 벽에 걸린 벨포르의 문장 깃발은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아주 느리게 흔들렸다.종이와 밀랍, 막 갈아 둔 잉크 냄새가 섞인 방 안에서, 나는 먼저 자리에 앉지 않고 두 남작이 회의실을 살피는 시간을 주었다.하겐 남작은 문턱을 넘은 뒤 곧장 의자로 가지 않았다.그는 창문을 보고, 문을 보고, 내 뒤편에 선 레온의 위치까지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공작 각하께서 이렇게 빨리 시간을 내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남부의 길이 막히는 일이라면 미룰 사안이 아닙니다, 하겐 남작 각하."손끝을 서류 가장자리에 얹었다.손은 느슨하게, 어깨는 곧게. 입가에 남아 있던 피곤한 기색은 더 드러나기 전에 눌러 지웠다.이 몸은 이런 자세를 아주 잘 알았다.마치 원래부터 누군가를 설득하고, 누군가를 겁주고, 누군가에게 선택지를 쥐여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로웬 남작은 이미 앉아 있었다.황궁에서 증언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말수는 적었고, 시선은 서류의 빈칸을 먼저 훑었다."크렌트가 관세를 삼 분의 일 가까이 올렸습니다. 여섯 달째지요."짧은 문장 하나가 탁자 위에 떨어졌다."명목은요?""도로 보수와 검문 강화지요."로웬 남작이 내민 문서를 펼쳤다.조항은 예쁘게 쓰인 약탈이었다.길을 고쳐 주겠다,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 대가로 통과세를 더 내라.겉으로는 그럴듯했지만 실제로는 남부의 작은 영지들이 크렌트의 문 앞에서 허리를 굽히게 만드는 구조다.속으로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 나온 목소리는 낮고 매끄러웠다."로웬 남작 각하께서 이 자리까지 오신 이유는 단순히 세금 때문만은 아니겠군요."로웬 남작은 대답 대신 나를 보았다가, 짧게 턱을 끄덕였다."보증은 좋습니다. 다만 제 이름이 벨포르 간판 아래 눌리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독자적 권한을 잃지 않는 보증을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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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 사흘이면 오나 봐요

다음 날 아침, 창틀 틈으로 찬 공기가 얇게 스며들었다.북령의 봄은 수도의 봄처럼 향기부터 앞세우지 않았다.아직 차고, 조금 젖어 있고, 서류 다발 사이로 배어든 잉크 냄새와 섞이면 사람을 정신 차리게 하는 쪽에 가까웠다.언제부터인가 나를 밖에서 보는 버릇이 들었다.빙의 초의 패닉이 가라앉고, 시장 초입에서 노인이 "작년엔 못 뵀습니다"라 했을 즈음부터였을까.책상 너머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고 그 사람이 카이렌이라는 공작이며, 나는 그 어깨 뒤에서 손을 거들고 있는 느낌.살아남기 위해 켰던 관찰자 모드가 어느 사이엔가 일상의 기본값이 되어 있었다.처음엔 그 거리가 낯설었는데, 지금은 그쪽이 일하는 데 더 편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집무실 책상 위에 쌓인 문서들을 순서대로 밀어 놓았다.어깨를 반듯하게 세웠고, 시선은 가장 위의 계산서에서 멈추었다. 힐데가 맞은편에 서서 장부를 펼쳤다."남부 자작가의 대리인이 보낸 주문서입니다. 선금이 함께 도착했습니다.""품목은요?""표지가 들어간 보존 잉크 소량, 그리고 봉인용 밀랍입니다. 수량은 많지 않으나, 대리인 명의가 확실합니다."봉투에서 꺼낸 영수증을 확인했다. 소량이라 해도 첫 외부 매출이었다.영지 안에서만 빙빙 돌던 물건이 드디어 남의 장부에 이름을 올린 셈이었다.돈이 들어왔다는 사실보다, 누군가 벨포르의 표지를 돈 주고 쓰겠다고 결정했다는 점이 더 중요했다."선금은 창고표와 별도로 기록해 주세요. 납품 기한은 넉넉히 잡고, 첫 거래니까 흠 없이 보내야 합니다.""예, 공작 각하."힐데가 펜 끝을 잉크병에 적시고, 사각거리는 소리가 집무실의 아침을 잘게 나누었다.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범한 장부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영지의 집무실에서 매출이라는 단어를 보는 건, 폐허에서 풀잎 하나를 발견하는 것과 비슷했다.문밖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시종이 은쟁반을 들고 들어와 봉투 둘을 올려놓았다. 하나는 다미안 특유의 단정한 회색 봉투였고,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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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 이름이 영지 안으로 들어왔다

이튿날 아침, 별관 마당의 흙은 밤새 서리를 품었다가 햇빛을 받으며 천천히 풀리고 있었다.포장된 스무 상자는 처마 그림자와 볕의 경계에 맞춰 가지런히 놓였다.같은 천으로 감싸고 같은 끈으로 묶었는데도, 상자마다 조금씩 다른 무게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힐데는 마지막 목록을 들고 상자 옆을 지나며 봉인 상태를 확인했다.일꾼들은 말없이 수레 바퀴에 기름을 쳤고, 마부는 고삐를 점검했다. 떠들썩한 축하도, 지나친 격려도 없었다.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나가는 물건은 웃음보다 정리가 먼저였다."남쪽 자작가로 가는 길목에서 수레를 따로 세우지 마세요. 짐은 한곳에서만 확인하고, 중간 여관에는 표식을 남기지 않습니다.""예, 공작 각하.""받는 쪽에서 수량을 다시 세면, 힐데가 적어 둔 목록과 맞춰 확인해 주세요."힐데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얼굴에는 피로가 있었지만,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그 눈빛을 보고 나서야 상자들에서 시선을 거두었다.첫 매출이라는 말은 가볍지만, 매출을 유지하는 일은 가볍지 않다. 길은 열었다고 바로 길이 되는 것이 아니다.처음 길을 여는 쪽이 먼저 돌을 치워야 하는 일은, 결국 수레가 떠난 뒤에도 계속됐다.수레가 움직이자 바퀴 밑의 흙이 낮은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돌아오는 즉시 보고서 올려 주세요.""그리하겠습니다."대답을 듣고 돌아서자,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그 생각은 집무실로 돌아온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크렌트 쪽 원료가 늦어진 이유, 남쪽 자작가가 첫 주문을 받아들인 속도, 이졸데가 보내온 편지의 문장들, 그리고 수도의 말들이 영지 안쪽으로 밀려드는 방식이 서로 느슨하게 이어져 있었다.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들을 순서대로 넘기며, 그 연결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매끈하다는 결론을 다시 확인했다.저녁이 되자 집무실의 등불이 먼저 밝아졌다.창밖의 빛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종이 위의 글자를 읽기에는 방 안의 등불이 더 믿을 만했다.남은 서류를 정리하던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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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화 - 회피 매뉴얼

다음 날 아침, 시종은 장부가 모두 펼쳐지기도 전에 문밖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결재용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북령의 아침빛은 맑았지만 차가웠고, 유리 너머로 보이는 정원 길에는 밤새 얼어붙었던 흙빛이 아직 남아 있었다."들어오세요."시종이 봉투가 놓여 있는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두꺼운 회색 양피지 위에 붉은 밀랍이 붙어 있었고, 그 봉인은 조용한 사물답지 않게 눈길을 강하게 끌었다.밀랍의 붉은빛은 마른 피처럼 짙었고, 그 위로 제국 기사단을 상징하는 검의 문장이 깊게 박혀 있었다."공작 각하, 제국 기사단에서 공식 통지가 도착했습니다."손을 뻗다 말고 잠깐 멈췄다.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서신은 일반 서신과 달랐다.이건 예의상의 문답이 아니라, 이미 움직이기로 정한 절차가 문서 형태로 도착했다는 뜻이다.봉투를 집어 들자 종이의 무게가 손목에 분명히 실렸다. 밀랍은 얌전하게 붙어 있었으나, 내게는 그것이 문고리처럼 보였다. 열면 사람이 들어오는 문고리."확인하겠습니다. 물러가셔도 됩니다.""예, 공작 각하."시종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집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장작불이 작게 타는 소리와 벽시계의 규칙적인 움직임만 남았다. 봉인을 뜯자 밀랍이 갈라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선명했다.통지문은 길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나빴다.장황한 문서는 해석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 문서는 필요한 말만 골라 적은 칼날 같았다.제국 기사단은 나흘 뒤 북령 경계 순찰 일정을 진행한다. 해당 순찰에는 기사단장 본인이 동행한다. 영지 행정 협조 절차 확인을 위해 공작가에 단기 체류한다. 숙소와 회담 장소, 경계 구역 출입 허가에 관한 준비를 요청한다.통지문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아 이게 뭐야 진짜.서신을 보내고 답신이 오고, 이제 사람이 온다. 단계가 너무 빠르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곧 입꼬리를 자조하듯 희미하게 비틀었다.좋다. 막을 수 없다면 구조를 짜야 한다.직장에서 갈등 상대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감정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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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 결을 읽는 눈

세르주 아인하르트가 점심 전에 도착했다는 보고는, 아직 햇빛이 별관 회담실의 긴 창을 비껴들 무렵 전해졌다.어깨가 먼저 굳으려 했으나, 낮게 숨을 내쉬고 입가를 정리했다."별관 회담실로 모시세요. 본관 출입은 예정된 절차 외에는 열지 않습니다."시종이 물러가자, 매뉴얼 항목 위에 손끝을 가만히 두었다. 종이는 얇았고, 그 위에 적은 문장은 얇지 않았다.이건 회피가 아니라 관리다. 위험 인물과의 접촉을 업무 범위 안에 묶는 것. 감정이 끼어들 틈을 줄이고, 시선을 기록 가능한 곳에 묶어 두는 것.그런데 왜 이렇게 출근 전에 상사 면담 잡힌 사람처럼 속이 불편하지.별관 회담실은 본관보다 밝았다.늦은 봄 햇살이 창틀을 지나 긴 탁자 가장자리에 닿아 있었고, 양피지에서 나는 마른 냄새와 잉크병의 서늘한 냄새가 공기 속에 섞여 있었다.벨포르의 봉인 색으로 정리된 서류들이 탁자 왼편에 놓였고, 북령 경계 순찰 관련 문서는 맞은편에 펼쳐질 자리만 남겨 두었다.동석자는 문서관과 별관 관리관, 그리고 문 가까이에 선 호위 기사였다.매뉴얼 첫 항목은 적용되었다. 장소는 분리되었고, 보는 눈은 여럿이 되었고, 사적인 공백은 없었다.문이 열렸을 때, 세르주는 짙은 망토를 두른 모습으로 먼저 눈에 들어왔다.짙은 천이 어깨에서 곧게 떨어졌고, 제국 기사단 문장이 금실로 박힌 가장자리가 창으로 든 빛을 받아 가늘게 빛났다.뒤이어 검은 머리와 넓은 어깨가 보이고, 마지막으로 금색 눈과 짧게 시선을 맞췄다."공작 각하."그의 인사는 길지 않았다. 할 말만 먼저 놓고, 필요한 만큼만 고개를 숙였다."기사단장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고르게 나왔다.다행히 밖으로는 아무것도 새지 않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만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것 같았다.세르주는 자리에 앉기 전 창밖을 보았다. 별관 너머로 역참 쪽 길이 비스듬히 보였다.낮인데도 등불 관리대가 남아 있었고, 길가에는 공동 표지와 벨포르 봉인 색의 작은 표식들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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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화 - 조심하시오

다음 날 아침, 북쪽 경계로 향하는 길에는 늦은 봄 햇살이 낮게 깔려 있었다.밤새 식었던 흙은 말발굽 아래에서 눅눅한 냄새를 올렸고, 등자 가죽은 햇볕을 받아 손등에 닿을 때마다 미묘하게 따뜻했다.말을 천천히 몰며 앞쪽 능선을 보았다.안개가 걷히는 속도, 역참으로 이어지는 샛길, 경비대가 세워 둔 표식까지 하나씩 확인했다. 공식 업무였다.뒤에는 호위 기사 둘과 벨포르 경비대 일부가 붙어 있었고, 오른편에는 세르주 아인하르트가 나란히 말을 몰았다.그 사실을 최대한 행정 문서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이건 순찰이다. 협조 항목이다. 사람과 사람이 나란히 있는 게 아니라, 공작령과 기사단의 업무선이 잠시 겹친 것이다."북쪽 능선의 안개는 해가 오르면 대체로 걷힙니다. 다만 골짜기 아래쪽은 정오 가까이 남는 날이 있습니다."내가 설명하자 세르주는 고개를 조금 돌려 능선 아래를 보았다.금색 눈이 안개를 훑고, 그다음에는 길가의 돌과 말발굽 자국 사이로 갈라진 흙을 보았다."물이 늦게 빠지는 곳이오?""맞습니다. 그래서 우기 전에는 저쪽 배수로를 먼저 봅니다.""돌을 새로 다졌소?"대답하려다 잠시 멈췄다. 세르주는 보고서를 본 적이 없다.어제 집무실에서 설명한 것도 큰 항목뿐인데, 그는 길의 표면만 보고 보수 시점을 짚어냈다."지난달에 했습니다. 마차가 자주 빠져서요.""그렇겠소. 바퀴가 흙을 밀어낸 자리가 남아 있소."그는 별말 아니라는 듯이 짧게 말했다.먼저 결론을 내고, 필요한 만큼만 덧붙였다. 눈앞의 길을 보며 속으로 마른숨을 삼켰다.'이 남자, 길 보는 눈이 진짜 보고서야.'돌의 간격, 흙의 색, 물이 흐른 자국.내게는 관리해야 할 목록이었는데, 세르주에게는 이미 읽을 수 있는 문장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영지 운영 평가받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PT 받는 날이었나. 분명 순찰이라고 했는데, 왜 담당자가 현장 발표 중인 기분이지."역참 등불은 해 질 무렵부터입니까.""예. 북쪽 길은 안개가 남는 날이 많아 다른 역참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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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화 - 사실상의 동거

본관 집무실의 창은 별관 쪽으로 나 있었다.아침 안개가 걷히고 나자 낮은 언덕 아래에 기사단 천막들이 드러났고, 젖은 천 가장자리에 걸린 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양피지 위에 놓인 일정표를 내려다보다가, 펜촉 끝에 맺힌 잉크가 번지기 전에 손을 멈췄다.힐데브란트가 맞은편에서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공작 각하, 별관 기사단 임시 주둔 일정이 보름 더 이어집니다."'보름? 보름이나?'행정 협조에 보름이나 왜 필요한데."사유는요?""순찰 기록 대조 이후 추가 확인 절차가 생겼습니다. 영지 경계 병력 명부와 기사단 파견 명부를 맞춰야 하고, 별관 창고 사용 내역에도 기사단 확인란이 붙었습니다.""확인란..""예. 기사단장 각하의 서명이 필요한 항목입니다."일정표의 빈칸을 보았다. 본관과 별관 사이 동선 분리, 공식 용건 외 사적 접촉 금지, 동석자 배치, 모든 발화 기록. 정리해 둔 항목들은 아직 멀쩡했다.문제는 멀쩡한 항목들이 현실에는 조금도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아인하르트 경의 의견은요?"문 옆에 서 있던 세르주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제복 깃이 흐트러짐 없이 닫혀 있었고, 표정은 어제 순찰길에서 돌아왔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문서가 늘면 움직임도 남소."짧았다. 그런데 말이 너무 정확해서,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공작 각하께 불편을 드릴 생각은 없소. 공식 자리에서만 뵙겠소."그게 문제라고요.속으로만 대답하고, 겉으로는 고개를 기울였다."알겠습니다. 힐데브란트, 동선표는 기존 매뉴얼대로 유지하세요. 본관 식사는 필요한 경우에만 동석자를 두고 진행합니다. 기사단 측에는 모든 요청을 서면으로 받도록 하세요.""그리 처리하겠습니다, 공작 각하."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급하게 다가왔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레온의 목소리가 먼저 들어왔다."공작님!"눈을 들었다. 레온은 숨도 고르지 못하고 들어서더니, 두 손에 쥔 서류를 가슴에 바싹 붙이고 눈을 빛냈다."기사단장 각하께서 공작님 곁에 붙어계시다니!""레온,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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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화 - 시선

다음 날 저녁, 연회장 문이 열리기 전, 대기실 탁자 위에 놓인 일정표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영지 귀족 입장, 남부 동맹 인사, 첫 잔, 축사, 기사단장 동석 확인, 영지 의례.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공작가의 공식 절차는 늘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적어도 문장으로 적혀 있는 동안에는 그랬다.힐데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공작 각하, 하겐 남작과 로웬 남작이 도착했습니다. 기사단장도 이미 연회장 안쪽에 있습니다.""알겠어요. 남부 두 분은 오늘 동맹으로 예우해 주세요. 영지 귀족들 차례 흐트러지지 않게 부탁드립니다.""예, 공작 각하."문이 열리자 촛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높은 천장 아래 불빛이 겹겹이 번졌고, 금실로 수놓인 장식 천과 드레스 자락들이 그 빛을 받아 움직일 때마다 홀 전체가 조용히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꽃 장식에서는 늦봄의 단 향이 났고, 귀족들의 향수가 그 위에 얇게 겹쳤다.현악기 소리와 낮은 관악기 소리가 아직 춤을 알리기 전의 전주처럼 흘렀다.그 모든 것을 시야에 담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영지민 대표에게 고개를 숙였고, 오래된 가문 문장을 단 기사에게 잔을 들어 보였으며, 하겐 남작과 로웬 남작이 다가오자 걸음을 멈췄다.하겐 남작이 환하게 웃었다."공작 각하, 이 영지의 홀은 소문보다 훨씬 단정하군요. 사람들 얼굴도 밝습니다.""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입니다. 이곳의 질서는 이곳 사람들이 오래 지킨 것입니다. 공작가는 그 위에 필요한 것을 더할 뿐입니다."로웬 남작은 잔을 조금 들어 올렸다."필요한 것을 더한다는 말, 남부에선 오래 기억될 겁니다.""기억보다 실무가 먼저입니다, 남작. 내일 오전에 목재 운송로와 세금 감면 기간을 다시 확인하겠습니다."두 남작이 서로 짧게 눈을 맞추었다. 연회장에서 세금 감면을 말하다니.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잔을 내려놓았다. 공식 자리에서의 대화는 인사와 약속, 약속과 기록으로 이어져야 한다. 감상은 그 다음이었다.그때 의전관이 다가왔다.자연스럽게 다음 절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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