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로판 속 악녀 공작에 빙의했다. 빙의 첫날부터 독차를 마시고, 마지막에는 남주한테 공개 처형당하는 자리다. 답은 정해져 있다. 도망친다. 영지를 굴리고, 사교계에서 줄 타고, 사망 플래그 하나씩 분지른다. 야근으로 단련해 둔 게 이런 데 쓰일 줄 몰랐다. 문제는 남주가 자꾸 따라온다는 거다. 원작에서 나는 거들떠도 안 보던 남자가 영지까지 와서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같은 말을 한다. 처형할 사람이 안부는 왜 묻는데? 눈빛도 이상하다. 원작에서 본 그 차가운 눈이 아니다. 피하면 따라오고, 따라오면 심장이 뛴다. 무서워야 하는데 자꾸 무섭지 않다. 이거, 내가 읽은 그 소설이랑 뭐가 다르다.
View More이불이 너무 좋았다. 첫 번째로 잘못된 게 그거였다.
내 자취방 이불은 이런 감촉이 아니다.
빨고 나면 네 귀퉁이가 뒤집히고 모서리에 보풀이 잡혀야 정상인데, 지금 손에 닿는 건 어느 호텔 신혼 패키지에나 깔아 줄 법한 부드러움이었다.
입안이 마른 채로 깨어났는데, 그 정도가 평소와 달랐다. 어깨도 마찬가지였다.
자고 일어나면 결리는 자리가 정해져 있는데, 그 자리가 어딘지 잠깐 못 찾겠다.
천 안쪽에 무슨 풀 같은 단내가 배어 있었고, 어디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빠르게 울다 그쳤다.
그러고 나서야 천장이 너무 높다는 걸 알았다.
높이라기보다는 거리감이었다. 머리 위 공간이 이렇게 비어 있을 일이 내 인생에는 없었다.
뭐지?
벌떡 일어나려다가 동작이 이상하게 굼떴다. 몸이 무거웠다.
어제 야근을 또 한 건가, 하는 데까지 갔다가 멈췄다.
근데 막상 떠올리려니 그 어제가 잡히지 않았다. 회사를 갔는지, 야근을 했는지, 어떻게 잠들었는지 — 아무것도.
이불 밖으로 손을 꺼냈는데,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따라온 건 그다음이었다.
창백할 만큼 희고, 길었다. 마디가 가늘고 손톱 끝이 반들거렸다 — 정리정돈된 사람의 손이었다.
내 손은 마우스 잡는 자리 안쪽이 항상 뻑뻑하고, 손톱 옆에 거스러미가 늘 있어야 정상이다.
접었다 폈다. 접히고 펴지는걸 보니 내 손은 맞는데, 생김새는 내 것이 아니었다.
손은 손인데 내 손이 아니라는 게, 그게 더 무서웠다.
목을 만지려고 손을 들었더니 머리카락이 한 줌 같이 따라 올라왔다.
부드럽고, 길었고, 무엇보다 무거웠다.
내가 단발로 자른 게 작년 7월쯤이었나. 어쨌든 어깨까지 내려올 일은 없는 머리였다.
'말도 안 돼... 근데 무게가 이 정도면 꿈은 아니잖아.'
침대에서 발을 내리는데 부드러운 천이 다리에 서늘하게 닿았다.
잠옷이 발목까지 닿는 종류였고, 허리께를 딱 한 번 꾹 죄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이런 옷을 입고 자?
맨발에 닿는 마룻바닥이 차가웠다.
침대에서 한참 떨어진 자리에 무거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너머로 햇빛이 비스듬하게 바닥에 깔려 있었다.
햇빛이 길게 누운 걸 보면 늦은 오후였다. 늦은 오후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지. 어제도 잘 모르는 마당에.
투덜거릴 새도 없이 시선이 딱 한곳에 멈췄다.
거울이 거기 있었다.
***
거울 앞에서 발이 멈췄다. 멈추기 전에 숨이 먼저 멎었다.
은발이었다.
어깨를 넘는 길이로, 조명 아래서 차갑게 빛났고 끝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해 볼 생각도 안 했던 색이었다. 그걸 생각할 새도 없이 은빛이 먼저 시야를 눌렀다.
눈은 더 심했다. 보랏빛이었다.
조명 탓인가 싶어 고개를 틀어 봤다. 그대로였다.
사람 눈에서 나올 색이 아닌데, 거울 속 여자는 그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은 한 번에 안 들어왔다.
예쁘다고만 하기엔 설명히 부족하고, 차갑다고 단정하기에는 눈을 못 떼지 못했다.
표정을 푸는 순간에도 사람을 한 발쯤 물러서게 만들 만큼 서늘한 인상이었다.
나는 거울을 오래 봤다. 보다가 문득 회사 단톡방이 떠올랐다. 김 대리가 보낸 시안에 코멘트 달기로 했었는데.
어제? 어제, 야근 끝나고 — 거기서 끊겼다. 끊긴 기억이 이어지질 않는다.
엄마한테 전화는 했나? 안 했지. 안 했고, 이제는 못 한다. 그게 미안한 게 아니라 무서웠다.
거울 속에서 이 여자가 내가 손을 드는 동작 그대로 손을 들었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정말로 내 동작을 따라 했다.
진짜였다. 이상할 만큼 진짜라서, 어쩐지 웃겼다.
***
웃을 일이 아니었다는 건 책상 앞에 가서야 알았다.
화장대인지 책상인지 애매한 너른 가구 위에는 은빛 손거울부터 빗, 편지칼까지 죄다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정리 잘하는 인간의 책상이었다.
그 위로 옅게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깔려 있었고, 창 너머 햇빛이 가구 한쪽 모서리에만 환하게 닿아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게 또 거슬렸지만, 그러면서도 봉투를 봤다.
두꺼운 종이에 또렷한 글씨로 한 줄.
카이렌 드 벨포르 공작 각하.
심장이 쿵 뛰었다.
이름 자체는 늦게 인식됐는데, 심장이 그보다 먼저 알아들었다.
카이렌. 벨포르.
거울에 있던 그 여자가 내 손을 따라, 아니 나를 따라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봉투 옆에 이미 뜯긴 편지 몇 장이 정렬되어 있었다.
가장 위 장의 첫 줄에 '아인하르트'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다음 장 어딘가에 '제이황자 전하의 뜻을 받들어'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 두 이름이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설명보다 먼저 내 쪽으로 서늘하게 밀려왔다.
거기서 기억이 한꺼번에 풀렸다.
아.
아, 그 소설.
야근 끝나고 씻지도 못한 채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휴대폰 액정으로 읽던 것.
「검은 장미의 기사」.
남주는 세르주 아인하르트, 여주는 엘리스 로젠크란츠, 그리고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마지막에 처형당하는 악녀 공작이 한 명 있었다.
은발에 보랏빛 눈, 성격은 더럽고 집착은 질기고 끝에는 깔끔하게 목이 날아가던 여자.
이름은 — 한 번 더 봉투를 봤지만, 봉투에는 그냥 그 이름이 있을 뿐이었다.
카이렌 드 벨포르.
'아... 그 소설. 거기 처형당하던 그 악녀가 나라고?'
마지막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피 묻은 돌바닥. 차갑게 내려다보는 기사. 울면서 매달리던 은발 여자.
그때도 나는 그 여자가 답답하다고 생각했었다.
막상 그 이름이 내 목에 걸리니, 답답하다는 감상은 사라졌다. 답답한 쪽은 이제 내가 될 차례였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등받이가 부드럽게 받쳐 줬다. 지금 내 인생에서 제일 쓸모없는 배려였다.
머릿속에서는 거울 속 그 얼굴, 봉투 위 그 이름, '아인하르트'라는 글자, '제이황자'라는 글자가 서로 부딪히며 돌아다녔다.
소설 내용은 또 왜 이 타이밍에 이렇게 선명한지 모르겠다.
남주 얼굴은 기억도 안 나는데 내 처형 장면만 또렷한 게, 독서 경험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
그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공작님, 차를 올리겠습니다."
심장이 통째로 내려앉았다. 대답할지 말지 정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들어오십시오."
머리로 떠올린 말이 아니라 몸에 배어 있던 응답 같았다. 입에서 나온 다음에 내가 더 놀랐다.
문이 열리고 시종 하나가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회색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중년 남자였다.
그는 시선을 낮춘 채 찻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한 발 물러섰다.
잔을 내려놓는 동작이 잠깐 끊겼던 것 같기도 했는데, 내가 잘못 본 건지 그가 바로 자세를 고쳐 세운 건지 확신은 서지 않았다.
"오늘도 편히 드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따뜻한 김이 잔에서 곧게 올라왔다. 풀잎이 살짝 익은 듯한 향이 코 안쪽에 닿았다. 좋은 차라고 짚어 두기에는 마음이 그쪽에 있지 않았다.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미 잔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공작은 적어도 자기 방에서 차 한 잔쯤은 떨지 않고 마셔야지, 하는 생각이 거의 반사적으로 따라붙었다.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게 체면은 아닌데. 안 마시면 더 수상해 보일까 하는 계산이 또 그 위에 얹혔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눈치부터 보는 내가 좀 한심했다.
잔을 잡는 자세부터 자연스러웠다. 몸이 기억하는 건지, 내가 아는 건지 잠깐 헷갈렸다.
찻잔을 입술에 댔다.
처음엔 떫었고, 그다음 늦게 단맛이 올라왔다.
혀끝이 싸하게 저렸고, 목을 지난 액체가 그대로 명치까지 내려앉았다.
안쪽에서 뭔가가 뜨겁게 번졌다.
아니, 잠깐.
이거 지금,
황제의 알현실 문이 열렸을 때, 나는 문서 봉인부터 보았다.붉은 밀랍 위에 황실 문장이 눌려 있었다.어제 관저 책상 위에서 차갑게 굳어 있던 봉인이 오늘은 황제의 책상 위에 놓였다.같은 문양이었는데, 장소가 바뀌자 무게가 달라졌다.같은 문서도 권력 있는 방에 올라오면 달라 보이는 모양이었다.정해진 자리에서 예를 갖췄다.세르주는 나보다 반 걸음 뒤에 섰고, 다미안은 더 뒤에서 서류함을 들고 있었다.알현실에는 황실 서기관과 의전관만 남았다.사람이 적은데도 숨이 더 막혔다.큰 소리는 없었지만, 보는 눈은 많았다.황제는 문서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이미 읽은 사람처럼 첫 장과 마지막 장만 넘겼다."벨포르 공작.""예, 폐하.""정략인가.""예. 독화살 사건 이후 귀빈 보호와 공작가 안정화를 위한 한시적 정략입니다."대답은 준비한 그대로 나갔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정략이라는 말이 이렇게 성실하게 입 밖으로 나오면, 거짓말도 관료제에 취직할 수 있구나.참 대단한 세계였다.황제의 시선이 세르주에게 옮겨 갔다."세르주 경.""예, 폐하.""그대 뜻인가.""그렇습니다."짧았다.세르주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황제도 더 묻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오래된 문장들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았다.그 생략이 오히려 알현실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황제가 봉인을 손끝으로 짚었다."보호가 사사로 흐르면 칼이 무뎌진다.""명심하겠습니다.""공작.""예.""이 선택이 그대 생존을 돕기를."축복이 아니었다.경고에 가까웠다.살아남으려면 선택의 값을 치르라는 말.고개를 숙이며 숨을 고르고,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혔다."폐하의 결정을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황제는 더 말하지 않았다."짐이 결재한다. 공지하라."황실 서기관의 펜이 움직였다.사각거리는 소리가 알현실에 남았다.그 소리가 끝나는 순간, 한시적 정략 약혼은 관저 책상 위의 임시 문장이 아니라 황제가 허락한 공식 약혼이 되었다.펜 소리를 들으며 손바닥을
다미안은 의전청 회의가 끝나자마자 관저 집무실 문을 닫게 했다.탁자 위에는 독화살 봉인함 사본, 관람석 출입 명단, 사교계 반응지가 차례로 놓였다.의자에 앉으며 손바닥을 한 번 폈다.아직 남아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부터 사라지지 않는 잔상.세르주의 장갑을 보지 않겠다고 버텼는데, 보지 않는다고 손바닥 안쪽까지 비워지는 건 아니었다.몸이 제멋대로 자료를 보관하는 건 정말 최악의 기록 관리였다.다미안이 첫 장을 밀었다."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관계를 공개적으로 공식화하면 공격 표적이 줄어듭니다."레온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공식화라면, 어떤 의미입니까.""말 그대로입니다. 설명을 요구받는 관계가 아니라, 문서로 먼저 정리해 두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종이를 내려다보았다.다미안의 글씨는 언제나처럼 반듯했다.반듯한 글씨가 싫어지는 순간도 있구나.새로 배웠다."다미안.""예.""내가 지금 아주 싫은 예감이 드는데, 맞아?""대체로 맞습니다."아, 그럴 줄 알았다.다미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정략 약혼입니다. 외부 표기는 한시적 보호 정략. 문서상 명분은 독화살 사건 이후 황실 기사단장의 귀빈 보호와 벨포르 공작가 안정화입니다."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테오도어는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죽였다.웃지 않았다. 웃을 상황도 아니었고, 웃었다가는 이상하게 보일 뿐이었다.무엇보다 웃을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약혼.그 단어는 정치 용어로 꺼냈는데도 어딘가에 걸렸다.어젯밤 꿈에서 보이지 않던 얼굴, 목덜미에 남은 듯한 숨결, 손바닥 안쪽의 잔상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려 했다."가짜 약혼을 정치 방패로 쓰자는 말이네.""공식 문서에는 그 단어가 들어가지 않습니다.""당연히 안 들어가겠지. 들어가면 문서가 아니라 자백서니까."다미안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레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그 침묵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누군가 축하라도 했다면 나는 진심으로 찻잔을 엎었을지도 모른다.다
밤이 깊어도 손바닥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침대 위에 누워 손을 펴 보았다.방 안에는 촛불 하나만 남아 있었고, 천장에는 흔들리는 그림자가 얇게 걸렸다.명단도 화살촉도 다미안에게 넘겼다.독 분석은 기사단이 맡았다.알렉세이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졸데 쪽으로 돌릴 문장을 준비하면 된다.정리할 것은 정리했다.그런데 눈을 감으면 갑옷에 남은 흠이 먼저 떠올랐다.그다음에는 장갑의 결이 손바닥 안쪽에 다시 닿았다. 살아남았다는 증거라고 하면 편했다.문제는 증거치고 너무 따뜻하게 남는다는 점이었다.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렸다.자자. 오늘은 더 생각하면 안 된다. 사람은 잠을 자야 내일 덜 망한다.그렇게 생각한 것까지는 기억났다.***꿈속의 방은 내 방이 아니었다.벽지가 어두웠고, 창가에는 무거운 휘장이 내려와 있었다.촛불은 멀리 있었는데도 열은 피부 가까이 닿는 듯했다.누군가 바로 앞에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넓은 어깨와 낮은 숨소리, 가까이 올 때마다 먼저 닿는 체온.움직이려 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아니, 몸은 움직였다. 다만 그녀가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손이 먼저 올라갔다.손끝이 낯선 옷깃을 스쳤고, 몸은 그 감촉을 이미 아는 것처럼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손목을 잡힌 것도 아니었다. 끌려간 것도 아니었다.몸은 그 거리감을 먼저 받아들였다.조수석에 앉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다 보이는데 방향을 틀 수 없었다.브레이크를 밟고 싶은데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얼굴 없는 남자의 손이 뺨 가까이를 지나갔다.손등인지 손가락인지 모를 감각이 짧게 남았다. 그다음에는 목덜미 쪽으로 숨이 닿았다.말은 없었다.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 몸은 그 침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왜 무서워하지 않아.질문은 꿈속에서 소리가 되지 않았다. 대신 몸이 대답했다. 오래 알고 있었다는 듯, 다시 만난 것처럼, 잃어버렸던 것을 확인하듯.감각이 먼저 가고 생각은 뒤에 끌려왔다
정원 쪽 회랑은 집무실보다 조용했다.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레온이 따라 나오려 했고, 다미안은 서류를 든 채 내 곁에 섰다.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뜻이었다.오늘 독화살을 맞을 뻔한 사람이 혼자 정원으로 나가는 건, 상식적으로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레온은 문 안쪽에 있어. 내가 부르면 바로 와.""공작님.""명령이야."레온은 입을 다물었다. 다미안이 대신 짧게 물었다."기록은 제가 이어서 보겠습니다.""응. 동선부터.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지.""알겠습니다."테오도어는 회랑 쪽 문을 열어 두었다. 바깥에서 젖은 흙 냄새가 들어왔다.해가 기운 뒤라 정원 돌길은 낮의 열을 거의 잃고 있었다.걸음을 옮겼다. 이건 업무였다. 독화살 조사 경과를 듣고, 사교계에 나갈 문장을 정하고, 세르주 기사단장과 공식 대응 방향을 맞추는 일. 딱 거기까지.그렇게 정리하면 쉬워야 했다.그런데 손바닥에는 아직 장갑의 결이 남아 있었다.***세르주는 정원 회랑 끝에 서 있었다.검은 갑옷은 닦여 있었지만 왼쪽 흉갑에는 얕은 흠이 남아 있었다. 화살촉이 비틀렸던 자리였다.가까이서 보니 검푸른 독 자국은 사라졌고, 금속 표면만 거칠게 긁혀 있었다.그래도 나는 그 흠을 보는 순간 숨이 잠깐 막혔다.세르주가 먼저 예를 갖췄다."공작.""기사단장님."알현실 복도 때와 비슷했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사교계가 보면 또 문장 하나쯤 만들기 좋은 간격이었다. 아, 이제 거리까지 문장 단위로 계산하게 생겼네. 정말 싫다.세르주는 그 계산을 모르는 사람처럼 곧바로 보고했다."휘장 뒤에서 단궁의 받침 조각을 찾았습니다.의전청 임시 인력 명단에 있던 한 사람이 사라졌고, 기사단이 성문 쪽을 막았습니다.""독은요?""분석 중입니다. 피부에 닿아도 위험한 종류로 보입니다. 화살촉은 봉인했습니다."짧고 정확했다. 지금 듣기 좋은 방식이었다. 사건, 증거, 다음 조치. 감정을 끼워 넣을 틈이 없었다.그래서 오히려 사적인 질문이 끼어들 틈이
다음 날 오전, 서재의 잉크 냄새는 전날보다 옅었고 내 눈 밑의 피로는 전날보다 선명했다.장부와 찢긴 연대기를 나란히 두고 밤을 보낸 대가였다.공작가 침대는 비싼 만큼 푹신했지만,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굴러다니면 깃털 매트리스도 돌판이 됐다.문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들어와."말하고 나서 잠깐 멈췄다.'공작이면 들어오라가 맞나, 들어오십시오가 맞나.'다미안이면 반말이어도 되는 것 같은데, 문밖 사람이 다미안이 아닐 수도 있었다.다행히 문을 연 건 다미안이었다.그는 검은 가죽 서류철 하나를 들었고, 손끝에는 얇은 면
황궁 알현은 이상할 정도로 무난하게 끝났다.무난하다는 말이 이렇게 수상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황제 제라드 폰 아르네스는 오래 닦인 금속처럼 차고 반듯한 사람이었고, 내 안부를 물으면서도 내 대답보다 내가 단어를 고르는 속도를 재는 듯했다.나는 벨포르의 충성을 말했고, 황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세르주는 끝까지 필요한 말만 했다.큰 사건은 없었다. 다만 황제가 누구를 먼저 보는지, 대신들이 숨을 죽이는 타이밍, 황제가 세르주에게 말할 때와 나를 볼 때의 말끝 차이를 죄다 머릿속에 담아 왔다.정보 수집 모드였다. 살아
"벨포르 공작님. 기사단장 각하께서 직접 호위를 맡으셨습니다."황궁 서쪽 응접실 문 앞에서 시종이 그렇게 말했다.잠깐만. 원작에선 이 시점에 세르주랑 말도 안 섞었는데?손에 낀 장갑 안쪽이 답답해졌다. 새 장갑이라 그런 건지, 내가 지금 도망치고 싶어서 그런 건지 구분이 안 됐다.황궁 응접실의 문양은 전부 금으로 반짝였고, 바닥은 사람 얼굴이 비칠 만큼 닦여 있었으며, 나는 어느 문이 알현실로 이어지는지 아직도 제대로 몰랐다.절차는 몸이 외우고 있었다.응접실에서 기다린다, 황궁 시종이 부르면 일어난다, 황제의 명이 먼저
독.단어가 먼저 떠올랐고, 몸은 그다음에야 알아들었다.명치 끝에 뜨거운 바늘 같은 통증이 박혔다.그 감각이 아래로 퍼지기 전에 의자에서 밀려나듯 일어났다.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가 부딪혔지만 아픈 줄도 몰랐고, 잔은 아직 내 손끝에 걸려 있었다.우아하게 죽을 팔자는 아니라는 걸 그 순간 확신했다. 손가락을 입안으로 밀어 넣자 목 안쪽이 긁히고, 뜨거운 차와 침이 뒤섞여 한꺼번에 올라왔다."공작님!"시종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말만 할 뿐 다가오지는 않았다.나는 책상 옆으로 몸을 숙인 채 게워 냈다. 찻물이 바닥에 흩어지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