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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화 - 남부의 셋

Author: 뽁뽁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0 16:40:47

시장에 다녀온 이튿날, 별관 회의실 문이 닫히자 복도의 말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

긴 탁자 위 촛불은 낮인데도 켜져 있었고, 벽에 걸린 벨포르의 문장 깃발은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아주 느리게 흔들렸다.

종이와 밀랍, 막 갈아 둔 잉크 냄새가 섞인 방 안에서, 나는 먼저 자리에 앉지 않고 두 남작이 회의실을 살피는 시간을 주었다.

하겐 남작은 문턱을 넘은 뒤 곧장 의자로 가지 않았다.

그는 창문을 보고, 문을 보고, 내 뒤편에 선 레온의 위치까지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공작 각하께서 이렇게 빨리 시간을 내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남부의 길이 막히는 일이라면 미룰 사안이 아닙니다, 하겐 남작 각하."

손끝을 서류 가장자리에 얹었다.

손은 느슨하게, 어깨는 곧게. 입가에 남아 있던 피곤한 기색은 더 드러나기 전에 눌러 지웠다.

이 몸은 이런 자세를 아주 잘 알았다.

마치 원래부터 누군가를 설득하고, 누군가를 겁주고, 누군가에게 선택지를 쥐여 주기 위해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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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역인데, 남주가 이상하다   # 13화 - 남부의 셋

    시장에 다녀온 이튿날, 별관 회의실 문이 닫히자 복도의 말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긴 탁자 위 촛불은 낮인데도 켜져 있었고, 벽에 걸린 벨포르의 문장 깃발은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아주 느리게 흔들렸다.종이와 밀랍, 막 갈아 둔 잉크 냄새가 섞인 방 안에서, 나는 먼저 자리에 앉지 않고 두 남작이 회의실을 살피는 시간을 주었다.하겐 남작은 문턱을 넘은 뒤 곧장 의자로 가지 않았다.그는 창문을 보고, 문을 보고, 내 뒤편에 선 레온의 위치까지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공작 각하께서 이렇게 빨리 시간을 내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남부의 길이 막히는 일이라면 미룰 사안이 아닙니다, 하겐 남작 각하."손끝을 서류 가장자리에 얹었다.손은 느슨하게, 어깨는 곧게. 입가에 남아 있던 피곤한 기색은 더 드러나기 전에 눌러 지웠다.이 몸은 이런 자세를 아주 잘 알았다.마치 원래부터 누군가를 설득하고, 누군가를 겁주고, 누군가에게 선택지를 쥐여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로웬 남작은 이미 앉아 있었다.황궁에서 증언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말수는 적었고, 시선은 서류의 빈칸을 먼저 훑었다."크렌트가 관세를 삼 분의 일 가까이 올렸습니다. 여섯 달째지요."짧은 문장 하나가 탁자 위에 떨어졌다."명목은요?""도로 보수와 검문 강화지요."로웬 남작이 내민 문서를 펼쳤다.조항은 예쁘게 쓰인 약탈이었다.길을 고쳐 주겠다,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 대가로 통과세를 더 내라.겉으로는 그럴듯했지만 실제로는 남부의 작은 영지들이 크렌트의 문 앞에서 허리를 굽히게 만드는 구조다.속으로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 나온 목소리는 낮고 매끄러웠다."로웬 남작 각하께서 이 자리까지 오신 이유는 단순히 세금 때문만은 아니겠군요."로웬 남작은 대답 대신 나를 보았다가, 짧게 턱을 끄덕였다."보증은 좋습니다. 다만 제 이름이 벨포르 간판 아래 눌리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독자적 권한을 잃지 않는 보증을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그

  • 악역인데, 남주가 이상하다   # 12화 - 시장 초입

    시장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힐데브란트는 찻잔을 내려놓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눈썹만 조금 내려갔다."공작 각하께서 직접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예. 장부에 적힌 값이 실제 장에서도 맞는지 보겠습니다."말하고 나서 속으로 혀를 찼다. 가격 조사 같은 소리.하지만 영지에 와서 본 것은 양피지와 봉랍과 서기관의 펜뿐이었고, 크렌트 남작 영지의 움직임도 아직은 종이 위의 짧은 줄이었다.밖의 위협을 읽으려면 안쪽부터 알아야 했다. 사람들이 어떤 길로 오고, 어디서 말을 삼키는지.레온은 문가에서 이미 허리를 펴고 섰다."공작님!""호위는 동행한다. 시장 초입까지만 걸어. 소란 만들지 말고.""예! 공작님께서 직접 백성의 삶을 살피시는 이 장면은—""레온.""예!""소란 만들지 말라고 했어."관저에서 시장 초입까지는 마차를 댈 거리도 아니었다.돌길 사이 바퀴 자국마다 전날 빗물이 흐리게 고여 있었다.천막 줄이 바람에 흔들렸고, 기름에 구운 빵 냄새와 훈제 생선 냄새, 막 자른 나무 냄새가 좁은 길 위에서 섞였다.장사꾼들의 목소리는 가까워질수록 여러 갈래로 갈라져 들렸다.문제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마다 그 목소리들이 조금씩 낮아진다는 점이었다.'아니, 이거 행사 입장 같잖아.'사람들은 길을 완전히 비키지는 않았지만, 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시선은 바닥에 두면서도 광주리 옆, 천막 틈, 저울 뒤에서 내 쪽으로 계속 올라왔다.원래 카이렌이 시장을 어떻게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걸어 내려오진 않았던 모양이다.나는 사과 광주리 앞에서 멈췄다.중년 여자가 광주리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있다가, 내 그림자가 닿자마자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사과를 파십니까?""예? 예, 공작 각하. 사과입니다요. 오늘 아침에 닦아 온 겁니다요.""별고 없으셨습니까?"여자가 눈을 깜빡였다.아.방금 질문이 너무 현대식 안부였나. 아니, 여기서도 안부는 물을거 아냐."올해 장사에 큰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여쭌 겁니다.""아, 예. 어

  • 악역인데, 남주가 이상하다   # 11화 - 봉인의 색

    차가 두 번 새것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장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책상 위에는 양피지와 명세서가 층층이 펼쳐져 있었고, 서기관 둘은 벽가에 선 채 펜을 들고 대기했다.도착 첫날 저녁에 할 일치고는 지나치게 성실했다.아니, 성실한 건 좋은데 왜 내가 포위당한 기분이지."우선 특산물은 셋이군요.""예, 공작 각하. 양모, 꿀, 그리고 겨울 밀랍입니다."힐데브란트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저 속도면 내가 장부를 넘기기도 전에 다음 장을 펼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유능함이란 때로 사람을 든든하게 만들고, 때로는 등 뒤에 칼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양모는 북령 귀족가와 수도 상단으로 나가고, 꿀은 약재상과 수도 찻집 쪽으로 흘러가는군요. 겨울 밀랍은?""성당과 귀족가 촛대 수요가 큽니다. 벨포르산은 그을음이 적어 가격이 안정적입니다."좋다. 원물은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쁜 정도가 아니라 꽤 괜찮다.양모는 겨울용 망토와 담요, 꿀은 차와 약재, 밀랍은 예배와 연회. 생활재와 체면재가 같이 있다.시장이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았고, 계절성도 어느 정도 분산돼 있다.포트폴리오는 괜찮은데, 문제는 수익 구조다.나는 양모 장부의 가운데 줄에 손가락을 얹었다."이 항목이 이상합니다. 세금을 떼기 전 판매가는 올랐는데, 영지로 돌아온 금액은 거의 그대로군요."힐데브란트는 아주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다."중간 상단의 선별비와 운송 보증비가 늘었습니다.""얼마나요?""전년 대비 거의 두 배입니다."아 미쳤네. 마진을 반이나 떼였다는 소리잖아.겉으로는 고개만 끄덕였다.공작이 장부 앞에서 '마진'이라고 외치면 안 된다. 특히 이 세계에서 아직 그 단어가 공식 장부 용어인지도 모르는 상태라면 더더욱."양 키우고 털 깎고 말리는 거 다 우리가 하는데, 선별이니 운송이니 하면서 중간 상단이 절반을 가져가고 있다는 거잖아요.""맞습니다."대답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씁쓸했다.힐데브란트는 이걸 몰라서 방치한 사람이 아니다. 알고도

  • 악역인데, 남주가 이상하다   # 10화 - 총관의 미간

    마차를 탄 지 사흘째, 나는 드디어 바퀴 소리에도 표정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좋은 일은 아니다.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귀족 마차 안에서 허리를 세운 채 잠깐씩 기절하듯 졸고, 흔들릴 때마다 손잡이를 잡고, 창밖 경계석을 보며 지금쯤 어느 영지인지 가늠하는 생활에도 몸이 맞춰졌다.문제는 몸만 맞춰졌다는 점이다.머리는 계속 새 업무 환경에 던져진 신입이다.수도에서 벗어난 길은 점점 좁아졌고, 창밖의 공기도 달라졌다.관저 복도의 향 냄새 대신 젖은 흙과 말 땀 냄새가 먼저 들어왔고, 바퀴가 포장석을 벗어날 때마다 마차 바닥에서 둔탁한 진동이 올라왔다.멀리 낮은 언덕 사이로 회색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레온이 말을 가까이 붙였다."공작님, 벨포르 영지 저택입니다!""봤어, 레온. 너무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 내가 처음 오는 사람 같잖아."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아니, 처음이 맞긴 하다.정확히는 이 몸이 아니라 내가 처음이다.그러니까 더 문제다. 외부에는 단 한 치도 그런 기색을 보이면 안 된다.레온은 다행히 다른 방향으로 감동했다."공작님께서 영지를 새롭게 바라보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이해하지 말고 앞을 봐.""예!"그는 정말 앞을 봤다. 충성심이 과하면 해석력이 먼저 폭주한다는 사실을 지난 며칠 동안 배웠다.영지 운영 매뉴얼에는 없는 항목이지만, 체감상 아주 중요한 위험 변수다.저택은 수도 관저보다 낮고 넓었다.흰 석벽은 오래된 눈처럼 차분했고, 문루 양쪽의 깃발은 바람을 받아 무겁게 흔들렸다.마차가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쇠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울렸고, 뜰 가장자리의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사람 수가 많았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환영 인파인가.아니면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관찰하러 나온 내부 평가단인가.둘 다 가능해서 더 싫었다.마차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발판을 먼저 확인했다.사흘 전 팔꿈치 바깥쪽에 남았던 장갑의 온도 같은 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정확히 한 번 떠올

  • 악역인데, 남주가 이상하다   # 9화 - 체온이 있었다

    아인하르트의 검 둘이 관저 밖에 선 지 사흘째, 소문은 드디어 수도의 거의 전부를 먹었다.다미안은 아침 차가 식기도 전에 보고서를 펼쳤다.종이 가장자리가 반듯했고, 잉크도 마른 지 오래라서 이건 새벽에 급히 적은 보고가 아니었다.밤새 들어온 것들을 정리하고, 지우고, 다시 눌러 쓴 결과물."수도 사교계 거의 전부입니다, 누님.""나머지는요?""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쪽 일겁니다."아, 그럼 전부네.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잡이를 놓는 동작은 이제 꽤 자연스러웠다.이 세계에 떨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동작, 호칭의 순서, 집사에게 명령하는 건 몸에 붙기 시작했다.문제는 몸이 익숙해질수록 수도가 나를 더 빠르게 씹어 삼킨다는 점이다."헤르츠베르크 부인 쪽에서는요?""공식 절차라는 말을 받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구애라는 말을 한 줄 더 붙였습니다.""부지런하시네.""부지런하신 건 누님도 마찬가지라는 평입니다. 달라진 공작, 움직이는 벨포르, 아인하르트의 보호를 받는 여자.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하나로 모이고 있습니다."다미안이 마지막 문장을 읽지 않고 덮었다.종이의 흰 면이 위로 올라오자 오히려 더 피곤했다.글자가 보이지 않는데도 머릿속에서 계속 굴러갔다. 구애. 보호. 달라진 공작.셋 다 내가 원해서 붙인 이름은 아니었다."영지로 간다."다미안이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지금 수도를 비우시겠다고요?""응. 수도의 입을 막을 수 없으면, 내 손이 닿는 곳부터 정리해야지.""소문을 피하는 걸로 읽힐 수 있습니다.""그러라 그래. 도망도, 회피도, 해명도 아니야. 그냥 내 영지로 가는 거야."내가 먼저 말해 놓고도 이상하게 숨이 가라앉았다.도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 어딘가에서 기웃거렸지만, 거기에 자리를 주지는 않았다.수도에 남아 모두의 입을 하나씩 막는 건 불가능했다.가능하지 않은 일을 붙잡고 버티는 건 전 질색이다."다미안, 넌 남아.""누님.""정보망 유지해. 헤르츠베르크 부인 쪽 반응, 황궁

  • 악역인데, 남주가 이상하다   # 8화 - 제 이름으로

    다음 날 아침, 관저는 전날보다 조용했다.조용하다는게 좋은 일 이라는 건 아니다. 적어도 벨포르 관저에서는.하녀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테오도어가 오늘 접견 명단을 평소보다 얇은 서류철에 끼워 올 때면 대개 밖에서 무언가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이 세계에 떨어진 지 닷새째.이제 찻잔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하는지, 집사에게 어떤 순서로 명령해야 하는지, 다미안을 부를 때 굳이 정중한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지에는 조금 익숙해졌다.문제는 익숙해진 만큼 새로운 재난이 더 정교하게 찾아온다는 점이었다."공작님."테오도어가 문가에서 고개를 숙였다."아인하르트 기사단장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답신이 도착했다는 뜻입니까?""아닙니다. 각하 본인이십니다."'아, 제발.'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눌렀다.테오도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얼굴이었고, 나는 공작다운 속도로 펜을 내려놓았다.공작다운 속도라는 게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놀라서 펜을 떨어뜨리는 것보다는 나았다."응접실로 모셔요. 다미안에게도 바로 알리고.""예, 공작님."테오도어가 물러난 뒤에야 찻잔을 들었다. 차는 아직 따뜻했는데, 입 안으로 넘어가는 감각은 거의 없었다.서신 답신 대신 사람이 왔다.그것도 원작에서 감정 없는 검처럼 움직이던 세르주 아인하르트가, 예고도 없이, 벨포르 관저 응접실에.생각이 거기까지 닿자마자 속이 불편해졌다.응접실 문을 열었을 때 세르주는 이미 서 있었다.검은 망토 끝에 아침 안개가 얇게 묻어 있었고, 그는 장갑 낀 손을 검자루에서 조금 떨어뜨려 두고 있었다.칼을 뽑을 사람의 자세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들어오자 방 안의 무게중심이 그쪽으로 쏠렸다."벨포르 공작.""기사단장님. 예고 없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서신을 받았습니다."할 말 먼저, 설명은 나중. 세르주다운 순서였다."답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기록에 남길 답변은 별도로 올리겠습니다."그는 거기서 말을 끊고, 내 얼굴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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