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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مؤلف: 냥냥샤인
“무슨 일이요?”

남예린은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 만나러 가는 거 말이야. 이번에 경원시에 오셨는데 너를 만나고 싶대.”

주시윤은 마음이 좀 급했는지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복도는 매우 조용했다.

너무 고요해서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라이터 뚜껑이 닫히는 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탁.

짧고 선명한 그 소리는 마치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 같았다.

남예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주시윤은 남예린이 대답하지 않자 말을 보탰다.

“네가 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인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는 마. 우리 부모님이 마침 경원시에 놀러 오셨는데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한 번 얘기해 본 거야. 혹시 부담되면 내가 대충 둘러댈 테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도시락을 든 남예린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복도 끝에서는 여전히 빨간 불씨가 깜빡이고 있었다.

굳이 보지는 않았지만 남예린은 배진성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아요. 만날게요.”

주시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어. 그러면 부모님한테 그렇게 전할게.”

남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시윤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집까지 바래다줄게.”

복도 끝의 불씨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담배를 세게 한 모금 빨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곧이어 담뱃불이 꺼지고 담배꽁초는 쓰레기통 안에 버려졌다.

배진성은 그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배진성은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전부 들었다.

남예린은 곧 남자의 부모님을 뵙게 될 것이다.

배진성은 눈을 감았고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던 탓에 바닥에 담뱃재가 수북했다.

몸을 돌린 배진성은 비상계단으로 걸어갔고,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무거운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쿵, 쿵.

마치 심장 박동 소리 같았다.

...

7시 10분. 날은 아직 밝지 않았다.

남예린은 주시윤의 차에 올라탔다.

주시윤은 차에 시동을 건 뒤 바로 출발하는 대신 먼저 열선 시트를 켰다.

“춥지?”

주시윤이 물었다.

“괜찮아요.”

주시윤은 손을 뻗어 송풍구 방향을 남예린 쪽으로 돌려주었다.

잠시 뒤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3월의 꽃샘추위에 밖에는 안개가 끼었고 가로등 불빛은 희미했다.

남예린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주시윤과 결혼하면 자신의 삶 또한 그런 모습일 거라고 짐작했다.

잔잔하고 따뜻하고 큰 기쁨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도 없는 나날일 것이다.

스물아홉이 된 남예린은 이제 아프지 않은 삶을 선택해야 했다.

그때 앞 교차로에서 검은색 포르쉐 카이엔이 갑자기 차선을 바꾸며 끼어들었다.

주시윤은 브레이크를 살짝 밟으면서 경적을 울렸다.

“미친 건가?”

남예린은 앞 차 번호판을 보고 당황했다.

그건 배진성의 차였다.

그 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지 않고 오히려 속도를 줄이며 그들과 나란히 달렸다.

짙은 선팅 때문에 차 안이 보이지 않았다.

1미터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남예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주시윤은 핸들을 꺾으며 그 차를 추월했다.

백미러를 통해 배진성의 차가 잠깐 방황하다가 갓길 쪽으로 붙는 게 보였다. 잠깐 차를 세울 곳을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예린은 시선을 거두었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고개를 숙이니 낯선 번호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남예린은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남예린은 문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화면 위를 맴돌던 손가락을 움직여 결국 삭제 버튼을 눌렀다.

“누구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주시윤이 무심코 물었다.

“스팸이에요.”

남예린이 대답했다.

사실 남예린은 상대의 부모님을 뵙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배진성과 사귀게 되었을 때 남예린은 자신이 왕자님을 만난 신데렐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동화는 산산조각 났다.

유리구두를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누군가 확대경을 들고 남예린은 그 유리구두를 신을 자격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배진성과 만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배진성의 엄마 주희선은 남예린과 단둘이 경원시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서 커피를 마셨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비싼 팔찌를 한 주희선은 말투는 온화했지만 눈빛으로 남예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고 있었다.

“부모님이 중견기업에서 일하신다고?”

“네.”

“어느 도시에 계시니?”

“창운에 계세요.”

“창운?”

주희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웃으며 말했다.

“내 대학 동기 중에 대기업 회장이 있는데 너희 부모님을 조금 더 좋은 직장으로 옮겨드릴까?”

남예린은 당황했다.

주희선은 호의를 베풀려는 게 아니라 두 집안의 수준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저희 부모님은 충분히 만족하고 계세요.”

“그래?”

주희선은 컵을 내려놓고 남예린을 바라보며 경멸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성이한테 형이 있는 건 알지? 진성이 형은 우리 회사를 물려받을 거야. 진성이는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살았어. 우리도 굳이 진성이 일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었지. 그런데 딱 한 가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어. 그건 바로 진성이 결혼 상대야. 진성이랑 결혼할 여자는 반드시 우리 진성이에게 어울리는 여자여야 해.”

배진성에게 어울리는 여자여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남예린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네가 별로라는 건 아니야.”

주희선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는 얼굴도 예쁘고 학벌도 좋고 착한 아이야. 하지만 우리 같은 집안에서 결혼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야. 생각해 봐. 앞으로 진성이가 모임에 나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재벌가 딸이랑 참석하는데 진성이만...”

주희선은 말을 끝맺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러나 어떤 말이 이어질지 남예린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남예린은 울었다.

물론 그 일을 굳이 배진성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배진성이 난감해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남예린은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배진성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집안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돌아온 건 배진성의 죽고 싶으면 죽으라는 말뿐이었다.

남예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배진성 역시 주희선처럼 남예린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

창밖의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배진성은 10분 동안 기다렸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동안 정효민이 전화를 몇 번이나 했지만 배진성은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저 문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끊임없이 새로고침을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답장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거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배진성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다 갑자기 주희선에게서 전화가 왔고 배진성은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

“진성아, 어떻게 효민이한테 그럴 수 있니? 효민이 다쳤다면서. 그런데 그냥 집사한테 맡기고 혼자 외출한 거야? 너 나랑 약속했던 거 다 잊은 거니?”

배진성은 핸들 위에 엎드린 채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남예린이 다른 남자와 함께 나란히 걷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과거를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남예린과 달리 배진성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

남예린은 집에 도착한 뒤 잠을 잤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주시윤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시간과 장소가 정해졌다는 내용이었다.

[3일 뒤 소담 책방에서 보자고 하시네.]

남예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약속 장소는 공교롭게도 소담 책방이었다.

소담 책방은 현재 경원시에서 가장 유명한 핫플레이스 중 하나로 책방이자 꽃집이며 카페이기도 한 곳이었고, 항공과 관련된 것들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책방 운영자는 바로 정효민이었다.

소담 책방은 배진성이 정효민을 위해 차려 준 작은 가게였다.

정효민은 글씨를 잘 쓰는 예술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효민은 나 안 좋아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남예린은 그 말을 믿었다.

배진성이 너무 잘해줘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벌가 자제인 배진성은 남예린을 위해 요리도 배우고 빨래하는 법도 배웠다.

심지어 한동안 남예린의 속옷까지 직접 손빨래해 주었다.

그래서 당시 남예린은 정효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장소를 바꾸면 안 될까요?]

남예린이 문자를 보냈다.

[왜? 우리 부모님이 직접 고른 곳이야. 이미 예약도 해 두셨대. 예약하기 힘든 자리라서 안 가면 부모님이 서운해하실 수도 있어.]

남예린은 입술을 깨물며 다 지나간 일이니까 상관없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남예린은 잠시 망설인 끝에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요. 시간 맞춰 갈게요.]

정효민은 손목을 다쳤으니 당분간은 가게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설령 정효민이 가게에 나온다고 해도 두려울 이유도, 피할 이유도 없었다.

3일 뒤, 소담 책방.

창가 자리 옆에는 책장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곳곳에 생화가 놓여 있었다. 책과 꽃향기가 어우러져 분위기가 우아하고 격조가 있으며 조용했다.

벽에는 수많은 서예 작품이 걸려 있었다. 필체가 힘차고 유려했으며 모두 정효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예린은 그것들을 쭉 훑어본 뒤 시선을 거두었다.

맞은편에는 주시윤의 부모님이 앉아 있었는데 두 분 모두 안경을 쓰고 있었고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주시윤의 말에 따르면 두 분 모두 지방 명문고에서 평생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예린아, 부모님은 뭐 하시니?”

“두 분 다 중견기업 다니고 계세요.”

“좋네, 좋아.”

주시윤의 엄마 김정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서 만족스러움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시윤이가 우리한테 정말 예쁜 애라고 자주 얘기했었어. 오늘 보니까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똑똑하기까지 하네. 공부도 잘했고 직업도 좋고. 우리 시윤이가 운이 참 좋네.”

남예린은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를 숙이며 커피를 마셨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계층의 상대를 만났으니 좋은 일이었다.

남예린도, 남예린의 부모님도 무시당할 이유가 없었다.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지자 김정미는 주시윤의 어렸을 적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주시윤은 일찍 철이 들어 속 한 번 썩이지 않았고, 공부는 늘 자기가 알아서 잘해서 좋은 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주시윤의 아빠 주혁수는 말수는 많지 않았지만 따뜻한 눈빛으로 남예린을 바라보며 가끔 한마디씩 거들었다.

남예린은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평범한 삶이겠지.’

받아들여지고, 좋아해 주고, 식구처럼 대해주는 삶 말이다.

그때 2층에서 발소리와 함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엄마. 저 내려갈래요!”

무심코 시선을 든 남예린은 그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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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어진 지 4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기장님   제30화

    허지형은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배진성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배진성이 건넨 서류를 받아 펼쳐 보자 지정한 의사 란에 예상했던 이름이 시야에 들어왔다.[남예린.]다시 서류를 덮고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잘되길 바랄게.”배진성이 허지형을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야?”허지형은 고개를 저을 뿐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조금 전 주시윤이 남예린의 몇 마디에 얼굴이 얼마나 하얗게 질린 채 자리를 떴는지 너무 똑똑히 봤다.그래서 물러설 줄 모르는, 경계심이 전혀 없는 전 남자친구도 주시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스스로 무덤을 파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아무것도 아니야.”허지형이 서류를 배진성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이만 가 봐.”사무실로 돌아간 허지형은 문을 닫고 창가 앞에 섰다.아래층에서 남예린이 당직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바람에 흰 가운을 날리며 걷는 뒷모습은 정말 날렵하기 그지없었다.이토록 이성적이고 시크한 모습의 남예린과 배진성이 말한 사랑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소녀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아 한참을 바라봤다.‘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던 걸까...’당직실.근무표를 받은 남예린은 잠시 멈칫했다.여러 번 체크하며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확인한 후 근무표를 들고 조영진을 찾아갔다.“조 과장님, 이게 뭐예요? 저더러 오후에 병원 건강검진센터에 가서 네이션항공 기장 건강검진을 하라고요?”키보드를 두드리던 조영진은 남예린의 말에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남예린에 대한 조영진의 태도가 예전에 비해 완전히 달라졌다.얼마 전까지 못마땅한 듯 깔보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조심스럽게 대했다. 혹시라도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봐...“네. 위에서 내려온 지시예요. 네이션항공은 정부가 투자한 대기업이에요. 네이션항공 기장이 우리 병원에 와서 건강검진 하겠다는데, 이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왜요? 뭐 문제라도 있어요?”남예린이 근무표를

  • 헤어진 지 4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기장님   제29화

    그때 배진성은 이렇게 생각했다. 관계라는 것이 결말을 보지 못한다면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고...하지만 결국 시작하고 말았다.허지형이 배진성을 한 번 힐끗 보더니 한마디 물었다.“남 선생님이 어떻게 했는데?”허지형과 눈을 마주친 배진성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빛 깊은 곳에 웃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남예린에게 관심 있어?”허지형은 대범하게 인정했다.“저렇게 재미있는 여자라면 관심 없는 게 이상하지.”배진성의 시선이 또다시 복도 끝으로 향했다.남예린은 이미 그곳에 없었지만 배진성은 그녀가 아직 거기에 있는 듯 그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내가 이 일을 시작한 첫 해, 심해시에서 합동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어. 보름 동안 연속으로 비행하다가 과로로 위장병이 났지. 남예린에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나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꼬박 36시간 타고 왔더라고. 밤이 되어서야 내가 있는 기숙사 아래에 도착했는데 그날 날씨가 영하 10도였어. 심해시에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이었지. 그래도 어떻게든 날 만나려고 아래에서 40분 동안 서 있었어.”배진성의 목소리는 약간 메마른 듯했다.“내가 달려갔을 때 남예린은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어. 무릎을 껴안은 채 얼굴은 빨갛게 돼서 동상이 걸릴 정도였지. 그런데도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어. 그 미소, 아직도 머릿속에 새긴 듯 남아 있어... 그때 남예린이 손에 보온 도시락을 들고 있었어. 그 안에 따뜻한 죽이 담겨 있었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바깥에서 나를 기다렸는데도 죽은 여전히 뜨거웠어. 나중에 알고 보니, 몸을 웅크린 이유가 자기 몸으로 죽이 식는 걸 막기 위해서였어. 정말 바보 같은 여자지...”배진성은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보온 도시락을 내게 건네며 다 마시면 바로 가겠다고 했어. 훈련 절대 방해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기숙사로 데려가려 했지만 남예린이 기어코 거절하더라고. 자기가 관리인한테 물어봤대, 여자는 남자 기숙사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면서 절대 안 들어가려 했어.

  • 헤어진 지 4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기장님   제28화

    간호사 스테이션에 있던 유해인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너무 놀라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진료 기록부를 안고 서 있는 옆의 인턴은 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복도 저편에서 지나가던 간호사 두 명이 걸음을 멈추고 서로 마주 보며 눈빛만 주고받았다.주시윤은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떨며 얼버무렸다.“너!”“그리고!”남예린이 주시윤의 말을 끊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말투가 어찌나 사나운지 마치 메스가 피부를 스치는 듯했다.“제가 허 과장님 같은 ‘상류층 집안’은 넘보면 안 된다고 하셨죠? 하지만 제 말 잘 들으세요. 첫째, 허 과장님은 제 상사예요. 허 과장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집안 때문이 아니라, 허 과장님의 능력과 인품 때문이에요. 물론... 주 선생님은 이 점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시겠죠.”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둘째, 주 선생님이 그렇게 입에 달고 사는 그 ‘계층’은 선생님이 스스로 만든 핑계 아닌가요?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까 그런 걸로 연약하고 열등감 가득한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고요. 그렇게 하면 본인이 정말 못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요.”주시윤은 얼굴이 완전히 하얗게 질렸다. 분노와 수치심에 손을 들어 남예린을 향해 삿대질했다.“남예린, 네 주제 좀 알고 떠들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헛소리하지 마. 네 출신이 어떤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제 출신이 뭐가 어떻다는 거죠?”남예린이 주시윤을 바라보았다.“저희 부모님은 중견기업 직원으로 일하며 평생 성실하게 살아오셨어요. 누구 물건 훔치거나 빼앗은 적도 없고요. 저는 제 성적으로 의대에 합격했고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으며 제 능력으로 해외 연수 기회도 얻었고 귀국 후에는 대학병원에 입사했어요.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고 한 단계 할 단계 제 실력을 쌓으면서 위로 올라왔어요. 모두 내 힘으로 이룬 건데 제 출신이 어떻다는 거죠?”조용했던 복도에서 갑자

  • 헤어진 지 4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기장님   제27화

    남예린은 고개를 숙여 물을 한 모금 마셨다.몸을 돌리던 순간 뒤에 있던 사람과 거의 부딪칠 뻔했다. 물잔도 같이 흔들리며 손등에 몇 방울 튀자 얼른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고개를 들자 주시윤이 바로 코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남예린은 이 사람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다.주시윤은 흰 가운 안에 짙은 남색 폴로 셔츠를 입은 채 복도에 서 있었다. 깃은 빳빳이 세운 채 머리는 빈틈없이 잘 정리된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또 잔뜩 긴장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남예린은 지나가기 위해 몸을 옆으로 비켰다.“그래...”바로 그때 주시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남예린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갑자기 나를 거절한 이유 이제 알겠어.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노리고 있었던 거네.”남예린은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에 믿기 어려운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시윤을 바라보았다.주시윤이 남예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에는 경멸도 있었지만 마치 대단한 것을 알아챈 듯한 득의양양함이 가득했다.“그래, 이제야 이해가 가.”뭔가 오래된 와인을 음미하듯 말끝을 길게 끌었다.“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겠지.”목소리는 낮았지만 상대방을 깔보는 태도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조심해, 높이 오를수록 떨어질 때 더 아픈 법이야. 너 같은 출신은...”잠시 말을 멈추고 남예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시선은 마치 자로 재듯 그녀의 얼굴에서 발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왔다.“나 같은 사람과 제일 어울려.”물잔을 쥐고 있던 남예린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허 과장님 같은 상류층에...”주시윤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말투는 마치 멋모르는 아이에게 설명하듯 무심하면서도 심드렁했다.“네가 닿을 수나 있을 것 같아? 상류층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남예린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본인의 능력이 걸맞은지도 생각해 봐야지. 인정할게, 네 얼굴?

  • 헤어진 지 4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기장님   제26화

    주만호는 뭔가 알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그래, 방금 항공 의료센터에도 연락해 놨어. 건강검진 담당 의사는 내일 오전 회의실에서 자세히 상의하면 돼.”배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맙습니다.”“나한테는 그런 인사치레 안 해도 돼.”주만호가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고개를 들어 배진성을 바라봤다.“스케줄 일정은 계속 비워두고 있었어. 검사 빨리 통과하길 바라. 다음 달 근무표에 국제선이 여러 개 있는데 팀 이끄는 거 문제없지?”배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감이 넘쳤다.“당연하죠.”주만호가 웃으며 서류 한 장을 건넸다.“복귀 확인서에 사인해.”확인서를 받은 배진성은 한 번 힐끗 본 뒤 바로 사인했다.펜촉이 종이에 닿을 때 배진성의 손은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처럼 안정적이었다.“진성아.”갑자기 입을 연 주만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편안한 얼굴로 물었다.“집은 괜찮아?”“괜찮아요.”“그럼 됐어.”주만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서류를 폴더에 넣었다.“운행 재개하기 전, 며칠 동안은 기숙사에 묵을 거야, 아니면 집에 갈 거야?”“기숙사에 묵을 거예요.”“그래, 항공 의료센터 결과 나오면 나한테 바로 알려줘. 근무표 짜줄게.”배진성이 사무실을 나와 복도에 섰다.창밖은 계류장이었다. 일렬로 늘어선 여러 대의 비행기가 저녁 노을빛 아래 황금빛으로 물들어 반짝이고 있었다.지상에서 움직이고 있던 정비 요원들 중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러자 배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비행기들을 바라보았다.모두 배진성이 조종해 본 비행기들이라 비행기들의 기종, 성능, 순항 속도와 최대 항속 거리를 두 눈 감고도 줄줄 외울 수 있었다.경원시에서 유럽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이곳에서 미주까지 가려면 어떤 항로를 거쳐야 하는지... 하나하나 너무나도 익숙했다.한참을 서 있다가 몸을 돌려 기숙사 건물로 걸어갔다.지난 수년간,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이곳에서 잠시나마 평온

  • 헤어진 지 4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기장님   제25화

    “어떻게 이걸로 나를 협박할 수 있어?”배진성의 말을 끊으며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 정효민은 곧바로 뒷좌석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다행히 현우는 깨지 않았다.배진성이 정효민을 바라보며 말했다.“뭐 어때서? 나도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야.”말투는 아주 아주 담담했지만 듣는 사람을 소름 끼치게 했다.조수석에 앉은 정효민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었다.고개를 돌려 배진성의 옆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배진성에게는 진짜로 사실을 진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효민에게 불리한 사실을...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뼛속까지 소름 끼치게 했다.“그냥 혼인신고 하기 싫은 거잖아.”정효민의 말에 배진성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았어, 당신 말대로 할게.”칼 같은 남자가 어떻게 할지 너무 잘 알기에 정효민은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하지만 어른들이 내 말을 들으리라는 보장은 없어.”“상관없어.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 됐어.”차는 천천히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머리 위에 달이 훤히 떠 있었지만 이 남자의 마음까지는 비치지는 못했다.깊은 마음과 복잡한 눈빛...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진성 씨.”정효민이 무기력하게 입을 열었다.“말해.”“나에 대한 감정, 아직 남아 있긴 해? 아주 조금이라도?”배진성은 여전히 침묵했다.하지만 이건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무서운 침묵이었다. 정효민은 침묵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시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남아 있지 않다고 바로 말한 게 아니라면 있는 것이니까...차가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선 뒤 배진성이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었다.동작 하나하나에 여유로움이 넘칠 정도로 매우 느긋했다.배진성이 차량 앞을 돌아 뒷좌석 문을 열고 현우를 안아 밖으로 내올 때까지도 정효민은 차 안에 앉아 있었다.현우가 흠칫하며 살짝 놀라긴 했지만 자세를 바꾸더니 다시 배진성의 어깨에 기대어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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