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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냥냥샤인
휴대폰을 움켜쥔 남예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남예린은 그 일을 언급한 게 조금 후회됐다.

갑갑한 기분에 남예린은 서둘러 화제를 끝내려고 했다.

임하영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반에 나랑 꽤 친한 애가 있거든? 걔가 배진성 친척이야. 내가 물어봤을 때 걔가 그랬어. 배진성은 결혼식을 올린 적이 없다고. 배씨 가문은 생각보다 엄격한 집안이라 배진성 형이 결혼식을 올려야 배진성도 결혼식을 할 수 있대.”

남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도 사실상 부부와 다름없었고 심지어 아이까지 있었다.

남예린은 가슴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예전에 배진성은 정효민이 임신해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했었다.

그것이 남예린이 손목을 그은 직접적인 이유였다.

분명 그 전날까지만 해도 결혼하자며 프러포즈를 했었는데 말이다.

배진성과 3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남예린은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배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배진성의 마음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남예린은 정효민의 존재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효민이 자신과 배진성 사이에 끼어들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배진성과 정효민은 언제부터 만났던 걸까?

정효민은 또 언제 임신한 걸까?

수많은 질문들이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더니 예전에 배진성의 가족이 자신을 무시했던 모습, 정효민을 특별하게 대하던 모습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숨이 막혀 왔다.

임하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예린아, 혹시 아직 마음이 남아 있다면 내가 대신 알아봐 줄게.”

“됐어.”

남예린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신경을 껐어. 배진성이 결혼을 했든 안 했든, 결혼을 몇 번이나 했든 나랑은 상관없어.”

임하영은 한숨을 쉬었다. 남예린이 안쓰러워 차마 솔직해지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결혼 생각은 있어?”

“응.”

남예린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젖혀 천장을 쳐다봤다.

“너희 학교에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줘.”

전화 너머로 임하영의 신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괜찮은 사람이 있어. 연기과고 얼굴도 잘생겼어. 내가 한 번 알아봐 줄게.”

남예린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는 순간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남예린은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바위 하나가 끝없는 심해 속으로 가라앉듯이 가슴속 무언가가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남예린은 몸을 돌려 쿠션에 얼굴을 묻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숨을 내뱉었다.

...

배씨 가문의 별장은 역마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는 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거실이 일반 가정집만큼 컸다.

3층 높이의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는 대리석 바닥을 환하게 비추었다.

식탁은 비싼 목재로 만들어졌고 식기들은 전부 명품 브랜드에서 한정판으로 제작한 것들이었다. 모든 것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배진성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젓가락은 계속 들고 있으면서 음식은 몇 입 뜨지 못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주희선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배진성을 바라봤다.

“이번에 휴가 내고 당분간 효민이랑 같이 집에 있어. 현우도 이제는 컸으니까 결혼식을 올려야지. 우선 혼인신고부터 하는 게 어때? 계속 미루는 건 현우한테도 좋지 않아.”

젓가락을 쥔 정효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효민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고개를 숙였고 긴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졌다.

정효민은 부드러운 인상이라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안쓰러워 보였다.

그러나 배진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배진성의 아빠 배인호는 상석에 앉아 있었는데 가만히 있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배인호는 말없이 천천히 음식을 씹으면서 서늘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응시했다. 무거운 그 시선에 사람들은 숨이 막혔다.

한참 뒤 배인호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혼인신고하고 3개월 뒤에 식을 올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바위처럼 묵직했다.

“더는 미루면 안 돼.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시간을 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배진성은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탁.

젓가락이 그릇과 닿으며 맑은 소리를 냈다.

“약속이요?”

배진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입꼬리를 올리더니 자조하듯 웃었다.

“그건 제가 아니라 두 분이 한 약속이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주희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성아!”

“4년 전에 저한테 그러셨죠. 정효민이 임신을 했으니까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배진성은 시선을 들어 주희선을 마주 봤다.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저는 4년 동안 최선을 다했어요.”

배진성은 잠시 멈췄다가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께서도 저랑 약속을 하셨죠. 그런데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기시려고요?”

집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배인호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진성을 바라봤다.

“지금 우리랑 조건을 논하는 거니? 이제는 다 컸다, 이거야?”

주희선이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했다.

“진성아, 네 형은 결혼한 지 1년이 지났어. 이제 너도 결혼식을 올릴 수 있어.”

배진성은 멈칫했다.

어렸을 때부터 배진성은 형 배지훈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다.

배지훈은 여러모로 뛰어났고 철도 일찍 들었으며 부모님이 최선을 다해 후계자로 키웠다.

그러나 배진성은 달랐다.

그들에게 배진성은 뭘 하든 상관없지만 사고 치지 않고, 집안 망신시키지 않고, 형한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는 둘째였다.

부모님의 오랜 무관심 때문에 배진성의 마음속에는 늘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4년 전, 배진성은 난생처음 부모님의 눈빛에서 기대와 온정을 보았고 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걸 느꼈다.

“진성아, 우리 가족을 도울 수 있는 건 너뿐이야.”

그 말은 마치 몸 안에서 거대한 해일이 몰아치는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국 배진성은 승낙했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자 가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배진성은 부모님이 예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꼈고 드디어 마음속 허전함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남예린을 영영 놓쳐버렸다.

“저랑 약속하셨죠.”

배진성은 시선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며 크지 않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그냥 평생 이렇게 살기로.”

주희선은 말없이 남편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배진성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때 양보하고 희생한 대가로 돌아온 건 인정이 아니라 끝없는 강요였다.

배진성은 이제 최연소 기장이 되었고 떳떳하게 4줄 견장을 달았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가족들은 여전히 배진성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둘째로 여겼다.

그들에게 배진성은 언제든 이용할 수 있고, 희생시킬 수 있으며 평생 통제할 수 있는 존재였다.

배진성은 자신이 오래전 그런 삶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남예린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응급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예린의 두 눈은 매우 맑고 이성적이었으며 또 냉담했다. 마치 배진성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무언가가 심장을 힘껏 들이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배진성은 그 자리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4년 동안 죽어 있던 몸이 그 순간 모든 감각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

배진성은 깊이 후회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땅을 치며 후회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느꼈다.

그건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견딜 수 없이 슬프고 괴로워 숨이 쉬어지지 않고 산송장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주희선은 남편과 시선을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주희선은 정효민의 손목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가족이야. 이렇게 작은 일로 싸울 필요는 없어. 너희도 이 일 때문에 싸웠던 거지?”

주희선은 정효민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붕대를 쓰다듬더니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봐. 정말 안쓰러워 죽겠어. 효민아, 너는 서예가의 딸이잖니. 이렇게 귀한 손을 함부로 다루면 어떡해?”

배진성은 흰 붕대가 깔끔히 감겨 있는 정효민의 손목을 힐끗 보았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배진성의 머릿속에 문득 남예린의 왼쪽 손목에 있던 흉터가 떠올랐다.

색은 많이 옅어졌지만 매끈한 흰 피부 위로 흉터가 살짝 튀어나와 있는 것이 마치 메마른 강줄기 같았다.

어쩌다가 흉터가 생긴 걸까?

그런 의문이 들자 날카로운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피가 차갑게 식었다.

“4년 전에...”

배진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살짝 잠긴 목소리였다.

“저를 속여서 해외로 보냈던 그때 말이에요. 저 몰래 예린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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