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가 지고 나서야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27 챕터

제11화

청색 휘장이 드리운 작은 가마는 골목을 돌아, 저녁 어스름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한상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임나연이 그의 소맷자락을 쥐고 있던 손은 어느새 힘을 잃고 떨어져 있었고, 문 앞 하인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가마는 이미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바람이 불어 그의 옷자락이 가볍게 휘날렸다.그녀는 방금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정말로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상운 오라버니.”임나연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가슴이 조금 아픕니다... 저 좀 처소까지 데려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한상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텅 빈 골목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오라버니?”그제야 그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듯 시선을 거두었다.“여봐라, 나연 아씨를 처소로 모셔라.”임나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옷소매 끝을 감싸 쥔 가느다란 손끝이 살짝 비틀렸다. “오라버니는... 함께 안 가세요?”그는 답하지 않았다. 이미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등은 곧게 펴져 있었지만, 걸음은 평소보다 유난히 빨랐다.임나연은 둥근 문 뒤로 사라지는 그의 옥청색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가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길로 돌아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한상운은 서재에 홀로 있었다.그는 창가에 서서 마당의 해당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개한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붉은 조각처럼 흩어지고 있었다.작년 이맘때 그녀는 흰 옥병에 담긴 해당화 한 가지를 그의 책상에 꽂아 두었었다.그때 그는 흠천감에서 별자리를 살피는 일에 몰두해 있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사흘 뒤 꽃이 시들자, 그는 하인에게 치우라 했고 꽃과 병은 함께 거두어 갔다.그 이후로 그녀는 다시는 꽃을 보내지 않았다.한상운은 눈을 감았다.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해
더 보기

제12화

한상운은 차가운 청석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사지에는 이미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남은 것은 끈질긴 의지뿐이었다.달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임나연은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마침내 귀한 보물을 얻은 듯 손끝으로 그의 눈썹을 가볍게 쓸었다. “상운 오라버니.”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이제 드디어 나만 바라보게 되겠군요.”한상운은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눈을 감았고, 어둠 속에서 떠오른 것은 다른 얼굴이었다.그녀는 이번에 그 대신 죽으러 간 것이다.한상운은 번쩍 눈을 떴다.어디서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남은 모든 힘을 짜내 팔을 휘둘렀다.탁자 위의 술잔과 그릇이 와르르 떨어지자, 깨진 사기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손을 뻗어 날카로운 파편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움켜쥐었다.곧 손바닥에서 피가 솟구쳤다.따뜻하고 끈적한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졌다.그가 바닥을 짚고 조금씩 몸을 일으키자, 임나연은 깜짝 두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그의 손에서 솟구치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오라버니...”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임나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들자, 눈물이 흰 뺨을 따라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제가 그런 짓을 한 건... 다 오라버니를 연모해서입니다.”“저는 오라버니를 삼 년 동안 연모했습니다. 그 아이를 알기 전부터였단 말입니다. 그해 오라버니가 스승님 문하에 들어왔을 때, 저는 병풍 뒤에서 몰래 오라버니를 훔쳐보았습니다. 오라버니가 별자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모습까지도... 저는 다 좋았습니다.”“그런데 그 아이가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가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그녀는 그의 소매를 움켜쥐었다.“그 아이는 그저 흉성이고, 장기말이었습니다. 오라버니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오라버니는 저를 위해 그 아이와 혼인했고, 저를 위
더 보기

제13화

먼지투성이의 검은 옷을 입은 월야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한상운이 궁문에 보내 둔 사람이었다.가까이 달려온 그는 한상운의 손바닥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인, 손이...!”“그 아이는?”한상운은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김소윤에 대해서만 물을 뿐이다.검은 옷의 사내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대인, 송구합니다. 자신전(紫宸殿) 밖은 금군이 삼엄하여 그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궁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사오나, 끝내 마님을 보지 못했습니다...”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궁 안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 또한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한상운은 아무 말 없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손바닥에서 떨어지는 피가 청석 틈으로 한 방울씩 스며들고 있었다.무소식이라... 그건 어떤 결과보다 더 사람을 괴롭혔다.검은 옷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대인, 우선 상처를...”“그럴 것 없다.”한상운이 허리춤에서 옥패를 풀어 그에게 내밀자, 검은 옷의 사내가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국사부의 모든 첩자를 소집하여 주작문(朱雀門) 밖에 집결시킨 후, 내 명을 기다려라.”사내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주작문.궁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남문이었다.‘설마 궁을 난입하시려는 건가?’그는 감히 더 묻지 못한 채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갔다.한상운은 몸을 돌려 마당 밖으로 향했다.임나연은 그의 뒤에 서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비장한 뒷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그를 부르려 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그 순간 갑작스럽게 세상이 휘청였다.너무 급하고 거센 어지럼에 그녀는 옆의 나무조차 붙잡지 못했다. 이내 시야가 흐려지고 발밑이 꺼지는 것 같아, 그녀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깨진 자기 사이로 힘없이 쓰러졌다.뒤에서 들려온 둔탁한 소리에 한상운은 걸음을 멈췄다.고개를 돌리니 임나연이 깨진 도자
더 보기

제14화

김소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녀는 눈앞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누님”이라고 부르는 젊은 황제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되찾았다.“...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이연은 다시 말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동자에는 촛불이 비치고 있었고, 동시에 십삼 년 전 동궁의 모퉁이 문을 통해 황급히 사라지던 한 그림자도 비치고 있었다.김소윤은 그를 바라보았다.“누님 어깨의 봉우(鳳羽) 태기는 유일한 표식이 아닙니다.” 이연이 눈을 들어 말했다. “어마마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님의 허리 뒤쪽에는 연꽃 모양의 태기가 하나 더 있는데, 어마마마가 장명부를 매어 줄 때 직접 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것은 어마마마의 가족에게만 문양이라 다른 이에겐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김소윤은 잠시 멍해졌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겹겹이 쌓인 옷자락과, 삼 년 동안 국사부에서 받은 수많은 상처 너머로 그녀는 거의 잊고 있었다.허리 뒤쪽에 남아 있던 옅은 분홍빛, 손톱만 한 크기의 연꽃 문양을.양어머니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맞습니다.”김소윤이 말했다.“연꽃 문양 하나가 있습니다.”이연은 대답 대신 눈을 천천히 감았다.“그때 궁중 역모를 일으켰을 때...” 그녀는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그날 밤, 궁 안이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하셨습니다.”이연이 눈을 떴다.“맞습니다. 섭정왕이 궁을 핍박해 들어오고, 금군이 배반했으며, 동궁에 불이 났습니다. 하여 어마마마께서는 심복을 보내 누님을 궁 밖으로 탈출시키게 하셨습니다.”그는 멈칫했다가 말을 이어갔다.“어마마마는 공주가 있으면, 나라의 근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김소윤은 눈을 내리깔았다.“어머니는...” 그녀는 낮게 말했다. “제가 큰 복을 타고난 운명이라고 하셨습니다.”그녀는 어머니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머리를 빗겨주며 거울 속
더 보기

제15화

태의령(太醫令)은 한상운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댄 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나연 아씨의 맥상은 보통 병증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독에 중독된 것처럼 보입니다.”한상운은 침상 곁에 서서 눈을 내리깔고 창백하고 수척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사흘.꼬박 사흘 동안 궁성(宮城) 쪽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그가 김소윤을 맞이하러 보냈던 사람은 아직도 주작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그녀에게 준 그 패도 여전히 그 사람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그는 그녀가 궁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히려 임나연이 중독되었다는 소식이 먼저 들려왔다.“무슨 독인가?”태의령의 이마에는 촘촘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아직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만, 아마도 아씨께서 몸에 지니고 계시던 물건에서 비롯된 듯합니다.”한상운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뒤져라.”반 시진 뒤, 한 내시가 새하얀 손수건 한 장을 받쳐 들고 그의 앞으로 나아왔다.“대인, 이것은 나연 아씨의 베갯머리 함에서 발견한 것입니다.”한상운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그... 그 손수건은...”옆에 무릎 꿇고 있던 시녀는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손수건은 아씨께서... 소인에게 잘 간수하라고 하셨습니다.”한상운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시녀는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 그날 아씨께서 소인에게 창고에 가서 그 백유청화병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병 안의 약을 바꾸셨습니다.”그녀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한상운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았다.그는 눈을 내리깔고 침상 위에서 의식을 잃은 임나연을 바라보았다.평생을 다해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이 여인의 얼굴은 지금 종이처럼 창백했고, 입가에는 아직도 마른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십이 년.스승님은 임종을 앞두고 어린 딸을 그에게 맡기며 그녀를 평생 지켜 달라고 당부했고, 그는 십이 년 동안 그녀를 지켜 왔다.그녀
더 보기

제16화

한상운은 대답 대신 여전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임나연은 몸을 지탱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베개에 기대앉았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하지만 그 눈만은 달랐다.열다섯 살부터 줄곧 그를 따라다니며, 눈물 어린 채 두려움과 망설임을 품고 있던 그 눈.지금 그를 바라보는 눈은 마치 마침내 한 겹의 가면을 벗어던진 듯했다.“상운 오라버니.”그녀가 나직이 불렀다.“제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한상운은 대답하지 않았다.임나연 역시 그의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십이 년 동안 연모해 온 이 사람을.병풍 뒤에 숨어 그를 처음 훔쳐보았던 순간부터.그가 그녀를 대신해 첫 번째 화살을 막아 주었던 순간부터.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형장에서 그녀를 국사부로 데려왔던 순간부터.그리고 그가 다른 여인과 혼인했던 순간까지.“오라버니가 혼인하던 날...” 그녀가 말했다. “저는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라버니가 그 아이와 혼인한 것도, 그 아이를 지켜 준 것도, 또 그 아이에게 잘해 준 것도 모두 저 때문이었으니까요.”“오라버니 마음속에는 저밖에 없었으니까요.”그녀는 가볍게 웃었다.“헌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그 아이의 탄일이면 오라버니는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물러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간도 맞지 않는 그 음식들을 끝까지 다 드셨지요.”“그 아이가 칠 일 밤낮을 새워 수놓은 그 옷도 받아 주시더군요. 오라버니는 원래 누구의 손바느질도 입지 않으셨는데 말입니다.”“언제부터였을까요? 자꾸만 그 아이의 처소가 있는 쪽을 바라보게 된 게.”“언제부터 그 아이를 말할 때 더는 흉성이라 부르지 않게 된 겁니까?”“언제부터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런 아쉬운 표정을 짓게 된 겁니까?”한상운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촛불이 그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그는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임나
더 보기

제17화

검은 옷의 사내가 한상운 앞에 무릎을 꿇었다.“대인, 지금 입궁하시는 것은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궁 안에서는 아직 상을 치른다는 소식도 없고, 마님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만 해도 천만다행입니다. 지금 대인께서 경솔하게 폐하를 찾아 뵈시면, 폐하께서 반드시 의심하실 것입니다...”한상운은 듣지 않았다.그는 곧바로 말에 올라타 임나연의 화장함에서 찾아낸 그 도자기병을 손에 꼭 움켜쥐었다.해독제.‘혹 그 아이가 아직 그 독약을 먹지 않았다면...’‘혹 그 아이가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면...’‘혹...’그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몰았다.밤바람이 칼날처럼 귓가를 스치며 울부짖었지만, 한상운은 오직 자기 심장이 뛰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주작문의 금군은 그를 알아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길을 열어 주었다.그는 겹겹의 궁문을 지나 천 개가 넘는 옥계단을 밟고 올라갔다.자신전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내시의 아룀 뒤에 전각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한상운은 어좌 아래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사흘 동안 감춰 온 초조함과 불안이 눈빛에 드러날까 두려웠다.“신 한상운, 폐하를 뵙습니다.”긴 침묵이 흘렀다.그의 등에 닿은 시선은 무겁게 내려앉아, 마치 천 근의 바위가 짓누르는 듯했다.“국사께서 이 밤중에, 어인 일로 입궁하였는가?”한상운의 목울대가 움직였다.그는 이미 변명거리를 준비해 두었다.북쪽 변경의 전황, 남쪽의 수해, 흠천감이 정한 제천대전의 길일과 길시.그러나 무릎을 꿇는 순간, 그 말들은 모두 목구멍에 걸려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다.그가 묻고 싶은 것은 단 하나였다.그 아이는 아직 살아 있는가.그 약은 먹었는가.그녀가 그를 언급한 적은 있는가.하지만 한상운은 물을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이 직접 궁으로 들여보냈으니, 그에게는 물을 자격이 없었다.“...신은...”“최근 폐하의 옥체가 편찮으시다고
더 보기

제18화

한상운은 자신이 어떻게 국사부로 돌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다만 말을 몰아 주작문을 빠져나올 때는,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대문 앞의 하인이 멀리서 그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는 것을 보고는, 허둥지둥 달려와 고삐를 받아 들었다.하인은 고삐를 넘겨받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한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어디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대인은 분명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한상운은 자신의 침소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임나연의 처소로 향했다.마당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던 임나연은 발소리에 제꺽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그의 뒤에 네 사람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두 명의 형벌 담당 하인과 두 명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파였다.그중 한 노파의 팔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굵기의 등나무 채찍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짙은 갈색으로 번들거리는 것이 오랫동안 동유에 담가 두었던 모양이었다. 채찍은 세 번 감겨 있었고, 아래로 늘어진 한 자락이 아직도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그 채찍을 바라보던 임나연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상운 오라버니.”그녀가 말했다.“오셨군요.”한상운은 문턱 곁으로 한 걸음 물러난 뒤, 몸을 옆으로 돌려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형벌 담당 하인에게 물었다.“임씨는 위를 속이고 아래를 기만하며 마님을 해치려 했다. 죄가 어떠하냐?”하인은 머리를 숙였다.“국사부 가법에 따르면, 주인을 기만한 자는 곤장 서른 대, 마님을 해하려 한 자는 곤장 쉰 대입니다. 두 죄를 함께 물으면...”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곤장 여든 대입니다.”임나연의 얼굴이 조금씩 새하얗게 질려 갔다.“상운 오라버니.”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아니 됩니다... 저에게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하지만 한상운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뭐 하고 있느냐!”하인들이 명을 받들었다.노파가 앞으로 나서 침상에서 임나연을 끌어내렸다. 그녀는 침상 기둥을 있는 힘껏 붙들고 몸부림쳤
더 보기

제19화

한상운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있었고, 저녁빛이 서서히 마당 안을 잠식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월야가 문턱 밖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궁에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폐하께서 장녕공주를 북쪽 변경으로 멀리 시집보내 흉노(匈奴)와 화친(和親)시키려 하신답니다.”한상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화친이라.”그는 그 말을 되뇌었다.“북방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흉노가 기병 십만을 앞세워 국경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화친을 주장하는 쪽이 이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월야는 빠르게 말했다.“마님의 금책이 막 주조되어 작위가 이미 정해졌사오니, 제도상 화친의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예부에서는 이미 혼례 절차를 논의하고...”이때 한상운이 몸을 일으켰다.“폐하께서는 허락하셨느냐?”월야가 고개를 숙였다.“폐하께서는 명확한 조서를 내리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반박하지도 않으셨습니다.”한상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북쪽 변경의 흉노, 십만 철기병. 해마다 이어지는 전란,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는 전장.그녀는 그토록 말랐고, 그토록 창백했다.손목의 칼자국은 아직 다 아물지도 않았고, 무릎의 오래된 상처는 궂은날이면 욱신거릴 터였다. 그녀 또한 유독 추위를 탔다.이때 한상운이 입을 열었다.“화친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느냐?”월야는 잠시 침묵했다.“소인이 듣기로, 폐하께서는 조정에서 한 말씀을 하셨다 합니다.”“뭐라 했느냐?”“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월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누군가 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북쪽 변경을 평정하겠다면, 공주는 화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한상운은 그를 바라보았다.어둠이 이미 짙게 내려 그의 얼굴은 흐릿한 빛 속에 잠겨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월야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대인, 북쪽 변경의 전쟁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조정은
더 보기

제20화

묘시 삼각.한상운은 상화원 밖 버드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그는 인시부터 와 있었다.궁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기에 당직 내시들이 머무는 곳 밖에서 기다렸다. 내시가 안에 들어가 기다리시라고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은 채 버드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이슬이 그의 관복 자락을 적시고 장화까지 흠뻑 젖게 했지만 그는 춥지 않았다.그는 그저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그 아이가 저 길을 따라 걸어오면 먼저 이 버드나무를 보게 될까, 아니면 먼저 자신을 보게 될까?’‘그 아이는 자기와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을까? 하여 몸을 돌려 그대로 가 버리지는 않을까?’‘아니면 애초에부터 이쪽을 보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지는 않을까?’한상운은 소매 끝의 유려한 구름무늬를 꽉 움켜쥐었다.오늘 아침, 그는 동경 앞에서 오랫동안 그 무늬를 매만졌다.혹여나 구겨질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보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한상운은 고개를 들었다.아침 안개 속에서 화려한 가마가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살굿빛 황색 양산, 붉은 금빛 지붕, 드리운 술 장식이 미풍에 가볍게 흔들렸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가마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너무 멀었다.너무 높았다.고개를 들어야만 그녀의 윤곽을 볼 수 있을 만큼이었다.가마는 상화원 밖에 멈추어 섰다.궁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자, 한상운도 무릎을 꿇었다.그는 푸른 돌길 옆에 무릎을 꿇고 눈을 내리깔았다.그러곤 그녀의 발소리가 자기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들었다.한 걸음.또 한 걸음.이슬 맺힌 청석 바닥을 밟으며 그녀는 그의 곁을 지나쳤다.멈추지도 않았고, 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마마.”갈라진 그의 목소리에 김소윤은 잠시, 아주 잠시 멈추었다.그리고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연못가의 난간 앞까지 걸어갔다.궁인이 이미 물고기 먹이를 올리고 있었다.그녀가 청자 그릇을 받아 들고 한 줌 집어 연못에 가볍게 뿌리자, 비단잉어들이
더 보기
이전
123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